< 개발자의 클리어 공식 >
개발자의 클리어 공식
85화 죄의 무게 (1)
지독한 강행군을 펼쳐 소림에 도착했지만, 시후는 휴식보다도 앞서 천지아를 찾아갔다.
도망친 부교주는 지아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정의맹에 있다는 걸 안 이상, 절대 포기하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물론, 소림에 있으니 어떤 수를 쓰더라도 무용할 테지만.
“별다른 이상은 없고?”
“이상이 어떤 이상을 의미하는 건지 명확히 말해 주시길 바랍니다.”
“몸에 일어난 변화가 있다면 죄다 말해 봐.”
시후의 질문에 지아는 잠시 멈추어 자신의 몸을 내려다봤다.
잠시 후, 지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가장 큰 변화는 아무래도, 식단이 바뀐 데 따른 신체 변화가 눈에 띕니다.”
“신체 변화? 어떻게 바뀌었는데?”
“지방이 줄어듦과 동시에 몸무게가 줄어들었습니다. 줄어든 부위는······.”
“아냐, 말할 필요 없어.”
왠지 시무룩해 보이는 건 기분 탓일까.
시후는 그런 지아에게 배교에서 있었던 일들을 말해 주었다.
물론, 그와의 거래는 빼놓고.
모든 이야기를 들은 지아는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저는 이제 어떻게 되는 겁니까?”
“기다려야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신의가 자신의 막내 제자를 설득하거나, 그도 아니면 부교주를 잡아들이는 두 선택 중 하나를 해야 했다.
물론, 신의가 설득하는 건 불가능할 것이다.
그렇다면 남은 방법은 부교주를 잡는 것인데 과연 그가 쉽게 잡힐 것인가?
확률이 높은 쪽은 부교주를 잡는 쪽이지만, 잡느냐 못 잡느냐에 돈을 건다면 못 잡는다는 것에 돈을 걸어야 했다.
물론, 부교주를 잡는다면 신의가 그를 해부하여 단서를 얻을 수 있을 것이고, 지아는 완전한 생강시로 거듭날 수 있을 것이다.
“그걸 가져다주면 더 확실하지만······.”
“그것이 무엇입니까?”
“신경 쓸 필요 없어. 그냥 혼잣말이야.”
시후는 딱 잘라 말하곤 북쪽을 바라봤다.
남궁천도 아직 오태산까지 도착하진 못했을 것이다.
끽해야 태원 정도에 도착했을까.
시후는 당분간 보지 못할 남궁천의 생각을 털어 냈다.
“그보다 신의께선?”
“시간이 시간인 만큼, 주무시고 있습니다.”
“이리 떠드는데 잠을 잘 수가 있겠는고? 진즉에 깬 지 오래다.”
문 너머 목소리가 들리더니 곧 문을 열며 신의가 나타났다.
부스스한 머리는 확실히 침대에서 일어난 지 얼마 안 돼 보였다.
“진즉에 일어나셨다는 분이 머리 정리하실 시간은 없으셨나 보죠.”
“······ 원래 나이를 먹으면 머리에 힘이 없어서 붕 뜨는 법이다.”
신의는 달처럼 새하얀 자신의 머리를 토닥였다.
곧 시후와 눈이 마주치자 두 사람은 동시에 피식 웃었다.
그 와중에 지아는 아무 반응 없이 서 있을 뿐이었다.
시후가 슬쩍 곁눈질로 지아를 흘겨본 뒤 신의를 바라봤다.
“너는 들어가거라.”
신의의 말에 지아는 인사를 꾸벅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할 말이 있거든 아침에 오지 않고?”
“급해서요. 소식 들으셨죠?”
“배교 총타를 지웠다는 소식 말이더냐?”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이자, 신의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 이야기라면 내일 했어도 충분할 터인데······.”
“찾았습니다. 아니, 데려왔죠.”
신의는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어느 순간 입과 눈이 찢어질 정도로 벌어졌다.
곧 정신을 차린 그는 시후의 팔을 잡아끌고 안으로 데려갔다.
문 열리는 소리에 지아가 방문을 열고 잠시 고개를 내밀었으나, 신의가 손을 휘젓자 다시금 문을 닫았다.
“사로잡았다는 인물 중에 셋째가 있었더냐?”
신의는 기막을 펼치기가 무섭게 질문했다.
시후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다리가 풀린 듯 한차례 휘청거리더니, 침대에 쓰러지듯 앉았다.
신의는 양 손바닥을 펼친 채 한참을 바라보다가 손바닥으로 얼굴을 덮었다.
시후도 재촉하지 않고 묵묵히 기다려 주었다.
그가 고개를 들었을 때 눈시울은 촉촉이 젖어 있었지만, 시후는 애써 모른 척을 했다.
“진류, 그 아이는······. 아니, 아이라고 하기엔 이미 세월이 너무 많이 지났구나.”
부모 앞에선 여든이 넘은 노인도 아이였다.
스승과 제자의 관계도 부모와 크게 다르지 않으니, 신의가 아이라 부른다고 한들 틀린 말은 아니었다.
“총타를 지웠다는 소식에 진류 그 아이도 죽었을 거로 생각했거늘······. 늘그막에 얼굴이라도 볼 수 있겠구나.”
“밝힐 생각입니까?”
오래 기다린 만큼 시후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그 질문에 신의는 이미 생각해 둔 바가 있었는지,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힘드실 텐데요?”
“내가 안고 가야 할 짐 아니겠는가?”
“쌓아 올린 명성에 누가 될지도······.”
“명성이라는 녀석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놈일세.”
신의의 태도는 단호했다.
분명 배교의 몸담았던, 그것도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인물이 자신의 제자라고 밝힌다면, 파문은 걷잡을 수 없는 수준일 것이다.
비록 연이 끊어진 지 수십 년이 되었다고 한들, 그가 은거했던 십 년의 세월 또한 의심받을 수밖에 없다.
“구명을 청할 생각이라면······.”
“이 늙은이가 그 정도로 사리 분별을 못 하지는 않네. 마음의 짐을 덜어내고 그 아이와 똑바로 마주 보고 싶어서 그런 것뿐일세.”
마주 보고 싶다.
그 말이 시후의 가슴에 와닿았다.
“피곤할 텐데 고맙네. 혹 더 해 줄 말이 있는가?”
은근한 축객령에 시후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방을 나섰다.
문을 닫기 전 안을 들여다보니, 신의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앉아 있었다.
모양새를 보니 밤새도록 저러고 있을 공산이 컸다.
조용히 문을 닫고 밖으로 나온 뒤, 잘게 떨어지는 별빛을 맞으며 경내를 배회했다.
왠지 그래야만 할 것 같은 밤이었다.
* * *
소림에선 죄를 지으면 참회동에 가두었다.
하지만, 참회동이라고 한들 입구가 막혀 있다거나 쇠창살이 있는 건 아니었다.
스스로가 밖으로 나갈 생각이 없으니 쇠창살이나 구속이 필요하진 않으니깐.
다만, 그 대상이 소림이 아니라 밖에서 잡아들인 악인이라면 다르다.
구속력이 필요하고 그들을 억제할 장소가 필요하니깐.
그래서 만들어진 게 이 불살동(不殺洞)이다.
살계(殺戒)를 여는 스님도 있지만, 대부분 소림승은 불살(不殺)이 원칙이었다.
그렇기에 강호에서 잡아들인 악인들인 지독한 악인들은 대부분 이곳에 가두었다.
그런 불살동은 소림에서도 가장 사람이 적게 찾는 곳이었지만, 오늘은 사람들로 발 디딜 틈이 없이 득실거렸다.
“데려오거라.”
참마원주(斬魔院主) 정립의 말에 사로잡은 배교의 외당주와 신의의 제자인 진류가 끌려 나왔다.
외당주는 무릎을 꿇렸지만, 진류는 나이를 배려해선지 몰라도 바닥에 앉혀 주었다.
“덕사(德賜) 이십이 년. 맹춘(孟春) 스무날. 심문을 시작하겠소이다.”
정립은 뒤돌아 합장하곤 무릎 꿇은 두 사람을 향해 몸을 돌렸다.
“두 사람은 배교에 속해 무고한 사람들을 해쳤소. 또한, 사자를 강시로 만들어 그들을 모욕하는 행위를 일삼았으며······.”
그는 미리 준비한 듯한 말을 줄줄이 읊었다.
늘어놓은 죄목을 들어본다면, 불살동이 아니라 당장에 목을 쳐도 부족함이 없을 정도였다.
“······ 이에 불살동에서 일평생 고혼을 기리며 반성케 하고자 하는데, 혹여 할 말이 있으신 분 있습니까?”
“제 놈들끼리 떠들고 있는 꼬락서니가 우습구나. 그냥 처박아두면 될 일이지, 쓸데없이 공명정대한 척 포장이라도 하고 싶더냐?”
“없으면 이대로 두 사람을······.”
정립이 말끝을 흐렸다.
뭉쳐 있던 사람들을 헤치며 누군가 앞으로 나섰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차 시주, 말씀하시오.”
“저는 저자를 잡을 때 잠시 대화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그때 저자가 했던 말 중 유독 인상 깊었던 말을 전하고자 합니다.”
시후의 말에 다양한 반응이 나왔다.
인상을 찌푸리는 자도 있었고,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흥미를 보이는 자도 있었다.
정립은 전자였다.
그러나 시후의 말을 제지하기도 어려웠다.
그가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였다.
“저자는 자신의 행동이 삶과 죽음의 경계선을 허무는 행위이며, 추후 모두가 불사의 삶을 누리는 날이 올 것이라고 했습니다.”
“궤변이로고. 차 시주께서 그 말을 전하는 연유를 물어도 괜찮겠소?”
“궤변이지요. 그러나 저자는 자신의 말을 철석같이 믿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무지도 죄라고 하지만, 그의 무지를 일깨워 주는 것도 불교에서 말하는 관용이 아니겠습니까?”
“지금 차 시주는 저자를 아니, 배교를 옹호하는 것이오?”
시후의 발언은 선을 넘나들었기에 정립은 날이 선 목소리로 물었다.
주변에서 내리꽂히는 시선이 따가워졌다.
“그건 아닙니다. 다만······.”
“아니면 되었소. 그만하시오.”
정립이 딱 잘라 말하자 시후도 더는 말을 이어나갈 수 없었다.
시후가 도와줄 수 있는 건 여기까지였다.
시후가 뒤로 물러나자, 그를 대신해 신의가 앞으로 나섰다.
그는 시후에게 고개를 살짝 숙여 감사의 인사를 건네며 앞으로 나아갔다.
신의는 성큼성큼 걸으며 정립 바로 앞까지 다가갔다.
정립은 당황하여 뒤늦게 가벼운 합장을 했다.
하지만, 신의는 그의 인사를 받지 않고 그냥 지나쳤다.
진류의 바로 앞에 가서야 걸음을 멈추었다.
그는 바닥에 앉혀진 진류를 따스한 눈빛으로 내려다보았다.
“오랜만이구나.”
“······ 늙은이는 누군데 날 아는 척하는 것이오.”
“참 많이 늙었구나.”
“이 늙은이가 귀가 먹었나, 누군데 아는 척하느냐고 묻지 않소?”
신의가 말을 건네었지만, 진류는 악다구니를 쓰며 그를 외면했다.
분위기가 묘하게 변했다.
눈치가 아무리 없다고 한들, 두 사람이 아는 사이라는 건 누구나 알 수 있었다.
정립이 용기를 내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신의께서는······.”
“내 제자일세.”
정립은 그대로 굳어 버렸다.
이는 비단 정립뿐만이 아니라, 이곳에 모인 모든 이들의 공통된 반응이었다.
“늙은이가 노망이 들었나 보군. 나는 처음 보는데 누가 당신 제자라고······.”
“류야.”
신의는 땅에 앉혀진 진류의 앞에 무릎 꿇으며 손을 붙잡았다.
진류는 아직 덜 여문 입술을 깨물었고, 금세 피가 흘러나왔다.
신의는 손을 뻗어 흐르는 피를 소매로 훔쳤다.
“난······ 이 늙은이를 모르오. 처음 보오. 오늘 처음 본단 말이오.”
진류는 고개를 돌려 부정했다.
신의를 모른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가 잘게 떨려왔다.
두려움이었다.
자신이 아닌, 신의가 오해를 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신의 님. 설명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만······.”
굳어 버린 정립 대신, 추나행이 앞으로 나서며 물었다.
신의는 무릎을 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주위를 둘러보곤 고개를 푹 숙였다.
“추구하는 바가 달라서 내 곁을 떠나갔지만, 내 마지막 제자일세.”
신의의 말에 진류는 눈을 질끈 감았다.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가치관의 차이였을 뿐 그는 스승을 존경했다.
“그렇게 말해 봤자 파문당한 제자일 뿐이오! 그것도 30년도 훌쩍 넘은!”
그렇기에 진류는 부정했다.
스승은 제자라 하고, 제자는 아니라 했다.
제자는 버리라 하지만, 스승은 버리지 못했다.
다들 이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고민했다.
논란의 중심에 선 두 사람을 제외하면, 가장 많은 시선을 받은 건 소림의 방장 정진이었다.
정진은 이 사태에 어떤 대답을 놓을 것인지 한참을 고뇌했다.
그러는 와중 고개를 들어 좌측을 바라봤다.
‘그의 무지를 일깨워 주는 것도 불교에서 말하는 관용이 아니겠습니까?’
돌이켜 생각해보면, 무지를 일깨워 주는 건 스승인 신의일 것이고, 소림에서는 그에 힘을 실어달라는 이야기였다.
“이걸 노린 건가?”
정진은 낮게 중얼거리며 시후를 바라봤지만, 시후는 말없이 웃으며 온화한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정진은 침으로 메마른 입술을 적신 뒤,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하루. 하루는 생각할 시간을 가지는 편이 좋겠습니다.”
- 86화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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