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개발자의 클리어 공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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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화 배교 총타 (5)
“아니, 도대체 얼마나 더 남은 거야?”
검후의 입에서 불만이 터져 나왔다.
이제는 끝날 때도 되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벼락지대인 4구역을 통과했지만, 여전히 진을 벗어나진 못했다.
게다가 제갈려가 진을 파악하기 위해 천로수변을 꽂았으나, 일어나는 시기는 여느 때 보다 한참 늦었었다.
그리고 묘한 표정을 짓는 것이 사람을 영 불안하게 했다.
“아무것도 없는데 분명 뭔가 있어. 어떻게 이럴 수 있지?”
제갈려는 의미를 짐작하기 힘든 말을 던지곤 제자리를 빙글빙글 맴돌았다.
시간이 허비되고 있었다.
이미 4구역에서 적지 않은 시간을 잡아먹었기에 다들 초조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일단 움직이는 게 좋지 않겠는가?”
“나도 생각이 같소만.”
운허와 준혁이 의견을 일치시켰다.
조급한 마음을 헤아리자면 검후는 그보다 더할 것이다.
결국, 제갈려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럼 움직이되 뭔가 이상하다고 느끼면 바로 멈추겠습니다.”
딱딱히 굳은 표정과 말투에서 얼마나 긴장하고 있는지 여실히 전해졌다.
선두는 제갈려와 검후가 나란히 섰다.
그 뒤는 시후와 남궁천이 자리 잡아 좌우를 살폈고, 후미는 운허와 준혁이 맡았다.
“한 호흡에 한 걸음씩.”
검후의 제안에 다들 천천히 걸음을 내디뎠다.
열 걸음 정도를 걸었지만,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무사태평하다면 반겨야 할 일이지만, 불안감은 더욱 가중되었다.
스무 걸음쯤 걸었을까.
시후는 걸음을 멈췄다.
익숙하지만, 익숙해지기 싫은 소리였다.
고개를 바삐 움직이며 주변을 둘러봤다.
탁 트인 공간에는 불그스름한 안개만이 가득할 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차 아우, 무슨 일인가?”
“이 소리······.”
시후는 말을 하다말고 품을 뒤져 무음필대를 꺼내었다.
다들 무음필대가 어떤 용도로 쓰이는지 알고 있었다.
앞서가던 검후도 제갈려를 감싸며 무기를 빼 들었다.
다들 넘실넘실 내공을 끌어올리며 눈을 부릅뜬 채 사방을 주시했다.
시퍼런 날이 사방을 향해 번뜩였으나, 시간이 지나도 그 어떤 강시조차 나타나지 않았다.
“멈췄다?”
무음필대의 소리가 끊겼다.
소리가 들려온 방향도 명확하지 않았다.
그러나 분명 소리는 들렸었다.
미치지 않고서야, 제대로 듣지 못할 수가 없지 않은가.
시후는 답답한 마음에 가슴을 두들겼다.
“멈췄다는 게 무슨 말인가?”
“분명히 조금 전까지 소리가 들려왔는데······ 지금은 끊겼습니다.”
잔뜩 긴장한 탓인지 자연스레 존댓말이 튀어나왔다.
시후의 말에 다시 주변을 샅샅이 둘러봤으나, 발견되는 건 아무것도 없었기에 다시 걸음을 재촉했다.
하지만, 몇 걸음을 채 옮기기도 전에 다시 소리가 들려왔다.
“또? 방향은?”
검후의 질문에도 시후는 어느 한 곳을 정하지 못했다.
소리는 분명 들렸지만, 어디서 들려오는지 알 수 없었다.
시후는 답답한 마음에 뒤통수를 벅벅 긁었다.
“아, 미치겠네.”
의심 어린 눈빛은 아니지만, 의아한 눈빛을 받으니 기분이 썩 좋지만은 않았다.
양치기 소년의 마음이 이런 것일까.
아니, 애초에 거짓말을 한 적도 없지 않은가.
시후는 억울함을 토로했지만, 그렇다고 한들 속마음을 누가 알아주는 것도 아니었다.
“일단 계속 움직이지.”
계속 멈춰 있을 순 없었다.
검후의 말에 시후를 제외한 모두는 고개를 끄덕였다.
시후도 계속해서 들려오는 무음필대 소리에 인상을 찌푸리며 뒤를 따랐다.
“아······.”
소리는 점점 커졌다가 작아지길 반복하며 끊임없이 이어졌다.
극도로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기에 자연스레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었다.
다만, 이전과 달리 소리는 끊어지지 않았다.
시후의 찡그린 인상도 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잠시만요.”
제갈려가 일행을 멈춰 세웠다.
뭔가를 알아차렸나 싶어 바라보자, 제갈려는 상당히 혼란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녀가 뜨문뜨문 말을 이었다.
“끊임없이······ 아냐······ 축을······ 안돼······ 그러면······.”
제갈려는 한참이나 혼잣말을 이어가더니, 표정을 굳혀 바닥에 자갈 몇 개를 주워들었다.
그리고 다시금 길을 재촉했을 뿐 딱히 설명은 없었다.
묵묵히 걷고 또 걸음을 옮기는 가운데 이번에는 시후가 멈췄다.
“방향.”
시후의 뜬금없는 말에 다들 눈을 끔벅이며 바라봤다.
곧 팔을 천천히 들어 올리더니 우측을 가리켰다.
“소리가 이쪽에서 들려요.”
손끝이 향한 곳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다들 우측을 주시한 채 의견을 교환했다.
“가서 확인해야 하지 않겠소?”
“조금 더 지켜보지요.”
“제 생각도 지켜봐야 한다는 쪽입니다.”
“내 생각도 마찬가지다.”
시후는 확인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준혁을 제외하곤 다들 지켜보자 말하고 있었다.
제갈려는 그 와중에 침묵을 지켰다.
그리곤 바닥에 자갈을 떨구더니 그 옆에 일(一)을 새겨놓았다.
“반대로 움직이죠.”
제갈려의 당찬 목소리에 다들 시후가 가리킨 반대쪽으로 걸었다.
소리는 멀어지지도 가까워지지도 않았다.
이를 제갈려에게 말했으나, 제갈려는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 계속 걸었다.
그렇게 제법 시간이 흘렀다.
“소리는 여전해?”
제갈려의 물음에 시후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바닥에 다시금 자갈을 떨구더니 전과 같이 숫자를 새겼다.
이번에는 이(二).
이해하기 힘든 일에는 의문을 가지지 말라고 했던가.
시후는 제갈려의 행동에 관심을 거뒀다.
“이번에는 소리가 들린다는 방향으로 갈 거예요.”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방향을 잃지는 않았는지 곧 바닥에 놓인 자갈과 숫자가 보였다.
다만, 제갈려의 표정은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제갈려가 다시금 몸을 돌렸다.
다들 왜 그러는지 몰랐지만, 제갈려의 뒤를 따랐다.
바닥에 자갈과 새겨놓은 숫자가 보였다.
하지만, 뭔가 이상했다.
비단 그러한 느낌을 받은 건 시후만이 아니었나 보다.
다들 눈을 마주쳤다.
그 불안감을 입 밖으로 꺼내는 이는 없었다.
아직 확실치 않았으니깐.
시후는 제갈려를 뒤따라 본래 최초의 자갈을 놓아두었던 자리로 돌아갔다.
‘이것으로 확실해졌다.’
검후는 골치가 아픈 듯 관자놀이를 살살 주물렀다.
“이게 무슨 경우인지 설명할 수 있나?”
제갈려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바닥에 숫자를 적기 시작했다.
200, 400, 400, 800.
“걸음 수인가?”
“네.”
바닥에 놓은 자갈을 왕복하며 걸은 걸음의 수였다.
진은 넓어지고 있었다.
무음필대 소리가 들려오는 반대쪽으로 움직인 만큼이나 말이다.
물론, 확실한 건 아니다.
몇 번 더 확인해 보면 더욱 확실하겠지만, 지금 필요한 건 실험 정신이 아니라 이 상황을 타개할 대책이었다.
“진이 노골적으로 저쪽으로 오라고 말하는 것 같죠?”
“아니라고 말 못 하겠군.”
“함정일까요?”
“글쎄, 함정을 파더라도 이런 단순한 함정을 팠겠는가? 게다가 그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건······.”
남궁천은 말끝을 흐렸다.
그렇다.
이 무음필대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자들은 한정되어 있었다.
함정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한결 마음이 가벼워졌다.
그렇다고 완전히 마음을 놓은 건 아니었다.
적당히 긴장을 유지한 채, 시후가 앞장서서 걸었다.
곁에 걷는 제갈려는 다소 풀이 죽은 듯 보였다.
하긴, 진법으로는 천하에 한 손에 꼽을 것이라 자부하였는데, 이번 진은 아무런 단서조차 찾지 못했으니 자존심이 많이 꺾였을 것이다.
어설픈 위로는 독일지도 몰랐기에, 시후는 묵묵히 걷기만 했다.
“가까워지는 것 같아?”
“아직.”
귓가에 들리는 무음필대 소리는 여전히 일정 거리 안쪽으로 좁혀지지 않았다.
‘이제는 슬슬 뭐라도 반응이 있을 때가 되지 않았나?’라는 생각을 두어 번 했을 무렵, 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이 바뀌었다.
“잠깐만요.”
시후는 사람들을 멈추게 한 뒤, 몇 걸음 뒤로 물러났다.
좌측에서 들리던 무음필대 소리가 전방에서 들려왔다.
다시 앞으로 걷자 소리는 좌측으로 옮겨갔다.
그 후로 앞뒤로 오가길 반복했다.
확실히 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이 달라졌다.
그 후로도 몇 번이나 방향은 이리저리 바뀌었다.
일정한 규칙은 없었다.
제멋대로 길을 안내하듯 이끌었을 뿐.
걷고 또 걸었다.
빛이 보일 때까지.
* * *
[대마라혈진을 통과하였습니다.]
[진으로 인한 감소 효과가 해제됩니다.]
몸이 한결 가벼워졌다.
시후는 일원신공으로 인해 제약이 덜했으나, 검후에게 절반이라는 제약은 엄청났을 것이다.
검후는 몇 번이고 주먹을 쥐다 펴길 반복하며 웃었다.
시후도 몸을 풀면서 주위를 둘러봤다.
지나온 길은 안개로 그득했으나, 이곳은 저 멀리 산봉우리가 보일 정도로 시계가 좋았다.
다만, 그 안개는 마치 밥그릇을 땅에 엎은 것처럼 산을 감싸고 있었다.
그 봉오리는 그보다 한참은 높았는지, 안개 속에 파묻혀 있었다.
“저곳인가?”
검후가 가리킨 산 중턱에는 산을 빙 둘러 세워 둔 높다란 성벽이 눈에 띄었다.
마치 모용세가의 모습과 닮아 있었다.
모용세가의 장원이 성이라 부르기에 부족함이 없었다면, 배교의 총타 또한 산중 요새라 불러 마땅했다.
“손님 대접이 엉망이군.”
다만, 준비가 덜 된 것인지 배교는 머리카락조차 비추지 않았다.
검후는 진을 나오자마자 한바탕 싸울 줄 알았는지, 다소 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시후는 그런 그녀를 대신해 제갈려에게 다가가 귓속말을 건넸다.
“진법에 들어왔다는 걸 알 거라고 하지 않았어?”
“모를 순 없을 거야. 다만, 이렇게 빨리 지나올 거라는 생각은 못 했겠지.”
일리 있는 말이었다.
정상적인 방법이라면 사령배임을 지나는데 꼬박 하루가 걸렸을 테고, 마지막 구역 역시 몇 날 며칠이 걸렸을 것이다.
“앞에 진은?”
“없어요.”
간결한 질문에 간결한 대답.
검후는 짧게 고개를 끄덕이며 앞장섰다.
진법이라는 특수성 때문에 검후가 앞장설 기회가 적었지만, 그녀는 누군가의 등 뒤에 서 있다는 게 세상 그 무엇보다 어색한 사람이었다.
진법이 사라진 이상, 검후의 감각과 실력이 빛을 발휘할 때였다.
조심스럽게 오르는 듯했지만 거침이 없었고, 얼핏얼핏 살피는 것처럼 보일지 몰라도 무엇 하나 놓치는 것이 없었다.
일행은 어느새 성벽 근처까지 다다랐다.
“총 다섯.”
“아니, 여섯이다.”
검후가 운허의 말을 부정함과 동시에 정정해 주었다.
시후도 나무 옆으로 고개를 슬쩍 내밀어 확인했다.
성벽 위에는 총 네 사람은 보였으나, 나머지 둘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문 뒤편에 있는 녀석의 기척을 읽었겠지? 나머지 한 놈은 저 조잡하게 지은 성루에 있다.”
검후의 말에 운허는 다소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들키지 않고 제압하는 건 가능하신가요?”
“불가.”
제갈려의 질문에 검후는 고개를 내저었다.
검후 정도의 고수가 들키지 않고 제압할 수 없다면 상당한 실력자다.
최소한 운허 정도의 수준이라 봐도 무방할 것이었다.
허술하게 지킨다고 생각했거늘, 생각보다 경계에 힘을 싣고 있었다.
덕분에 제갈려의 이마에 제법 선명한 주름이 생겼다.
곧 바닥에 쪼그려 앉아 대충이나마 아래서 본 성을 그렸다.
나뭇가지를 몇 번 끄적였을 뿐인데, 제법 그럴듯한 모습이 그려졌다.
그녀는 나뭇가지로 지금 있는 위치와 선 내부의 어느 한 곳을 가리켰다.
“아마도 진을 이루는 핵은 이곳에 있을 거예요. 이곳에서 거리는 족히 150장은 될 테죠.”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거리였다.
아직 말이 끝나지 않은 듯 재차 입을 열었다.
“안에서 어떤 변수가 있을지 모르니, 최소한 성벽만큼은 안 들킨 채로 넘고 싶었는데······. 어쩔 수 없죠. 성벽을 따라 조금 돌아보면서 몰래 들어갈 만한 곳을 찾아보죠.”
“제갈의 아이가 잘못 이해했구나.”
검후가 막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제갈려의 팔목을 붙잡았다.
“성루에 있는 녀석은 강시라서 제압이 불가한 것이지, 죽이는 거라면 언제든지 가능하단다. 나머지 녀석들도 마찬가지다. 죽이려면 들키지 않고 언제라도 죽일 수 있으니 말만 하려무나.”
검후는 웃으며 말했지만, 아무도 웃지 않았다.
시후는 순간 모용세가에서 검후가 행했던 일을 떠올렸다.
그때와 같았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흑백선자의 입을 찢던 그때도 지금과 같이 웃고 있었다.
그 폭력성이 자신에게 향하지 않을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몸은 정직했다.
시후는 엉거주춤한 자세로 조금 따스해진 바지춤을 만지작거렸다.
‘썅.’
- 78화에 계속 -
< 개발자의 클리어 공식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