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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발자의 클리어 공식-72화 (54/201)

< 개발자의 클리어 공식 >

개발자의 클리어 공식

72화 생강시 (2)

천지아는 태연했다.

그리고 천연덕스러웠다.

혹시나 잘못 알고 있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하지만, 그와 반대로 천진승의 반응은 명확했다.

달아오른 얼굴과 떨리는 동공.

그는 곧 시후에게 다가오더니 어깨를 강하게 밀쳤다.

“초면부터 무슨 이리 실례되는 말을 한단 말인가! 남궁천 공자님을 믿고 이러는 거라면, 내 단단히 버릇을 고쳐 주마!”

이전까지 예의 바르던 모습은 눈 씻고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흥분했다.

진승은 당장이라도 검을 뽑을 듯 검병을 움켜쥐었다.

하지만, 시후는 그와 싸우기 위해 이곳에 온 게 아니었다.

팔짱을 낀 채로 싸울 의사가 없다고 피력했고, 아무리 흥분했다고 한들 진승도 무기를 들지 않은 상대에게 달려들 정도로 이성을 잃진 않았다.

게다가 투기를 뿜어냈으나, 싸우고자 하기보다는 관심을 돌리고 싶다는 게 눈에 보였다.

천지아는 그 광경을 지켜보다가 천천히 입술을 뗐다.

“맞습니다.”

“누님!!”

절규하는 듯한 목소리.

진승의 외침에도 지아는 꿈쩍하지 않았다.

“앉으시죠. 승아, 너도 앉아.”

도리어 일어서 있던 세 사람을 바라보며 차분히 말했다.

그녀의 말에 시후는 냉큼 자리에 앉았고, 남궁천은 눈치를 슬쩍 보더니 그 옆에 앉았다.

하지만, 진승은 여전히 일어선 채로 시후를 죽일 듯 노려보고 있었다.

“승아, 앉지 않으면 이야기를 할 수 없지 않겠니.”

지아의 말에 진승은 입술이 터지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꽉 깨물더니, 의자의 안위가 걱정될 정도로 털썩 주저앉았다.

“대화를 나누기에 썩 좋은 환경은 아니지만, 이곳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게 가장 안전하겠지요······.”

그녀는 말을 잠시 끊은 뒤 진승을 바라봤다.

무감정한 눈빛이었다.

“어떻게 알고 오셨는지 모르겠지만, 역시 세상에 비밀이란 건 존재하지 않는군요. 차시후 소협이라고 했던가요? 저분의 말대로 전 죽었습니다. 아니, 죽었었다고 합니다.”

무감정한 그녀의 말에 진승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러나 지아는 말을 계속 이어나갔다.

“오음절맥(五陰絶脈)을 앓고 있던 저는 한 달 전, 온몸이 차갑게 얼어붙음을 느낌과 동시에 기억이 끊어졌습니다. 필시, 죽음이었을 테지요.”

진승은 말없이 눈물 흘리고 있었다.

지아는 그런 진승의 곁으로 다가가 그 눈물을 닦아 주었다.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들린 건 승아의 울음소리였습니다. 저는 하늘이 불쌍히 여겨 다시 땅으로 돌려보내 줬다고 믿었죠······. 하지만, 아니었습니다.”

지아는 손을 쥐었다 펴길 반복했다.

볼을 쭉쭉 잡아당기기도 했다.

“처음에 느껴졌던 감정은 이내 꺼져가는 촛불처럼 희미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감정을 끊임없이 되뇌고 있어야 기억할 수 있는 상태죠. 우습기 짝이 없지 않나요? 감정을 기억하려 한다는 것이? 저는 지금 감정을 흉내 내고 있을 뿐입니다.”

“아닙니다. 누님은 흉내 내는 게 아니에요. 죽지 않았었어요.”

다 큰 남자가 펑펑 우는 꼴이 우습게도 보일 수 있지만, 오히려 누이를 아끼는 마음이 얼마나 절실했는지 알 수 있었다.

지아는 그럼 진승을 살포시 안아 주었다.

“지금도 승아가 왜 우는지를 이해하고 그에 관한 행동을 할 뿐입니다. 저는······ 지금 무엇인가 결여되어 있습니다.”

“이야기는 잘 들었소. 그러나, 그전에 어떻게 살아났는지 자세히 이야기해 주셔야 이해가 될 것 같소만.”

세 사람의 시선이 진승에게 꽂혔다.

진승은 떨군 고개를 들어 올릴 기색이 없었다.

지아는 그런 동생을 바라보다가 남궁천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네가 말하기 힘들면······.”

“아뇨.”

진승은 눈을 부릅뜨며 고개를 들었다.

“반년 전, 서역까지 다녀온 대붕 상단이 진귀한 물건들을 팔러 저희 세가에 찾아왔었습니다. 난생처음 보는 종류의 물건들 속에 조그만 콩알 같은 게 있었습니다. 잘못 놔둔 물건이겠거니 싶어 물었지만, 파는 물건이라고 하더군요.”

그가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죽음에 이르더라도 살리는 기적의 비약이라고 했습니다. 허튼소리로 치부했죠. 누가 그런 말을 믿겠습니까? 하지만, 누이가 눈에 밟혔기에 사서 누이에게 먹였습니다. 하지만, 세상에 기적 따윈 없다는 걸 알려 주었죠.”

진승은 차분히 앉아있는 지아의 손을 붙잡았다.

“누님의 병은 신의가 아닌 이상 치료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신의를 원망하고 욕했습니다. 하필이면 누님이 죽고 난 뒤에 신의가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는 말에 피를 토할 뻔했습니다. 하지만, 누님은 깨어났습니다. 비약의 힘으로······.”

“잠시만요.”

시후는 진승의 말을 끊으며 품을 뒤적였다.

곧 무음필대를 꺼낸 뒤 입으로 가져다 댔다.

가만히 있던 지아의 몸이 움찔했다.

“들리죠?”

그녀는 고개를 위아래로 움직였다.

시후는 남궁천을 바라보며 눈을 마주쳤다.

“확실하네요.”

“본래 바라지 않는 것들은 일어나는 법이라지만, 이건 너무 가혹한 게 아닌가.”

남궁천의 반응에 불안함을 느낀 건 진승이었다.

그는 혼란스러워하는 지아의 손을 꽉 잡아 주었다.

시후는 남궁천에게 눈짓을 보냈다.

“방금 차 아우가 불었던 건 무음필대라는 물건이오. 그리고 그 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건······.”

남궁천이 검을 뽑아 들었다.

진승도 가만히 있진 않았다.

“천 소저께선 흑련회에 속해 있습니까?”

“아니요.”

“배교에 들지도 않으셨지요?”

“네.”

“그렇다면 남은 건 하나군요.”

남궁천이 시후를 바라봤다.

좋지 않은 버릇이 또 나왔다.

말하기 곤란한 건 넘기는 버릇.

시후는 쓴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그쪽, 강시예요.”

한껏 열기를 내뿜던 화로가 제 역할을 하지 못했다.

차갑게 얼어붙은 실내의 공기를 데우지 못했다.

진승은 목소리를 잃은 듯 입만 뻥긋거렸다.

그 와중에 지아는 침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남궁천은 도리어 침착한 지아의 태도에 당황했다.

“혹, 천 소저께선 강시를 모르시는 건······.”

“한평생 무림 세가의 여식으로 살아왔는데 모를 리 있겠습니까. 다만, 제가 다시 눈을 뜨게 된 이유로 가장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하긴 했습니다.”

“침착하시군요.”

“감정이 결여되었을 뿐입니다.”

남궁천은 감정이 배제된 그녀의 대답에 짧게 헛기침하며 목을 가다듬었다.

“크흠. 그보다, 의생(醫生)을 모은 것도 그 때문이지요?”

“맞습니다.”

“정의맹에 신의가 있지 않습니까? 같이 가시죠. 분명 도움이 될 거라 생각합니······.”

“그럴 순 없습니다!”

진승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어느새 검을 뽑아 든 진승이었지만, 그 검의 끝은 흔들리고 있었다.

흥분하거나 겁을 먹어서가 아니다.

천 씨 세가 특유의 요유검(搖柳劍)을 펼친 것이었다.

요유검은 바람에 흔들리는 버드나무를 본떠 만든 검법으로, 무당의 태극검과 비슷하다는 평을 받을 정도로 유려한 검법이었다.

“그냥 물러가지 않겠다면 누군가는 죽어야 할 것입니다.”

진승은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조금 전까지 눈물을 흘리던 유약한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어설픈 살기를 뿌리진 않았다.

다만, 기개만으로도 상대를 물러나게 만들기엔 충분했다.

시후와 남궁천은 눈을 마주치며 의견을 교환했다.

진승을 제압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어설픈 제압은 독이 될 것이다.

진승과 두 사람의 사이로 지아가 들어왔다.

그녀는 곧 치켜세운 진승의 검 앞에 멈춰 섰다.

“난 두 분을 따라가려 하는데, 나도 죽이겠느냐?”

애처로울 정도로 떨리던 검은 바닥으로 떨어졌다.

진승은 바닥에 엎드린 채 오열하였고, 지아는 그런 동생을 내려다보더니 몸을 돌려 시후를 바라봤다.

“세가로 가지 않고 이곳에 왔다는 건, 곧바로 떠나야 한다는 말이겠지요.”

“그렇습니다.”

“잘하셨습니다. 옷가지 등은 올라가면서 사도록 하고······. 승아.”

지아의 부름에도 진승은 고개를 들지 못했다.

갑판에 굵은 눈물을 뚝뚝 흘릴 뿐.

“신의께서 방도를 찾을지도 모르니 걱정하지 말고 부모님을 잘 진정시켜 드리려무나.”

그가 고개가 미세하게 위아래로 움직였다.

지아는 남궁천에게 기막을 풀어달라고 말한 뒤, 호위들에게 배를 뭍으로 대달라고 부탁했다.

배에서 내려 마차에 다다른 네 사람은 호위를 멀찍이 물렸다.

“누님을······ 꼭 돌려보내 주시오.”

“약속하리다.”

부탁보단 애원에 가까운 진승의 말에 남궁천은 간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절대 떨어지지 않을 것 같았던 진승이 손을 놓자, 지아는 마차에 올라탔다.

다행히도 마차는 남궁천이 몰 줄 알았기에 마부를 데려가야 하는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남궁천이 마부석에 오름과 동시에 시후도 마차 안으로 몸을 던졌다.

“이럇!”

쌍두마차는 항주 밤거리를 힘차게 달리기 시작했다.

놀란 호위들이 마차로 달려왔지만, 진승이 그들을 막아 세웠다.

잠시 시간을 벌어 준 덕분에 마차는 금방 그들의 눈을 벗어날 수 있었다.

“이거 천 씨 세가에 너무 큰 빚을 지는 듯한 기분이군.”

마부석 사이에 존재하는 나무 창은 얇았기에 남궁천의 목소리는 또렷이 들려왔다.

다른 방법은 없었다.

지아의 외출은 꽃 배에 오르는 게 전부였으니 말이다.

그녀를 정의맹으로 데려가기 위해선 허락이 필요했으나, 누가 죽었다 살아난 딸을 내어 주겠는가.

부득이하게 둘을 설득하여 반 납치를 공모할 수밖에 없었다.

“그보다, 누가 의가(醫家)를 세울 것이라는 소문을 내었소?”

“승아의 의견입니다. 그러면 각지에서 실력 있는 의원들이나 의생들이 몰려들 것으로 판단했지요.”

“생각보다 소문을 크게 냈었나 봅니다. 기다리는 수가 적진 않던데······.”

“상단에 돈을 뿌려 입소문을 태웠겠지요. 그보다 조금 더 가시면 사람이 많이 다니는 길목이니, 속도를 줄이심이 좋을 겁니다.”

속도가 확연히 줄어들었다.

사람이 많이 다니는 길목인지라 속도를 내기 어려웠다.

마주 보며 앉아 있기가 여간 껄끄러운 게 아니었기에 시후는 마차의 창문을 열고자 손을 뻗었다.

“무음필대라고 했던가요?”

하지만, 지아의 질문에 뻗었던 손을 거두며 고개를 끄덕였다.

시후는 곧 품에서 무음필대를 꺼내 건네주었다.

달라는 말도, 원하는 표정도 짓지 않았지만, 쓸데없이 이야기를 꺼냈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지아는 살짝 고개를 숙이며 무음필대를 건네받았다.

잠시 눈치를 살피더니 무음필대에 입술을 가져다 댔다.

몇 번이나 숨을 불어넣었지만, 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무음필주법을 익히지 않고선 소리 낼 수도 없을 테니 당연한 결과였다.

무음필대는 곧 시후의 손으로 돌아왔으나, 강요 아닌 강요로 무음필대를 불어야 했다.

그녀의 귀가 수차례 쫑긋거렸다.

“신기하군요.”

“지금 제가 불 때는 단순히 소리에 불과하겠지만, 배교 놈들이 불었을 땐 어떤 결과가 나올지는······ 말 안 해도 알겠죠?”

“제가 강시라고 하셨으니, 아마도 그들의 명령대로 움직이겠죠.”

시후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손가락은 좌우로 까딱거리며 지아의 가슴을 가리켰다.

“약간 다를걸요? 그들의 명령을 내리면 그쪽 방식대로 이해해서 행동할 테니.”

시후의 말에도 지아의 표정은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그게 무슨 말인가요?”

“지금 정의맹으로 가는 것도 그쪽 생각이 아닐 수도 있죠.”

“그 말은 제가 지금 조종받고 있을 수도 있다는 말인가요?”

걱정스러워서가 아닌, 의문이 생겼으니 답을 알아야겠다는 듯한 어투였다.

시후는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가능성이 없지는 않죠.”

“그렇다면 왜 이 이야기는 지금 와서야 하는 건가요?”

“이야기를 나눌 시간이 별로 없었잖아요.”

“맞는 말이군요. 이해했습니다.”

지아가 긍정하자, 창 너머 마부석에선 신음이 흘러나왔다.

너무나도 차분한 그녀의 태도에 되레 대화를 엿듣고 있던 남궁천이 당황한 것이었다.

상대의 감정을 배려하지 않고 핵심만 짚는 시후와 그를 이해하노라 말하는 지아의 모습은 남궁천에게 너무나도 어려운 광경이었다.

남궁천은 관심을 거두며 말을 몰았다.

세 사람을 태운 마차는 항주를 빠져나와 북서쪽을 향해 거침없이 달렸다.

- 73화에 계속 -

< 개발자의 클리어 공식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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