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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발자의 클리어 공식-31화 (13/201)

< 개발자의 클리어 공식 >

개발자의 클리어 공식

31화 소검후 (3)

각 문파나 세가에는 다들 각기 다른 형태지만 금지(禁地)가 존재했다.

소림에는 조사동(祖師洞)과 장경각(藏經閣) 등이 있을 것이고, 아미파로 치면 금정사(金頂寺)가 있을 것이다.

제갈세가도 초대 시조인 제갈규(諸葛珪)와 제갈량(諸葛亮)의 위패를 모시고 있는 신위당(神位堂)이 대표적인 금지로 손꼽혔다.

그리고 시후가 도착한 이 청심당(淸心堂)도 제갈세가의 금지에 속해 있었다.

그 탓일까, 수발을 돕는 시비도 단 한 명에 불과했다.

“이만 물러가 보거라.”

제갈마혁의 말에 청심당의 유일한 시비가 조용히 방을 빼져 나갔다.

그마저도 이제 없었으니, 청심당에는 오롯이 이번 비무에 관련된 사람만이 앉아 있었다.

남궁천은 관련이 있다면 있고 없다면 없는 수준이었지만, 시후만 보내는 게 마음에 걸렸는지 기어이 따라왔다.

눈치를 살피던 남궁천이 제갈마혁을 향해 입을 열었다.

“언제까지 저대로 둘 것이신지······.”

“신경 쓰지 말거라.”

그의 냉랭한 대답에 남궁천을 입을 꾹 다물었다.

천비령은 자리에 없었다.

청심당에 오자마자 제갈마혁은 그녀에게 천로수변을 집어 던졌다.

결국, 그녀는 지금까지 알 수 없는 진에 갇힌 채 허우적대고 있었다.

아무리 남궁천의 넉살이 좋다고 해도, 단호히 말을 자른 그에게 다시 말을 걸긴 어려울 것이다.

그는 천천히 차를 한 모금 홀짝이더니 정현 사태를 바라보았다.

“옥정 사태는 아직 정정하더냐.”

“올해로 입적하신 지 삼 년이 되셨습니다.”

정현 사태의 말에 그의 눈이 과거를 회상하는 듯 아련하게 변했다.

찻잔을 매만지던 그가 잔을 내려놓더니 합장하며 짧게 기도했다.

다시금 눈을 떴을 땐 감정을 추슬렀는지, 아련하던 눈빛은 본래의 색으로 돌아갔다.

“향을 피우기 위해서라도 아미를 찾을 테니, 문전박대나 하지 않았으면 하구나.”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방문해 주신다면 언제라도 환영하겠습니다.”

“겨울에는 뼈마디가 쑤셔서 움직이기 힘드니, 내년 봄에나 아미를 찾을 게다.”

“장문인께 말을 전해 놓겠습니다.”

팔황에 오른 인물이 뼈마디가 쑤신다면 누가 믿겠냐마는 정현 사태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와 별개로, 이번 일은 네 책임이 가장 크다. 알고 있겠지?”

잡담은 끝났으니, 본론으로 들어갈 때였다.

정현 사태를 비롯해 남궁천과 시후는 덩달아 긴장했다.

“그렇습니다.”

“그에 관한 벌은 옥정을 대신해서 내가 내려도 되겠느냐?”

“합당하다면 듣겠습니다.”

다만, 아무리 팔황의 인물이라고 한들, 다른 문파 사람에게 죄를 논할 수는 없었다.

정현 사태의 말에 제갈마혁도 강요할 생각은 없었는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장문인의 허락을 받아야겠지. 미현에게 이번 일을 설명하고 내 의견을 전하거라.”

“그리하겠습니다.”

“내 생각에 옥정이라면, 네게 2년의 묵언을 명했을 것이다. 이 말을 미현에게 전하거라.”

“알겠습니다.”

정현 사태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의 시선은 곧 남궁천에게 향했다.

“천이라고 했더냐?”

“예!”

남궁천의 씩씩한 대답에 시후는 그를 흘겨보곤 작게 웃었다.

“왜 이곳까지 따라왔는지는 알겠으니 그만 가거라.”

덕분에 남궁천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제갈마혁의 말에 다들 자리에서 일어났지만, 시후는 문밖으로 나서지 못했다.

“넌 잠시 남아 있거라.”

“저 말씀입니까?”

“아직 밖에서 벌을 받는 아이도 있는데, 사건의 당사자가 가면 어찌하누? ”

그의 말에 시후는 다시 자리에 앉아야 했다.

방을 나서던 남궁천이 슬쩍 말을 걸었다.

“그럼 밖에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 나오면······.”

“어련히 알아서 돌려보낼까. 앞에서 어슬렁거리지 말고 돌아가거라.”

“알겠습니다.”

하지만, 제갈마혁이 다소 심기가 상한 듯 말을 끊자, 남궁천은 황급히 고개를 숙이며 사과했다.

두 사람이 청심각을 벗어나자, 제갈마혁도 슬쩍 자리에서 일어났다.

덕분에 시후는 자리에 앉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일어서야 했다.

그는 엉거주춤 서 있는 시후를 스치듯 방을 나섰다.

“주인 없는 방에서 뭘 우두커니 서 있는 게냐? 냉큼 따라오거라.”

‘언제 따라오란 말이라도 했던가.’

시후는 속으로 투덜거리면서도 서둘러 그의 뒤를 밟았다.

제갈마혁이 향한 곳은 청심당의 입구였다.

그곳에는 여전히 진에 갇힌 채 검을 휘두르고 있는 천비령이 서 있었다.

아니, 서 있다는 말을 써도 괜찮은 건가 싶을 정도로 상태가 좋지 않아 보였다.

입고 있는 무복은 마치 비라도 맞은 듯 땀으로 흥건히 젖어 있었고, 팔다리는 한계치에 다다른 듯 잘게 떨리고 있었다.

파리한 안색마저 결코 정상적인 상태는 아니었다.

“진을 풀어주는 게 좋겠느냐?”

제갈마혁의 질문에 시후는 실소를 터트렸다.

진에 가둘 때는 자신에게 의견을 묻기라도 했던가.

“마치 제가 원해서 가둔 것처럼 물어보십니다?”

“네 의사는 물어보지 않았지만, 너 때문에 갇힌 건 맞지 않느냐? 네가 그 공격을 제대로 받아치기만 했어도, 저 아이가 저기에 있을 이유가 없을 것이다.”

억지였다.

궤변이고, 늙은이 헛소리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의 면전에서 그렇게 말할 수는 없지 않은가.

“······ 맞습니다. 맞으니 그만 풀어 주시죠.”

시후의 체념 어린 대답에 제갈마혁이 피식 웃음을 보였다.

곧 바닥에 꽂힌 천로수변으로 손을 뻗던 그가 갑자기 뒤돌아보았다.

“그보다, 네가 익힌 내공 심법은 무엇이더냐? 그따위 창술로 막아낼 현월문의 무공이 아니거늘.”

“제 창술이 어때서 말입니까?”

“그걸 말이라고 묻는 게냐? 현월검법은 천하 십 대 검법에 들어갈 만큼 대단한 검법이거늘, 네 녀석이 펼치던 창술은······ 그래. 네가 익힌 창술의 이름은 무엇이더냐?”

‘십창이요.’

그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발음이 묘해서 말했다간 오해를 살 수밖에 없었다.

시후가 우물쭈물하자 제갈마혁이 혀를 찼다.

“쯧쯧, 그것 보아라. 이름도 밝히지 못할 저급한 무공이 아니더냐. 경지에 다다르면 무공에 얽매이지 않는다고 말하지만, 그건 단순히 휘두름 속에 초식을 담고 있기 때문이거늘.”

시후가 말하지 못 하는 이유를 지레짐작한 그가 나무랐다.

시후는 순간 이름을 밝힐까 고민했지만, 그랬다가는 내공 심법까지 밝혀야 했다.

“제가 익힌 무공은 죄다 저급해서 말씀드리기가 부끄럽군요.”

“부족한 무공처럼 속도 좁구나.”

시후를 타박하는 말과 함께 제갈마혁이 손바닥을 휘두르자, 바닥에 꽂혀 있던 천로수변이 한순간에 그의 손아귀로 들어갔다.

“커헉, 헉, 헉.”

그와 동시에 천비령의 몸이 바닥으로 무너져 내렸다.

그래도 끝까지 검을 놓지 않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천비령은 바닥에 쓰러져 몸을 부들거리며 안쓰러움을 불러일으켰다.

천비령을 내려다보던 제갈마혁이 그녀에게 입을 열었다.

“검후가 무슨 생각으로 무공만 가르쳤는지······ 도무지 알 수 없구나. 네 사부는 어디로 갔느냐?”

“하악, 하악, 사, 사부님은 장백산, 장백산으로, 후우······. 가신다고 했습니다.”

“쯧, 예나 지금이나 강호에 문제만 일으키는군.”

천비령은 숨을 거칠게 가다듬으면서도 몸을 일으키기 위해 바둥거렸다.

비지땀을 쏟아내면서 간신히 얼굴을 땅에서 떼어낸 그녀가 제갈마혁을 올려다보았다.

흙바닥을 나뒹굴어서 그런지, 천비령의 몰골은 말이 아니었다.

“네 사부를 생각해서 여기까지만 하도록 하마. 그러나, 앞으로 검을 다스리기 전까지는 절대 비무를 하지 말거라.”

[돌발 임무 ‘동갑내기 길들이기’가 제갈마혁의 개입으로 무산되었습니다.]

[추후 2년간 해당 임무는 비활성화로 변경됩니다.]

[‘동갑내기 길들이기’를 실패로 간주하여, 대체 임무 ‘증명’이 시작됩니다. 해당 임무는 내일부터 시작됩니다.]

떠오른 알람 창을 바라보며 시후는 속으로 욕을 내뱉었다.

‘썅.’

실패할 가능성도 있다고 생각했지만, 거기에 대한 불이익이 존재할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럼, 둘 다 이만 가 보거라.”

제갈마혁이 다시 청심당으로 들어가자, 시후는 여전히 바닥을 기고 있는 천비령을 내려다보았다.

모두에게 가라고는 했지만, 천비령의 상태를 보아하니 스스로 움직일 수 있을 것 같진 않았다.

“혼자 움직일 수 있어?”

“조, 조금만 부축을······.”

‘부축은 얼어 죽을.’

한쪽 팔을 붙잡아 줬지만, 그녀의 의지와는 달리 쉽게 몸을 가누지 못했다.

한계까지 몰아붙인 근육들은 이미 뇌의 간섭을 벗어던진 듯했다.

게다가 정신이 없어서 그런지, 시후가 자연스레 말을 놓은 것도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큭······.”

조심스럽게 움직인다고 움직였음에도, 시후가 한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천비령의 입에선 신음이 흘러나왔다.

덕분에 갓난아기에게 걸음마를 가르치듯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죄송했습니다······.”

비무 전까지는 시종일관 당당했던 그녀였지만, 더는 그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

고소한 기분이 없지 않아 있었지만, 그녀가 이렇게 기죽어 있으면 곤란했다.

천비령은 언제고 자신감이 넘쳐 있어야 하는 캐릭터였으니깐.

“죄송할 게 뭐 있어. 그보다 결판을 못 냈잖아?”

‘미친놈처럼 보지 마. 어차피 비무 못 하는 거 알고 하는 소리야.’

시후는 입을 쩍 벌린 채 자신을 바라보는 천비령의 시선을 마주하며 다시 입을 열었다.

“2년. 2년 뒤에 다시 붙을까? 그 기간이면 충분하겠지?”

“2년······. 길지 않은 시간이지만, 노력해 보죠.”

풀이 잔뜩 죽었던 천비령이 다시금 눈을 반짝이기 시작했다.

한 걸음씩 조심히 내디뎠던 두 사람은 어느새 연무장 근처까지 다다랐고, 저 멀리서 기다리고 있던 아미파의 여승들과 남궁천 일행이 달려왔다.

시후는 곧 아미파 여승들에게 천비령을 넘겨주었다.

“그럼, 2년 뒤를 기약하겠습니다.”

부축을 받으며 떠나기 직전, 천비령은 시후를 돌아보며 말했다.

덕분에 남궁천은 둘이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 궁금해하며, 말해 주길 바라는 눈빛을 보내었다.

“별거 아니에요. 2년 뒤 다시 붙어 보자고 했죠.”

“허! 내 차 동생을 여태까지 잘못 봤군. 이토록 무를 향한 열망이 강했다니.”

“시후 오라버니! 죽다 살아난 거 모르시겠어요?”

남궁천은 고개를 가로저었고, 남궁미는 역정을 내었다.

팽철우도 할 말이 많은 얼굴이었지만, 두 사람이 성을 내자 말을 아끼는 듯했다.

물론 시후도 위험성을 알았다.

하지만 ‘동갑내기 길들이기’라는, 소검후와 친분을 쌓을 수 있는 임무를 포기할 수는 없었다.

“뭐, 2년 뒤에도 지금과 결과가 같다는 보장은 없죠.”

“글쎄······. 아우를 무시하는 건 아니지만, 시간은 모두에게 공평하지 않지. 그녀에게 2년이라는 시간은 누군가에게 10년, 혹은 20년과도 같은 시간일 터. 그리 낙관적으로 생각할 건 아니라고 보네.”

남궁천은 비관적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천비령은 열여섯의 나이에 절정에 다다랐었으니까.

성장세를 볼 때 2년 뒤엔 초절정에 발을 걸치더라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시후는 자신 있었다.

“씨앗을 심을 때까지는 누가 더 잘 자랄지는 모르는 법이죠.”

‘플레이어’와 ‘NPC’라는 토양질이 다르지 않은가.

게다가, 시후가 앞으로 얻을 것들을 생각한다면 지금의 격차는 없는 것과 다름없었다.

천비령은 물만으로 성장해야 하지만, 시후는 온갖 비료를 맞아가며 자라지 않겠는가.

다만, 시후의 말을 들은 남궁천의 표정은 확 굳어졌다.

“그래, 아우의 말이 맞네. 잠을 줄여가고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노력한다면 이길 수 있겠지.”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남궁천을 품을 뒤적이더니, 얇은 세필과 휴대용 대나무 먹통을 꺼내 들었다.

보통 급히 글을 적거나 할 때 쓰는 물건들이었지만, 남궁천은 주로 그림을 그릴 때 사용하던 것들이었다.

꽈직! 퍽!

잠시 두 물건을 바라보던 남궁천은 세필을 꺾고, 대나무 먹통을 바닥에 집어 던졌다.

깨어진 대나무 먹통에서 흘러나온 먹물은 빼곡히 박힌 청석의 틈 사이로 파고들었다.

“나 또한 무공이 경지에 이르기 전까지는 그림을 그리지 않겠다.”

그가 하늘을 우러러보며 결의를 다지는 사이, 연무장 주변을 맴돌던 시비 한 명이 잔뜩 뿔이 난 표정으로 다가왔다.

시비는 곧 사방에 튄 먹물을 닦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남궁미가 한숨을 내쉬었다.

“쓸데없이 분위기 잡더니······ 도와주고 오세요. 먼저 갈 테니깐.”

남궁미는 시후와 철우의 팔을 잡아끌며 자리를 떠났고, 어정쩡하게 서 있던 남궁천은 쭈뼛거리며 시비에게 다가가 걸레를 받았다.

- 32화에 계속 -

< 개발자의 클리어 공식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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