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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발자의 클리어 공식-9화 (192/201)

< 개발자의 클리어 공식 >

개발자의 클리어 공식

9화 계획 수립 (3)

“이쪽으로 오시지요.”

안내하는 소동의 뒷모습에서 묘한 감정이 전해졌다.

이 느낌은 입구에서 홍설을 찾을 때부터 느껴졌다.

뭔가 불결한 것을 바라보는 듯한 불쾌한 시선.

알 수 없는 반응이었지만, 묵묵히 그 뒤를 따랐다.

소동이 멈춰선 곳은 크지도, 작지도 않은 방이었다.

“대인이 호명하신 기녀는 반 각 내로 주안상과 함께 올 것입니다. 혹여, 필요한 게 있으시다면 여기 종을 울리시면 됩니다.”

간단히 인사를 하고 물러서는 소동의 눈빛은 여전히 꺼림칙했다.

왜 저런 눈빛인지, 잠깐 이유에 관해 고민하자 금방 결론이 나왔다.

“하긴, 해가 지기도 전에 기루를 찾는 호색한이라고 생각하겠지.”

그러한 목적으로 찾은 게 아니지만, 못할 것도 없었다.

다만, 누군가 자신의 게임 로그를 본다면?

그 부끄러움을 감당할 수 있을까?

부서 이동으로도 부족할 것이고, 이직해도 꼬리표처럼 따라붙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어휴, 상상만 해도······.”

시후는 끔찍한 상상에 몸서리치며, 팔뚝에 솟아오른 닭살을 쓱쓱 문질렀다.

그러기를 3분여.

반 각 내로 도착한다는 소동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는지, 곧 방문 너머 사람의 인기척이 느껴졌다.

“대인, 주안상을 가지고 왔습니다. 들어가도 괜찮겠습니까?”

맑은 목소리.

목소리를 따라 이름을 붙인다면 이 목소리의 주인을 ‘청청(淸淸)’이라 부름이 옳을 것이다.

이런 쓸데없는 생각을 할 정도로 목소리가 청아하기 그지없었다.

덕분에 대답이 한 박자 늦어 버렸다.

“흠흠.”

“상을 들이겠습니다.”

멋쩍음에 대답을 하지 못했지만, 헛기침에서 그 감정을 읽었는지 말과 함께 문이 스르륵 열렸다.

영상으로는 몇 번이나 보았지만, 이렇게 눈앞에 두고 보는 건 처음이었다.

확실히 미인이긴 했다.

그녀의 동생인 초설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홍설이 주안상을 들고 방 안으로 들어서자, 뒤편에 대기 중이던 소동이 문을 닫고 물러나는 소리가 들려왔다.

곧 시후의 앞에 상을 내려놓은 홍설은 자신의 앞에서 절을 올리더니, 슬쩍 옆으로 다가와 술병을 집어 들었다.

“소녀, 붉게 노을 지는 겨울날에 태어나 홍설(紅雪)이라고 하옵니다. 특별히 소녀를 지명해 주신 상공께 감사의 의미로 한 잔 올리겠습니다.”

“술은 되었고······ 응?”

술을 물리는 자신의 말에 술병을 집어 든 홍설이 살짝 몸을 떨었다.

왜 그런 반응을 보이는가 싶어 고개를 갸웃거리자, 홍설은 술병을 내려놓곤 슬쩍 상을 뒤로 밀었다.

다소 상기된 얼굴.

혹시나 하는 마음이 들었다.

“아, 그럼 바로 이부자리를 펴겠습니다.”

미친.

아니, 기루 특성상 그런 목적이 있는 곳이지만, 적어도 자신은, 그리고 지금은 아니었다.

“아니, 아냐, 그럴 필요 없어.”

“이, 이대로가 좋다는 말씀이신지······?”

“아냐! 그게 아니라······.”

말을 어떻게 꺼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자, 시후는 홍설이 뒤로 밀었던 주안상을 앞으로 잡아당겼다.

“술은 잘 마셔?”

“보조를 맞춰 드릴 정도는······.”

“아냐. 보조는 내가 맞출 테니, 마시면서 네가 살아온 이야기나 해 봐.”

“예?”

시후의 말에 홍설의 얼굴이 다소 멍청하게 변했다.

마치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강제적으로 권할 수는 없으니, 대화를 나누면서 어떻게든 그쪽으로 갈 수 있도록 이야기를 끌어가야 했으니깐.

빤히 바라보는 자신의 시선에 적잖이 당황한 게 선명하게 보였다.

이어지는 침묵 속에서 먼저 입을 연 건 시후였다.

“태어난 날에 눈이 내렸나 봐?”

“아, 네. 소녀가 태어나던 날은 유달리 눈이 많이 오던 날이었다고 말씀해 주셨죠······. 세상을 온통 눈으로 뒤덮을 것처럼 쏟아붓던 구름이 한순간 갈라지며, 그 사이로 노을이 쏟아졌는데 마치 붉은 눈이 내리는 것 같다고 하여 홍설이라 이름 붙였다고 하셨습니다.”

“좋은 이름이야.”

“그 때문인지 몰라도 어릴 적 아버지께선 눈 오는 날이면, 같이 툇마루에 앉아 눈을 보기도 하면서······.”

이야기하던 홍설의 눈은 향수에 젖어서인지 촉촉함이 맴돌았다.

술을 한 잔씩 먹여 가며 지루한 이야기를 듣다 보니, 슬슬 유년 시절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했다.

“동생이 태어난 것도 그쯤이었지요. 한참 가세가 기울어가는 통에 태어났는데, 그날은 동생이 태어남과 동시에 첫눈이 땅에 닿았고, 아버지께선 초설이라 이름 붙여 주셨답니다.”

“초설······.”

“동생의 이름도 예쁘지요? 일곱 살 때 이후로 본 적은 없지만, 분명 이쁘게 자랐을 거예요.”

지금이다.

술잔을 들어 올려 솟구치는 입꼬리를 가린 시후는 천천히 잔을 내려놓았다.

그와 동시에 홍설이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 이제 자리를 펼까요?”

다만, 홍설이 오해했는지 슬쩍 상을 다시 밀었다.

기겁한 시후는 다시금 술잔을 집어 들었다.

마치 술잔이 자신을 지켜 줄 방패라도 된다는 듯.

“아니, 무슨 눈빛만 보내면 자리를 편다고······. 그게 아니라, 내가 최근에 초설이라는 이름을 들어 본 적이 있거든.”

“예쁜 이름인 만큼 비슷한 이름을 가진 사람이 많은 거 같습니다. 상공, 여기 술을 받으시지요.”

홍설이 술병을 잡아 기울이기 시작했다.

비어 버린 잔에 술이 조금씩 내려앉기 시작하자, 시후는 슬쩍 운을 떼었다.

“악양루에 초설이라는 기녀가 머리를 올릴 거라는 이야기가 떠돌았는데······. 나이가 올해 열여덟이라고 했던가?”

시후의 말에 기울어진 술병의 주둥이는 올라올 줄 몰랐다.

병 안에서는 왈칵왈칵 술이 쏟아져 나왔고, 술잔이 포용할 수 있는 최대치는 진즉에 넘어섰다.

그렇다면 술병에서 계속 쏟아지는 술은 어디로 가겠는가.

잔을 붙잡고 있는 시후의 손을 적시고도 부족한지, 술은 바닥을 향해 후드득 떨어져 내렸다.

“죄, 죄송합니다.”

시후는 주안상 위에 잔을 내려놓았고, 홍설은 다급히 상 옆에 놓인 건포를 집어 들어 시후의 손을 닦아 주었다.

거의 다 넘어왔다.

“뭐, 악양은 호남에 있고 초설이라는 기녀는 원래 안휘성의 태화현 출신이라고 하니, 동생일 가능성은 없겠지?”

시후의 손을 닦아 주던 홍설의 움직임이 그대로 멎었다.

그럴 수밖에.

안휘성 태화현은 홍설의 고향이기도 했으니깐.

같은 고향, 같은 나이, 같은 이름.

자신이 흘린 정보를 종합해 본다면, 합리적인 의심을 뛰어넘어 확신으로 다가올 것이다.

그건 자신의 손을 붙잡은 홍설의 떨림으로 여과 없이 전해졌다.

지금부터 할 행동이 자신의 취향은 아니었지만, 쐐기를 박아야 했으니 어쩔 수 없었다.

내려놓은 술잔을 들어 단박에 비워 냈다.

그리고 떨고 있는 홍설의 손에 다 마신 술잔을 쥐여 주었다.

“이 잔에는 술 대신 그대의 고민을 채워 주시오.”

구운 오징어가 된 기분이 이런 것일까.

정상적으로 임무를 얻기 위함이라고 해도 너무 부끄럽지 않은가.

하지만, 진지한 자신의 말에 홀딱 넘어간 것인지, 홍설의 입술이 조금씩 달싹이기를 반복했다.

그리고 곧 신세 한탄과 같은 말이 홍설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소녀가 여섯 살 무렵이었을 겁니다. 아버지께서 친우의 보증을 섰다가 가세가 크게 기울었고, 논마지기를 비롯해 모든 걸 처분하고 나니 남은 건 집 한 채가 전부였지요. 그래도 그때까지는 괜찮았습니다. 이듬해 초설이 태어났을 때, 아버지께서 관직에 오르겠다고 공부를 하기 전까지는요. 그리고 소녀가 열 살이 되던 해에는 남동생까지 태어났는데······.”

한 번 물꼬를 트기 시작하자, 홍설의 말은 끝없이 이어졌다.

한마디당 술 한 방울이라고 가정한다고 해도, 술잔은 물론이고 술병을 통째로 채울 만큼 그녀의 사연은 길었다.

남동생이 태어나던 해, 아버지가 병을 앓다가 돌아가신 건 사소한 사건에 불과할 정도로.

그 길었던 이야기는 홍설이 열네 살이 되던 해, 이 천화루로 팔려 오게 됨으로써 끝을 맺었다.

말을 끝마친 홍설은 주저하는 기색이 역력했지만, 다시 한번 용기를 내어 입을 열었다.

“죄송스럽지만······ 상공께서 확인해 주실 수 있으실까요?”

[일반 임무 ‘흩어진 자매’가 발동합니다.]

[연계 임무로 이어질 확률이 매우 높습니다.]

연계 임무로 이어질지도 모른다는 문구에 입맛을 다셨지만, 잠시 생각해 보니 이건 오히려 반길 일이었다.

어차피 선행 조건을 충족시켜야 ‘마교’가 등장할 테니까.

물론, 준비가 안 된 상태론 곤란하니 성장이 필요했다.

자신과 더불어 NPC들까지.

원래대로라면 홍설과 초설의 만남은 초설의 사후(死後)에 이뤄져야 했다.

하지만 어차피 자신이 일원신공을 얻은 시점부터 모든 게 뒤틀렸는데, 굳이 초설을 죽일 필요가 있을까 싶었다.

물론, 초설을 살리는 방향으로 간다면 추후 어떤 결과가 찾아올지는 미지수였지만.

“물론.”

시후가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홍설은 곧장 자신의 옷고름을 풀었다.

풀어헤친 상의의 안으로 뽀얀 앙가슴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잠시 넋을 놓고 바라보던 시후가 뒤로 급히 물러났다.

“아냐! 안 해도······ 어?”

홍설이 옷고름을 푼 건 옷을 벗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녀의 목에는 낡은 나무 부적이 걸려 있었다.

머리치장 때문에 벗지 못하는 것인지, 묶어 둔 실을 조심스럽게 풀고 있었다.

시후는 자신의 뺨을 만지자 제법 뜨끈하게 열이 오른 게 느껴졌다.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안 하는데 김칫국을 시원하게 마신 셈이다.

실을 풀어낸 홍설은 애틋한 표정으로 부적을 쓰다듬었다.

부적을 어찌나 만져댔는지, 겉에 유약을 바르기라도 한 것처럼 반들거렸다.

“이 물건을 동생이 알아보면 좋겠지만······ 혹여 모를 수도 있으니, 내일 아침에 천화루를 다시 찾아 주실 수 있을까요? 짧게나마 서신이라도 한 통 전하고 싶은데······.”

“뭐, 상관은 없지. 오늘 밤에 떠날 것도 아니고.”

“아,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홍설이 고개를 깊게 숙이며 인사하자, 시후의 시선은 자연스레 한곳으로 내리꽂혔다.

그런 시후의 시선을 아는지 모르는지, 홍설은 손에 들린 부적을 바라볼 뿐이었다.

“이건, 어머니가 제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주신 물건이에요. 안녕을 기원하는 부적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이 부적을 주시면서 ‘성을 버리고 살아가라’라고 말씀하셨죠. 남동생이 관직에 올라 성공하면 사당을 세워 넋을 기려주겠다고······. 후후.”

자조적인 웃음과 함께 홍설은 유일한 단서를 시후의 손 위에 올려 주었다.

홍설의 체온을 머금어서 그런지, 부적이 매우 따뜻했다.

왠지 모르게 낯이 뜨거워진 시후는 재빨리 품에 집어넣었다.

그와 동시에 홍설은 자신의 허리끈을 잡아당겼다.

“아니라고! 왜 계속 벗어!”

“네? 아! 아직 술을 조금 더······.”

“아냐, 안 해, 안 할 거야. 술도 이 정도면 충분히 먹었고 너랑은 안 해.”

“아, 혹시 소녀가 못나서 거부하시는 거라면······.”

“그게 아니라······ 아, 미치겠네! 이걸 뭐라고 설명해?”

가슴을 퍽퍽 두들기는 시후의 모습을 본 홍설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신을 직접 지명해 놓고 하지 않겠다는 시후의 행동이 이해되지 않는 표정이었다.

잠시 고민하던 그녀는 뭔가 깨달은 듯한 탄성과 함께 시선이 아래쪽을 향했다.

“혹시······.”

게슴츠레한 눈빛.

마음이 통하는 사이는 아니지만, 그 눈빛의 숨은 뜻은 남자라면 모를 수 없었다.

도발이나 다름없는 그 시선에도 시후는 참았다.

아니, 참아야 했다.

누군가 자신의 게임 로그를 확인할 수도 있었으니깐.

부끄러워 죽는다는 게 뭔지 알고 싶지 않다면 말이다.

시후는 굳게 마음을 다잡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홍설은 그런 시후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불능이신가요?”

남자에겐 중요한 게 있다.

누구에게는 명예가 가장 중요할 것이고,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돈이 가장 중요할 것이다.

하지만, 사실 남자에게 가장 중요한 건 단 하나였다.

자존심.

홍설은 시후의 자존심을 후벼팠다.

상처 입은 남자의 자존심은 그 어떤 방향으로도 회복되어야 했다.

“홍콩으로, 아니, 향항(香港)으로 보내 주지.”

- 10화에 계속 -

< 개발자의 클리어 공식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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