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0화 〉 147화
* * *
하아. 마차에 탄 에리엘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기분은 좋지 않았다. 아니, 방금 전까지 좋았지만 마차에 다른 누군가가 타있다는 걸 알아채고 기분이 가라앉았다.
"흑령. 헤이네라스에 남는 게 낫지 않겠나."
"이미 중동부로 전입 신고해달라고 얘기했는데? 돌아갈 생각 없어. 에리엘 너랑 함께 있으려고 미리 준비해뒀지 히히."
팔짱을 끼고 어깨에 머리를 기대는 흑령이 헤실헤실 웃는다.
웃는 얼굴에 침을 어떻게 뱉는단 말인가. 에리엘은 속으로 이 기분을 삭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 원래 이게 맞다.'
일을 하는 시간에는 사적인 감정을 죽이는 게 옳다.
에리엘은 스스로에게 다짐하듯이 말을 되내였지만.
'크윽...'
아쉬운 건 아쉬운 법이다. 강한윤과 보낼 시간이 사라졌다는 생각에 속이 쓰렸다.
에우제니아는 카이보옌과 할 일이 있다며 헤이네라스에 남았다.
그 덕에 뤼네아로 가는 마차엔 강한윤과 키리아, 에리엘 셋만 남게 됐다.
에리엘은 키리아의 눈치를 볼 생각이 아니었다.
어차피 앞으로 계속 신경 쓰는 건 불필요한 정신력 소모니까.
원래대로라면 마차에서 강한윤과 꽁냥꽁냥거리며 기분 좋은 시간이 됐을 텐데.
"히히."
옆에 꼬리를 살랑살랑 흔드는 묘족 한 명 때문에 기분이 착 가라앉는다.
뤼네아로 가는 마차에서 강한윤과 어떻게 보낼까. 하고 상상의 나래를 펼쳤지만 그게 전부 쓸모없어졌다.
흑령을 무시하고 강한윤에게 스킨십을 할까.
그런 생각까지 했지만, 에리엘은 가까스로 참아냈다.
외부인인 흑령이 보고 있는 눈앞에서 한다고 해도 오붓한 분위기나 기분이 되지 않을 것 같았으니까.
이런 자투리 시간에 오붓하게 보내는 게 좋다는 걸 아는 그녀였지만 이번에는 포기하기로 결정했다.
"흑령. 어째서 뤼네아로 올 생각을 한 거지?"
"네가 있으니까!"
애초에 말조차도 통하질 않는다. 막무가내로 행동하는 흑령의 모습에 에리엘은 머리를 매만졌다.
에리엘은 그녀를 보고 있으니 두통이 올 것 같았다.
흑령은 좋은 친구정도지만 이럴 때는 그 정도가 과하다는 느낌이었다.
'설마. 흑령 때문에 밤 시간을 방해받는 건 아니겠지.'
에리엘의 뇌리에 불길한 생각이 스쳤다.
*
뤼네아로 돌아온 강한윤은 집무실로 향했다.
저번까지는 작전장교의 직함이었다면 이제는 중동부의 지휘관이다.
돌아가면 아무한테도 눈치 안보고 쇼파에 누울 수 있겠네.
가장 높은 직급의 사람만 누릴 수 있는 권리지.
.거기에 지휘관이 됐다는 사실을 안다면 다른 이들도 기뻐하지 않을까.
그녀들의 표정을 보고 싶은 강한윤은 문을 거칠게 열었다.
그때 누군가가 강한윤을 덮쳤다.
"하아...."
그레모리가 가슴팍에 얼굴을 박고서 숨을 크게 들이켰다.
가슴에 무슨 마약이라도 있는 걸까. 풀린 얼굴로 기분 좋은 미소를 짓는 게 딱 그런 모습이다.
"그레모리 오랜만이야."
"진짜로 오랜만이에요! 왜 이제야 온 거에요."
"어쩌다보니까 길어졌네."
그냥 투표만 하고 돌아오는 건 줄 알았는데. 일이 그렇게 풀리지 않았다.
생각보다 길어진 일정이라 다른 여자들도 그레모리와 마찬가지로 실망하지 않았을까.
품에 안긴 그레모리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강한윤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인원들이 생각보다 적다. 다들 바깥에서 훈련이라도 하고 있는 건가.
"오랜만이에요."
"그러게. 이렇게 오래 걸릴 줄 몰랐어."
가볍게 눈웃음을 짓는 세리스에게 인사하고, 올 줄 알고 있었다는 듯이 차를 내리고 있는 라이라와 눈이 마주쳤다.
"당신. 마실 건가요?"
"응. 당연히 마셔야지."
라이라가 끓여주는 차는 맛있을 것 같다.
담배를 피울 때 달달한 향이 나듯이 차에서도 달달함이 풍겨져 나온다.
"계급이 바뀌었네요. 그것도 꽤나 높은 계급으로."
"이번에 다녀온 이유가 그거니까."
"흐응.. 그렇죠. 당신이 없는 동안 일어난 일과 모은 정보들이에요."
그녀는 테이블에 서류뭉치를 툭 던졌다.
중동부보다는 동부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 많이 적혀있다.
동부에서 병사들을 징집 중.
동부의 광석 시세 상승
병사들의 외출 및 휴가 금지
수색, 정찰의 빈도 증가 및 경계 강화
첫 페이지부터 전쟁을 예고하는 징후들이 적혀있다. 이를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던 강한윤은 페이지를 차분하게 넘겼다.
'길어도 한 달 정도겠지.'
짧으면 일주일 안에 전쟁이 발발한다. 계속해서 저런 증거들이 드러나고 있는 도중이니 예측하는 건 강한윤에겐 쉬웠다.
'하지만 이래선 안 돼.'
전투가 벌어진다면 좋은 건 제물이 늘어나는 마족들뿐이다.
어떻게든 전투를 막아야한다. 그러기 위해선 시간이 많이 필요했다.
'무조건 암살과 게릴라전으로 가야해.'
몰래 동부에 잠입해서 마족들을 죽여 나간다.
그게 아니라면 마족들만 쏙쏙 골라잡고 움직여야하지만 그것도 어려운 상황이다.
동부의 군대가 전면전을 시작한다면 어느 한쪽이 부서질 때까지 싸우는 건 당연한 일.
하지만 몰래 움직이기엔 암살과 은신에 특화된 영웅이 너무 적었다.
'중동부는 여기에 있는 영웅이 전부지.'
동부에 몰래 침입할 정도의 스펙을 가진 영웅은 단 둘. 라이라와 흑령 뿐.
둘이 동시에 움직인다고 해도 동부의 군대를 막는 건 불가능하다.
'동부의 남은 대도시는 넷.'
그 중에서 두 곳을 소탕한다고 한들, 나머지는 전면전을 치러야 한다.
'의외로 다행인 건 마족에 합류하지 않은 도시가 있다는 거지.'
그 중에서 한 곳은 마족에게 합류하지 않았다는 게 그나마 희망적인 상황일까.
그렇게 마지막 페이지까지 읽은 강한윤은 종이를 흔들었다.
"마족에 대한 정보는 없나?"
"없어요. 마족 녀석들이 얼마나 잘 숨어있는지 알잖아요."
세리스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마족에 대한 흔적을 잡으려고 노력했지만 역부족이었다.
마족이 토벌당하고 있다는 소문을 들은 걸까. 자그마한 단서 하나 조차도 흘리지 않았다.
"직접 움직이는 게 아니면 정보를 얻을 수가 없어요."
직접이라. 세리스의 말에 강한윤의 시선이 라이라와 흑령에게 향했다.
"동부로 보낼 생각인가요?"
"그래야할 것 같은데."
어떤 녀석이 숨어있는 지 알아야 전력 분배를 확실하게 할 수 있으니까.
라이라가 알았다는 듯이 작게 끄덕였지만, 흑령은 무시하는 것처럼 눈도 마주치지 않았다.
"됐어. 귀찮게 직접 갈 필요 없어. 정보를 얻는 거라면 나 하나로 충분하거든."
흑령의 그림자에서 사람의 형체가 튀어나온다.
인원은 총 넷. 그들은 둘로 짝 지어서 한쪽 무릎을 굽힌 채 명령을 기다렸다.
"동부로 가서 정보를 얻어와. 인원이 더 필요하다면 같이 움직이고."
흑령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그들은 다시 그림자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이것도 라이라의 능력과 비슷해 보이는데 뭔가 다르네.
능력으로 개인 암살단을 운영하고 있다는 점에서 특이하긴 하다.
"이제 충분하지? 기다리기만 하면 되니까."
흑령의 능력에 감탄하는 한편, 강한윤은 속으로 무언가 찝찝했다.
흑령이 이런 영웅이 아닌데. 에리엘이 아니라면 호감도가 전부 최하에 박혀있다.
명령을 따른다고 해서 잘 듣는 것도 아닌 그녀가 순순히 움직인다니.
'에리엘이 옆에 있어서 그런 건가.'
혹시나 확인해본 흑령의 호감도는 10. 아군이라서 공격을 안 하는 수준이다.
애초에 호감도를 올리기도 어려운 영웅이니까 예외로 쳐야 하려나. 굳이 깊게 생각하지 말자. 괜히 머리만 아프니까.
자기 자리에 털썩 앉은 강한윤은 책상위에 올려져있는 서류들을 확인했다.
뤼네아의 내정에 관한 건 사인만 하면 되는 수준으로 처리가 되어있다.
이 중에서 가장 눈에 튀는 건 흑령의 전입에 관련된 서류다.
근데 얘는 이미 뤼네아에 와있는데? 이게 의미가 있나. 일단 확인하고 사인한다.
고양이에 가까운 묘족이라 그런 걸까. 진짜 제멋대로 행동하네.
서류더미들을 확인하던 강한윤은 그 사이에 놓인 자그마한 상자를 하나 발견했다.
"이건 뭐야?"
"그건 하이벤 산맥에서 보내온 선물이었어요."
"무슨 선물을 보내?"
상자를 열어보니 금색으로 빛나는 잎이 들어있다.
[묘족 전용 캣닢]
강한윤은 아이템 정보가 떠오르기도 전에 어떤 건지 알 수 있었다.
특이함으로는 손에 꼽을만한 아이템이니까.
좋은 정보를 알려줘서 고맙다. 라고 작게 적힌 종이도 들어있다.
이걸 어디에 쓰라는 거야. 흑령한테 줘야하나. 고민하던 강한윤은 캣닢이 든 상자를 흑령에게 건넸다.
"이게 뭐지?"
"캣닢이야. 묘족들이 좋아하잖아. 어차피 내가 가져봤자 쓸모도 없으니까."
아무래도 주는 게 훨씬 나을 것 같다. 이렇게라도 호감도를 올리는 건 좋지 않을까.
강한윤이 건넨 상자를 흑령은 의심쩍은 눈을 한 채로 받아들었다.
"흐응.."
캣닢이라고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안에 든 내용물을 확인하려는 듯 상자의 냄새를 킁킁 맡는다.
상자를 조심스럽게 여는 듯하더니, 곧바로 상자를 닫아버렸다.
"...아무튼 고마워"
퉁명스러운 대답을 내뱉은 흑령의 호감도는 약간이지만 상승했다.
호감도 12. 이런 선물로는 딱 2 정도 오르는 건가.
큰 기대를 하지 않았던 강한윤은 동부의 상황에 대한 서류를 다시 읽기 시작했고.
에리엘에게 달라붙어있던 흑령의 시선은 묘하게 강한윤에게 향했다.
*
"흐응... 하아..."
세리스는 침대에 누운 채로 숨을 몰아쉬었다.
오랜만에 하는 섹스라 그런지 잠깐 정신이 나갈 정도로 가버린 상태였다.
"오늘은 바쁘겠네요?"
물을 마시고 있는 강한윤을 보며 세리스가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아마 바쁘겠지?"
물론 바쁘다는 건 섹스를 말하는 거다.
다른 여인들도 세리스와 마찬가지로 굶주린 상태일 테니까.
그레모리 다음으로 섹스한 여자는 세리스. 다음은 라이라다.
정해둔 순번은 없지만, 며칠간 못본 여자와 전부 섹스를 해야 하지 않을까.
강한윤은 여전히 꼿꼿하게 발기한 물건을 세리스에게 들이댔다.
"깨끗하게 해줄 수 있어?"
"흐응."
눈을 흘긴 세리스는 마지못해서 해주는 척. 침으로 번들번들 해질 때까지 자지를 빨았다.
"고마워. 오늘 저녁 식사 전엔 돌아올 게."
"하아. 여자나 그만 만들어요."
이런 남자를 왜 좋아하게 됐을까. 능력은 좋지만 너무 밝히는 거 아닌가.
세리스가 작게 푸념하자, 강한윤은 짧게 키스했다.
그 키스 한 번으로 세리스의 응어리진 마음이 다시 풀려버렸다.
끼익
문을 열고 나온 강한윤은 지금쯤 방에서 기다리고 있을 라이라의 방으로 향했다.
오늘은 어떤 플레이를 하지. 약하게 목을 조르며 키스하는 것 정도로 할까.
상상만 해도 즐겁다. 라이라를 괴롭힌다고 생각하니 자연스럽게 흥분이 찾아왔다.
라이라와의 섹스를 기대하며 발걸음을 옮기던 그때. 강한윤의 발밑이 꿈틀거렸다.
"어."
이상함을 눈치 챈 강한윤은 발걸음을 멈췄다. 한순간이지만 바닥이 물컹거렸으니까,
딱딱한 바닥에서 마치 슬라임을 밟은 것처럼 부드럽다니?
그런 생각도 잠시. 강한윤은 바닥으로 순식간에 끌려들어갔다.
놀라서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강한윤의 눈앞에는 익숙한 장소가 보였다.
평상시에 잠을 자는 침실. 그곳이었으니까.
라이라가 이런 장치를 해놓은 걸까. 침대에 앉아서 기대했지만 강한윤의 생각은 틀렸다.
세상이 점점 어두컴컴해지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어두워졌으니까.
"..."
이건 좀 무서운데?
톡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 강한윤의 몸에 뭔가가 닿았다.
"어우. 뭐야!"
소스라치게 놀란 강한윤은 뒤로 물러섰다. 모든 공간이 구별되지 않아서 어딘진 모르겠지만, 여전히 침대 위라는 건 확실하다.
엉덩이 아래가 푹신푹신한 상태였으니까.
"후우."
가슴을 부여잡으며 진정하고 있는 강한윤은 뭔가가 계속 닿고 있다는 걸 알아챘다.
묘하게 부드럽고 따뜻하다.
형체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어두운 곳이지만, 뭔가 닿고 있는 쪽을 향해 손을 뻗었다.
물컹
부드러운 것이 강한윤에게 닿았다.
이 촉감으로 보아하니.. 사람? 그것도 여자의 가슴이지만, 한 번도 만져본 적 없는 느낌의 가슴이다.
'...'
강한윤이 어둠속을 지그시 바라보자 상태창 하나가 떠올랐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