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7화 〉 144화
* * *
이 중에 거래를 한 이가 있다고? 강한윤은 슥 훑어보았다.
헤이네라스 소속의 기사들의 숫자는 몇 되지 않는다.
호위하고 있는 기사는 총 다섯 명. 이 중에서 누구 하나는 칼레보른 그 녀석과 관련이 있다는 거였다.
'그건 천천히 알아 가면 되지.'
키리아가 알려주는 대상부터 파헤쳐서 어디까지 칼레보른과 연관이 있는 지 알아내면 되는 법.
섣불리 움직일 필요는 없지. 강한윤은 일단 지휘관의 자리부터 얻어낼 생각이었다.
"자격을 증명했으니 충분하지 않습니까?"
강한윤의 말은 헤이네라스의 영주에게 향한 게 아니다.
연합군 소속의 지휘관들을 향해서 내뱉은 말이었다.
에키르가 기다렸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확실히 그렇지. 사실 그럴 필요도 없었다. 투표 결과는 명백했고, 이의를 제기한 중부와 중동부의 대표를 존중해서 받아들였을 뿐 아닌가. 혹시 또 다른 이의를 제기할 생각이 있는 건가?"
에키르가 둘을 쏘아보았다.
너희들이 원하는 대로 해줬는데. 아직도 모자란 건가? 그렇게 말하듯이 말이다.
"크흠.. 그게.. 음.. 아니네."
주변의 시선이 곱지 않다. 투표 결과를 엎는 것도 잡음이 많이 나왔던 내용이다.
여기에서 또 뭐라 한다면 자신의 입지마저 위험하지 않을까.
그 사실을 직감한 중부의 지휘관. 카이보옌은 눈치를 보고선 입을 다물었다.
"다른 의견이 있나?"
에키르의 시선이 영주에게로 향했다.
영주도 당연히 눈치가 있다. 영주로. 귀족으로 오랫동안 군림하기 위해선 눈치가 필수다.
주변의 냉랭한 분위기를 느낀 그는 지금이 물러서야할 때임을 직감했다.
하지만 억지를 받아준 연합군이다. 또 억지를 부려도 되지 않을까.
한 번이 어렵지 두 번은 쉬운 법.
중동부의 지휘관이라는 자리를 탐낸 그는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저기 있는 강한윤이라는 자가 정말로 안개를 없앴는지 확신할 수 없지 않습니까.
그가 한 게 아니라 만약 천재지변이나 우연으로 없어진 거라면? 그게 아니라는 걸 증명할 수 있습니까?"
명분만 생긴다면 기회를 얻을 수 있는 법.
궤변에 가까운 말이지만, 그는 말하면서 점점 자신감을 되찾았다.
"그래. 인정하지 않는다라.. 그렇다면 카이보옌. 자네도 그렇게 생각하나?"
"뭣..."
에키르의 화살이 왜 갑자기 이쪽으로 향한단 말인가. 당황한 카이보옌은 혀를 깨물었다.
"강한윤 소령이 중동부의 지휘관이 된다는 게 싫은 건가?"
"당연히..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네."
자신의 계획은 이미 실패했다. 그렇다면 기회가 올 때까지 몸을 사리는 게 옳다.
저 능구렁이 에키르가 괜히 물어본 게 아니다. 이제 적당히 하라는 의미가 담겨있는 한마디였다.
카이보옌은 슬그머니 발을 뺐고.
"그렇다면 한 사람만 반대하는 군."
자연스럽게 한 사람만 고립되는 상황이 되었다.
"모두가 동의하는 데 혼자만 반대를 한다라... 아직도 똑같은 생각인가?"
'망할 녀석.'
영주는 호족 카이보옌을 쳐다보았다.
먼저 일을 제안했으면서 혼자 슬그머니 빠져나가는 꼬락서니라니.
이대로 간다면 혼자만 피해를 볼 가능성이 다분했다.
"일부러 시간을 질질 끄는 걸 보아하니 마족의 끄나풀이 아닐까 의심이 되는 군. 마족과 거래라도 했나?"
"그건 당연히 아닙니다! 마족의 끄나풀이라니!"
당황하며 소리쳤다. 마족이라니! 마족과 거래는 당연히 한 적도 없다.
"그렇다면 왜 막아서는 거지?"
"지금 대륙에서 마족들이 날뛰고 있긴 합니다. 의심이 가는 군요."
건수를 잡은 강한윤이 신성력을 밖으로 내보였다.
"마족과 관련이 있다면 신성교단에 연락을 취할 필요가 있겠군요."
동부와 북부 조금을 제외하고는 모두 연합군의 소속이 된 상황이다.
마족을 찾기 위해 신성교단이 활동하고 있는 가운데, 여기에서 일부러 시간을 끄는 건 아무래도 이상하다.
개인의 욕심을 위해 행동하다가 마족의 끄나풀로 몰리게 된 영주는 손을 내저었다.
"...아닙니다! 제가 잘못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될 거였으면서 시간을 끌다니. 결국에 꼬리를 내린 영주를 보고서 에키르는 코웃음을 쳤다.
"드디어 결정이 난 것 같군. 강한윤 소령. 아니 이제 대장이라 불러야 하는 건가."
"예. 뭐든 좋습니다."
강한윤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높은 자리에 올라간다는 건 나쁘지 않은 기분이었다.
"오늘의 회의는 이렇게 마치지는 게 좋지 않겠나. 볼 일은 다 끝난 것 같다만."
중동부의 지휘관은 결정 났고 바뀌지 않는 사실이다.
'그렇게 째려보면 어쩔 건데.'
패배한 개의 신세가 된 영주가 스쳐지나가며 쳐다본다.
그런다고 한들 강한윤에게는 우습기만 할 뿐이었다. 승리한 건 강한윤이니까.
"기대해. 너는 가만히 안 놔둘 테니까."
방을 나가는 영주에게 조용히 속삭였다.
게리스가 아무런 뒷배도 없이 공격을 했을까.
당연히 저 녀석의 입김이 없었다면 그런 무모한 짓거리를 할 리가 없다.
기사가 멋대로 행동한다면 영주에게 책임을 물게 되니까.
적당히 내가 당한 정도로만 복수할게. 기대해. 강한윤은 게리스에게 찔렸던 상처와 고통을 떠올렸다.
회의실에서 한 사람씩 나가는 도중, 따로 할 이야기가 있다는 듯이 에키르가 강한윤을 붙잡았다.
"왜 그러십니까."
"이번에 헤이네라스에서 신원미상의 인물들에게 엘프 병사 하나가 납치당할 뻔 했지. 영주에게 부탁했지만 증거를 발견하지 못했고."
아하. 그런 거였구나. 강한윤은 그의 말을 단번에 이해했다.
엘프는 미모가 출중하니 귀족들이 좋아한다.
신원미상의 인물들에게 납치당할 뻔했다고 하면 이유는 대부분 잠자리가 목적인 법.
그런데 영주가 증거 하나 발견하지 못했다?
'그렇다면 뻔하지.'
영주가 한통속이라는 것. 그 결론밖에 나오지 않는다. 강한윤은 자신만만한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알아서 처리하겠습니다."
"역시. 믿을만한 건 사위밖에 없군."
이제는 인정하겠다는 듯이 에키르가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드디어 인정을 받는 건가. 강한윤의 입고리가 자연스럽게 올라가는 것도 당연했다.
처음부터 영주를 가만히 놔둘 생각이 없었던 강한윤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어디 한 번 털어볼까.'
*
중동부의 지휘관이 되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그냥 하자고 바로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저 계급장만 바꿔달면 되는 일이긴 한데 소령에서 갑자기 대장까지 진급한다고 생각하니 왠지 가슴이 무거우면서도 좋다.
실없는 웃음을 짓고서 강한윤은 기사 메피스에 대해 적힌 보고서를 확인했다.
에키르에게 부탁을 받은 김에 얻어온 정보였다.
키리아가 지목한 기사의 정보를 달라고 했을 땐, 이해를 못하겠다는 표정을 지은 에키르였지만 결국에는 정보를 얻어주었다.
"기사 메피스."
왠지 흐리멍덩한 눈빛을 하고 있던 그의 모습이 떠올랐다. 망각의 숲에서 받은 영향 때문일까.
강한윤은 그런 생각을 하며 정보를 쭉 읽어 내려갔다.
그 이외로 특별한 점은 없다. 영주와 특별한 커넥션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도 않고 말이다.
'하지만 명분이 중요한 법이거든.'
커넥션이 없다면 얼마든지 만들어주면 되는 법. 트집을 잡는다면 뭐든지 가능한 게 세상의 일이었다.
'중동부의 지휘관이 되기 전에 거슬리는 녀석은 처리해야지.'
특히 에키르가 따로 부탁할 정도라면 영주는 필요 없는 놈이다.
도움이 안 되는 녀석을 굳이 살려줄 필요는 없다. 연합군의 고혈을 빨아먹는 거머리는 빨리 죽여야겠지.
기사 메피스의 정보를 쭉 읽으며 생각을 정리하고 있던 강한윤의 옆에 여인 두 명이 나란히 섰다.
"강한윤. 오늘 일이 끝난다면 저 여성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도 되겠나?"
"그래. 후우... 또 여자를 만들어왔네? 우리가 어떻게 반응할지 알잖아?"
"아하하... 그렇긴 하지...?"
에리엘은 강한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고.
에우제니아는 어깨를 주물러주는 것 같지만 은은하게 살기가 담겨있었다.
이렇게 될 거라고는 이미 예상한 일이다. 눈치를 살살 보던 강한윤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일단 갈까? 늦게라도 저녁을 먹으려면 빨리 끝내는 게 좋잖아."
"에휴. 말이라도 못하면."
이런 걸로 화가 나진 않지만, 독점욕이나 질투심까지 없는 건 아닌데.
더 좋아하는 사람이 참고 살아야지. 에우제니와 에리엘은 참기로 결정했고.
"읏.."
눈치를 보고 있던 키리아는 가만히 있다가 조용히 뒤따라갔다.
"평범하네."
벌이가 꽤 괜찮기도 하고 준 귀족의 신분을 받는 게 기사다.
하지만 기사가 사는 집이라고 하기엔 너무 단출했다.
주택가에서 일부러 조금 떨어진 곳에 지어져있기도 하고 뭔가 휑하다는 느낌이 강하다.
이제야 막 어둑해진 시간이라 안에는 불이 켜져 있었다. 사람이 있는 지만 확인하면 된다.
"안에 사람이 있나?"
"있다. 기척이 느껴지는 군."
고개를 끄덕인 에리엘은 칼을 슬며시 뽑았다.
저녁 먹을 시간이라면 다들 집에 있는 게 맞지.
안에 사람이 있는 것도 확인했고 이제는 정보를 얻기만 하면 된다.
"일단 들어가서 얘기를 해보자고."
그렇게 말하지만 에우제니아는 몸의 대화를 할 생각이 넘치는 건지 근육을 풀고 있다.
콰앙!
그녀의 발차기 한 번에 문이 조각나며 부서졌다.
"뭐.. 뭐냐...!"
급하게 일어나서 자세를 잡는 메피스의 앞으로 강한윤이 다가갔다.
"별 건 아니고... 얘기할 게 있어서 왔는데."
최대한 친근하게 말해보려 했는데. 잘 통하려나. 강한윤의 그런 노력이 헛된 건지, 메피스가 칼을 뽑고 달려들었다.
강한윤의 눈에는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른 속도. 그러나 순식간에 에우제니아에게 진압당한 메피스는 바닥에 내리꽂혔다.
콰직 어딘가 부서진 소리가 나며 메피스가 신음을 흘렸다.
"크윽..."
"말로 하려고 했는데. 안되겠네. 너 이 사람 알지?"
메피스는 자신의 시야 앞에 등장한 여인에 동공이 살짝 흔들렸다.
옛날에 만난 적이 있었던 여인. 망각의 숲에 살고 있던 마녀였으니까.
"알고 있는 반응이네."
"하지만 쉽게 말하진 않을 걸? 이런 녀석들은 고도의 훈련을 받으니까."
"간단하게 손가락을 자르면서 시작할까?"
메피스에게서 어떻게 정보를 얻어낼까 고민하고 있으니 키리아가 손을 들었다.
"그렇다면 제가 건드려도 될까요?"
"키리아 네가?"
"네."
메피스는 다가오는 여인의 손에 두려움을 느꼈다.
저 손에 닿으면 안 된다. 본능적으로 알고 있지만 붙잡힌 상태라 저항할 수 없었다.
"크흐윽...! 크하아아악...!"
키리아에게 붙잡힌 메피스가 소리를 내질렀다.
"..저게 제일 아파 보이는데."
차라리 고문을 당하는 편이 낫지 않을까. 강한윤의 감상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
"크흐흐.."
반쯤 벌거벗은 여성을 보며 영주는 침을 흘리며 웃었다.
여성은 이제야 막 성인이 된 듯 풋풋함을 가졌다. 남성의 손이 닿지 않는 여성. 그렇기 때문에 영주에게 불려왔다.
힘이 없고 뛰어난 미색을 가졌다는 이유로 불려온 그녀는 천천히 영주에게 다가갔다.
"그래. 이리 오거라."
떨리는 발걸음을 옮기며 그가 있는 침대로 다가갔다.
침대에 걸터앉자 그녀의 얼굴을 가리고 있는 앞머리를 옆으로 넘긴다.
역시 낮에 봤던 대로 미색이 곱다. 영주는 웃으며 맛볼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낮에 여자를 상상하며 맛볼 생각을 한다. 고르고 나서는 밤에 어떻게 뭘 할지 상상하며 그날 하루를 보낸다.
하루를 기다리고 뜸들인 결과로 여자를 먹어치울 수 있다는 것.
자연스럽게 흥분되는 일이라 몸이 먼저 반응하는 것도 당연했다.
"크흐흐.. 오늘 밤은 즐겁게 보낼 수 있도록 노력하마."
여성의 허벅지를 만지며 그는 앞으로 있을 일을 상상했다.
대부분은 이렇게 도도하지만 결국에는 밑에 깔려서 앙앙 거린다.
이 여자도 마찬가지다. 결국에는 여자란 그런 법.
그의 손이 슬그머니 허벅지 사이로 향했다.
그때, 바깥에서 소란스러운 소리에 손이 멈췄다.
"어딜 들어가려 하느냐! 크흐윽..! 영주님...!"
문이 벌컥 열리며 기사가 바닥에 쓰러졌다.
"아니 그러니까 곱게 비켰으면 다칠 일도 없잖아. 오...우.. 즐거운 시간을 방해한 것 같네?"
"무슨 짓이지? 중동부의 지휘관이 됐다고 마음대로 해도 될 줄 아는 건가!"
지는 영지에서 마음대로 하고 있으면서 뻔뻔하긴. 코웃음을 친 강한윤은 가까운 의자에 앉아서 다리를 꼬았다.
"당연히 제 멋대로 할 순 없죠. 하지만 어디서 누군가 마족과 붙어먹었다는 소문을 들었거든요."
"그게.. 무슨.."
"굳이 누구인지 말해야 알겠습니까?"
강한윤은 인벤토리에서 수정구를 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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