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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물이 전부 따먹음-140화 (140/163)

〈 140화 〉 137화

* * *

"다녀올게."

인사는 간단했다. 하지만 강한윤의 발걸음은 무거웠다.

저기를 혼자 들어가라고? 증명하라고? 뭐를?

여차하면 죽을 가능성도 있는데. 이런 도박을 해야 한다니.

그런 생각은 물론 속으로만 하고 내뱉지는 않았다.

"그래 빨리 다녀와."

"강한윤. 믿고 있겠다."

에우제니아와 에리엘의 믿음 가득한 눈빛이 있었으니까.

자신만만한 모습만 보여주고 싶은 게 남자의 본능이다.

괜히 폼을 구길 생각은 전혀 없었다.

이후에 짧은 키스를 하고서 무덤덤하게 안개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하. 아무리 그래도 긴장되네.'

게임에서도 여기에서도 제일 주의해야 하는 곳이 이 장소였으니까.

한 번도 발 들여 본 적 없는 곳이 망각의 숲이다.

어떤 일이 발생하는 지 자세히는 모른다는 미지에서 약간의 공포가 생겨났다.

'어떤 일이 일어날까.'

정말로 기억이 삭제되는 건가? 아니면 그저 잠깐의 망각이 일어나는 걸까.

망각이 일어난다면 회복할 수 있는 건가. 이런 저런 생각에 머리가 아프다.

일단은 들어가서 망각의 숲이 어떤 매커니즘을 가지고 있는 지 확인해보자.

안개가 닿지 않는 곳에 멈춰서서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가장 먼저 보이는 건 에키르였다.

걱정하는 눈빛과 표정을 짓고 있다. 어디 죽으러가는 사람을 배웅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게 안 봤으면 좋겠는데.

시선을 더 옆으로 옮기자 음흉하게 웃고 있는 녀석이 있다.

게리스는 진짜로 죽는 게 확정이라는 것처럼 웃고 있었다.

'내가 죽어버리면 투표 결과 같은 건 의미 없다고 생각하고 있겠지.'

망할 새끼. 느끼한 얼굴로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 지 뻔하다.

하지만 망각의 숲에 들어간다고 죽는 건 아니다.

그저 기억만 잃을 뿐이다.

심하면 죽음에 가까운 자아의 소멸이 있지만, 그만큼 위험하다면 다시 빠져나오면 그만이다.

'죽는다고? 절대 그럴 일 없지.'

망각의 숲이 어떤 모양인지 어디에 지름길이 있는 지 전부 외우고 있을 정도로 빠삭하니까.

머릿속의 데이터를 가진 채, 망각의 숲에서 길을 잃을 가능성은 0%에 가깝다고 자신했다.

마녀의 집의 위치가 어디인지 기억해내며 강한윤은 안개의 안으로 성큼성큼 한 걸음씩 옮겼다.

'남쪽으로 한 시간 쯤 직진하고 남서쪽으로 향하면 된다.'

머릿속에 정보가 완벽하게 들어있다.

빨리 마녀의 집에 가서 일처리를 해버리자. 별거 없는 일이다.

마녀와 만나서 일처리를 하고 돌아온다. 그게 전부다.

고인물인 자신에게는 이런 일은 식은 죽 먹기나 다름없으니까.

'설마 내가 망각의 숲에서 무슨 일이 생기겠냐고.'

강한윤은 그런 생각을 하며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안개를 향해 걸어 들어갔다.

*

"하 씨발."

길을 잃어버렸다. 좆됐네. 소리가 절로 나오는 상황이다.

여기가 어디지. 앞으로 한 30분 즘 걸은 것 같은데.

아니 길을 잃어버렸다기보다는 망각해버렸다.

여기가 어디인지. 어디에 서있는지.

그 모든 것을 잊어버릴 정도로 안개의 효과가 굉장했다.

나는 30분 걸었다. 30분 걸었다. 30분 째 걷고 있다.

이렇게 속으로 외치며 걷는 것까지는 좋았다.

하지만 안개가 짙어지면서 효과가 더 늘어난 걸까.

30분 째 걷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되새기기만 할 뿐.

계속해서 시간을 세어나가야 한다는 사실 자체를 망각했다.

걸은 시간이 30분을 넘긴지 한참 됐다고 직감이 말해주고 있었다.

'근데 얼마만큼이나 더 걸었는지 모르겠네.'

느낌상으로는 한 40분 정도인 것 같은데.

이것조차도 확실하지 않다. 모든 게 확실하지 않다는 사실만 확신할 수 있었다.

'생각보다 망각의 숲이 무서운 곳이네.'

게임에서 볼 때 망각의 숲이 어떤 곳인지 이해하지 못했다만 이제 완벽히 이해했다.

그냥 기억을 망각하는 것만 아니라, 망각했다는 사실 조차도 망각해버리는 숲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알 수 있다.'

의식에 가장 가까운 기억을 망각한다.

계속 위치와 시간을 신경 썼기 때문에 위치와 시간에 대해 망각하기 시작했다.

망각을 피하기 위해서 기억과 정보를 떠올리면 안 된다.

'내가 어디쯤에 있고 얼마나 더 걸어야 하는 지. 그걸 떠올리는 건 최대한 피해야 돼.'

강한윤은 보고서에 적혀있던 수색대의 일지를 떠올렸다.

기억을 저장하고 꺼내고 잊어먹기 위해서는 훌륭한 매개체가 필요하다는 것.

지워도 괜찮고 언제든지 복구할 수 있는 강렬한 기억과 그와 관련된 매개체가 이곳에 있었다.

'팬티가 제일 도움이 되는 상황이네.'

아공간에서 팬티를 꺼냈다. 넣을 당시의 상황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따스한 온기가 약간 남아있고 여전히 축축하며 애액으로 젖은 상태다.

강한윤은 망설이지 않고 팬티에 코를 박았다.

스읍 하

냄새를 맡으니 콧속으로 달달한 향이 퍼져들어 온다.

은은하면서도 달달한 냄새. 이 냄새의 주인은 에리엘인가.

팬티의 냄새를 맡으며 어젯밤에 보았던 에리엘의 모습을 그렸다.

흐트러진 금발과 땀에 젖은 육감적인 몸매가 어떠했는지 땀방울 하나까지 세세하게 기억해냈다.

에리엘이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 어디가 가장 기분 좋았는지. 어디가 제일 자극적이었는지.

그녀의 모습을 생생하게 떠올렸다.

'근데 이렇게 있으니 무슨 미인을 스토킹 하는 변태 같네.'

안개 속에서 팬티 냄새를 맡고 있는 남성.

수상한 사람 랭킹이 있다면 아마 상위 5% 안에는 가볍게 들어가지 않을까.

강한윤은 자조적인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안개가 왠지 짙어진 것 같다.

방금 전까지는 10m 앞의 나무는 보일 정도의 안개였는데.

이제는 5m 앞의 나무도 흐릿하게 보일 정도로 시야가 흐릿해졌다.

안개가 짙어지는 게 맞아. 중심부로 향하는 게 확실하다.

'일단 마녀의 집이 있을 법한 곳을 돌아다녀보자.'

얼마나 걸었는지 확실하진 않지만 찾다보면 마녀의 집을 찾을 수 있을 거다.

미니맵 시스템도 있으니까 어느 방향으로 움직이는지는 알 수 있다.

맵을 밝히다보면 마녀의 집이 있을 법한 위치를 추론할 수도 있고 말이다.

강한윤은 더욱 짙은 안개를 향해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

마녀의 집을 찾기 위해 1시간 반 정도 지난 것 같다.

아니 2시간 정도? 아니면 그것보다 짧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대충 이쪽 주변을 둘러보면서 미니맵을 밝힐 생각이었다.

마녀의 집이 있을 확률이 높은 곳은 여기니까.

그때 상황을 점검하던 강한윤의 귀에 작은 소리가 들렸다.

바스락

나뭇가지와 나뭇잎이 바스러지는 소리다.

잘못 들은 걸까. 아니면 바람에 흔들린 소리인가.

긴가민가하던 그때, 또 다시 소리가 들려왔다.

바스락

잘못 들은 게 아니다. 이제는 확신할 수 있었다.

이 소리는 다른 무언가가 있는 소리다.

무언가가 움직이는 기척이라는 알아차린 강한윤은 재빨리 단검을 뽑았다.

'이럴 땐 절망적인 스탯이 조금 억울하네.'

싸운다고 해서 이길 수 있는 사람이 많은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무기를 사용하지 않는다면 그냥 죽여 달라는 거나 다름없다.

싸워도 지고 안 싸워도 지는 확정적인 상황.

그 상황에서 강한윤이 할 수 있는 건 단검을 손으로 굳게 쥐는 것 이었다.

바스락

무언가가 가까워져온다. 확실하게 강한윤을 향해서 다가오고 있었다.

이런 안개 속에서 싸울 수 있을까.

강한윤은 짧게 고민을 내린 뒤에 달려들 자세를 취했다.

이런 시야라면 상대도 마찬가지로 시야가 좋지 않을 테니까.

그 이점을 살려서 기습한다면 충분하다.

바스락

이제는 바로 앞에 무언가가 다가왔다.

나무에 몸을 숨기고 있던 강한윤이 땅을 박찼다.

단숨에 찌르기 위해 몸을 날린 그때.

"와아아아아아아아욱!!!!!!!!!!"

화들짝 놀란 고라니가 반대쪽으로 도망쳤다.

시발 뭔 고라니야. 유해 조수는 망각의 숲에도 사는 건가.

유해 조수라서 안개의 영향도 받지 않는 건가?

아니면 기억을 망각해도 괜찮은 거야 뭐야.

"어후.. 놀래라..."

갑자기 고라니를 마주치니까. 군대에서 봤던 고라니 녀석의 기억이 떠올랐다.

진지를 구축한다고 작업을 하다가 지금처럼 눈을 마주쳤었다.

그래서 고라니를... 고라니를... 어떻게 했더라.

수통을 던졌던가 삽을 날렸던가. 기억이 애매하다.

기억이 희미해지는 것 같아서 강한윤은 빠르게 아공간에서 팬티를 꺼냈다.

"스읍... 하아..."

진한 향수처럼 달달한 냄새가 강한 게 에우제니아의 팬티다.

똑같은 디자인의 팬티지만 향기가 이렇게 완벽하게 다르다니.

두 가지 맛의 팬티를 맡고 있던 그때. 어디선가 불쾌한 냄새가 풍겨왔다.

달달한 냄새는 사라지고 매캐함이 코를 찔렀다.

마녀의 집이다. 마녀의 집이 이 근처에 있다.

강한윤은 팬티를 아공간에 집어넣은 뒤 냄새를 따라 걸었다.

대체 이게 무슨 냄새일까. 이 냄새가 뭔지 예상해보려고 했지만 인생 처음 맡아보는 역한 냄새다.

시체가 썩으면서 발효된다면 이런 고약한 냄새를 풍기지 않을까.

옷소매로 코를 가리며 계속해서 이동했다. 냄새가 점점 강해졌다.

강한윤의 눈에 희미한 실루엣이 보였다.

안개 때문에 잘 보이지 않아서 앞으로 쭉 걸었다.

4인 가족은 잘 수 있을만한 크기의 오두막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 곳이 그토록 찾고 있던 마녀의 집이었다.

'어우 어지러워. 안개가 너무 짙다...

이 정도면 망각이 아니라 기억 강탈이다.

떠올리고 생각하려고 노력해도 곧 머릿속이 텅 비어버린 느낌이다.

이대로 여기에 있다가는 바보가 되어버릴 것 같다. 아니 확실하다.

"후욱... 후욱.."

날아갈 것 같은 의식을 붙잡으려고 천천히 심호흡 하는 강한윤 앞에 누군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흐으흐흥... 흐흥... 어라 손님인가요?"

신난 듯이 콧노래를 부르며 다가온 여인은 강한윤을 빤히 바라보았다.

이렇게 농도가 짙은 안개임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아무렇지 않은 모습이었다.

그녀는 자기소개를 하라는 것처럼 그가 입을 열기를 기다렸다.

"..."

보라색 머리칼을 가진 순한 인상의 여인. 그녀는 확실히 마녀다.

강한윤은 기억 속의 모습과 일치하는 마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이렇게 보니 평범하게 예쁜 미인이네.'

평상시에 봉사활동이나 할 것처럼 순하게 생겼다.

하지만 그 속에는 수많은 사람들을 살해해도 눈 하나 깜짝 안할 정도로 잔혹한 본성이 있다.

그 사실을 알고 있는 강한윤은 최대한 조심해서 말을 꺼냈다.

"할 얘기가 있어서 왔습니다."

다짜고짜 와서 그녀에게 안개를 없애달라고 부탁한다?

1초만에 몸이 걸레짝이 될 수도 있다.

거기에 말이 통하지 않는 상대도 아니니 충분히 설득해서 넘어갈 수 있을 거란 자신이 있었다.

"얘기요...?"

그녀의 눈빛이 멍해진다. 강한윤의 등골에 식은땀 한 방울이 흘러내렸다.

설마 틀린 선택지인가? 강한윤이 두려움에 떨고 있을 때, 그녀는 뭔가 떠오른 것처럼 핫 하고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손님이네요! 일단 안으로 들어오세요! 아 맞다. 이걸 미리 드시는 게 좋을 거예요."

그녀는 주머니를 뒤적뒤적 거려서 하얀색 사탕처럼 보이는 물건을 꺼낸 뒤, 강한윤의 손위에 톡 하고 떨어뜨렸다.

'사탕인가?'

만지기에 느낌이 사탕인데.

[마녀의 특제 안개 사탕]

­망각의 안개에 저항합니다.

­지속시간 : 12시간

확실히 사탕이 맞네. 강한윤은 입에 사탕을 바로 집어넣었다.

달콤하면서 쌉싸름하고 약간은 시다. 그렇다고 맛없는 건 아니었다.

이 맛들이 어우러져 하나의 맛있는 사탕이 되었다.

몇 개 얻어갈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 마녀가 안개 안쪽으로 손짓했다.

"들어오세요! 제가 차라도 대접할게요."

"네. 알겠습니다."

마녀는 안개 안쪽으로 스르륵 사라져버렸다.

오두막의 실루엣이 있는 곳으로 따라들어가던 강한윤은 무언가를 발견했다.

"..."

구석에 마족이 죽어있었다.

마족들은 죽어서 6등분으로 분해가 된 상태.

머리를 제외한 나머지 부분들은 이상한 기계에 삶아지고 있다. 마치 곰탕처럼 우려지고 있다.

이거 진짜로 들어가도 되나? 강한윤은 미지의 공포를 느꼈다.

"안 들어오세요?"

"아뇨.. 들어가야죠."

도망치면 곰탕이 될 위기였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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