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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물이 전부 따먹음-92화 (92/163)

〈 92화 〉 89화

* * *

라이라가 손짓을 한다면, 잠복하고 있는 살수들이 튀어나가겠지.

아니, 라이라 혼자서 저기 있는 성녀를 죽이는 건 아이 손목을 비트는 것처럼 쉬운 일이다.

성녀는 1:1 전투에서 라이라보다 강할 리가 없다.

스킬 자체가 전부 1:1 전투보다는 대규모 전투에 특화되어 있으니까.

'죽이면 편하긴 하겠지.'

앞으로 전투를 벌어진다면 성녀는 걸림돌이 되는 건 확실하다.

하지만 그녀를 설득하는 것은 어쩌면 생각보다 쉬울 지도 모르는 법이었다.

"성녀님."

강한윤은 천천히 성녀에게 모습을 드러냈다.

적대할 의사가 없다는 걸 알려주듯이 맨손이 잘 보이도록 들어올리고, 조심스럽게 가면을 벗었다.

"성녀님. 아니, 세리스 요한님 처음 뵙겠습니다."

"...누구죠? 저는 전혀 모르는 얼굴인데."

혹시나 아는 얼굴인가 하고 기억을 되짚어봤지만, 모르는 얼굴이었다.

저 검은색 머리. 동부에서만 볼 수 있는 특징과 관련해서 생각해봐도 떠오르는 게 없었다.

완전히 모르는 사람.

세리스는 여전히 의심을 거두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경계심 어린 눈빛으로 강한윤을 쳐다보았다.

"당연하죠. 초면이니까요."

애초에 게임에서 말고는 만난 적도 없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강한윤은 어디에선가 만난 적 있다는 듯이 태연하게 얘기하며, 주변의 나무목재 더미 위에 적당히 앉았다.

"언젠가 한 번 성녀님이 빈민 구제 활동을 하는 것을 본 적이 있었습니다. 주변을 돌아다니면서 다니시지 않았습니까?"

"... 그렇죠."

큰 일이 없을 때는 이스타르 님의 가르침에 따라서, 도시 외곽과 다른 도시를 돌아다니면서 사정이 어려운 자를 도왔다.

자원봉사를 한 걸 봤다니. 어디에서 만났던 걸까.

세리스는 동부에도 가긴 했지만, 이 사내와는 마주쳤거나 대화한 기억이 나지 않았다.

"동부의 소모리아에서 성녀님의 모습을 보고 감탄했습니다. 가난하고 힘이 없는 자들을 위해 활동하는 것을 보고 말이죠."

"그게 지금 얘기와 무슨 상관이죠? 저는 당신이 누구인지 궁금하다고 했을 텐데요."

거참. 인내심이 없네.

강한윤은 인상을 찌푸린 세리스에게 말을 계속했다.

"저는 그때는 평범한 교단의 신도였습니다. 하지만 우연히 어느 분의 도움을 받아서 돈을 크게 벌 기회를 얻었죠. 그리고 이 곳을 만들었습니다."

"... 뭐라고요?"

세리스는 자신이 들은 내용을 순간 이해하지 못했다.

여기를 만들었다고? 이 지하 경매장을 말인가?

그리고 이 사내에 대한 생각이 바뀌었다.

추잡하고 더러운 곳을 만든 쓰레기. 지금 당장이라도 죽여야 하지 않을까.

한 편으로는 이해할 수 없었다. 이런 장소를 만든 이가 왜 스스로 정체를 밝힌단 말인가?

그녀는 궁금증을 해결하고 싶었다.

"그걸 왜 저에게 말하는 거죠? 자수라도 하는 건가요?"

"자수요? 아뇨. 저는 아니죠."

강한윤은 작게 웃으며 답했다.

그리고 무언가를 떠올리듯이 위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여기에 참 더러운 놈들이 많지 않습니까?"

"...당신도 포함이에요."

"저를 굳이 제외할 생각은 없었습니다만.. 아무튼 나쁜 놈들은 세상에 많습니다. 굳이 하지 마라는 것은 꼭 하는 놈들이 있죠.

마약, 인신매매, 살인청부 등 다양한 범죄들 말입니다.

저는 그런 지저분한 놈들이 이 세상에 활개치고 다니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원하지 않는다는 사람이 이런 시설을 만드나요? 이런 시설이 문제인 겁니다."

"아뇨. 성녀님 틀렸습니다."

강한윤은 그녀가 한 말을 부정했다.

"오히려 그런 쓰레기들을 세상으로 격리하고 있는 겁니다."

"격리라고요?"

"예. 격리죠. 쓰레기들을 담아놓는 쓰레기통 같은 겁니다.

바닥에 떨어져 있는 쓰레기를 가볍게 걷어찼다.

그녀가 이 말에 동의를 하지 않아도 된다. 어차피 점점 그녀에게 적당한 '의심'만 심어두면 되니까.

강한윤은 넌지시 신성교단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하지만 그 쓰레기통에 교단의 사람들이 있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건..."

세리스는 이 지하 시설에 들어오게 된 이유를 떠올렸다.

신성교단의 사람들이 뒷세계의 문물에 빠져있다는 소문.

그리고 그 소문에 대한 정보를 범죄자 조직을 소탕하면서 얻을 수 있었다.

10이라고 적힌 자그마한 칩과 여기로 들어오는 방법을 말이다.

지독한 고문을 버티지 못한 범죄자 녀석은 결국 정보를 불고 나서, 한마디를 더 내뱉었다.

­크큭... 지하 경매장에서.... 봤던 얼굴도 보이는 군...

죽어가는 범죄자가 단말마처럼 내뱉은 한 마디로 인해서 신성교단의 분위기는 이상해졌다.

세리스는 범죄자의 말을 듣고 난 뒤에 확인하려는 것처럼 경매장으로 오게 됐고.

앞에서 나불대는 청년의 말처럼 점점 인정하고 있었다.

'교단은... 썩어가고 있는가.'

미세하게 남아있는 신성력의 잔재와 흔적으로 경매장에 참여한 인물들 중 교단의 고위 사제들이 섞여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신성력을 아무리 숨긴다고 한들, 그녀보다 완벽하게 제어할 수 있는 이들은 없었으니까.

교단 내부에 타락한 이들이 하나둘씩 생겨나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었다.

겉으로는 웃고, 약자들을 보호하며, 정의를 실현하는 것처럼 행동하지만.

뒤에서는 노예를 구매하고, 돈을 횡령하고, 약자들을 괴롭히는 쓰레기들.

그들은 마치 독처럼 신성교단에 퍼져나가는 중이었다.

세리스는 마음을 다잡고 항변하듯이 말을 내뱉었다.

"이런 시설이 없었다면 그들은 타락하지 않았을 거다. 이 시설은 사회의 악이다."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강한윤은 품에서 종이 하나를 꺼냈다.

"이 안에는 성녀님은 모르는 정보가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이 경매장을 자주 이용하는 성직자들의 목록이죠. 아. 확실한 증거도 있습니다."

팔랑팔랑 종이를 흔들자 세리스의 눈동자도 따라서 같이 흔들렸다.

"... 그런 물건이 있다고 한들 믿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하나."

"그런가요."

강한윤은 종이를 품에 다시 넣은 뒤, 작게 웃었다.

"하긴 그렇겠죠. 하지만.. 제가 알고 있는 고위사제만 해도 두 자릿수가 넘습니다."

"그럴 리가 없다. 사제들의 믿음을 뭐로 보는 거지?"

"그렇습니까?"

사제의 믿음이라. 그건 이미 바닥에 버려진 것 같은데.

비웃음을 담아서 말했다.

"그럼 혼자 알아서 해보세요. 물론 그렇게 한다고 신성교단의 타락한 이들을 처리할 수 있을 진 모르겠네요."

성녀는 대답하지 않고 애꿎은 바닥만 바라보고 있었다.

"저는 이런 쓰레기들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세상에 쓰레기들을 격리할 쓰레기통은 반드시 있어야하는 법이죠. 거리를 더럽히지 않으려면 말입니다."

강한윤은 조용히 말을 이었다.

"저는 성녀님을 응원하고 싶습니다. 약자들을 구원하려는 모습.. 저는 그 모습에 반했거든요.

신성교단 내부의 문제점을 덜어내고 싶다면 언제든지 찾아오시면 좋겠습니다."

성녀의 반응을 살폈다.

가면 아래로 보이는 눈동자에도 동요가 없고, 무슨 생각을 하는 지 알 턱이 없었다.

"아무튼 응원하겠습니다. 성녀님."

강한윤은 가만히 서있는 성녀를 내버려 둔 채 자리를 떠났다.

라이라는 강한윤과 함께 숨어서 성녀가 바깥으로 나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살려두는 것보다는 죽이는 게 덜 귀찮지 않을까.

거기에 여기에서 몰래 죽인 시체는 처리하기도 편했다. 그녀의 구역이었으니까.

지하수로와 통하는 곳으로 가서 조각난 시체를 버리면 그만이었다.

"이래도 괜찮은 건가요?"

라이라는 성녀가 살아나가는 것이 조금 불만이었다.

나중에 성녀가 무슨 일을 벌일지 모르니까.

하지만 강한윤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답했다.

"괜찮아. 아무런 문제도 없을 거야."

성녀가 전쟁에서 큰 활약을 하기 좋은 카드인 건 맞다.

인간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서라면 죽이는 게 필수지만.

강한윤은 성녀의 특징을 알고 있었다.

성직자들의 범죄나 타락에 굉장히 민감한 반응을 보인다는 것.

그녀는 명확한 증거가 없는 타락 사제들을 잡기 위해서 온갖 짓을 다할 거다.

하지만 증거가 없기 때문에 잡을 수 없다.

익명 경매의 정보를 알고 있는 건 오직 이쪽이다.

'나중에 그녀가 먼저 부탁을 하겠지.'

강한윤은 그 때를 위해서 행동하고 기다리면 될 뿐이었다.

***

'신성교단에 타락한 자들이 많다고?'

세리스는 코웃음을 쳤다.

'뭐? 응원하겠다고?'

범죄자에 불과한 새끼가 뭐라고 지껄이는 것인가.

그녀는 분노를 담아 집무실의 문을 닫았다.

­콰앙!

문짝이 부서지는 듯한 소리가 났지만, 그녀는 신경 쓰지 않고 보고서를 작성했다.

'타락한 사제..?'

하위 사제들은 그럴 수 있다.

하지만 고위 사제들은 그럴 리 없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세리스는 범죄자가 내뱉는 말은 전부 거짓이라고 치부했다.

당연히 그가 신성교단에 대해서 지껄인 소리도 그렇겠지.

절대로 사실 일리가 없다. 아니 사실이어선 안 된다.

세리스는 단숨에 보고서와 함께 작전 수립서를 적어나갔다.

주교님에게 말한다면 진심이 통할 거다.

그는 무조건 작전을 도와주리라.

주교님 보다 뛰어난 이는 없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녀가 생각하기에 주교님은 이스타르님과 가장 가까운 모습이었다.

항상 범죄자 단절에 앞서고 약자를 보호하는 사람이었으니까.

하지만.

"왜 안 된다고 하는 겁니까?"

그녀의 범죄조직 토벌 작전 건의는 너무나도 가볍게 거절당했다.

주교는 안경의 알을 닦으면서 세리스를 느긋하게 바라보았다.

"세리스. 증거를 확보했나?"

"그건.."

그녀에게 증거는 없었다.

물건을 사지도 않고 매번 들락날락하다보면 눈에 띄기 마련이다.

거기에 증거를 확보하려고 행동한다면, 금세 들킬 게 뻔했다.

증거를 쉽게 남기는 조직도 아니고 말이다.

"그렇다면 목격자는?"

"제가 있습니다. 제가 전부 목격하고 나왔습니다."

세리스의 대답을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이, 주교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제 3자여야만 해당된다는 걸 알지 않은가. 세리스 요한."

주교는 세리스가 건넨 보고서와 작전 건의서를 읽어 내려가다가, 한 부분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리고... 여기에 보면 신성교단의 인물들도 이용하고 있다. 특히, 고위 사제들이 이용하고 있다는 데... 이게 사실인가? "

예 사실입니다. 라고 대답하려는 세리스.

하지만 주교는 대답할 여지를 주지 않고 말을 이었다.

"하지만 이건.. 어떻게 봐도 교단에 도움이 되지 않는 발언이야."

"..그게 무슨 소리이십니까?"

세리스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잘못이 있다면 바로잡고, 문제가 있다면 해결을 해야 하지 않은가.

문제가 있다는 걸 말했는데. 오히려 잘못의 화살은 세리스에게 돌아가고 있었다.

"이게 사실이라면 교단의 이미지는 무너져내리겠지. 거짓이라면 성녀가 거짓말을 했다고 입방아에 오르겠고."

주교의 말대로였다.

세리스는 반박할 말을 찾지 못했다.

잘못을 바로잡는 것도 중요하지만, 교단의 이미지도 중요한 법이었으니까.

신도들을 모으려면 교단의 이미지도 신경을 써야하는 법이었다.

"이게 사실이든 아니든 위험한 발언일세. 세리스."

주교는 차가운 말투로 세리스에게 말했다.

"이건 없던 걸로 하겠네."

주교는 세리스가 건넨 보고서를 쓰레기통에 던져 넣었다.

마치 들을 가치도 없는 얘기라는 듯이 말이다.

세리스는 자신의 보고서가 쓰레기통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며, 꽈악. 주먹을 쥐었다 폈다.

"이 내용에 대해선.. 함구하도록 하지. 그리고 암시장은 따로 조사를 하겠네. 이 정도가 최선이라는 걸 알아줬으면 좋겠군. 세리스."

"...네 알겠습니다. 나가보겠습니다."

""이스타르님의 축복이 있기를,""

작게 기도를 하고, 세리스는 바깥으로 나왔다.

'... 이럴 리가 없는데.'

세리스는 믿고 있던 주교님에게 깊은 배신감을 느꼈다.

이스타르님의 가르침대로 깨끗한 세상을 만들려는 게 아니었나?

그녀는 주교와 얘기를 나누던 방금 전의 기억을 떠올렸다.

같은 얘기를 하고 있지만, 분위기의 온도차가 심했다.

일을 진행하려는 세리스와 반대로 관심이 없다는 듯이 묻으려는 주교.

세리스는 지하에서 봤던 그 청년의 말이 떠올렸다.

'혼자서 해봐요. 잘 될지는 모르겠지만.'

그럴 리가 없어.

절대로 신성교단이 타락했을 리가 없어.

세리스는 스스로에게 속삭였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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