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1화 〉 88화
* * *
사제 복장으로 대놓고 즐기고 있는 모습을 보아하니, 잠시 여유가 되는 동안 즐기러 온 건지.
즐겁다는 듯이 여자의 엉덩이와 가슴 쪽을 유심히 쳐다보고 있다.
은화를 여자들에게 던지면서 끈덕진 욕망의 눈길을 보내는 게 성직자가 맞나 싶다.
"고위 성직자들은 아니네."
얼굴도 대부분 모르는 이들이고, 혹시나 상태창을 확인해보니 무명의 NPC들이었다.
스탯도 별로고, 성장 기대치도 낮은 놈들.
그들을 구경하면서 한 마디 내뱉으니, 라이라가 의외의 말을 했다.
"그렇죠. 돈이 있는 성직자들은 여기에 없어요."
"여기에 없다고?"
확인하듯이 되물으니, 라이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고위 성직자들은 다른 곳에 있다는 얘기였다.
"... 진짜야?"
"네. 진짜죠. 제가 뭐 하러 거짓말을 하겠어요."
"숫자는?"
"2자리는 가볍게 넘죠."
라이라는 담배를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의외였다. 진짜로 성직자가 많이 타락했다니.
사티라에서 성직자들을 구워삶을 생각을 하긴 했는데.
이럴 수가. 이미 라이라가 선수를 친 상황이라니.
잘했다며 머리를 쓰다듬고 칭찬하고픈 기분이었다.
이따가 밤에 숙소로 돌아간다면, 무지성 칭찬을 해줘야겠다.
"어떻게 한 거야?"
성직자들을 겨냥한 노림수를 사용한 건가? 아니면 성직자들을 타락시키는 데 도가 튼 건가? 궁금했다.
"그거야."
라이라는 별거 아니라는 듯이 하얀 연기를 뿜은 뒤 답했다.
"성직자들은 애초부터 타락하기 쉽더라고요."
라이라는 저 요상한 춤에 열광하고 있는 성직자들을 무심하게 바라봤다.
그녀는 신앙심이 없기 때문에 신성교단의 교리에 대해서 잘 아는 건 아니었지만 저들이 하는 짓은 정말 멍청하다고 생각했다.
정신적인 수양을 위해서 욕구를 참는 직업을 가지고 있으면서.
옷을 갈아입는 것도 잊어버린 채 여자를 바라보고 있다니.
"제가 한 건 별로 없어요."
정말로 그들은 알아서 음지로 찾아들어왔고, 누구보다 빠르게 타락해버렸다.
이건 뒷세계에 능통한 그녀도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고위 성직자들은 어디에 있는데?"
"안에요."
그녀는 턱짓으로 어두컴컴한 안쪽을 가리켰다.
벽에 걸려 있는 등불에 희미하게 길이 비쳐 보인다.
가까운 곳에 상점으로 보이는 천막이 보이고, 그 안쪽은 어두워서 보이질 않았다.
"안쪽?"
"곧 경매장이 열리는데. 거기에 있을 거예요."
취급하기 힘든 물건을 거래하고, 익명을 보장하는 지하 거래소인 만큼 신기한 아이템도 많이 있겠지.
아이템을 구경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혹시나 값비싼 아이템을 싼 가격에 구할 수 있을지 모른다.
"경매장으로 가자."
"그래요. 그럼 가기 전에 그것도 처리하고 가죠."
"그거?"
아. 어음 말이구나. 처분해야 하긴 하니까.
어음을 처분하기 위해 라이라를 뒤따라 걸었다.
"여기는 지하지?"
"네. 지하죠."
습하고 꿉꿉한 공기가 지하와 반 지하 특유의 것이다.
이건 단번에 알아차렸지만, 궁금한 것은 따로 있었다.
"이 공간은 대체 어떻게 만든 거야?"
지금 이곳의 공간은 넓었다.
천장은 3m는 족히 넘는 높이에 폭은 5m는 넘는 크기였으니까.
도시 지하에 이런 공간을 몰래 만들 수 있나?
"안 만들었어요."
"그럼?"
이 공간이 어디에서 솟아나기라도 한 건가?
"폐쇄된 지하수로를 개조했어요. 아무나 못 들어오게 말이죠."
그녀의 말을 듣고나니, 여기가 확실히 지하수로 같은 분위기였다.
어두컴컴하고 가끔씩 큰 기둥이 보이는 공간.
이런 시설이 지하에 있는 것도 이해가 된다.
"...헛 여제님."
가려진 천막을 들춰서 상점 안으로 들어가자, 눈을 마주친 상인은 숨이 멎는 듯한 소리를 내질렀다.
라이라도 얼굴을 가리고 있지만 단번에 알아챈 듯했다.
빨간색 드레스를 입은 게 그녀밖에 없는 걸까.
순식간에 공손한 태도로 바꿔서 고개를 꾸벅꾸벅 숙였다.
"여기엔 무슨 일이십니까? 이번의 자릿세는 이미 냈는데.. 혹시 뭔가 잘못된 것이라도 있습니까?"
그는 혹시나 해코지를 당하는 게 아닐까. 하고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이걸 처리하려고 하는데."
"이건.. 어음이네요."
꺼낸 어음을 보여주자, 사내의 눈빛이 날카롭게 변하면서 물건을 조심히 만졌다.
"호오... 안스티프 백작의 어음이라니.. 이건 귀한 물건이네요. 높게 쳐줄 가치가 있고... 나머지는 통상 비율대로 하겠습니다."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으니 거래가 끝난 뒤에 라이라에게 물어봐야겠다.
"처리 기간은 어떻게 합니까?"
"최대한 빠르게."
"그렇다면... 급매가로 처분하니까... 대략 130만 골드정도 됩니다."
상인은 종이에 숫자를 끼적거리며 계산을 했다.
"기한을 늘리신다면 170만 골드까지는 됩니다만."
이건 어떻냐는 듯이 고개를 이리저리 돌렸다.
라이라도 이쪽에 결정을 하라는 듯이 가만히 기다리고 있었다.
"130만 골드면 충분합니다."
강한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130만 골드면, 좋은 아이템을 구입하거나 작전 수행에 충분히 사용하고 남을 돈이었ㄴ다.
"알겠습니다. 그러면 현금으로 드리는 건 어려우니.. 칩으로 변경해도 괜찮겠습니까?"
"예."
뭔지는 모르겠지만, 라이라도 가만히 있으니 나쁘지 않은 조건이겠지.
그런 생각으로 가만히 있으니 정말로 카지노에서 사용할 법한 칩을 꺼내주었다.
은은하게 마나가 흐르는 것을 보니, 마법적인 처리가 되어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검은색 칩에 하얀 글자로 100이라고 적혀있고, 나머지는 10이 적힌 칩 3개.
칩을 딱 4개만 손에 쥐고 있으니, 별 가치가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경매장으로 갈까요."
"그래."
돈이 생겼으니까 사용하기도 해봐야지.
강한윤은 라이라를 따라서 경매장으로 이동했다.
*
경매장은 이 지하수로 블랙마켓의 끄트머리에 있었다.
한참을 걸어간 뒤에야 경매장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273번이라.'
왠지 울림이 좋은 번호다.
숫자가 적혀있는 번호표를 들고서, 안의 분위기를 살폈다.
굉장히 조용하다.
맨 앞은 검은색 천막으로 닫혀있고, 모두 경매가 시작되기를 기다리며 조용히 앉아있을 뿐이었다.
강한윤은 라이라와 함께 오른쪽 끄트머리의 비어있는 의자에 앉았다.
"언제 시작하는 거야?"
"곧 있으면 시작해요."
그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앞의 천막이 열리고 있었다.
무대 위에서는 검은색 가면을 쓴 사내가 걸어나와서 고개를 숙였다.
"여러분들. 블랙마켓 경매장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최대한 조용한 분위기에서 경매를 진행해주시길 바랍니다.
비매너적인 행동을 할 경우엔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니 조심해주시길 바랍니다."
얘기를 끝낸 사내는 들어가고, 또 다른 사내가 나왔다.
이번에도 검은 가면의 사내인데, 입이 보이는 가면을 착용하고 있었다.
"네! 기다려주신 여러분들! 환영합니다! 이번 물품은 재미있는 게 많이 나왔습니다! 자 그럼 첫 번째부터 보도록 하죠!"
목걸이를 착용한 나체의 엘프가 철장에 갇힌 채, 무대 한 가운데로 옮겨졌다.
"뭐야. 엘프도 팔아?"
"... 아뇨 뭔가 착오가 있었나 보네요."
눈에 띄게 당황한 라이라는 시선을 피했다.
오드웰 연합군의 장교인 사람에게 엘프를 거래하는 모습을 보여준다니.
어떤 생각을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라이라는 수습하려는 것처럼 말을 덧붙였다.
"아마.. 예전에 잡힌 엘프일거예요. 이젠 노예 사냥꾼과는 거래하지 않으니까요."
"그래. 그렇게 말한다면 믿을게."
강한윤은 무덤덤하게 답했다.
엘프를 판매하는 걸 그녀에게 탓할 생각은 없었다.
나쁜 놈들은 엘프를 잡아오는 놈들과 그 엘프를 구입하는 돈 많은 녀석들이니까.
'여기 있는 새끼들을 전부 족치면 되려나.'
일단은 나중에 족칠 계획을 세워볼 생각이었다.
"일단 여기에서 엘프를 구매한 새끼들 명단 싹 모아서 넘겨."
"네 그렇게 할게요."
오드웰 연합군의 힘이 될 엘프들을 포획해서 노예로 팔고 있다니.
그럴 수도 있는 일이지만, 연합군의 장교로서는 참을 수 없는 일이었다.
엘프를 구매하는 놈들은 전부 처리할 생각이었다.
그 이후로도 엘프, 오크, 드워프, 인간까지 노예로 판매했다.
인간은 일반적인 노예가 아니라, 반반하게 생긴 몰락한 귀족들 위주였다.
그렇게 사형대에 오를 인원들이 늘어나는 도중에 다른 물건들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고대 제국의 유물..! 죽은 자의 속삭임이라는 물건입니다! 사용자의 정신을 파괴하는 고문 물품이죠!"
"오."
이런 아이템도 파는 구나.
확실히 양지에서는 구하기 힘든 아이템이었다.
고문 물품이라니.
작은 목걸이를 바라보고 있으니, 정보창이 떠올랐다.
[죽은 자의 속삭임]
모든 저항력 30%
혼란 부여
환각 부여
매혹 부여
공포 부여
정말로 고문에 특화된 아이템이었다.
이걸 가지고 누구를 고문할 생각이 많은 건지, 사람들이 번호표를 들어올렸다.
"시작가는 5만 골드입니다...!"
10만
15만
17만
18만
20만
가격이 순식간에 올라가고, 결국엔 20만 골드로 낙찰됐다.
'재미있는 아이템이 많네.'
게임에서는 볼 수 없었던 아이템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반반한 노예들을 구경하는 것도 나름 재밌었지만, 아이템 쪽이 더 재밌다.
노예들이 예쁘다고 해봐야 옆에 있는 라이라와 비빌 수도 없는 레벨이다.
강한 영웅은 그만큼 더 예쁜 법이니까.
그 이후로도 많은 아이템이 나왔다.
검, 창, 활, 방패 등등
특수 능력치가 붙은 물건들이 나오다가 이번에는 혹할만한 물건이 나왔다.
즉석 포탈 생성기
거리에 비례해서 마석을 소비합니다.
잠깐 동안 포탈이 열립니다.
"시작가는... 30만 골드입니다!"
이건 꼭 사야한다.
강한윤은 273번 번호표를 들어 올리고 외쳤다.
"100만."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기회가 마석으로 생긴다고? 시간을 단축할 수 있다고?
무조건 구입해야 하는 아이템이었다.
휴대용 포탈이 100만 골드라니. 포탈을 설치하는 비용을 생각한다면 100만도 싸게 먹히는 거였다.
단번에 100만 골드를 외치자, 경매장의 분위기가 술렁거렸다.
"100만...나왔습니다...! 더 없으십니까?"
전 재산이 130만인데 제발 그냥 주면 안 되나? 강한윤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 기대를 배신당하는 것처럼.
"110만."
왼쪽에서 누군가가 번호표를 들어올렸다.
"115만."
"120만."
"130만."
무조건 사겠다는 집념을 담아서 외쳤고.
"140만."
누군가 받아쳐버렸다.
"하.. 씨발."
욕지거리가 입에서 절로 튀어 나왔다.
이제는 돈이 없는데 포기해야 하나.
포기하려고 했을 때, 라이라가 273번 번호표를 대신 들어올렸다.
"200만."
"200만 나왔습니다...! 더 없습니까..?"
그제야 경매장이 조용해졌다.
"그렇다면 최종 입찰자는 273번님입니다."
그렇게 휴대용 포탈은 강한윤의 것이 되었다.
"제가 돈을 보태줄게요."
"도와줘서 고마워."
강한윤은 라이라의 손등 위로 손을 포갰다.
그녀의 지원 덕분에 아이템을 구매할 수 있었으니까. 고마움을 느꼈다.
그 이후로 경매는 계속 되었다.
돈을 전부 사용하고 할 일이 없어진 강한윤은 하품을 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생각보다 성직자가 많네.'
가면을 쓰고 있지만, 시스템을 막을 수는 없었다.
가면 위로 정보가 떠오르면서 이름을 확인했다.
전부 여기에 있을 법한 인물들이었다.
영웅치고는 영웅답지 않은 녀석들. 혹은 돈이 썩어 넘치는 귀족들.
'뭐 특별히 눈에 띄는 녀석은... 없나?'
그렇게 생각하며 둘러보던 강한윤.
'아니네?'
의외의 인물을 발견하고 눈을 반짝였다.
"모두 경매를 이용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경매가 끝나고 사람들은 바깥으로 천천히 빠져나갔다.
전부 호위를 달고 있는 건지. 바깥에서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이 맞이하고 있었다.
그 중에서 유유히 빠져나가는 인물이 눈에 튀었다.
'놓치면 안 되는데.'
강한윤은 인파 속에 섞여서 혼자 유유히 빠져나가는 여성을 쫓아서 움직였다.
그녀는 주변의 물건들을 둘러보지만, 흥미가 별로 없어보였다.
그렇게 그녀를 따라 가다보니 구석진 곳으로 이동하는 기분이었다.
아니, 실제로 인적이 드문 구석진 곳에 도착했다.
그러자, 그녀가 입을 열었다.
"따라오시는 분은 누구죠?"
뭐야, 처음부터 이쪽을 눈치 챈 거였구나.
하긴 눈치 채는 게 당연한 건가.
그녀는 그만큼 강한 영웅이었으니까.
세리스 요한. 그녀는 사티라에서 활동하고 있는 영웅.
이스타르 신에게 선택받은 '성녀' 였다.
그녀가 원하는 대로 나갈까 말까 고민하고 있자, 라이라가 먼저 입을 열었다.
"처음 보는 얼굴인데.. 처리할까요?"
처리를 한다면 연합군 쪽에 도움이 되겠지만, 반대로 저 여자를 이용한다면.
사티라를 손쉽게 무너뜨릴 수 있을 지 않을까.
강한윤에게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