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4화 〉 61화
* * *
느리게 눈을 떴다. 앞에 누가 있는 것이 느껴진다.
붉은 머리칼의 여인. 라이라다. 무의식적으로 손을 움직였다.
애무를 하듯이 가슴을 만지는 것도 좋지만, 아무 생각 없이 가슴을 만지는 것도 좋다.
그렇게 가슴을 만지고 있으니 손등에 무언가가 닿았다. 라이라의 손이었다.
"당신.. 일어나자마자 질리지도 않나 봐요. 어제 그렇게 해놓고서.."
"어제는 섹스였고 지금은 간단한 애정표현이잖아."
"읏.. 만져지는 입장에서도 생각을 해주실래요?"
가슴을 못 만지게 라이라가 몸을 반대쪽으로 뺐다.
이건 좀 섭섭한데.
나는 그것을 기어코 따라가서 라이라를 뒤에서 안았다.
"아무튼 내 마음 알지?"
"... 몰라요."
그렇게 말하지만, 라이라도 심장박동은 숨기지 못한다.
심장박동이 팔을 통해서 전해져 왔다.
라이라는 한숨을 푹 쉬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천천히 욕실로 이동하는 게 씻으려는 모양이다.
"씻을 거야?"
"네. 어제 씻은 게 소용없잖아요."
침대에 어제의 흔적이 묻어있다.
목욕을 끝내고 나와서도 네 번은 더 했었지.
라이라의 보지에 두 번.
펠라로 한 번. 69자세로 한 번.
그 동안 라이라는 미친 듯이 가버렸다.
애액을 흘리고 조수를 뿜어대고.
마지막엔 항상 그렇듯이 솔직해져서 사랑한다고 속삭였다.
욕실 문을 열고서 그녀를 따라 들어갔다.
욕조에 물을 받고 있는 그녀에게 다가가자 자연스럽게 하복부에 반응이 온다.
이럴 생각은 아니었는데.
"당신...또 하게요?"
"하고 싶긴 한데. 어제 실컷 했잖아."
반쯤 발기한 하물을 보더니 그녀가 먼저 물어본다.
이번에는 섹스가 주 목표가 아니었다.
라이라와 대화가 하고 싶었다.
욕조의 물이 다 받아지고 나자 조심스럽게 발을 담갔다.
뜨겁지도 않고 딱 적당한 온도다.
"후우."
안에 들어가니 몸이 풀린다.
아무래도 어제 섹스가 격하긴 했나보다.
약간의 피로를 느낄 정도였으니까.
에리엘과 노아를 상대하고 라이라까지 상대하는 건 벅차다는 건가.
'노아에게 아이템도 받았는데.'
재치 +5의 성능을 가진 반지다.
왼손 약지에 있는 반지 덕에 정력이 조금 더 강해진 기분이다.
재치에 이런 히든 스탯이 있었다니.
'화속성 저항 20%는 뭐.. 의미 없고.'
어차피 뭐든 맞으면 죽는다.
맞지 않도록 숨고 도망치는 게 나의 역할이다.
적당히 근육의 긴장이 풀렸다.
눈을 감고 이 기분을 느끼고 있으니 라이라가 옆에서 머리를 물에 감고 있다.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라이라. 그러고 보니 궁금한 게 있는 데."
"궁금한 거요?"
"네가 베르첼 가문에서 나온 이유. 옛날에는 사이가 조금 멀다고 생각해서 물어보지 않았거든.
이제는 대답해줄 수 있어?"
라이라는 하던 대로 머리를 감은 뒤, 간단하게 말아서 묵었다.
"제가 떠나온 이유..."
그녀가 옛날을 떠올리듯이 말한다.
"글쎄요 이제는 잊어버렸네요."
뻔한 거짓말이다.
라이라는 절대로 잊어버리지 않았다.
입에 올리기 싫다는 것처럼 얼버무렸으니까.
그녀의 대답에서 솔직함이 묻어나오지 않았다.
"그래. 잊어버렸다면 어쩔 수 없지. 하지만 하고 싶은 건?
하고 싶은 것도 없어?"
"가문이 사라졌으면 해요."
"베르첼 가문이?"
"네. 항상 그걸 원했어요."
이번에는 대답에 망설임이 없다.
정말로 베르첼 가문의 몰락을 원하는 것으로 보인다.
"만약 네 아버지인 이안 베르첼을 죽여야 하는 순간이 온다면 어떨 것 같아."
다음 작전은 이안 베르첼과 관련이 있다는 걸 확신할 수 있다.
그는 북부에서 거대한 무역길드를 운영하고 보급을 담당한다.
북부에서 작전을 진행하면 부딪칠 수밖에 없다.
그렇게 쭉쭉 진행해 나가다보면 언젠가는 선택을 내려야 한다.
이안 베르첼을 죽여야 할지 말아야 할지.
그 과정에서 망설이기 싫다.
모든 결정을 끝마친 다음 그것을 향해 달려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나는 라이라의 대답을 기다렸다.
"죽여야 할 순간이 온다면 그때는 제가 옆에 있을까요?"
"글쎄?"
라이라와 무조건 활동하려나. 이건 확신이 들지 않는다.
그녀가 다른 곳에서 활동해야 할 일이 생길 수도 있으니 말이다.
모호한 대답을 들은 그녀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 순간이 오게 된다면 저에게 결정권을 줘요. 죽인다면 제가 죽이고 싶어요."
"그렇게 복수를 하고 싶은 대상이야?"
"글쎄요. 소소한 복수라고 할까요."
소소한 복수가 죽이는 거라니.
라이라. 참으로 무서운 여자다.
"그렇다면 망설임 없이 작전을 해도 되겠네."
이안 베르첼에 대해서 고민을 했다.
혹시나 죽였다가 라이라가 슬퍼하면 어떨까 하고.
하지만 그건 괜한 고민이었나보다.
라이라도 딱히 자신의 아버지에 대해서 좋은 생각을 가진 것으로 보이진 않았으니까.
목욕을 적당해 했으니 나는 욕조 밖으로 나왔다.
대충 머리부터 발끝까지 씻은 뒤에 나가야겠다.
"당신. 오늘은 그냥 나가는 건가요?"
목욕을 끝내려고 하니 라이라가 의문을 표했다.
아. 그런 거였나?
"라이라 은근히 기대하고 있던 거야?"
".. 절대 아니에요."
절대라고 덧붙이니까 오히려 그런 것처럼 들린다.
"기대했는데 미안해. 다음에 여유있으면 하자."
"저는 별 말 안했어요."
라이라는 말 한마디를 져주질 않는다.
이런 면에서는 에우제니아랑 비슷하네.
욕조에서 나온 라이라는 모델같은 걸음걸이로 이쪽으로 다가왔다.
비누로 거품을 내서 머리를 마사지하고 등을 씻겨준다.
그녀의 손이 아니라 말랑말랑한 무언가가 닿았다.
가슴이 등에 닿고 있다.
거품을 묻힌 가슴을 비비고 있었다.
"... 오늘만이에요."
솔직하지 못한 말을 내뱉은 라이라는 정성스럽게 목욕을 도와준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대딸로 한 발 빼는 것으로 목욕은 끝났다.
"머리를 말려줄게요."
"말려준다고?"
대체 어떻게? 의문을 표하자 씻고 나온 라이라는 손에 마나를 담아서 머리를 톡 건드렸다.
축축하던 머리가 단숨에 뽀송뽀송해진다.
마나를 이렇게도 응용할 수 있는 건가?
절로 감탄사가 나왔다.
옷을 다 입은 라이라는 문이 아닌 벽 쪽으로 붙었다.
"저는 가볼게요. 해야 할 일이 있거든요."
"그래."
라이라는 벽으로 스르륵 사라졌다.
순식간에 적막이 찾아온다.
"후우."
이제는 나도 일할 시간이다.
얼룩진 침대에 정화를 퍼부어서 적당히 처리를 한 뒤에 바깥으로 나왔다.
어제 저녁에는 에리엘과 노아.
새벽과 아침에는 라이라다.
한창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나서 에리엘과 노아가 있는 방으로 들어가려 하니 느낌이 이상하다.
문손잡이를 잡으니 절로 긴장이 된다.
밤새 다른 여자랑 놀아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기분이다.
사실이라서 더 그런 걸까.
작게 심호흡을 한 뒤에 문을 열었다.
"드디어 왔군."
"왔네요."
이미 둘은 일어나있는 상태였다.
방금 목욕을 끝냈는지 수건으로 몸을 닦고 있다.
"어제는 즐거웠나?"
"그러게요. 얼굴 표정을 보니 즐거운 것 같아요."
"라이라. 그 여인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게 우리보다 좋았나?"
"좋았을 지도 모르죠?"
장난기가 가득 담긴 목소리로 말한다.
에리엘과 노아는 서로 주고받으며 대놓고 놀리는 중이었다.
"다 알고 있었어?"
"오히려 모르는 게 이상하지. 소드마스터 쯤 되면 오감이 예민해지니까. 잠을 안 자는 것부터 눈치챘어."
"나간 이유는 라이라라는 그 여인이 아닐까. 하는 예상일뿐이었다만 얼굴 표정을 보니 정답인 듯 하군."
둘은 이미 다 알고 있었나보다.
분위기로 보아선 뭐라하는 것도 아닌 것처럼 보인다. 긴장이 풀렸다.
침대에 걸터앉아서 그녀들이 옷을 입을 때까지 기다렸다.
"아무튼 즐거웠어?"
옷을 먼저 다 입은 노아가 물어본다.
"즐거웠어. 라이라랑 시간을 보낸 지 오래됐으니까."
"그래? 하긴. 요새 여유가 없긴 했어.
라이라... 흐음. 그녀랑도 얘기를 해보고 싶은데."
"무슨 얘기 하게?"
"글쎄. 이런 저런 이야기?"
노아가 일부러 대답을 피한다. 하지만 굳이 물어보고 싶진 않았다.
노아가 라이라에게 이상한 얘기를 할 것 같진 않았으니까.
"나도 그녀와 얘기를 해보고 싶다."
"에리엘도 라이라랑 하고 싶은 얘기가 있어?"
"흐음... 그렇지. 개인적인 이야기다."
라이라랑 무슨 얘기를 하고 싶은 걸까.
에리엘과 노아의 속내가 궁금하다.
나중에 언젠가는 알게 되지 않을까.
우리는 준비를 끝내고 바깥으로 나섰다.
이제는 일을 할 시간이다.
*
"안다이얄에서 연락이 왔군."
"무슨 이유입니까?"
"묘족에게 전선을 따라서 마나 지뢰를 심어달라는 요청을 했지만 일방적으로 거부를 당해서 화가 났다는 내용이다."
이번에 마나 지뢰를 설치해야한다는 건의를 했었지.
묘족이라하면... 저번 회의 때 봤던 적귀다.
'아. 그녀석도 좀 그런데.'
묘족이라 그런지 마이페이스 적으로 움직인다.
선호하는 영웅이 없어서 부대로 지정하더라도 보너스를 받지 못한다.
정말로 개인플레이 그 자체인 영웅이다.
성능마저 쓰레기였다면 가차 없이 쳐내도 되겠지만 그건 아니었다.
소드마스터 하급과 중급 사이의 실력자였으니까.
그저 사회성이 말도 안되게 없을 뿐이다.
"그래서 마나 지뢰를 설치하려면 설득해야 합니까?"
"잘 알고 있군. 에우제니아 사령관님이 안그래도 그렇게 얘기했다.
강한윤. 네가 가서 얘기를 해봐라."
"에리엘님이 가시는 게 낫지 않습니까?"
계급을 생각한다면 에리엘이 가는 게 맞지 않나.
에리엘은 고개를 저었다.
"에우제니아 사령관님이 대리로 한명을 지정해놓았다."
"그게 접니까?"
"그렇지."
"하아.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빠져나갈 구석이 없네.
그렇다면 빠르게 일처리를 끝내도록 하자.
적귀가 있는 옆 막사로 향했다.
수인들이 함께 생활하는 곳이다.
항상 그렇지만 나 혼자 인간이니까 기분이 묘하다.
주변의 시선을 무시하고 집무실의 문을 두드렸다.
"들어오도록."
적귀의 목소리가 들린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적귀는 보고서를 읽다가 시선을 이쪽으로 보냈다.
"무슨 일이지?"
목소리는 진지하고 무겁다. 하지만 그는 쇼파에 편하게 누워있었다.
"에우제니아 대장님 대리의 권한으로 왔습니다. 마나 지뢰 매설 작전에 대해서 얘기하고 싶습니다."
"흠. 그런가. 일단 앉지."
그제야 적귀는 자세를 고쳐 앉았다.
적귀의 맞은편에 앉으니 그가 먼저 얘기를 꺼냈다.
"이번 작전에 대해서 딱 짤라 말하고 싶군. 하기 싫다."
"...무슨 이유에서 입니까?"
"우리 묘족에게만 너무 많은 것을 강요하는 느낌이더군."
"다른 종족들도 작전에 참여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작전이라고 묘족만 참여하는 건 아니다.
엘프와 오크의 비중이 가장 높은 오드웰 연합군이다.
당연히 엘프와 오크를 주도적으로 작전을 진행한다.
"묘족의 숫자가 총 얼마인지 알고 있나?
부족을 전부 합쳐서 2만이 안 되는 숫자다.
부대에 있는 묘족도 200이 안 되는 숫자지.
작전을 진행하려면 절반이 넘는 숫자를 동원해야 한다.
그러다가 위험에 빠진다면 묘족에겐 큰 타격이다.
내 말이 틀렸나? 대위?"
그의 말대로라면 묘족에게는 달갑지 않은 작전이다.
"위험에 빠지지 않습니다."
"얻는 것 없이 위험부담만 전가한다면 좋아할 사람은 없지."
"에우제니아 사령관님의 명령이지 않습니까."
"우리는 연합군이다. 상호합의하에 작전을 진행해야한다.
묘족의 의사를 무시하고 강제로 징용한다면 그게 연합군인가? 아니면 연합군이라 믿고 싶은 건가?"
구구절절 맞는 말만 하네. 때리고 싶다.
고양이답게 요리조리 구멍을 찾아서 피해 다니고 있다.
"거기에 마나 지뢰따위를 심는다고 해도 전투에 도움이 되진 않는다."
"그래도 명령이지 않습니까."
"명령대로만 움직이길 원한다면 내가 이 자리에 있을 이유는 없지.
묘족의 협력이 아니라 복종만을 원하는 건가?"
"그렇다면 어떻게 하기를 원하십니까?"
"고개를 끄덕일 만큼 합당한 이유가 있는 작전.
혹은 작전 내용에 합당한 보수를 받아야 겠지.
자유분방한 묘족들에게 군대라는 건 매우 답답한 곳이거든."
충분히 합당한 이유가 있는 작전인데 그가 보기엔 별로인 듯하다.
그렇다면 보수를 줘야 한다고?
묘족에게 어울리는 보수라.
아. 아이템 하나가 떠올랐다.
"그렇다면.. 캣닢은 어떻습니까."
"캣닢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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