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4화 〉 34화
* * *
반할 뻔 했다? 아니, 이미 라이라에게 반했다.
그녀는 겉으로는 툴툴대지만 이런 상황이 닥쳐오자 걱정하고 챙겨준다.
예쁘고 마음씨도 고운데 반하지 않을 남자가 어디 있을까.
그녀에게 반하지 않는 남자가 세상에 존재한다면 게이거나 성기능이 마비된 사람이겠지.
그 와중에도 암살자 같기도 하고 닌자 같기도 한 이 6인방은 점점 거리를 좁혀오고 있었다.
우리를 죽이기 위해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는 중이다.
대체 어떤 씹새지?
이런 상황이 벌써 올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는데.
용병이나 암살자를 고용해서 죽이려는 시도를 하는 놈은 있지만.
이건 너무 빠르다. 대체 어떤 놈이지?
인간 세력에서 방해를 했다고 하기엔, 나의 신분은 노출되지 않았다.
작전장교 강한윤이라는 존재를 북부에서 알 길이 없다.
이제야 막 활동을 시작했는 데 상대에서 알고 반응을 한다? 말이 안 된다.
그렇다면... 아군 중에서 내가 죽길 바라는 새끼가 있는 모양이다.
의심이 가는 영웅이 몇 있기는 한데.
아직은 심증뿐이다. 물증을 얻을 때까진 참아야한다.
게임에서 동료를 팔아먹거나 칼을 겨누는 놈은 무조건 죽여버렸는데.
여기서도 마찬가지로 색출해서 반드시 죽이거나 그에 준하는 벌을 줄 거다.
검은 복면의 사내들은 점점 더 가까워 졌다.
15m 쯤 떨어진 정면에서 라이라를 경계하고 있다.
"당신. 제 옆에 붙어 있어야 해요."
라이라가 걱정이 된다는 듯 말했다.
안 그러면 순식간에 적들에게 목숨을 잃겠지.
이 위기에서 벗어나려면 라이라에게 의지하는 수밖에 없다.
기습당하는 건 무섭기 때문에 그녀의 등에 찰싹 달라붙었다.
일정한 포지션을 지키면서 앞으로 다가오는 암살자 무리들.
암살자 중에서 입지가 있는 라이라를 알고 있는 건지.
아니면 그냥 경계 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들은 최대한 신중하게 움직였다.
적들이 10m 정도의 간격까지 들어왔다.
그러자 라이라가 내 손에 무언가를 살며시 쥐어준다.
대체 뭐지?
손에 잡힌 것을 확인하니 자그마한 종이에 싸여있는 알약이었다.
이게 대체 뭘 하는 용도일까. 고민하고 있자 상대 쪽에서 먼저 반응을 보엿다.
"크윽... 독이다! 산개해라!"
대장으로 보이는 사람이 복면 위로 손을 덮으면서 뒤로 도약한다.
나머지 두명도 따라서 재빠르게 몸을 움직이는 데 성공했지만.
"크헉..."
"젠...젠장..."
반응하지 못한 나머지 3명은 숨을 헐떡이면서 바닥에 천천히 쓰러졌다.
그것을 보자마자 나는 알약을 입에 넣었다.
쓰다. 쓰지만 이걸 먹지 않으면 저렇게 되겠지.
라이라가 이 알약을 괜히 줬을 리가 없다.
"흐응... 이걸 알아채다니. 눈치가 빠르네."
어느새 라이라의 주변으로 자색의 안개가 펼쳐져 있다.
점점 영역이 넓어지는 안개에 상대는 섣불리 움직이지 못한다.
라이라가 손에 쥔 단검을 쓰러진 이들에게 던졌다.
콰직
그대로 머리를 파고 들어가서 무언가가 박살나는 소리가 들린다.
확인사살까지 끝낸 라이라는 손에 다시 무언가를 쥐어줬다.
"이거 들고 있어요."
그녀가 퉁명스럽게 말하면서 쥐어준 목걸이 하나.
나는 이 아이템이 뭔지 알고 있다.
[수호자의 목걸이]
하루에 1번. 치명적인 공격을 막아줍니다.
혹시나 내가 다칠까봐. 이런 아이템까지 준다고?
무심하게 아티팩트를 쥐어준 라이라는 퍼지는 안개와 함께 사라져버렸다.
이런 아이템까지 줬는데. 다치면 라이라가 실망하겠지.
나는 다치지 않도록 달콤한 향이 가득한 안개 속으로 몸을 숨겼다.
*
이번 임무는 매우 간단하다. 사내 한명을 죽이면 되는 임무였다.
육체는 보잘 것 없고, 마나도 형편이 없는 사내. 그리고 시녀 한명이다.
시녀 쪽도 특별한 건 없었다. 사내의 음담패설을 들으면서 꼬박꼬박 받아주는 것을 보아하니 말이다.
저들이 돌아오는 길에 함정을 파고 기다리고 일을 시작하자.
단번에 죽이고 술이나 마시러 갈까. 하던 생각을 했던 사내는 지금 쫓기는 중이었다.
'젠장.. 잘못 건드렸다.'
화살을 쐈을 때까진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시녀가 단검을 꺼내고 화살을 쳐냈다.
안개가 퍼지면서 순식간에 팀원 3명이 죽어버렸다.
붉은 머리칼의 시녀가 살기를 드러내자, 온 몸이 곤두서는 느낌이었다.
"망할.... 여제가 어째서...."
시녀의 정체를 유추해낸 사내가 읊조렸다.
대체 여제가 왜 여기서 저런 사내의 시중을 들고 있단 말인가?
알 수 없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목숨이 경각에 달렸다는 사실이다.
지금 당장이라도 도망쳐야한다고 생각했지만 그게 쉬울 리가 없다.
암살자 세계의 룰.
암살자끼리 싸우게 된다면 둘 중 하나는 죽어야 한다.
그 법칙에 충실하기로 소문난 그녀가 살려줄 가능성은 0%다.
그렇다면 자력으로 도망치는 수밖에 없다.
일단은 안개를 벗어나야 한다.
안개 속은 그녀의 영역이라서 이길 가능성이 없다...!
주변으로 안개가 점점 짙어지는 것을 확인한 사내가 반대 방향으로 달렸다.
"크아악...!"
안개 속에서 살이 찢어지는 소리와 함께 비명이 들린다.
동료가 시간을 번 지금이라면 도망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판단을 내린 사내는 안개를 벗어나서 앞만 보고 달렸다.
날카롭게 예민해진 사내의 감각에 무언가가 걸렸다.
달콤 쌉싸름한 향. 죽음의 냄새였다.
"...이런"
꽃에서 나는 냄새처럼 향기롭지만, 지금의 사내에겐 아니었다.
바로 앞의 나무에 기대서 담배를 피고 있는 사람이 있었으니까.
피처럼 붉은 머리칼을 가진 여인이 사내를 무심히 바라보았다.
"어디서 온 거지?"
"...."
사내는 질문에 답하지 않았다.
그런 사내를 보며 마치 대답을 기대한 적 없다는 듯, 여인은 연기를 내뱉었다.
"대답하지 않아도 좋아."
여인이 단검을 치켜들며 담배를 바닥에 떨어뜨렸다.
"결국은 불게 만들 거니까."
사내에게 여인의 검이 쇄도했다.
채챙!
단검이지만 묵직하다.
1합을 겨눴을 뿐인데 팔이 저릿하다. 마나가 순식간에 빠져나가면서 격차를 느끼게 됐다.
도망 쳐야 한다.연막탄이 소용이 있을 진 모르겠지만.
정면으로 싸우는 것보단 낫다.
사내가 연막탄을 집어서 터트리려는 순간.
서걱
"크윽...!"
연막탄을 잡고 있던 손가락이 순식간에 잘려나갔다.
대체 어떻게 된 거지?
사내가 고통으로 화끈거리는 손을 붙잡았다.
"젠장.."
여제가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다.
죽음을 직감한 사내가 마지막으로 힘을 짜내서 공격을 시도했다.
*
"흐음."
향기만 맡아도 게거품을 물고 쓰러지는 아이템이라니.
이건 대체 뭐지? 게임에서는 본 적 없는 건데.
바닥에 쓰러져 있는 시체들을 관찰하면서 특이한 점이 있나 확인했다.
피부에 반점 같은 건 없고 그 외로 이상 증세는 보이지 않는다.
그렇게 시체들을 둘러보며 시간을 죽이고 있을 때.
"끄아아아아악!!!!!!!!"
저 멀리서 끔찍한 비명이 들려왔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걸까.
깊은 산속 S급 쿨뷰티 미녀와 단 둘이서... 아마 고문을 받고 있겠지.
처음엔 살려달라고 애원하다가 죽여 달라고 하고 이제는 하염없이 비명만 내질렀다.
살면서 이렇게 끔찍한 소리는 들어본 적이 없는데.
온 몸의 털이 곤두설 정도로 끔찍하다.
저벅. 저벅.
누군가 걸어오는 소리가 들린다.
일을 끝내고 돌아온 라이라의 느긋한 발소리였다.
"소리가 끔찍하던데 무슨 짓을 한 거야?"
여기까지 고문당하는 사람의 고통이 느껴질 정도였다.
"정보를 안 불더라고요."
라이라가 답답함을 토로하듯이 말했다.
일을 끝낸 그녀는 묵묵히 다시 담배에 불을 붙였다.
정보를 불 때까지 고문을 하다가 상대가 죽어버렸겠지.
무슨 짓을 당했는지 상상하고 싶지 않지만, 그녀의 손에 말라붙어 있는 피를 보면 저절로 상상하게 된다.
"그래도 알아낸 정보는 없어?"
몸수색을 해서 알아낸 정보는 없을까.
"암살을 할 때 증거가 될 만한 물품을 챙기는 건 하수죠. 어중이떠중이는 아니에요."
하지만 대충 어느 길드 인지는 알아냈어요.
그녀가 덧붙였다.
라이라는 아무렇지 않게 말하지만 암살자 6명을 손쉽게 처리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암살에 도가 터서 암살자끼리의 싸움도 손쉽게 이긴 건가?
싸운 라이라는 태평한 반응을 보이지만 나는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당신. 제 뒤에 숨어요.'
나를 구해줬으니까. 감동받았다.
"구해줄 거라 생각은 못했는데. 보호까지 해주다니. 고마워."
겉으로는 츤츤대더니 막상 이런 상황이 닥치니 먼저 챙겨주는 모습을 보여준다.
여기에 감동을 받지 않는 사람도 있을까.
라이라의 손에 깍지를 끼고 말을 했다.
"...그런 거 아닌데요."
아니긴 뭐가 아니야. 심각한 표정으로 감쌌으면서.
모든 동작에 걱정이 담겨있다는 걸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라이라는 정말 솔직하지 못하네."
지금 당장이라도 애정 고백을 한다면 기쁨의 뽀뽀를 해줄 텐데.
라이라는 귀찮다는 듯이 손을 빼면서 눈을 찌푸렸다.
"나중에 당신이 저에게 도움을 준다면서요. 그만큼의 값어치를 못하고 죽으면 무조건 제 손해잖아요."
쌀쌀맞게 대답을 하지만, 목덜미가 살짝 붉다.
그녀 나름대로 부끄러워서 이렇게 대답을 하는 것처럼 보인다.
"정말로?"
"..."
이젠 아예 입을 열지 않는 라이라를 계속해서 놀리며 마을을 향해 걸었다.
마을로 도착하자마자 사령부로 향했다. 그리고 방금 있었던 일을 에우제니아에게 말했다.
작전 수행을 위한 일을 하고 돌아오는 도중 습격을 당했다.
누구의 소행인지 어느 세력에서 공격을 해온 건지 정보는 알아내지 못했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은 북부에 내통하는 스파이. 혹은 화합을 무너뜨리는 반대 세력이 존재한다는 것.
확실한 조사를 위해서 움직여달라는 부탁까지 끝마치자 운동을 하고 있던 에우제니아는 움직임을 멈췄다.
"... 그런 일을 당했다고?"
"제가 거짓말을 하겠습니까."
에우제니아와 한 배를 탄 상태인데 거짓말을 할 이유는 없지.
거짓말을 한다고 해서 이득이 있는 것도 아니니, 거의 결백하다는 건 확실하다.
쿠웅.
무거운 쇳덩이를 바닥에 내려놓은 에우제니아가 수건으로 땀을 닦았다.
"남부에서 암살자가 붙을 만한 일을 한 건 아닌가?"
"..."
"누군가에게 원한을 샀다면 암살자가 올 수도 있지."
그녀의 얘기에 곰곰이 생각을 해보았다.
다프닐, 루프란, 마르벨스를 점령하면서 정말로 누군가에게 원한을 살만한 일을 했나?
... 없는데?
억울하게 죽인 사람은 있어도, 원한을 살 정도의 일을 벌인 건 없다.
확실한 건 아니지만, 남부에서 암살자를 보내왔을 거라고 생각은 하지 않는다.
거기에 북부로 오는 도중에 기회가 얼마나 많았는데.
중부에서 토막 내고 강에 버리면 찾을 수 없다.
굳이 북부에서 일을 처리한다는 것도 이상하지.
"아무리 생각해도 남부는 아닌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하아. 젠장. 골치 아파졌잖아."
에우제니아가 쇼파에 털썩 누워버렸다.
저런 반응을 보이는 것도 이해는 된다.
그녀의 능력으로는 북부의 사령관 자리를 지키는 게 어렵다.
거기에 내부의 적이 생겨난 상황이니 마음이 편할 리가 없다.
"대체 어떤 새끼지? 찾아낸다면 진짜 죽여 버리고 싶은데."
이건 인정이다. 범인을 색출해낸다면 무조건 죽이지 않을까?
아니면 살기 싫을 정도로 끊임없는 고통을 주는 게 맞다.
"일단. 우리도 서쪽의 시체를 확인해보고 정보를 얻도록 할 테니까. 몸조심해. 괜히 혼자 있다가 뒤지지 말고."
"예. 알겠습니다."
라이라에게서 떨어질 생각은 추호도 없다.
그녀가 든든하게 나를 지켜주는 데 굳이 위험을 감수할 필요는 없다.
"혹시 호위가 필요해? 호위를 붙여줘도 되는데."
"아뇨 이미 있어서 괜찮습니다."
라이라 정도면 든든하지.
그보다 할 얘기가 따로 있어서 찾아왔는데 까먹을 뻔 했다.
"아 맞다. 이번 작전으로 돈이 필요합니다."
"돈? 돈이 필요하다고? 얼마나?"
"조금 많이 필요합니다."
"조금 많이? 뭐 얼마나 필요하다고 그래. 그냥 써."
그녀가 털털하게 답했다.
얼마가 필요한지 알고 그런 대답을 하는 걸까.
이번 작전은 돈이 아주 많이 필요 한데.
나는 느긋하게 누워있는 에우제니아에게 다가가서 속삭였다.
"50만 골드가 필요합니다."
"이런 씨발 뭐라고? 50만 골드?"
그녀가 쇼파에서 일어났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