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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물이 전부 따먹음-33화 (33/163)

〈 33화 〉 33화

* * *

카브란 산맥의 서쪽엔 특별한 게 없다.

작은 광산과 좋은 아이템이라곤 나오지 않는 소규모의 던전.

그리고 이 작은 오두막뿐이다.

"평범한 오두막이네요."

라이라의 말대로 겉보기에 특색이 없어 보이는 작은 오두막이다.

그녀가 이렇게 말하는 것도 어떻게 보면 당연하다.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보기엔 그저 평범한 오두막일 뿐이니까.

­잡상인 사절.

나는 팻말을 지나쳐서 오두막의 문을 가볍게 두드렸다.

­끼익

그러자 문이 살짝 열리고 어둠 속에서 노란색의 눈동자가 드러났다.

야수처럼 길쭉한 눈동자가 나를 유심히 쳐다보았다.

"잡상인은 아닌 것 같은데... 무슨 용무지?"

의심과 귀찮음이 섞인 목소리가 오두막 안에서 들려왔다.

"거래를 하러 왔습니다."

"거래? 그런 걸 할 생각은 없어."

퉁명스러운 대답을 한 상대가 문을 닫으려는 낌새를 보였다.

이러면 안 되는데? 최대한 상대의 관심을 끌어야 했다.

문이 닫히기 전에 빠르게 말을 내뱉었다.

"연금술 재료 거래와 마법 각인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그러자 문이 닫히려다가 멈춘다. 까다로운 놈.

게임에서도 흥미를 끄는 주제를 가져오지 못하면 단번에 거절하고 호감도가 떨어진다.

호감도가 떨어지면 대화만 걸어도 화염 마법으로 공격해온다.

본론으로 넘어가서 궁금증을 유도해야한다는 걸 아는 나는 재빠르게 말을 걸었다.

­딸깍.

그러자 잠금 장치를 푸는 소리가 들리고 문이 열렸다.

오두막 안으로 들어가자 수많은 약병과 약재들이 널브러져있다.

테이블 위에는 방금까지 실험을 했는지, 거무튀튀한 찌꺼기들이 약병에 들러붙은 상태다.

"그래. 무슨 거래지?"

붉은 색의 리자드족 달리스. 그가 입을 열었다.

이 녀석을 만나기 위해 여기까지 찾아온 것이다.

"물품을 여기에 올려봐."

어질러진 테이블 위를 대충 치운 달리스가 말을 이었다.

라이라가 아공간에서 약재들을 꺼내서 차례대로 올려놓았다.

하나둘씩 쌓이는 약재들을 본 달리스가 한숨을 내쉬었다.

"흐음.."

약재들을 둘러보며 살만한 게 있는 지 체크했다.

손으로 약재들을 만져보고 냄새를 확인하는 걸 보니, 신선도를 체크하는 듯하다.

"음... 이 정도만 구입하지."

가져온 물품의 절반 정도만 구매하기로 결정했다.

달리스에게 필요한 물품만 골라서 가져왔는데 생각보다 저조하네.

그러나 이건 달리스의 흥미를 끌기 위한 초석에 불과하다.

거래를 끝마친 달리스는 약재를 대충 선반에 쑤셔 박았다.

"그래서 마법 각인에 관한 이야기는 뭐지?"

이제야 달리스의 눈빛에 호기심이 깃들었다.

혀를 날름거리며 마법 각인에 대한 관심을 내보이고 있다.

마법 각인.

마나로 작동하는 물건은 전부 마법 각인이 들어간다.

술식을 얼마나 깔끔하게 설계했나에 따라서 아이템의 성능 차이가 발생한다.

달리스가 진행하고 있는 연금술의 연구는 마법 각인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러니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것도 당연하다.

"마법 각인 스크롤 제작을 부탁하고 싶습니다."

"부탁하고 싶다고?"

방금까지 눈을 빛내고 있던 달리스가 실망을 표했다.

마법 각인은 연금술의 기초다. 하지만 이걸 다른 이에게 부탁한다?

저는 연금술에 대한 재능이 없어요. 라고 말하는 거나 다름없다.

마법 각인은 기초 중에 기초였으니까.

"도면에 제가 술식을 적을 테니 마법 각인만 해주시면 됩니다."

그에게 부탁하려는 의뢰는 마법 각인 스크롤 제작이다.

당연히 평범한 스크롤 제작은 아니다.

그걸 이제 달리스에게 보여줄 예정이다.

"술식을 적는다고?"

"일단 보고 계십쇼."

달리스가 헛웃음을 짓는다.

그가 도면과 펜을 꺼내주었지만, 얼굴 표정을 보니 기대감이라고는 하나도 없다.

그래. 어디 너 할 거 해봐라 같은 표정이다. 비웃음도 섞여 있었다.

'어디 한 번 그려볼까.'

기억 속에 있는 마법 각인을 떠올렸다. 나는 그걸 그대로 그리기만 하면 된다.

원래라면 외울 필요도 없는 것들인데, 게임하다보니 각인을 이해하고 외우게 됐다.

누가 들으면 미쳤다고 하겠지만, 게임을 하다보면 이런 저런 것도 다 익히게 되더라.

나는 펜을 가볍게 들었다.

*

마법 각인에 관해서 이야기를 하자더니 스크롤 제작을 부탁한다고?

달리스는 인간이 펜을 잡는 것을 보고 어이가 없었다.

'그래 해봐. 사기꾼 녀석아.'

펜을 잡는 방법부터 틀려먹었다.

저렇게 잡아서 선을 제대로 긋기나 가능할까.

마법 각인이라는 건 일정한 알고리즘으로 작동한다.

한 치의 오차만 발생해도 마나 제어에 문제가 생기면서 술식이 멈춰버리는 경우가 허다하다.

문제가 생긴다면 바로 내쫓아주마.

그리고 자신 있는 화염 마법으로 혼쭐을 내주지.

그런 생각을 하며 술식을 그어 나가는 인간의 행동을 유심히 지켜보던 달리스가 인상을 찌푸렸다.

펜을 잡는 방법도 엉성하고 연금술에 재능이 있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술식을 그려나가는 방법도 엉터리다.

알고리즘대로 쌓아나가고 완성하는 게 아니라.

도면의 구석부터 그려나가고 있었다.

이게 대체 뭐하는 짓이지? 나하고 장난을 치려는 건가?

달리스는 화를 내려고 했지만.

...아니야 조금만 더 지켜보자.

인간이 뭘 하는 건지 호기심이 동했다.

최근 들어 마법 각인을 짜는 것에 슬럼프를 느껴서 연구에 진척이 없으니까.

저 인간의 엉뚱한 행동이 도움이 될 지도 모른다.

그렇게 천천히 그려나가는 인간의 손에 술식의 한 구석이 완성된다.

저주와 축복과 관련된 문양이었다.

우연인가? 엉성하기 짝이 없는 데 저걸 어떻게 그릴 수 있지?

달리스는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인간의 술식은 점점 완성되어가는 중이었다.

삐뚤삐뚤하고 엉성한 선. 숙련도가 아예 없는 수준이지만.

첫 번째로 완성된 각인의 효과는 혼란이다.

그래. 이 정도는 그럴 수 있다.

달리스가 팔짱을 끼고 술식이 완성되어 가는 과정을 지켜보았다.

두 번째 술식은 매혹.

상대를 유혹하는 효과의 각인이었다.

'두 가지의 각인을 아무렇지 않게 만들다니.'

아직 완성되지 않은 각인이라 달리스는 가만히 바라보았다.

여러 효과의 술식이 꼬이지 않도록 하는 건 굉장히 어려운 기술이다.

그 사실을 아는 달리스가 마음속으로 소리쳤다.

불가능하다! 아무런 문제가 없을 리가!!

아무것도 모르는 인간이 2중 마법 각인을 그릴 수 있다고?

두 가지의 효과를 새기는 건 달리스도 힘겨운 일이다.

그리고 그게 아무런 문제도 없이 작동한다는 건 더더욱 힘든 일이었다.

마지막으로 인간이 완성한 문양은 용기.

힘과 체력에 버프를 걸어주는 효과였다.

'3중 각인...'

눈이 휘둥그레진 달리스가 쳐다보았다.

말도 안 된다! 조예가 없어 보이는 인간이 해낼 수 있을 리가..!

"다 됐습니다."

각인이 완성된 종이를 달리스가 빼앗듯이 집어 들었다.

그럴 리가 없다....!

하지만 손에 들려있는 건 너무 완벽한 마나 술식이었다.

선이 엉성한 것을 제외하면, 문제 삼을 곳이 한 군데도 없었다.

하나의 오류도 없는 완벽한 술식에 달리스가 하루 종일 쳐다보았고.

"어떤가요? 쓸 만하지 않나요?"

강한윤이 그런 달리스를 보며 웃었다.

***

달리스가 유독 마나 술식 이야기에 집착을 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모든 연금술에 사용할 수 있는 현자의 돌을 제작하려면, 마나 술식을 완벽히 이해해야 하니까.

얻기 어려운 재료에 조합법도 까다롭고 마나 술식 각인도 어렵다.

그 모든 난관을 거쳐야 탄생하는 아이템이 현자의 돌이다.

'나도 그걸 이해해보겠다고 머리가 깨지는 줄 알았지.'

3중 마법 각인? 이건 약과다. 현자의 돌을 만들려면 5중 마법 각인 스크롤을 3개는 만들어야 하니까.

제 정신인 사람이라면 시스템의 도움을 받지 한땀 한땀 만들 생각은 안한다.

'4중 마법 각인까지는 할 만한데.'

5중이 문제다. 마나가 서로를 간섭하지 않도록 하면서 올바른 효과를 만들어 내야한다.

이 작은 공간에 그걸 효율적으로 때려박으면서 완성시키는 게 쉬울 리가.

좋은 성능을 가지고 있는 문양은 그리기 어렵다.

그걸 2중 3중으로 설계할수록 난이도는 극악으로 치솟는다.

선도 오밀조밀 해지고 배치고 신경써야하고 알고리즘도 문제가 생기면 안 된다.

알고리즘 도표를 보면 이걸 이해할 거야? 그냥 베껴서 만들어. 아니 베낄 순 있지?

라고 말하듯이 어지럽다.

그걸 완벽하게 그려내서 좋은 성능의 마법 술식을 만들어 내는 게 능력이다.

그래야 장비에 좋은 성능을 부여할 수 있으니까.

'달리스도 어지간히 놀랐나보네.'

아이템이라는 건 단번에 생겨나지 않는다.

시간이 진행될수록 영웅들이 성장하고 숙련도가 늘어난다.

좋은 물건이 제작되고 고대의 유물이 발굴되고 그러면서 세상에 무기들이 풀려난다.

그런데 여기에서 갑자기 3중 마법 각인을 선보였으니 달리스가 놀라는 것도 당연하겠지.

지금의 달리스라면 2중 마법 각인 정도를 만들어내는 게 고작일 테니까.

'인간 세력의 마탑주는 3중 마법 각인의 수준일 텐데... 그쪽의 도움을 받기는 힘들지.'

오드웰 연합군으로 시작했으니 어쩔 수 없지.

결국에 북부에서 도움을 받을만한 기술자는 달리스뿐이다.

"이걸 어떻게 만들어 냈지?"

달리스가 놀라서 소리치고.

"아니... 대체... 이게..."

마나 술식이 적힌 종이를 들고 입을 뻥긋 거렸다.

"이걸로 만들어냈죠."

내 머리를 검지로 톡톡 두들겼다.

사실, 사이트에서 조합법을 검색해서 때려 박듯이 외운 거지만.

그것도 머리로 한 게 맞긴 하지.

"그래서 이 마법 각인대로 스크롤을 만드는 건 며칠이나 걸리죠?"

"2주일... 아니. 10일...."

달리스가 이쪽의 반응을 살피면서 대답했다.

"음... 다른 곳을 찾아가야 하나."

"일주일! 일주일 이면 충분하다!"

기겁하는 달리스를 보며 피식 웃었다.

시간을 줄일 수 있으면서 왜 그래.

"그럼 일주일 뒤에 올게요. 돈은..."

"아니... 돈도 필요 없으니. 제발 가주게."

이제는 달리스가 아예 애원을 한다.

3중 마법 각인이 탐나긴 한가보지.

자신의 벽을 뛰어넘을 수 있는 기회가 왔는데, 포기하자니 아쉽겠지.

"그럼 일주일 후에 오겠습니다."

스크롤 제작도 하고 마법 각인 연구도 하려면 시간이 빠듯하겠지.

마법 각인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는 달리스를 내버려두고 바깥으로 나왔다.

"당신 참... 악랄하네요."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라이라가 허를 내둘렀다.

"아니 왜? 뭐가?"

공짜로 해준다는 데 문제 삼을 게 있나.

부려먹는 것처럼 보이지만 아니다.

이쪽은 3중 마법 각인을 제공했다.

달리스는 3중 마법 각인에 대한 정보를 얻었다.

그래서 공짜로 스크롤을 만들어 주는 것뿐이다.

"..."

라이라가 이해를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담배를 꺼내들었다.

그렇게 반응하면 조금 슬픈데.

마을로 돌아가기 위해 숲을 느긋하게 걸었다.

누가 나무가 가득한 곳에서 담배를 피우면 건강해지는 느낌이라 좋다고 하던데.

라이라도 그런 기분일까?

생각을 비운채로 걷던 도중 라이라가 재빠르게 단검을 휘둘렀다.

­챙!

그녀의 검에 화살이 튕겨져 나가며 옆의 나무에 박힌다.

"씨발 뭐야!"

반응도 못했는데 라이라가 막아줘서 다행이다.

순간 놀래서 오줌을 지릴 뻔 했지만 아무렇지 않게 주변을 살폈다.

라이라가 앞에서 단검을 역수로 쥐고 보호하는 자세를 취했다.

"누구냐."

그녀가 나지막이 말하자 나무 위에서 6명이 뛰어내렸다.

눈을 제외하고는 온통 검은색 투성이인 사람들이다.

저렇게 검은색으로 입고 있으니 왠지 닌자처럼 보였다.

"계획이 틀어졌다. 저 여자부터 처리한다."

가운데에서 사내가 명령을 내리자 다른 인원들이 무기를 꺼냈다.

검과 활. 그리고 마법 스크롤까지 보인다.

누가 의뢰한지는 몰라도 아주 단단히 준비한 모양이다.

"누가 시킨 거지?"

라이라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는 인원들. 당연히 대답하지 않겠지.

묵묵부답인 적과 대치하는 라이라가 팔로 나를 호위하듯이 감쌌다.

"당신. 제 뒤에 숨어요."

순간 반할 뻔 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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