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화 〉 23화
* * *
"정말로? 싸우고 오라고? 저 인간이랑?"
"응. 있는 힘껏 싸우고 와."
"하아... 될 대로 되라지."
단호한 대답에 노아가 인상을 찌푸렸다.
자신의 무기인 백금의 사냥 활을 꺼내서 헨리크 공작에게 걸어가는데.
마치 죽으러 가는 사람처럼 포기한 채로 걷고 있다.
하지만 이건 노아에게도 좋은 기회다.
'결투는 영웅을 성장시키니까.'
결투를 해서 이기던, 지던 많은 경험치를 획득한다.
운이 좋게 강자를 이기는 경우가 생기면, 특수능력을 얻는 경우도 있다.
성장이 필요한 노아에겐 이 결투가 많은 도움을 줄 거란 사실은 확실하다
이 결투로 인해서 노아의 레벨이 단숨에 오를 수 있다면.
소드익스퍼트 최상급의 경지까지 걸리는 시간이 단축되겠지.
헨리크 공작이 노아를 보면서 검을 뽑았다.
"크흐흐! 귀여운 아가씨가 나오셨군. 그럼 한 번 가볍게 시작해볼까? 실컷 놀아주지!"
그가 살기를 피워 올리자 전장의 분위기가 급속도로 얼어붙는다.
마나를 끌어올리는 걸 본 노아가 급하게 백대쉬로 간격을 벌리지만.
"도망치려고?"
헨리크 공작은 단 번에 따라붙었다.
악착같이 달라붙는 공작에게 노아가 마나화살을 발사하지만.
콰지직!
헨리크의 검에 화살이 가볍게 바스라진다.
노아의 앞까지 따라붙은 헨리크 공작은 깔끔한 동작으로 발차기를 날렸다.
"크흑...!"
노아의 배에 깔끔하게 들어간 드롭킥.
스피드, 힘, 마나, 어느 것으로도 우위를 점하지 못한 노아가 밀리는 건 당연했다.
초원에 널브러진 노아가 자리에서 박차고 일어난다.
재빠르게 화살을 쏘아내자, 세 갈래로 퍼지면서 헨리크 공작에게 날아간다.
"재능도 있고 감각도 뛰어나지만, 아직 여물지 않았군!"
헨리크 공작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아니, 눈에 보이지 않을 속도로 움직였다.
"크읏...!"
노아가 계속해서 활을 쏘지만 헨리크 공작에게 닿지 않는다.
무의미한 반항이다.
헨리크 공작이 어린아이를 가지고 노는 것처럼 모든 공격을 막아내고 있다.
노아와 헨리크 공작의 거리가 가까워지고.
활을 쏨과 동시에 노아가 단검을 뽑아들었다.
화살과 쇄도하는 노아. 허를 찌르는 일격이지만.
"좋은 시도였네."
노아의 검이 쉽게 막혔다.
헨리크 공작은 칼등으로 노아의 목을 친 뒤에 호탕하게 웃었다.
"크흐흐! 역시 즐겁군."
헨리크 공작이 손속에 자비를 베푼 것을 포함하더라도 노아는 잘 버텼다.
소드 익스퍼트가 사용하는 검기와 소드마스터의 검기는 차원이 다르다.
잡티가 섞인 검기와 정순한 마나로 뽑아낸 검기가 대결이 될 리가 없다.
소드마스터는 그런 존재다. 하나의 격을 넘어버린 존재.
노아를 땅에 내려놓은 헨리크 공작이 마르벨스의 병사들을 향해 소리쳤다.
"우리가 이겼다! 앞으로도 이길 것이다! 안 그런가!"
"맞습니다!"
이게 부대의 사기를 올리는 버프의 일종인가. 직접 보니 확실히 알겠다.
저 병사들의 목소리를 들으니 살이 저릿하고 떨린다.
자신감이 넘치는 부대가 약할 리가 없지.
옆에서 에리엘이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한다. 손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이 보인다.
"이렇게 긴장한 건 소드익스퍼트 시절 이후로 처음이군."
"그건 몇 년 전입니까?"
"대략... 삼... 아니 비밀이다! 그런 건 묻지 마라! 강한윤 중위!"
"부끄러우십니까?"
"당연한 거 아니겠나!"
나이를 언급하는 건 역시 싫어하나 보네.
일부러 긴장을 풀어주기 위해 말을 건 게 효과가 있는 지.
에리엘의 떨림은 멎어있었다.
"후우... 그래. 강한윤 중위 덕에 긴장이 다 풀렸군."
"그래도 저희가 아무것도 준비 안한 건 아니지 않습니까."
강화된 야만의 영약
힘+5, 체력+5
마녀의 보양식
마나 회복력이 30% 상승합니다.
달콤한 벌꿀 디저트
재치가 10 상승합니다.
준비한 아이템들은 이렇다. 이 세 개로는 모자랄 수 있지만.
이것보다 더 많은 영약을 복용한다 해서 효과가 더 좋은 것도 아니다.
겹치지 않는 효과를 받기 위해서라면 위험한 영약들도 먹어야 하니까.
단기전으로 보면 좋은 선택이겠지만,
에리엘은 단순히 한 번 쓰고 버리는 말이 아니었다.
"처음부터 모든 마나를 끌어올리세요. 에리엘 대장님."
"그게 무슨 소리지?"
"잡기술은 통하지 않을 테니까요."
나가기 전 에리엘에게 한 마디 조언을 했다.
이런다고 확실히 이기는 건 아니지만, 이길 확률은 올려준다.
나머지는 에리엘의 손에 달려있을 뿐이다.
헨리크 공작을 향해 에리엘이 걸어 나갔다.
***
"크흐흐! 이제야 싸워볼만 한 상대가 나왔군!"
헨리크 공작이 에리엘을 보며 말했다.
마르벨스 다프닐 라인을 유지하고 있을 때 몇 번 검을 겨눴었지.
결판을 못 내서 아쉬움이 가득했지만 지금은 확연히 다르다.
수많은 병사들을 신경 쓰며 전투를 치르던 때와 달리 지금은 1:1로 싸울 수 있는 판이 깔려있다.
개인의 무위를 완벽하게 보여줄 수 있는 상황이다.
헨리크 공작은 기대가 된다는 듯이 웃음을 흘렸다.
에리엘. 겉으로 보기엔 가녀린 엘프 여인처럼 보이지만, 속에 담겨있는 것은 그렇지 않다.
지금까지 만나본 상대 중 손에 꼽을 만큼의 강자였으니까!
밀려오는 고양감에 헨리크 공작은 검을 거세게 쥐었다.
"많이 기다렸나? 헨리크 공작."
"많이 기다렸지. 마지막으로 검을 맞댄 이후로 몇 달이나 흘렀는지 셀 수 없으니 말이야."
헨리크의 대답에 에리엘이 루드밀라에 있던 때를 떠올렸다.
그때의 전투부터 벌써 몇 달이나 흘렀나.
마치 벽처럼 느껴졌던 헨리크 공작의 검. 무겁고, 빨랐다.
이 사내에게 이길 수 있을까. 아니 이겨야 한다.
그의 검을 꺾어야 하는 상황이니까.
에리엘이 검을 뽑았다.
검은 순백색으로 아름답게 빛났다.
세 걸음은 넘게 떨어진 거리에서 서로를 바라보았다.
누군가 먼저 움직일 때까지 이어질 대치상황.
선수 친 것은 에리엘이었다.
'불리한 건 나다! 먼저 움직여서 선제 권을 가져와야 한다.'
에리엘이 땅을 박차면서 마나를 끌어올렸다.
평소보다 마나를 운용하는 게 쉽다. 몸도 가볍다.
채앵!
헨리크의 검과 부딪히자 반동으로 손이 부스러질 듯 아프다.
무겁다. 묵직하다. 헨리크의 검은 무거웠다.
신중하게 검을 휘두르면서 헨리크 공작의 빈틈을 찾지만.
빈틈이 보이지 않는다.
에리엘이 더욱 많은 마나를 끌어올리며 검을 휘둘렀다.
빈틈이 없다면. 억지로 비집어서 빈틈을 만들어야 한다.
챙! 채앵!
휘두르는 검이 계속해서 막히고 있지만, 패배한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최상의 컨디션이니까.
예전에 벽처럼 느껴지던 격차도 줄어들었다.
최고로 도핑된 몸 상태라면 질 것 같지 않았다.
에리엘은 계속해서 헨리크 공작에게 달려들었다.
이쪽에서 큰 실수를 하지 않는다면.
공작에게는 반드시 빈틈이 나온다!
에리엘이 이를 악물었다.
검이 부딪히고 검기가 부서지면서 공중으로 흩어진다.
다시 검기가 맺어지고 검이 부딪힌다.
뭐 이런 사내가 다 있단 말인가...!
마치 철처럼 단단한 사내다.
그는 흔들리지 않는다.
"크흐흐! 역시 재미있어! 이래야지!"
헨리크 공작은 즐겁다는 듯이 검을 받아쳤다.
강자와 싸우는 것은 언제나 즐거웠으니까.
검을 잡았다면, 경지의 끝을 향해 단련해야 한다.
강자들을 쓰러뜨리고 먹어치운다.
그리고 위로 올라선다.
그렇게 강자를 쓰러뜨린 헨리크는 지금의 자리에 서있었다.
예전에 봤을 땐 부족한 느낌의 엘프였건만.
먹음직스럽게 달려드는 모습에 참을 수 없다.
이 끓어오르는 피와 마나는 한쪽이 부서지기 전까지는 진정되지 않겠지.
헨리크 공작이 웃음을 터트렸다.
"크흐흐! 더욱 달아오르게 해줘라!"
채챙!
"큿.."
에리엘이 검을 내질렀다.
최상의 컨디션이건만. 격차가 존재한다.
아니, 능력치는 같지만 숙련도에서 밀렸다.
철과 같은 사내지만 빈틈은 생긴다.
팔 근육은 저려오고 손은 부서질 것같다.
마나를 너무 사용해서 심장이 터지려고 한다.
'처음부터 모든 마나를 끌어올리세요.'
검을 휘두르는 것에 집중을 해야할 터인데.
강한윤의 말이 떠올랐다.
그렇게 한다 해서 쉬우면 이렇게 고전할 리가 없지 않은가!
에리엘은 팔이 부서져라 검을 휘둘렀다.
그녀가 더욱 마나를 끌어올린다.
헨리크의 빈틈을 만들기 위해서 검의 궤도를 비틀었다.
팔의 근육이 찢어질 것 같다.
"크흐흐! 재밌는 짓을 하는 구나!"
그럼에도 헨리크 공작은 잘 받아낸다.
무리를 해서라도 뚫는다.
마나가 뭉텅이로 빠져나가며 검기가 더욱 진해졌다.
더 이상 질질 끌 생각은 없었다.
밀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으니까.
에리엘이 땅을 거세게 박차고.
검을 빠르게 휘두른다. 다음 검격은 타이밍을 꼬아서 느리게.
상대방의 빈틈을 만들면서.
이쪽에도 빈틈이 생기지만.
'이겨야 한다.'
에리엘의 머릿속엔 승리뿐이었다.
어째서?
승리를 원한다.
아니, 그게 아니었다.
강한윤이라는 사내의 바람을 들어주기 위해서.
이기고 싶었다.
헨리크 공작의 반응에 틈이 생겼다.
그럴수록 에리엘의 몸에 잔 상처가 늘었다.
치명타를 한 번만 먹일 수 있다면!
또 다시 에리엘이 검을 휘둘렀다.
헨리크는 공격을 받아내고, 피하고, 흘려보낸다.
챙!
헨리크가 검을 받아 내는 순간.
에리엘은 찢어질 것 같은 통증을 느끼며 궤도를 비틀었다.
근육이 비명을 지른다.
마나가 순식간에 타오르면서.
헨리크의 빈틈을 파고 들어갔다.
지금이 마지막 순간인 것처럼.
모든 것을 쏟아내서 헨리크에게 쇄도했다.
'과감하다! 과감해!'
이런 검을 받아보는 게 얼마만인가!
빈틈을 만들기 위해 빈틈을 내어주다니!
에리엘의 검을 막아 내기 위해서 움직이지만.
늦었다.
헨리크 공작은 에리엘의 검이 다가오는 것을 지켜보았다.
에리엘의 몸에서 마나가 피어오르는 것을 보며 깨달았다.
그녀는 죽을 각오로 검을 휘둘렀다.
결투에서 최선을 다하지 못한 쪽은 나였구먼.
그런 생각을 하던 헨리크 공작의 목에 검이 닿았다.
"...끝입니다. 헨리크 공작."
검을 잡고 있는 에리엘이 손이 떠릴고 있었다.
"이게 마지막 공격이었을 터."
이걸 막아내지 못했다. 헨리크 공작은 아쉬움을 담아 말했다.
"그래. 나의 패배야."
정석적으로 움직여서 승기를 잡으려고 했건만.
오히려 패배해버리는 꼴이 되어버렸다.
아쉬움을 토로하는 헨리크 공작에게 에리엘의 몸이 기울어졌다.
모든 힘을 쏟아낸 에리엘이 기절해서 쓰러진다.
헨리크 공작이 에리엘을 받아들었다.
쓰러진 이가 승리했고, 서있는 헨리크 공작은 패배했다.
상대에게 모든 것을 내보이라고 말한 그였지만.
모든 것을 내보이지 못한 것은 정작 본인이었다.
"...완전히 패배해버렸군."
공작이 씁쓸하게 웃었다.
***
결투가 끝난 뒤.
헨리크 공작은 준비해놓은 서류에 간단하게 사인을 휘갈겼다.
간단한 동작이었지만, 그 안에 담긴 내용은 무겁다.
마르벨스는 오드웰 연합군에게 투항하겠다는 항복 선언 서약이었으니까.
[마르벨스를 점령했습니다!]
[행동 경험치를 획득합니다!]
이 것으로 마르벨스의 점령은 끝이 났다.
사인을 끝마친 헨리크 공작은 이가 보일 정도로 크게 웃고 있었다.
"역시 영지를 다스리는 건 내 몸에 영 맞질 않아! 이번 결투를 하고 나니 깨달음을 얻었다! 나를 북부로 보내줘라!"
"...건의는 해보겠습니다."
이 인간. 싸우고 싶어서 일부러 투항한 거 아냐?
패배하자마자 영지를 넘기고 북부로 보내달라고 하다니.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다.
북부로 보내는 건 내가 결정할 문제도 아니고.
기절해있는 에리엘이 알아서 할 일이니, 그녀가 깨어나면 얘기하도록 하자.
"그런데 여기에 있는 내용은 뭐지?"
"투항했으니 적당한 권리를 챙겨준 겁니다."
내용을 보지도 않고 사인한 헨리크 공작이 되물었다.
마르벨스의 내정 권한은 오드웰 연합군과 헨리크 공작이 가진다.
헨리크 공작의 재신을 유지한다.
헨리크 공작의 부는 유지해주기로 결정을 내린 사안이었다.
항복해주는 만큼 챙겨준다는 걸 알린다면, 다른 지역도 항복할 확률이 올라가니까.
대신 오드웰 연합군은 마르벨스의 자원과 영웅들을 사용할 수 있으니 서로 윈윈이었다.
"그래! 서로 좋은 관계를 맺으면 더욱 좋지! 대신에 나는 북부로 꼭! 꼭! 보내주도록 하게!"
헨리크 공작이 손을 잡은 채로 위아래로 거세게 흔들었다.
팔이 부서질 것 같다. 뭐 이렇게 힘이 쎼냐고.
"그럼 일단락 됐으니 저는 대장님에게 가보겠습니다."
에리엘은 마지막으로 검을 겨누고 쓰러졌고, 결투가 끝남과 동시에 의무대로 향했다.
승리한 것으로 보이지만, 패배했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헨리크 공작이 자신이 패배했다면서 얘기하지 않았으면 상황을 몰랐을 지도 모른다.
이겼으니 된 거지만. 에리엘의 몸 상태는 좋아보이지 않았다.
새 파랗게 보일 정도로 마나를 끌어올렸고..
영약 부작용으로 디버프를 받은 몸이 좋을 리가 없다.
나는 에리엘의 상황을 살피기 위해 의무대로 향했다.
병사들이 지키고 있는 입구를 지나쳐서 에리엘이 있는 방으로 향했다.
방 앞에도 병사들이 문을 지키고 있는 데.
들어가는 걸 막지는 않았다. 조심스럽게 문을 열자 내부에는 아무도 없었다.
선객이 없구나.
입구에서 지키고 있는 병사들과 대비되는 분위기다.
병실 구석의 침대에 에리엘이 누워있다.
나는 에리엘에게 다가가서 몸을 살폈다.
눈에는 약한 다크서클이 있어서 피로해보이고. 손은 차다.
강인한 야만의 영약과 마녀의 보양식의 부작용이었다.
거기에 결투에서 몸을 혹사시킬 정도로 움직였으니 당연히 몸 상태는 좋지 않다.
몸이 망가지지 않도록 보양식을 먹이는 게 지금의 최선이리라.
아이템을 만들어서 가져다주기 위해서 나가려고 하는데.
에리엘이 몸을 뒤척였다.
"읏..."
내 손을 따뜻한 손난로처럼 만지던 에리엘이 나를 끌어당겼다.
몸 상태가 안 좋아도 에리엘이 훨씬 강하다.
반항도 하지 못하고 에리엘에게 붙잡혀서 침대로 들어갔다.
마치 죽부인을 껴안듯이 팔다리로 나를 감싼다.
숨소리도 들릴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 에리엘은 몸을 최대한 밀착했다.
이대로 에리엘이 깨어난다면 조금 그런 상황 아닌가?
그때, 에리엘의 눈이 살짝 떠지고.
"..."
에리엘과 눈이 마주쳤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