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화 〉 8화
* * *
"어우 피곤해."
동굴로 가기 위해서 잠도 얼마 못자서 그런지 몸이 찌뿌둥하다.
나는 기지개를 켜면서 느긋하게 걸었다.
'내가 서두른다고 달라지는 건 없지.'
전투는 이미 끝나있으니까.
거기에 전투력도 답없는 내가 있다고 해서 전황이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다프닐의 성문으로 다가가자 오크 병사 하나가 소리쳤다.
"인간... 인간입니다!"
"야이 새꺄. 이번에 새로 오신 중위님이잖아."
"아 그렇습니까? 몰랐습니다."
나는 가볍게 웃으며 경례하고 다프닐 안으로 들어갔다.
신병이라. 나도 저럴 때가 있었지.
대한민국 군대의 이등병 시절을 떠올리면서 안쪽으로 이동했다.
'... 불쾌한 냄새.'
성 내로 들어오자마자 코를 찌르는 냄새가 난다.
주변에 파리가 왱왱 날아다니는 것만으로도 누군가 죽었다는 것을 짐작하게 만들었다.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냄새가 짙어졌다.
병사들이 시체를 치우는 중이었다.
놀란 표정으로 죽어있는 병사부터 곤히 잠든 것처럼 죽은 병사까지 보였다.
여기에서 처음으로 죽음을 마주했다.
게임이라고는 할 수 없는 디테일.
아니 그냥 현실이었다.
잔인하기 짝이 없는 현실.
그로테스크한 것에 대한 내성이 높아서 시체를 보는 건 그렇게 큰 충격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하지만 병사들의 표정과 냄새. 분위기 그 모든 것은 끔찍하기 그지없다.
시체를 수레에 담아서 옮기는 것까지 보고 난 뒤.
나는 생각을 비웠다.
여기가 게임이든 현실이든 중요하지 않으니까.
내가 강한윤 중위로서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나는 내 할 일만 생각하자.'
오드웰 연합군을 승리로 이끈다.
무슨 짓을 해서라도 승리로 이끌어서 세력통합을 이룬다.
그것만을 생각하고 움직이도록 하자.
나는 마음을 다 잡은 뒤에 다프닐의 안쪽으로 이동했다.
'무너진 성벽은 벌써 복구작업으로 들어가고 있고... 무난하네'
포로로 붙잡힌 다프닐의 병사들이 무너진 성벽을 보수하고 있었다.
복구를 끝낸 뒤 마법을 부여하면 저 작업은 끝나겠지.
우리가 다프닐을 점령했다 한들 다른 지역에서 지원이 오거나, 다른 문제가 생겼을 때 방어할 필요가 있다.
'뭐... 다들 열심히 해주고 있네.'
다프닐의 내정작업이 수월하게 진행되고 있나 열심히 돌아다녔지만.
특별히 신경쓰이거나 거슬리는 요소는 없었다.
나는 주변에 돌아다니는 병사를 한명 붙잡아 말을 걸었다.
"에리엘 대장님은 어디 계시지?"
"...? 아.. 그.. 북쪽의 청사에 계십니다."
아직 내 얼굴이 많이 알려지지 않았는지.
미묘한 표정을 짓던 병사가 내 계급장을 쳐다본 뒤 빠릿하게 대답한다.
역시 계급이 좋긴 좋아. 인간이라고 무시당하는 일도 없고.
청사에 들어가자 에리엘이 반겨주었다.
"드디어 왔군. 강한윤 중위."
기다렸다는 듯이 말을 걸어온 에리엘은 옅은 미소를 띠고 있었다.
속을 썩이던 다프닐을 점령했으니 에리엘이 기분 좋은 것도 당연한 일이다.
나도 덩달아 웃으면서 에리엘의 맞은편에 앉았다.
"이번에는 중위의 작전이 매우 큰일을 해줬다. 처음에 무작정 의심했던 건 사과하도록 하지."
"괜찮습니다. 그럴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건 당연한 거지.
나라도 갑자기 임관시켜달라는 인간이 있다면 의심한다.
의심을 안 하는 게 오히려 이상하리라.
에리엘이 책상 위에 있던 주머니를 집어서 내쪽으로 던졌다.
생각보다 묵직한 소리가 난다.
"이건 뭡니까?"
"이번의 공적이다. 전리품에 비하면 많은 건 아니지만 그 이상으로 하기엔 조금 빠듯해서 말이야."
"어우 뭘 이런 걸 다 주십니까."
그렇게 말하면서 나는 주머니를 집었다.
주머니가 벌어진 틈으로 들어있는 게 뭔지 살짝 보인다.
노란색으로 찬란하게 빛나는 금화였다.
'돈은 있으면 있을수록 좋지.'
작전을 위해 부대의 돈을 사용하는 것도 좋지만,
내 장비를 맞추려면 돈이 필요하다.
그것도 절대적으로 많은 양의 돈이 필요하다.
'게임이었다면 부대의 돈을 막 빼서 썼겠지만 그건 불가능해.'
게임에서처럼 관여할 수 있는 부분이 많지 않고 운영의 방식이 많이 달랐으니까.
내가 직접적으로 운영에 참여하는 게 아니다.
간접적으로 의견을 제시하고 부대의 지휘관이 승인을 해야 하는 구조였다.
내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은 많이 없었다.
계급이 올라가서 부대를 따로 지휘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게 쉬울 리가.
아직 중위에 불과한 내가 그렇게 되려면 최소 중령. 혹은 대령까지는 올라가야 한다.
"밝은데서 보니 얼굴이 반쪽이군 강한윤 중위. 휴식은 제대로 취하고 있나?"
"당연히 푹 쉬고 있습니다."
물론 거짓말이다. 요새는 좀 바빴으니까.
낮에는 부대의 일처리와 함께 작전을 준비한다.
밤에는 노아의 마사지를 해주느라 피로가 안쌓일 수가 없었다.
체력 스테이터스가 낮아서 피로도 생각보다 안풀리는 게 가장 큰 문제였다.
그 와중에 에리엘이 고마운 얘기를 꺼냈다.
"이번에 제일 고생하기도 했고 공적을 세웠으니 오늘은 가서 쉬도록. 아니, 명령이다. 쉬어라."
"...알겠습니다."
나는 입고리가 올라가려는 것을 참아가면서 대답했다.
휴식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군대에서 개인 시간이 주어진다는 건 특혜 중에 특혜니까.
조용히 경례를 하고 청사를 뒤로 하고 나왔다.
'이래서 에리엘이 좋다니까?'
부하들을 신경써주고 착하고 이쁘고 좋은 향기까지 나는 지휘관이 세상에 어디 있겠는가.
나는 방금 받은 주머니를 열어서 내용물을 확인했다.
금화 15개.
이 정도면 일반 시민들에게는 풍족한 돈이겠지만 나에게는 아니다.
'돈 쓸 곳이 한 두 곳이어야지.'
아이템 제조, 스펙을 올리기 위한 장비 등등 챙기고 싶은 게 많았다.
앞으로 필요한 스탯을 보정하기 위한 물품들을 생각하면.
돈은 무조건 모아둘 필요성이 있었다.
'결국에 답은 마법계열인가?'
검이나 방패를 들어서 싸우기엔 체력과 힘이 너무 낮다.
그럴 바엔 돌연사하지 않을 정도로만 체력 스탯을 찍은 후.
나머지는 전부 지능에 올인 하는 게 낫겠지.
'어차피 공격당하지 않는 포지션을 잡으면 되니까.'
마법계열로 육성한다면 체력에 대한 부담감이 조금은 덜어진다.
물론 그렇게 하더라도 마지막 즈음엔 스탯이 부족해지겠지만 해결 방법은 없는 건 아니다.
'등급이 높은 음식이나 포션으로 스탯을 뻥튀기 한다.'
높은 난이도에서는 일상이라고 할 수 있는 도핑.
하지만 후반에서부터 도핑 하는 게 아니라.
초반부터 있는 것 없는 것 전부 털어서 전투마다 도핑을 해야 할 수도 있다.
자세한 건 그때가서 생각하면 되고.
돈을 벌 수 있는 방법이나 꼼수는 많으니까. 큰 걱정은 하지 않았다.
'일단은 돈이 생겼으니 마법서부터 구매하자.'
나는 마을의 잡화가게를 찾았다.
마법을 뭘 고를 지는 이미 생각해뒀으니 구입만 하면 된다.
'나는 화염 마법과 대지 마법으로 가는 게 맞아.'
블블에서의 마법은 조합이 중요하다.
어떤 속성으로 조합을 짜느냐부터 어떻게 연계를 할 것인지 스킬을 연구하는 게 기본일 정도니까.
화염계 마법의 특징은 데미지가 강하다는 것.
하지만 데미지가 강한 만큼 상태이상을 걸 수 있는 기술이 적고.
아군에게도 피해를 입힐 수 있다는 리스크가 존재한다.
'하지만 그 모든 리스크를 씹어 먹고도 화염 마법이 1티어인 이유가 있지.'
소규모, 대규모 교전 할 거 없이 모든 전장에서 강력함을 보여준다는 것.
상대가 다가오기 전에 쓰러뜨리면 된다는 마인드로 공격에 전부 투자해버리면 무지막지한 화력을 보여주는 게 화염계 마법이다.
거기에 대지계 마법과 연계를 해서 데미지를 뻥튀기를 하고 상태 이상을 건다?
컨트롤만 된다면 무슨 적이든 1:1로 이길 수 있다는 자신이 있었다.
'얼음계도 좋아서 조금 아쉽긴 하네.'
상반되는 속성 두 가지로 스킬을 배우지 못하는 이유는 히든 스탯 '친화력'이 있었다.
화염계 마법을 위주로 배우면 화염친화력이 올라간다.
얼음계 마법을 위주로 배우면 얼음친화력이 올라간다.
만약 두 가지를 같이 배우면? 모든 친화력이 사라져버리게 된다.
'친화력이 쓰레기 스탯이면 모르겠지만...'
친화력은 해당하는 속성의 데미지를 올려주고 내성을 늘려주는 역할을 한다.
굳이 두 가지 속성을 다 배워서 약해질 이유가 없었다.
'안 그래도 망캐인데. 여기서 더 망캐가 되면 캐릭터를 새로 키워야 한다고.'
딜도 안 나오고 상태이상도 걸 수 없는 희대의 쓰레기 캐릭은 상상하기도 싫었다.
나는 화염계 1티어 마법인 화염구, 점화, 화염방벽 3개.
대지계 1티어 마법인 오염, 석화, 화석 강타 3개를 배울 생각이었다.
'다른 스킬도 많이 있긴 한데...'
그다지 도움이 안 되는 기술들을 배울 필요도 없고 그걸 살 돈도 없었다.
마법책은 쓸데없이 가격이 비쌌으니까.
1티어 마법책이 개당 1골드 정도를 요구한다면, 2티어 마법책은 개당 10골드 이상을 요구한다.
'망할.'
돈을 어디서 벌어놓던가 하지 않으면 계속 이렇게 쪼들리게 진행하지 않을까.
나는 마법책 하나를 집어서 조심스럽게 열었다.
그러자 눈앞에 띠링 하고 메시지가 떠오른다.
[화염구를 배우시겠습니까?]
[점화를 배우시겠습니까?]
[화염방벽을 배우시겠습니까?]
[오염을 배우시겠습니까?]
[석화를 배우시겠습니까?]
[화석 강타를 배우시겠습니까?]
배우고 싶다고 마음속으로 생각하자, 잡고 있던 책이 먼지가 되어 휘날렸다..
머릿속으로 흘러들어온 방대한 지식에 의해 순간 두통이 찾아온다.
나는 인상을 살짝 찌푸린 뒤, 마법을 영창하는 법을 떠올렸다.
'한번 사용해볼까.'
나는 아무도 없는 공터로 이동해서 조용히 주문을 외웠다.
"화염구."
몸 안에 있는 마나가 순식간에 빠져나가면서 사람의 머리만한 화염구가 생성된다.
날리는 건 어떻게 하지?
화염구를 날리고 싶은 방향을 머릿속으로 생각한 뒤 손을 뻗었다.
그러자 화염구가 날아가며 작은 폭발이 일어난다.
'이런 느낌이구나.'
이질적이지만 재밌다.
하지만 게임에서 조작하는 느낌과 차이가 심하다.
게임에서 하듯 현란한 컨트롤로 공격하는 건 지금 단계에서 무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법을 사용하는 것에 익숙해지기 전까지 숙달이 필요하다.
'마법 한번 썼다고 마나가 바닥이 났네.'
이걸 마법사라고 할 수 있을까?
마법 한 번 사용하고 다음 마법을 위해서 5분을 쉬어야한다니.
일단 마나를 올려야 할 필요성이 있었다.
어디서 마나 호흡법에 관련된 책을 얻으면 좋겠지만, 그럴 필요가 없다.
나에겐 노아와 채음보양이 있으니까.
***
노아는 강한윤의 방 앞에 섰다.
마사지를 처음 받은 날로부터 며칠이 지났다.
강한윤의 의심스러운 행동에 비해서 마사지의 효과는 탁월했다.
신체능력이 향상되고 마나를 사용하는 것도 더 수월하다. 전체적으로 몸이 가벼워졌다.
하지만 문제는 몸이 민감해졌다.
마사지를 받은 횟수가 올라갈수록 강한윤의 손짓 한 번에 더욱 민감하게 반응하게 된다.
잠을 자기 전 마사지를 받을 때의 감각을 떠올리면서 정신없이 자위를 하는 게 일상이 되어버렸다.
마사지를 받지도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노아의 심장이 미칠듯이 뛰고 있었다.
그리고 하복부가 근질거리는 느낌을 받았다.
'이래서는 마치..'
자신이 인간의 손길로 쾌락을 느끼기 위해서 찾아온 것 같지 않은가.
아니. 전혀 아니었다.
이건 전부 복수를 위해.
강해지기 위해서 하는 행동일 뿐. 그 이상의 가치를 지니지 않은 일이었다.
노아는 그런 생각을 하며 방문을 두드렸다.
'진정하자. 진정.'
이렇게까지 긴장할 이유는 없으니까.
그저 강해지기 위해서 매일 하는 일이다.
검을 휘두르고, 활을 쏘고, 마나 호흡법으로 강해지는 것처럼.
인간의 능력을 사용해서 강해지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끼익. 하는 소리와 함께 방문이 열린다.
그리고 평소와 같은 아로마향이 흘러나왔다.
노아의 심장 박동이 더욱 거세졌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