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7화 〉 이겨도 바쁘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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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제국군이 멀찍이 물러났다는 보고를 받고 나서야 제 갈 길로 떠났다.
너무 의심이 많은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하나, 제국군이 돌아가는 척 기습을 할지도 모른다는 국왕의 한숨 섞인 명령에 따르지 않을 수도 없었다.
더구나 우리는 국왕파였으니 더더욱.
“ 모두들, 정말로 고생이 많았습니다. 여러분 모두가 힘을 모아 싸웠고, 그 과정에서 희생을 치러야 했기에 얻은 승리입니다. ”
헬레나는 국왕을 수도까지 무사히 데려다준 뒤, 수많은 군사와 귀족들 앞에서 고개 숙여 인사했다.
여기서부터 각자가 데리고 온 군사를 이끌고 영지로 돌아가야 했기에 건네는 마지막 인사였다.
단, 마지막이라 해서 영영 얼굴도 안 보고 산다는 뜻은 아니다.
“ 각자 영지로 돌아가셔도 밀린 일이 많아 고생이 많으시겠지만… 각 귀족께서는 그를 위로하도록 노력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 공작님의 명을 따르겠습니다. ”
선두에 선 귀족들이 입을 모아 고개를 숙이자, 헬레나가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이 제법 마음에 들었는지 얼굴을 붉히는 사람들도 제법 많이 보였다.
최대한 냉정하게 봐도 눈을 끄는 모습이니 그럴 만도 했다.
“ 더 이상 길게 말해봐야 아무런 의미가 없겠지요. 자, 다들 집으로 돌아가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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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을 지면 당연히 문제가 생기지만, 이겨도 큰 문제가 생긴다.
이겨도 저도 사람이 죽어나가는 것은 똑같으며, 전후처리라는 것을 처음 해보게 된다면 더더욱 마음이 무거웠다.
중상자도 있었고, 사망자도 있었다.
나는 오랜만에 돌아온 크라우저 저택 집무실 탁자 앞에 앉아 여러 이름과 숫자가 적힌 보고서를 쭉 훑으며 긴 한숨을 토해냈다.
이만큼 많은 사람들이 눈을 감았어도 크게 흔들리지 않는 멘탈이 무서울 지경이었다.
“ 원래 사람을 단순한 숫자로 계산해서는 안 되지만, 전쟁터에 나서면 그래야 할 때도 있는 법이잖아. 너무 신경 쓰지 마. ”
“ …그래. 그래야지. ”
내 속이 복잡하다는 것을 알았는지 헬레나가 웃으며 말을 걸었지만, 마치 애써 웃는 것만 같았다.
마음이 무거워서 그런지 저도 모르게 어두운 쪽으로 생각이 향하는 탓이 아닐까 싶다.
그러나, 어찌 되었던 쌓인 문제는 해결하고 봐야했기에 수북하게 쌓인 서류더미를 조금씩 깎아 나가기 시작했다.
전쟁 준비로 인해 제법 돈을 썼지만 원래 부유한 집안이기도 하고, 배상금도 받을 예정이라 예산이 모자라지는 않을 듯싶었다.
하루, 또 하루.
귀한 목숨을 물질로 대신한다는 것이 말이 안 되지만 최대한 성의를 담아 유족들을 위로했다.
이 대륙에 사는 사람들은 이러는 것만으로도 무척 황송해했고, 덕분에 마음의 짐을 조금이나마 덜 수 있었다.
“ 아이를… 내년에 갖고 싶다고? ”
배상 문제가 일단락된 낮.
나는 몸이 나른해지는 오후 무렵에 이스의 방을 찾았다.
그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되묻는 아이에 관한 이야기를 마무리 짓기 위해서.
“ 예. 장인어른께서도 아시다시피 전쟁을 겪어야만 했으니까요. ”
“ 전쟁을 겪는 것과 아이가 무슨 상관이 있는가? ”
“ 피와 원한이 묻은 몸으로 아이를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
전쟁 중에도 아이는 태어난다지만, 여러 사람을 죽여 놓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이를 만든다는 것이 몹시 마음에 걸렸다.
그렇기에 아이를 만들 계획을 미루기로 정했다.
물론 나 혼자서 정한 것이 아니라 헬레나와 충분히 이야기를 나누고 내놓은 결과였다.
“ 피와 원한이라… 그렇군. 자네도 그렇고, 헬레나도 그렇고… 공을 제법 크게 세웠다고 들었네만. ”
“ 예. 사람을 많이 죽일수록 공이 커지는 것이 전쟁의 웃기는 점이라 할 수 있겠지요. 제 터전을 지키기 위함이라고는 하나 많은 이들이 목숨을 저와 헬레나의 손으로 끊었습니다. ”
“ 으음……. 자네의 눈빛만 봐도 많은 일이 있었음을 알 수 있겠어. ”
그 또한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
이스는 그 말을 끝으로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 탓에 몹시 묵직한 침묵이 목을 무겁게 짓눌렀으나, 귓가에 들려오는 이스의 목소리가 그 무거움을 덜어주었다.
“ 공작가의 후계자는 내게도 무척 중요한 일이기는 하고, 헬레나의 나이도 있어 마음이 조급해진 탓도 있네. 하지만 자네가 말한 대로 피 묻은 몸으로 아이를 만들 수도 없을 노릇이겠지. 이해하네. ”
“ …감사합니다. ”
“ 감사할 것까지야 있겠는가. 결국 아이를 만드는 두 사람의 의견이 가장 중요한 것이지. 아무튼 내 아내에게도 자네의 뜻을 전해 오해가 없도록 하겠네. 혹여 부부사이가 틀어지지 않았는가 하는 걱정에 사로잡힐 지도 모를 노릇이니까. ”
“ 이런 말이 위로가 될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저희 사이가 틀어질 일은 없을 겁니다. ”
만약 사이가 틀어진다면 어떻게 될까. 생각하기도 어렵지만, 그렇게 될 것을 억지로 상상하자 소름이 돋았다.
그것은 나름대로 좋은 성과를 얻었던 것들이 전부 물거품처럼 사라진다는 것이니까.
물론 이스는 그를 모를 테지만, 힘을 담아 말을 한 것이 믿음직했는지 입꼬리를 슬쩍 들어올렸다.
“ 고생했어. 아버지는 별 말씀 없으시지? ”
다시 집무실로 돌아오자, 홀로 서류작업을 하고 있던 헬레나가 반겼다.
이브는 부족한 점을 보완하겠다며 방에 콕 박혀있었고, 엘렌은 친구들과 교류를 하라는 명분으로 보냈으니까.
“ 다행히 이해해 주시더라. ”
나는 집무실 책상 옆에 놓인 의자가 아닌 손님맞이용 소파에 앉아, 왼쪽에 빈 자리를 가볍게 두드렸다.
헬레나는 그것을 물끄러미 쳐다보다, 기다렸다는 듯 다가와 내 품으로 파고들었다.
“ 벗을까? ”
헬레나가 가슴에 묻었던 얼굴을 들어 올리며 물었다.
붉게 물든 뺨과 몹시 반짝이는 눈빛이 강렬하게 느껴졌다.
전쟁과 그 뒷수습을 하느라 바빴던 탓에 제법 불만이 쌓였고, 그것이 기대감으로 드러난 듯한 눈치였다.
생각지도 못한 상황으로 흘러가는 탓에 내심 당황하기도 했으나 기대도 되었다.
여태껏 숨 돌릴 틈도 없었으니 지금 저질러도 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뇌리를 스치기도 했다.
낮에 몸을 섞은 적이 한두 번도 아니었고.
나는 옷깃을 풀어헤치고, 자연스레 제복의 상의를 벗는 헬레나를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 대신 천천히, 부드럽게 하자. 그리고 각 성문 시찰을 나가야 하니까 늦지 않도록 하고. 알았지? ”
“ …응! ”
그 후, 덜 자란 아이처럼 기뻐하며 몸을 비비는 헬레나와 함께 시간을 보냈다.
미리 얘기했던 대로 시간에 맞춰서.
“ 하던 중에 끊으니 너무 아쉬워……. ”
헬레나는 함께 방 안 욕실에서 더럽혀진 몸을 씻고, 아쉬운 듯이 입맛을 다시며 옷을 갈아입었다.
밤을 새는 경우도 많았던 중 고작 한 두 시간으로는 성에 안 차는 모양이었다.
그래도 조금 전과 비교 될 만큼 무척 기분이 좋아 보였고, 은근히 아랫배를 쓰다듬는 모습에서는 아찔함과 여유를 느낄 수 있었다.
배가 차면 마음이 놓인다고 하더니…….
“ 나머지는 밤까지 미뤄두자. 알았지? ”
“ 응. 즐겁게 기다릴게. 덕분에 시찰도 잘 끝낼 수 있을 것 같아. ”
나는 장롱 앞에서 헬레나와 어깨를 나란히 하며 옷을 갈아입고, 미리 준비해 두었던 말을 타고 길을 나섰다.
저택 사람들은 위엄을 위해 마차를 타야 한다고 말했지만 그처럼 요란한 행사가 아니었기에 정중히 사양했다.
더구나 효율을 위해 헬레나가 북문과 동문, 내가 서문과 남문으로 갈라졌기에 더더욱 마차를 쓸 이유가 없었다.
헬레나도 재빨리 돌아오려면 마차보다 직접 말을 모는 것이 낫다고 말했었다.
결국, 서로 말을 타고 달려가는 것이 시선도 최대한 덜 받고 빨라서 좋다고 생각해 행동한 결과였다.
“ 대공님! ”
히히힝! 울음 소리에 맞춰 남문 앞에서 말을 멈추자, 문을 지키고 있던 병사들이 절도 있게 고개를 숙였다.
영지 방어를 위해 남은 병사들이라 상대적으로 피로가 적어 보였지만 기세만큼은 전쟁을 겪은 병사들 못지않았다.
“ 다들 고생하는 와중에 들러서 미안합니다. 별 다른 일은 없었죠? ”
“ 물론입니다! ”
나는 어쩔 줄 몰라 하는 병사들을 달랜 뒤, 남문 책임자와 만나 여러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영지를 나서기 전에도 확인했었던 성벽이나 병장기의 상태, 필요한 물품이나 특이사항 등을 종이에 메모하고, 품에 고이 넣어 보관했다.
그 결과, 남문 쪽에는 큰 이상이 없음을 확인하고 곧장 서문으로 말머리를 돌렸다.
그런데, 생각도 안했던 홀랜드와 서문에서 마주치고 말았다.
마주쳐서 곤란할 것이야 없지만 깜짝 놀랄 정도였다.
“ 아니, 왜 홀랜드가 여기 있습니까? ”
“ 그야 영지를 방어하는 책임자이니 여러 성문을 도는 것이 당연하지요. ”
그랬지. 평소 한 군데 죽치고 앉아 보고를 듣는 것이 보통이라 생각했던 탓에 깜빡했지만, 홀랜드는 책임감 있는 남자였다.
이스가 있다고는 하나 우리가 자리를 비운 동안 빌 자리를 맡길 수 있는 것도 그 책임감을 믿기 때문이었고.
나는 그 사실을 새삼 깨달으며 홀랜드에게 사과했다.
“ 미안해요. 한가하게 살던 모습이 눈에 박히다보니 그만……. ”
“ 크흠! 미안하실 것 까지는 없지만… 정 그러시거든 술이나 사주십시오. 그 정도면 충분합니다. ”
“ 예. 특별히 좋은 놈으로 보내드릴게요. ”
“ 그러시다면 됐습니다. ”
홀랜드는 새 술을 먹을 상상을 하자 기분이 좋아졌는지, 히죽 웃으며 나를 안내했다.
덕분에 홀랜드의 뒤에 우두커니 서 있던 서문 책임자는 할 일이 줄어 기뻤는지, 가슴을 쓸어내리며 긴 숨을 토해냈다.
“ 본래 내일이 되면 제가 보고를 하러 가려 했습니다만… 참 급하십니다. ”
함께 어깨를 나란히 하며 성벽 위를 걷던 중, 홀랜드가 어이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불만이 있어서가 아니라 걱정된다는 기색이 가득해 오해할 여지조차 없는 모습이었다.
“ 전후처리는 빠를수록 좋잖아요. 물론 야근은 안 하니 걱정 마세요. ”
“ 공작님과 교분을 두텁게 가지시는 것도 야근 아닙니까? 소문으로는 동이 틀 때 까지 제대로 주무시지도 못하는 일이 많으시다 들었는데요? ”
“ 예? 그런 소문이 있었습니까? ”
본래 낯 뜨거운 소문을, 그것도 그 당사자라 할 수 있을 귀족 앞에서 태연히 내뱉기가 쉽지 않다.
경우에 따라서 농락했다는 죄를 뒤집어씌워 온갖 처벌을 내릴 수도 있었다.
그러는 것이 당연한 세계였으니까.
다만 내게 이야기를 한 것이 홀랜드인데다, 나 또한 소문의 근원지를 찾아 뿌리 뽑을 생각이 없었기에 낯이 조금 뜨겁기만 했다.
약간 부끄럽기는 하지만 나와 헬레나를 깎아내리고자 한 것도 아니었을 테니.
“ 그럼요. 대공님의 정력이야 이미 온 공작령에 파다합니다. 아마 이웃 영지도 알지 않을까요?. ”
“ 홀랜드. 저는 그 정도로 강한 사람이 아닙니다. 어떻게 사람이 매일같이 그래요? 그리고… 대체 언제부터 그런 소문이 퍼진 겁니까? ”
“ 그야 대공님께서도 잘 아시지 않겠습니까? 아무튼, 저는 모두의 안위를 위해 소문이 퍼졌다는 것만 말씀드리겠습니다. ”
“ 쯧. 안위를 위해서라면 그런 소문이 났다는 것을 알리지 마셨어야죠. ”
나는 홀랜드의 넉살 좋은 분위기에 휘말린 것만 같아 머리가 지끈거림을 느꼈다.
이런 주제가 어색한 것도 아니고, 오히려 내가 주도적으로 꺼낼 때도 많았기에 익숙한 편이기는 했다.
막상 그 대상이 나라서 한숨이 나올 뿐이지.
“ 후우. 아무튼 그 이야기는 여기까지 하지요. ”
“ 아쉽군요. 늘 침착하신 대공께서 당황해 하시는 진귀한 모습을 더 볼 수 있었을 텐데. ”
홀랜드는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셨으나, 의외로 날카롭게 선을 지키며 한 발 물러서는 모습을 보였다.
많은 사람들을 휘하에 두고 명령을 내리는 입장이라 여러모로 갈고 닦인 모양이었다.
“ 참. 기왕지사 말이 나온 김에 한 가지 여쭤 봐도 괜찮겠습니까? 제법 무례한 질문이기에… 받지 않겠다 말씀하시면 조용히 입을 다물겠습니다. ”
점점 해가 저물기 시작할 무렵. 홀랜드는 나를 뚫어질 듯이 바라보며, 묵직한 목소리로 물었다.
은근히 긴장한 기색이 엿보이는 것은 물론, 능글맞은 사람이 맞나 싶을 만큼 딱딱하기 짝이 없는 표정까지 짓고 있었다.
무슨 말일까.
나는 호기심을 털어내기 위해서라도 고개를 끄덕였다.
말할 것도 없이 허락의 뜻이었다.
“ 대공님께서는… 공작님이 무섭지 않으십니까? ”
헬레나가 무섭지 않느냐라.
나는 갑자기 훅 치고 들어오는 것 같은 질문을 받자 목구멍이 막히는 것을 느꼈다.
아마 물을 마시는 중이었다면 깊은 사례에 들려 몇 분이나 기침을 토해내고 있었을 지도 몰랐다.
홀랜드가 던진 질문은 그만큼 날카로웠다.
“ 무섭다라. 일단 그렇게 물으시는 이유부터 들어볼 수 있을까요? ”
“ 전쟁터의 소식은 저희도 다 전해 들었습니다. 물론 대공께서도 크게 공을 세우셨다고 들었고요. 하지만……. ”
“ 그렇기에 그 모습을 직접 보고 겁에 질린 것이 아닐까, 그런 뜻이겠지요? ”
예. 홀랜드는 말이 잘린 것도 아랑곳 않고, 여전히 딱딱한 표정을 지은 채 짤막하게 답했다.
그렇잖아도 양면성이 짙은 헬레나가 날뛰었다는 말을 들었으니 두려울 만도 하지.
나도 축복받은 멘탈이 없었다면 겁에 질린 나머지, 쇼크로 죽었을 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그렇게 죽을 것이었다면 헬레나가 케인을 처형한 순간부터 불안에 떨며 지냈을 것이 분명했다.
그러다 겁에 질려 있다는 것을 헬레나가 눈치 채고, 이 몸이 열다섯이 되기 전에 죄다 무너졌겠지.
나는 강철 같은 멘탈을 요구하고 얻어낸 것이 새삼 신의 한수라 생각하며, 홀랜드를 향해 피식 웃었다.
“ 겁은 안 납니다. 물론 헬레나가 조용히 화를 내면 난처하지만, 작아질 때가 많지요. ”
“ 작아질 때요…? ”
홀랜드는 예상치 못한 답을 들었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떻게 보면 작아진다는 말 또한 겁이 난다는 뜻이 될 수도 있지만, 그 뜻으로 말한 것이 아니다.
아마 홀랜드도 그를 알았기에 고개를 갸웃거린 것이 아닐까 싶다.
그에, 나는 내심 기왕 남자끼리 진솔한 대화를 나눌 때인가 싶어, 제법 진솔하게 말할 생각을 끝낸 뒤 입을 열었다.
“ 예. 작아질 때요.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