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6화 〉 이겨도 바쁘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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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희들의 황제가 여기 있다! 제국의 잔당들은 당장 무릎을 꿇고 항복하라! ”
높은 성벽 위에 선 기사가 마나를 담아 최대한 우렁찬 목소리로 외쳤다.
마나가 실린 목소리는 칼과 창이 부딪치는 틈을 파고들 듯 하여, 살아남느라 여념이 없던 병사들의 눈길을 쉽게 돌릴 수 있었다.
그럼에도, 기사는 성을 지키는 루크의 명령을 받아 같은 말을 목이 쉬도록 외쳤다. 루크가 그리 명령했기 때문이다.
“ 후우……. ”
다 끝났구나.
선봉에 써서 싸우는 척을 하느라 진을 빼던 황태자, 리차드 헬리오스는 이마에 흐르는 땀을 훔치며 한숨 쉬었다.
흔히 말해 짜고 치는 판이라고는 하나 정말로 목숨을 잃을 가능성도 높았으니 긴장할 만도 했다.
그리고 그 긴장이 풀렸으니 긴 한숨이 나올 수밖에.
만에 하나 직접 나서야 할 사태를 대비해 황제를 기습하기 쉽도록 병영 배치를 바꾸기도 했으나, 마지막까지 가지 않아 다행이라고 리차드는 내심 안도했다.
권력 앞에서는 피도 눈물도 없다고는 하나, 직접 아비를 베는 패륜을 저지르지 않고 넘길 수 있었으니까.
다만, 황제와 어깨를 나란히 하듯 창대에 걸린 헬릭스의 목을 보며 입 안이 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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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전쟁은 머리를 족치면 끝난다고는 한다.
물론 그 때를 대비해서 지휘체계가 만들어져 있긴 하지만, 대체로 가장 높은 지휘관이 없어지면 한 풀 꺾인다는 것은 분명해 보였다.
그 머리가 황제라면 더더욱.
“ 이놈들! 황제에게 이 무슨 무례인가! ”
허세를 부리는 것일까, 아니면 늘 콧대가 높은 것일까.
납치당한 황제는 솔론트 백작 저택 방에 갇혔어도 위엄 있게 소리쳤다.
내일까지 제국군이 항복을 하지 않으면 목이 날아갈 판인데도 저러는 것이 신기하기만 했다.
죽지 않을 거라 믿는 건지, 겁에 질린 속내를 허세로 숨기는 것인지…….
“ 무례? 가만히 지내고 있던 우리 땅에 군사를 보낸 주제에 무례라……. ”
독방에서 가만히 이야기를 듣던 중, 헬레나가 눈썹을 씰룩이며 의자에 묶인 황제를 향해 발을 옮겼다.
한 발. 한 발.
손만 뻗으면 닿을 만큼 가까워진 순간, 앙상한 검은 오러를 길게 뽑아 왼손에 쥐었다.
“ 무, 무슨 짓을 하려는 것이냐? ”
무저갱 같은 눈빛과 싸늘한 기색을 접한 탓인지, 황제의 목소리가 파르르 떨렸다.
겁을 먹기 시작한 듯 눈동자 또한 초점을 제대로 잡지 못해 이리저리 헤엄치는 중이었다.
무슨 짓이라.
헬레나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그 말을 몇 번이나 중얼대다, 왼손에 든 오러로 황제의 허벅지를 가볍게 찔렀다.
체한 탓에 더부룩한 속을 풀고자 얇은 바늘로 손가락을 찌를 때처럼 얕고 가볍게.
“ 으, 으아아악!! ”
옆에서 지켜보던 내가 보기에도 깊게 들어가기는커녕 겉가죽만 살짝 찔렸을 뿐인데도, 몹시 고통스러움이 묻어나는 괴성을 질러댔다.
고작 이 정도에 온갖 인상을 찌푸리며 아파하는 꼴을 보니 어처구니가 없을 지경이었다.
그 엄살이 얼마나 심했는지, 한바탕 일을 저지를 것 같았던 헬레나도 눈을 동그랗게 뜨며 놀라워했다.
화가 풀려야만 해소되는 어둠 가득한 눈동자가 평소와 같은 빛을 띨 정도였다.
“ 고작 이 정도에 죽는 소리를 내나요? 대륙을 통일하겠답시고 전쟁을 선포한 인간이 맞나 싶을 만큼 속이 좁은데…? ”
“ 이, 이년…! 짐의 안전에 대고 그런 모욕을… 아아아악!! ”
대략 주삿바늘이 들어갈 만한 깊이로 오러를 찌르자, 다시 한 번 돼지 멱따는 소리가 귀를 때렸다.
날카로운 인상을 가졌다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혹시, 단순히 아파서 소리를 지르는 것이 아니라 그 뒤에 이어질 고통을 지나치게 상상한 탓에 그런 걸까.
나는 영문 모를 황제의 반응에 내심 한숨을 내쉬며, 구석 서랍장 위에 놓여 있던 작은 나무 상자를 가지고 왔다.
“ 으으… 이, 이게 무엇… 허억! ”
얼굴에 땀을 뻘뻘 흘리던 황제는 탁 소리를 내며 놓인 나무 상자를, 정확히는 그 안에서 튀어나오는 내용물을 보고 헛바람을 삼켰다.
그가 아껴 마지않던 헬릭스 백작의 목이었으니 당연한 반응이기는 했다.
황제 또한 사람인 것을.
“ 헤, 헬릭스 백작의 목이…! ”
“ 그래. 당신을 지키다 불쌍하게 목이 꿰뚫려 죽은 남자의 목입니다. 잘 봐둬요. ”
“ 이, 이럴 수는 없다. 그 강맹한 마스터가 어찌 이렇게 목만 덩그러니 남아 버렸다는 말인가……. ” “ 나도 마스터야. ”
본래 저런 말을 할 때에는 조금이나마 자부심이 섞여 나오기 마련이나, 헬레나의 표정에는 그런 기색이 하나도 없었다.
그저 덤덤하게 남을 보고 평가하듯 말하며, 어처구니없어하는 황제의 표정을 바라 볼 뿐이었다.
“ 남은 제국군에서 항복을 할지 안 할 지에 따라 당신을 어떻게 할지 결정할 겁니다. 병력 자체는 온전하니 당신의 야망을 따를 수도, 항복을 할 수도 있겠죠. ”
그러니 제국군이 부디 너를 살릴 결정만을 하길 기도하라.
헬레나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오러를 거둬들이고는, 미련 없이 방을 나섰다.
그 후에는 나와 공작 셋, 국왕이 다시 한 자리에 모여 회의를 나누었다.
주제는 앞으로 어떻게 대처하면 좋을지에 대한 것이나, 사실상 항복할 것을 알고 있었기에 여태껏 벌어졌던 일을 되새기는 중이었다.
“ 모든 분들께서 수고해주신 덕택에 제국 황제를 사로잡을 수는 있었소. 하지만… 저쪽 황태자가 정말 약속을 지킬까 염려되오. 황제가 없어졌으니, 혹여 다른 마음을 품을 수도 있지 않겠소? 그가 서명한 밀약이 우리 손에 있다 하더라도 말이오. ”
“ 물론 그럴 가능성을 아예 배제할 수는 없겠습니다만, 황제와 같은 꼴을 당하기 싫어서라도 항복을 할 겁니다. 또한 전하께서 말씀하신 밀약을 깬 신의 없는 자가 과연 지지를 받을 수 있겠습니까? ”
“ 제 생각도 킬리네어 공작과 같습니다. 내통을 했다는 것이 밝혀지면 지지를 받을 수 없고, 지지를 받지 못하는 자는 옥좌에 오를 수 없는 법이지요. 대공께서 하신 말씀을 빌려 보자면, 떡락을 피할 수 없는 상황이 될 겁니다. ”
크흠! 나는 고통스럽게 목구멍을 비집고 오르는 기침을 애써 삼키며 숨을 골랐다.
저 얌전한 칼리우드 공작 입에서 떡락이라는 표현이 튀어나온 탓에 깜짝 놀란 탓이다.
국왕은 한두 마디씩 거드는 공작들의 목소리를 들으며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이 제법 단호하게 주장들을 펼쳐 그런지 약하게 피어오르던 불안마저 낯빛에서 사라지고 있었다.
“ …음. 공작들께서 모두 그리 말씀하시니, 내 너무 비관적으로 생각했던 것 같구려. ”
“ 아닙니다. 비관적이라니요. 만약을 대비하시는 것은 위정자로서 옳으신 태도입니다. 지나친 낙관은 화를 부르니까요. ”
헬레나는 황송하다는 듯 고개 숙여 답하고는, 내일 있을 답을 기다려보자는 말로 이 대화를 매듭지었다.
만약 전쟁이 계속되면 각 공작들이 이끄는 진영이 번갈아가며 적의 보급을 끊고, 전면전에서는 CS탄보다 좀 더 독한 효과를 가진 연기를 일으키자 결정하기도 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을 먹고 너무 느슨해지지 않도록 병영을 돌고 있을 무렵, 제국 측에서 사자를 보내왔다.
백기를 들고 온 병사와, 그 옆에서 나란히 말을 탄 황태자가.
“ 어서 오시오. 결론은 내셨소이까? ”
끼이익. 국왕은 열린 성문 너머로 황태자가 들어오기 무섭게 질문을 던졌다.
서로 인사치례나 할 사이는 아니기에, 또 전쟁을 당해버린 입장으로서 날카로운 것이 당연했다.
황태자도 그것을 아는지 기분 나빠하기는커녕 당연하다는 듯 말에서 내려 고개부터 숙였다.
머리칼에 가려진 눈 너머로 비치는 눈빛이 날카롭게 번뜩이는 것이 조금 신경 쓰였지만, 억지로 예의를 갖추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 예. 의견을 모았습니다. ”
“ 그렇군. 그렇다면 그 모았다는 의견을 들어보고 제대로 들어보고 싶구려. ”
“ 물론입니다. 저 또한 바라던 바였으니까요. ”
황태자는 고개를 들자마자 부드럽게 웃으며, 말을 타고 직접 영내를 안내하는 국왕의 등을 따랐다.
성문으로 들어오며 무장을 해제했으니 해를 끼칠 수는 없을 듯싶었다.
실력을 숨기고 있다면 또 모를까.
“ 그래. 그 모았다는 의견이 부디 우리에게도 좋은 소식이기를 바라는데… 어떻소? ”
국왕은 저택 회의실에 도착해, 상석에 앉자마자 본론을 꺼내들었다.
다소 예의가 없어 보일지도 모르나 제국이 먼저 백기를 든 사자를 보냈으니 당연하다고도 할 수 있었다.
거기다 제 욕심을 채우고자 전쟁을 걸어 온 것도 제국이었으니.
“ 예. 정식으로 항복하기로 결정을 냈습니다. 그 대신이라 하긴 뭣하지만, 아버님이신 황제폐하의 신변은……. ”
“ 항복을 하시겠다니 돌려드릴 의향이 있기는 하오. 하지만, 조건이 있어야겠지. ”
“ 물론입니다. ”
후우. 황태자는 마음을 가라앉히려는 듯 숨을 고르며, 국왕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고개를 숙인다는 것은 주도권을 넘기겠다는 것과 같은 뜻이었으니까.
“ 상세한 조건은 갈리겠지만, 우리의 조건은 간단하오. 배상금, 그리고 현 황제의 퇴위 및 연금이오. ”
배상은 승자로서 당연히 뜯어내야 할 것이고, 황제의 퇴위는 전쟁 책임을 묻는 셈이다.
물론 그 뒤에는 이번 전쟁을 좀 더 수월하게 치르도록 도왔던 황태자를 위한다는 이유도 있었다.
설령 상황이 유리해진다 하더라도 우리가 먼저 신뢰를 등질 수는 없었다.
그래서도 안 되었고.
나나 헬레나, 그리고 두 공작들은 국왕과 마주보고 앉은 황태자와 국왕의 면면을 번갈아 바라보면서도 입을 꾹 다물었다.
공작이자 공을 세운 신하로서 자리에 참석하고는 있지만, 국왕이 미치지 않는 이상 끼어들지는 않을 터였다.
“ …그에 관해서는 좀 더 자세히 이야기를 나누어야 할 것 같은데, 괜찮으시겠습니까? ”
“ 물론이오. 한 번 말씀해 보시구려. 시간은 넉넉하니까. ”
씨익. 국왕은 힘겹게 입을 여는 황태자를 향해 웃으며, 얼른 말해보라는 듯 손을 내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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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 해가 하늘에 떠올라 있는 시각에 발을 들였는데, 벌써 노을이 지다니.
리차드는 병영에 도착하기 무섭게 그를 지지하는 귀족들, 또 벌벌 떨고 있을 주전파의 귀족들이 기다리고 있을 병영 회의장 텐트로 걸음을 옮겼다.
그의 품 안에는 소테른 국왕과 나누었던 이야기를 바탕으로 작성된 계약서가 웅크리고 있었으며, 그 계약서에는 각 나라를 상징하는 옥새가 찍혀 있었다.
공식 문서 중에서도 가장 권위가 높으며, 빼도 박도 못하게 되었음을 알리기 위해.
“ 전하! 폐하께서는…?! ”
“ 무사하십니다. 그보다, 할 이야기가 있으니 다들 자리에 앉으시지요. ”
리차드는 텐트에 들어오자마자 호들갑을 떠는 귀족 하나를 달래며, 가장 상석에 앉았다.
다 계획되었다고는 하나 세세한 사항을 의논하는 등, 협상이 아닌 속내를 제법 터놓고 진행하는 토론이 되었기에 몹시 지친 상황이었다.
그러나. 그런 이유로 귀족들 앞에서 틈을 보일 수는 없었기에, 황태자는 정신을 다잡으며 품속에 있던 계약서를 꺼내들었다.
솔론트 성에 들어가기 전 이곳 귀족들의 의견을 모으기는 했으나, 또 반발했을 경우를 떠올리며.
“ 말도 안 되는 일입니다! 폐하의 퇴위라니요! 이건 내정 간섭입니다! ”
역시나, 주전파 귀족 중 한 놈을 시작으로 대부분의 주전파가 반대 의견을 펼치고 들었다.
리차드의 동생이자 현 2황자의 위치에 선 청년 또한 그 중 하나였다.
잘 걸렸다. 리차드는 속으로 독기 가득한 미소를 지으며, 겉으로는 몹시 화가 난 듯 책상을 내려치며 목소리를 높였다.
“ 그러면 어쩌시겠소?! 이미 옥새로 찍어버린 계약을 위반할 것이오?! 힘의 논리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 국가 간의 관계라고는 하나, 우리는 엄연히 패배하고 말았습니다! 제국의 검이라 할 수 있을 헬릭스 백작은 목이 날아가 버렸고, 폐하마저 납치되어 있었단 말입니다! ”
“ 하, 하지만……. ”
“ 하지만, 같은 소리는 집어 치우시오! 사실 오늘의 패배나, 수많은 장병들을 잃은 이유 또한 폐하를 말리지 않고 은근히 전쟁을 부추긴 그대들 탓이 아니오! 그런데도 아직 정신을 못 차리셨습니까! ”
은근히, 그리고 확실히 주전파의 책임을 묻는 리처드의 목소리에 귀족들 모두가 어깨를 움츠리기 시작했다.
이만한 일을 부추겨 놓고도 실패했으니 그 책임이 얼마나 무거울지 깨달은 탓이다.
만약 책임을 지지 않고 회피하거나, 무거운 짐을 지운다 하여 반발하면 어떨까.
그럴 경우에는 명백한 책임을 물어 더욱 커다란 대가를 치르게 할 생각이었다.
황태자를 따르는 파벌에는 그만한 명분이 있었다.
무모한 전쟁으로 인해 애꿎은 목숨과 물자를 잃게 만들고, 제국에 커다란 손실을 안겨 주었다는 명분이.
“ 모두가 책임을 져야 하겠지! 전쟁을 반대했던 이들은 억울할지 모르나, 결국 따르게 된 우리의 책임도 분명 있을 겁니다! 허나 전쟁을 부추긴 그대들이 이렇게 반발만 한다면, 나는 더 큰 책임을 물을 수밖에 없습니다! ”
더해, 옥새가 찍힌 문서를 어기면 제국의 신뢰와 위신이 처참하게 깎이고 만다.
황태자는 그 점을 다시 한 번 꼬집으며, 반대의 목소리를 높이던 귀족들을 완전히 제압했다.
그 탓일까.
회의장 안의 공기가 가슴을 짓누르는 듯 묵직한 느낌을 안겨 주었다.
“ 후우……. 이제야 다들 알아들으신 것 같으니 더 말하지는 않겠습니다. 오늘 밤은 이곳에서 머무르되, 내일 일찍 떠날 수 있도록 철군 준비를 하십시오. 아시겠습니까? ”
“ 명을 따르겠습니다! ”
귀족으로서 신뢰와 명분을 깨뜨릴 수는 없다.
그를 깨뜨리는 순간 아무리 반항한다 한들 더한 나락으로 빠질 뿐이다.
이 자리에 앉은 귀족들 모두가 그를 알기에, 어쩔 수 없이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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