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0화 〉 전쟁과 주작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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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지만 강렬한 폭풍이 불자 안정을 찾던 분위기가 다시 한 번 혼란을 맞았다.
매직 아이템을 통해 위력을 줄였음에도 방패를 든 병사들이 볼링의 핀 마냥 사방으로 튕겨져 버린 탓이다.
당연히 대열 전부가 무너진 것은 아니었으나 그 구멍이 제법 컸다.
“ 크윽! 피해 상황은 어떠냐?! ”
“ 방패로 막은 덕에 큰 부상은 피할 수 있었지만, 충격이 워낙 심해 몸을 가누기가 어렵습니다! ”
자작은 보고를 받으며 바닥에 널브러진 방패병들을 날카롭게 노려봤다.
병사들이 한심해서가 아니라, 그들을 끙끙대게 할 만큼 강한 바람만이 불어 닥친 상황이 몹시 거슬렸기 때문에.
“ 멀쩡한 방패병들은 틈을 메우고, 몸을 딱 붙인 뒤에 자세를 낮춰라! 바람에 쓸려가지 마라! ”
다행히 작은 태풍은 정면에서 날아올 뿐 측면을 치는 기색이 없었기에, 자작은 그를 바탕으로 진형을 새로 짰다.
가장 앞에 자세를 낮춘 방패병을 세우고, 그 뒤에 선 사람이 등을 받쳐 튼튼한 벽을 만들기 위한 진이었다.
제국 병사들은 여느 질 낮은 이들과 다르게 자작의 명령을 아주 신속하게 잘 따랐다.
과장을 조금 보태면 눈 깜짝할 사이였다.
덕분에 폭풍이 아가리를 쩍 벌리며 덤벼들었어도 잠깐 흔들렸을 뿐, 바닥에 널브러지지 않고 버틸 수 있었다.
자작을 포함한 제국군은 그렇게 생각했었다.
폭풍의 몸집과 빠르기, 힘이 그대로였다면.
“ 아아악! ”
마치 폭탄이 터지는 것 같은 커다란 폭음이 귀를 때림과 동시에 몇몇 병사들이 하늘을 날았다.
조금 전까지 밀어닥친 폭풍이 엉덩방아를 찧게 만든 수준이었다면, 이번에는 약간이나마 무장을 한 병사를 허공에 띄울 정도였다.
그럼에도, 자작의 눈에는 마치 하늘을 나는 것처럼 보였다.
비명을 지르며 쓰러지는 병사들의 처참한 몰골을 보니 그런 생각이 들었다.
“ 이게 대체 무슨 일이란 말이냐! 분명 매직 아이템으로 위력을 죽이고, 방어를 단단히 해서 막아내기까지 했거늘…! ”
“ 아무래도 엘프 놈들이 힘을 숨기고 있었던 건 것 같습니다! ”
“ 콧대만 높은 귀쟁이 놈들이 이토록 영악할 줄이야…! ”
폐쇄적이고 자존심만 높은 종족 치고는 제법 영악한 태도를 접하자, 자작의 미간이 아주 화려하게 구겨졌다.
더 이상 구겨졌다가는 실핏줄이 터질지도 모를 만큼 심하게 구겨진 상태였다.
그나마 여유가 있었던 병사들은 그러한 자작의 안색을 살피며 낯빛을 굳혔다.
지휘관이 화를 내면 어쩔 수 없이 눈치를 봐야 했으니까.
그러나,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들이 눈치를 보며 마음 졸일 시간이 썩 길지는 않았다.
어느새 불바다를 뚫고 전열까지 다가온 검은 선 하나가 시원하게 뚫린 대열의 구멍으로 파고든 탓에.
“ 끄, 끄르르……. ”
검은 선은 칼을 든 헬레나였고, 타오르는 불빛 아래로 헬레나의 칼날이 번뜩일 때마다 하나 이상의 목이 발아래 뒹굴었다.
자작은 전열에서 몇 걸음 떨어진 채 그 모습을 바라보며 황급히 외쳤다.
“ 전군! 방패를 버리고 물러나라! ”
검은 오러가 심처럼 맺힌 검을 보고 온몸이 부르르 떨리는 와중에도 어떻게든 명령을 내리며, 스스로 대열을 무너뜨리는 길을 골랐다.
마치 공포에 질려 이성을 잃은 듯한 판단처럼 들리기도 했으나, 어찌 보면 또 옳았다.
어차피 오러를 든 기사 앞에서는 방패가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었다.
오히려 눈앞을 가리기에 방해만 될 뿐이다.
즉, 방패를 버리고 민첩함을 살리는 것이 더 낫다고 볼 수 있었다.
“ 지금이다! 파고들어라! ”
그저, 오러를 휘두르는 헬레나가 소드마스터이며, 그를 뒤따르듯 몸을 던진 남자 또한 오러를 다룰 줄 안다는 것이 문제였다.
그들과 같이 오러를 다룰 줄 아는 기사를 동원해야 하는 때에, 보통 병사들이 도움이 될 리 없었다.
방패가 잘리고, 검이 잘리고, 목이 떨어졌다.
오러를 두른 칼날은 여전히 날카로운 이빨을 갈며 장병들의 목숨을 앗아갔고, 그 옆을 비스듬히 따르던 남자, 지온은 병사들의 목을 잡아 부러뜨려 수를 줄여 나갔다.
“ 공작! 공작이 나타났다! ”
한 걸음. 또 한 걸음.
자작은 저도 모르는 사이 뒷걸음질 치다, 헬레나의 얼굴을 보며 크게 소리쳤다.
제국 입장에서는 반드시 제거해야 할 대상이기도 했으니 모를 수가 없었다.
그에 멀리 떨어져 제각각 무리를 이루던 병사들도 헬레나가 날뛰는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 기사! 기사들은 모두 저쪽을 향해라! 공작을 막아라! ”
그들은 하나둘씩 갑옷을 차려입고 달려오는 기사들에게 명령했다.
설령 승산이 없을 지라도 오러를 쓸 수 있다는 것만으로 충분히 제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했다.
설령 그것이 헛된 기대로 그친다 할지라도 그럴 수밖에 없었다.
지금도 밤을 밝히듯 크고 강렬하게 타오르는 불꽃.
좀 더 깊이 파고들어 병사들의 목을 꿰뚫는 엘프 군대.
그리고 이 참상을 주도하여 그 판을 키우는 헬레나와 지온 때문에, 지금도 머릿속이 혼란스러웠으니.
“ 어떻게 할까? ”
“ 줄일 수 있을 때 줄여야지. 엘렌! ”
헬레나는 방패를 버리고 등을 보이던 마지막 한 사람까지 베어낸 뒤, 엘프 군과 섞여 화살을 쏘던 엘렌을 불렀다.
장작 타는 소리와 비명소리가 사방에서 울려 제대로 들을 수나 있을까 싶었으나, 엘렌은 기다렸다는 듯 헬레나 곁으로 달려왔다.
“ 네. 부르셨어요? ”
“ 너도 보듯이 기사들이 달려오고 있어. 저들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군을 이끌고 그를 따르는 후발대만 정리해 줘. 너무 깊이 들어가지는 말고. 내 목소리가 들리는 범위 안에서. ”
“ 알겠습니다. ”
헬레나의 시선이 지시를 다 듣기 무섭게 한쪽 구석에서 날뛰는 엘프 곁으로 달려가는 엘렌의 등을 쫓다, 곧 검에 오러를 피우며 달려오는 기사들을 향했다.
어깨를 나란히 하던 지온도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알아서 한 걸음 물러섰다.
여러 측면에서 앞서는 헬레나를 상대로 보조를 맞추는 것이 말도 안 되는 일임을, 오히려 발목을 잡을 수도 있음을 알기 때문이었다.
“ 조심하고. 위험하다 싶으면 도우러 갈게. ”
지온은 헬레나의 손을 잡아, 그 등에 입술을 맞추며 웃었다.
고집을 피울 상황도 아니거니와, 피울 고집도 없었기에 이처럼 순순히 보내주기로 했다.
때에 따라서는 한심하다는 소리가 나올 만도 하겠으나, 역량 차이가 명확했으므로 그런 생각마저 사치였다.
실제로 헬레나는 지온이 떠나가기 무섭게 물러나기는커녕, 오히려 기사들을 향해 몸을 던졌다.
가장 앞에 선 기사와 검을 부딪치기 무섭게 원을 그리듯 팔을 휘둘렀다.
안에서 바깥으로 향하는 원에 휘말린 기사는 잠시 당황했으나, 어떻게든 기를 쓰고 버티려 했다.
소드마스터라고는 하나 평균적으로 남자가 여자보다 육체능력이 좋았으니 당연한 선택이라 할 수 있었다.
더구나 지금같이 단순한 힘 싸움이라면 더더욱 물러날 이유가 없었다.
다만, 기사의 생각에는 한 가지 중요한 요소가 빠져 있었다.
오러, 또는 마나를 다룰 줄 아는 한계가 월등히 다르다는 점이었다.
“ 끄, 끄으으……. ”
철과 철이 부딪치는 소리가 울려 퍼짐과 동시에, 충격으로 인한 얼얼한 느낌이 기사의 손에 퍼지길 잠시.
헬레나와 칼을 섞은 기사는 자신의 손에 들린 검이 하늘을 나는 풍경을 마지막으로 눈에 담으며, 입에서 피거품을 토해냈다.
그 한 순간에 목이 꿰뚫렸기에.
만약 기사가 조금만 더 오래 버텼어도 헬레나는 발을 뺐을 터였다.
수적으로 밀리는 난전에서 한 사람에게 발이 묶이면, 다른 사람이 훤히 드러난 등을 베어버릴 것이 너무도 뻔했으니까.
“ 침착해! 한 사람씩 덤벼들지 말고 조를 짜! 최소한 셋 이상으로! ”
기사들 중 제법 연배가 있어 보이는 남자가 외치자, 다른 기사들이 뭉쳐 헬레나를 조여오기 시작했다.
3인 1조로 이루어진 원형 포위망은 무척이나 두터워 좀처럼 빠져나갈 구멍이 보이질 않았다.
더구나 기사들도 오러를 사용하고 있어 쉬이 베어내기도 어려웠다.
본래 헬레나가 가진 오러의 질이 훨씬 뛰어나기에, 몇 번 휘두르면 오러 째로 베어낼 수는 있다.
문제는 그 몇 번을 휘두를 만큼 시간과 공간이 넉넉하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이대로 가만히 기다리다간 조여드는 포위망에 목이 졸려 죽게 될 터였다.
헬레나는 얼음처럼 시린 눈으로 주위를 슥 훑어보다, 조금 전 조를 짜라 외친 남자를 향해 뛰어들었다.
그 또한 다른 기사들과 마찬가지로 조를 짜고 있었으나 전혀 개의치 않는 모습이었다.
“ 쳐라! ”
마치 바닥을 기듯 최대한 낮은 자세에서 뛰어들었지만, 기사들의 눈에는 조급함을 이기지 못해 덤벼든 것처럼 보였다.
결국 소드마스터도 인간이라는 뜻이겠지.
아니면 경험이 부족하거나.
명령을 내린 기사는 노련하기 그지없던 제국의 헬릭스 백작을 떠올리며, 검을 아래에서 위로 쳐올리듯 휘둘렀다.
헬레나가 아래에서 검을 휘두르기에 당연한 선택이었다.
이제 곧 사방에서 날아드는 칼에 썰려 걸레짝이 될 터.
연배 있는 기사를 따라 검을 휘두르는 기사들 모두가 그리 생각했다.
그러나.
“ 뭣?! ”
기사는 아래에서 오르는 검을 후려치고, 그 반동으로 뛰어오르는 헬레나를 보며 헛바람을 삼켰다.
보통 사람이라면 어림도 없었겠으나, 초인적인 힘끼리 부딪쳤기에 가능한 기예였다.
만약 검을 휘두른 이들이 기사가 아니었다면 힘에 짓눌리고 말았으리라.
“ 당황할 것 없다! 틈을 노려 베어라! ”
연배가 많은 기사는 그 연배에 맞게 가장 먼저 혼란스러웠던 생각을 진정시키고, 고함을 지르며 검을 휘둘렀다.
공중으로 떠올랐으니 자세를 바로잡을 수도 없어, 그로 인해 허점이 크게 드러난 틈을 노렸다.
기사들도 그를 알았는지 허공을 메우듯 사방에서 검을 휘둘렀다. 가히 검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 커, 커헉……. ”
그런데도, 가장 솔선하여 명령하던 기사의 목젖이 검은 선에 꿰뚫렸다는 처참한 결과가 드러났다.
위에서 아래로 내려찍듯 검을 휘두르려던 기사들도 그 참상을 접하자 몸이 굳고 말았다.
탁. 어느새 땅에 발을 딛고 선 헬레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어느새 왼손에 쥔 검은 선을 바깥쪽으로 휘둘렀다.
예전에 홀리를 죽이려 했을 때 터득했던 나뭇가지 같은 오러였다.
오러가 고기를 자르는 부드러운 촉감을 헬레나의 손끝에 전하며 목 바깥으로 삐져나왔다.
그에 따라 붉게 피어오른 실선 아래로 거품이 들끓다, 이윽고 한 기사의 목이 우지끈 소리를 내며 천천히 부러졌다.
대체 무슨 일인가.
왼팔만을 쭉 뻗었던 기묘한 동작도 그렇고, 그로 인해 노련하던 기사 한 사람의 생명이 갑작스레 끊어진 것까지.
기사들은 그들의 상식으로 이해할 수 없는 광경에 몸 뿐만 아니라 머릿속까지 새하얗게 물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그것이 이승에서 마지막으로 떠올린 생각이었다.
잠깐 굳어버린 틈을 놓치지 않은 헬레나가 검은 선을 크게 휘둘러, 스스로를 둘러싸고 있던 기사들의 목을 깔끔하게 베어냈기 때문이다.
툭, 하고 수많은 머리들이 땅에 떨어져 뒹굴었다.
잘린 단면 아래로 거품이 끓다 피분수가 치솟았다.
헬레나는 뜨겁고 비린 붉은 비를 흠뻑 뒤집어쓰면서도, 여전히 차갑게 가라앉은 눈빛으로 전황을 살폈다.
약간 떨어져 있던 지온은 다시 제국 병사들의 목을 하나하나 정성스레 꺾고 있었고, 엘프 군대도 명령에 따라 진영을 휘젓고 다녔다.
미리 계획한 대로 주황깃발의 군대는 피해서.
“ 괜찮아? ”
어느새 헬레나 곁으로 다가온 지온이 헬레나의 피를 닦아주며 물었다.
목을 꺾어 죽였기에 피를 볼 일이 없었다고는 하나, 땀과 먼지 때문에 꼴이 말이 아니었다.
“ 응. 걱정해 줘서 고마워. 그런데 이 천은…? ”
“ 근처 막사에서 빼내 온 거야. 짬나는 김에. ”
“ 후후. 살림꾼 다 됐네. ”
헬레나는 시답잖은 농담을 주고, 또 받으며 얼굴을 닦아주는 남자의 손길에 몸을 맡겼다.
저주와도 비슷한 끈적한 피를 다 털어내지는 못했지만, 찝찝함이 훨씬 덜했다.
지금은 이것으로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 만큼.
그를 지켜보던 병사들은 겁에 질려 감히 다가올 생각을 못했고, 그 뒤에 숨어 고래고래 악을 질러대는 귀족 또한 몸을 부르르 떨고 있었다.
기사 수십을 삽시간에 도륙낸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으니 그럴 만도 했다.
“ 공작님! ”
헬레나가 다음 목표를 찾아 어슬렁대려는 순간, 엘렌이 마법병단을 이끌고 가까이 다가왔다.
제법 다급해 보이는 기색이 역력해 보이는 표정이었다.
그럴 만도 하지. 헬레나도 대충 짐작이 간다는 듯, 날카롭게 눈을 치뜬 채 물었다.
거슬리는 기척이 점점 가까이 다가오고 있음을 알았기에.
“ 그 헬릭스 백작이라는 늙은 노인네가 오고 있는 거지? ”
“ 네. 어떻게 할까요? 백작 뿐 아니라 태세를 정비하고 오는 병사들도 점점 늘어나고 있어요. ”
“ 후퇴하자. 마지막으로 바람 몇 방만 쏴 줘. ”
가장 유명한 전사가 다가오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면, 한번쯤 얼굴이라도 보고 싶어 하는 것이 기사라는 족속이다.
그러나, 헬레나는 그런 감정과 연이 멀었다.
고로 먼지 한 톨만큼의 미련조차 없이 단호하게 퇴각명령을 내렸다.
누군가 말했듯, 헬레나에게 있어 중요한 것은 명예가 아니라 옆에서 피를 닦아주던 남자였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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