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9화 〉 전쟁과 주작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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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생각하지만 아예 잠을 자지 않는 것도 고역이나, 자다 깨는 것은 더 힘겹다.
이번에야 전쟁으로 인한 특수한 상황에서 오는 긴장감 때문에 피곤함이 덜하지만, 다른 경우라면…….
나는 졸린 탓에 묵직해진 머리를 가볍게 흔들며, 마법병단 앞에 선 헬레나의 설명을 들었다.
마법병단 외에도 엘프 군대가 섞여 있어 제법 수가 되었다. 다 합하면 대략 삼백 정도.
“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큰 타격을 주는 것이 아니라 상대의 피로를 쌓는 것이 목적입니다. 그러니 적과 무리하게 싸울 필요 없이 적당히 견제만 해 주시면 됩니다. 물론 적군을 줄일 수 있을 때 줄이는 것이 좋겠죠. ”
“ 알겠습니다. ”
불이 없으면 눈앞조차 제대로 보기 힘든 밤이라 그런지, 답하는 목소리들 또한 낮았다.
기습하러 가는 입장에서 대놓고 큰 소리를 지를 수는 없으니 당연하다 할 수 있었다.
“ 엘프 여러분은 산맥을 타고 움직인 뒤, 근처에서 매복해 주세요. 마법병단에 붙을 꼬리만 떼 주시면 됩니다. ”
“ 저희가 도와드리지 않아도 되겠습니까? ”
“ 네. 퇴로를 지켜주시는 것만으로도 무척 든든해요. 더구나 우리가 산맥으로 도망칠 때, 그 꼬리를 타격하면 또 피해를 줄 수 있으니 여러모로 이득이라고 생각합니다. ”
그에 질문을 던진 엘프가 수긍했는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많은 무리 중에서 자연스레 말을 건넨 것도 그렇고 제법 대우받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설령 부대 설명을 듣지 못했다 하더라도.
“ 그러면… 지금부터 작전을 개시하겠습니다. ”
헬레나의 명령이 떨어지자, 엘프 군대가 기다렸다는 듯 산맥 쪽을 향해 내달렸다.
그들은 왕국과 제국 양 진영의 좌우를 막고 있던 산맥 중 오른쪽을 택해, 눈 깜짝할 사이 그 안으로 몸을 던졌다.
나와 헬레나, 마법병단도 기다렸다는 듯 그들의 뒤를 쫓았다.
같은 엘프종에 속하는 다크엘프 무리는 여느 엘프들과 마찬가지로 능숙하게 산맥을 오르고, 나무 사이를 뛰어 다니며 바람처럼 앞을 향했다.
새삼 숲에서는 그 누구라 할지라도 엘프에게 한 수 접어줄 수밖에 없다는 말이 떠올랐다.
헬레나야 보통 사람이 아닌 소드마스터이기 때문에 엘프와 어깨를 나란히 할 만큼 민첩하지만, 나는 아니었다.
내가 생각해도 제법 잘 따라잡고 있다고는 생각하지만, 그들보다 느리다는 것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작전에 방해될 정도는 아니라 망정이지, 아니었다면 누군가의 등에 업혀 한심하고 편안하게 달렸을 지도 모를 일이었다.
“ 뭣…?! ”
슥. 가장 선두를 달리던 엘프가 길을 가로막듯, 한 쪽 팔을 옆으로 펼쳤다.
그에 바짝 뒤를 쫓던 다른 무리들 또한 기다렸다는 듯 나는 듯한 달리기를 멈추고, 나무 그늘 뒤나 그 위에서 대기했다.
그렇잖아도 눈에 띄지 않도록 검은 로브를 위장천 대용으로 걸치고 있어 감쪽같았다.
다크엘프야 원래 피부가 검은 계열이라 굳이 필요 없을 법도 했으나, 장비가 빛을 반사하니 어쩔 수 없었다.
무슨 일일까.
나는 헬레나와 함께 최대한 소리가 나지 않도록 조심스레 발을 옮겨, 굵은 나뭇가지 위에 서 있는 선두를 향해 다가갔다.
“ 무슨 일입니까? ”
“ 멀리서 병사들이 오고 있습니다. ”
병사? 서로 눈으로 보일 만큼 가까운 거리에 있으니 산맥에도 주의를 기울일 법 했으나, 병사라니.
나는 저도 모르게 휘둥그레지는 눈에 마나를 집중시켜 시력을 강화했다.
이미 어둠에 눈이 익었기에, 사물을 분간하는 데에 큰 문제는 없었다.
그러자, 정말로 무리 지은 제국군이 눈에 들어왔다.
“ 저건… 제국군이 맞지요? ”
“ 네. 제국군이네요. 다가오는 방향도 그렇고, 복장을 봐도 제국군이 맞아요. ”
나무 위에 있던 엘프 남자가 묻자, 나와 함께 그 아래 그늘에 숨어 있던 헬레나가 답했다.
목소리가 크게 들리는 시간이기도 하고, 청력도 뛰어나기에 속삭이는 정도로도 수월하게 대화를 주고받았다.
“ 몇이나 보이나요? ”
“ 예. 대략… 삼, 사백 정도 되어 보입니다. 아마 아군 병력보다 두 배 정도 많은 것으로 사료됩니다. 더구나, 저희와 마찬가지로 말을 끌고 오지도 않았군요. ”
수가 적다하더라도 이백이 넘고, 그런 인원이 한꺼번에 말을 몰면 당연히 땅이 울린다.
더구나 탁 트인 평야이기에 끝까지 말을 타고 접근할 수가 없다.
그렇기에 말을 두고 산맥을 탄다는 결단을 내렸는데, 설마 제국군도 똑같은 짓을 할 줄이야.
심지어 오늘 막 도착해 지쳤을 병력을 이끌고.
“ 강행군을 한 것이 아니라 지쳐 쓰러질 정도는 아니겠지만… 막 도착한 병력으로 기습을 하러 올 줄은 몰랐네요. ”
“ 그것도 엘프가 자신 있어 하는 산맥 쪽으로 올 줄은 더더욱 몰랐습니다. ”
“ 그걸 잘 알기에, 그 틈을 찌르고자 한 것이겠죠. 숲을 꿰뚫고 있는 엘프가 있으니, 숲 쪽으로는 안 오겠거니 싶은 생각을요. ”
헬레나는 선두 엘프의 중얼거림에 친절하게 답하며 팔짱을 꼈다.
서로가 틈을 찌르다 보니 이렇게 웃지 못 할 결과를 낳을 줄은 몰랐던 모양이다.
“ 전부 나무 위에서 매복하세요. 기다렸다 단숨에 섬멸하겠습니다. ”
그러나, 이렇게 마주한 이상 운이 없었다고밖에 할 말이 없었다.
저 병사들에게 죄가 있다면 상관의 명령을 따를 수밖에 없었던 것 뿐이다.
더 나아가면 신 한 놈이 헛바람을 넣은 불행 때문이기도 하고.
“ 알겠습니다. ”
선두에 선 엘프가 등 뒤로 손을 둘러, 로브 뒤에 가려져 있던 활을 꺼내 손에 들었다.
또한 로브를 가다듬어 뒤에 짊어진 화살통과 등 사이에 끼워 화살을 편히 뽑을 수 있도록 했다.
다른 엘프들 또한 그와 똑같이 활을 꺼내더니, 알아서 사방으로 흩어졌다.
뒤쪽에 있어 지시를 듣지 못한 이들에게는 앞에 있던 이가 전달했다.
마치 옛날에 유행했던 전달게임을 하는 것 마냥.
“ 후우……. ”
그 사이, 나와 헬레나는 펼쳐 둔 올가미의 중앙 쪽으로 걸음을 옮겨 숨을 골랐다.
단숨에 죽이지 않으면 제국군이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 댈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조금만, 조금만 더…….
아직 우리가 있음을 눈치 채지 못한 제국군들은 순조롭게 앞을 향했다.
본래 이런 군사가 숲속에서 움직이면 사방의 가지가 부러지는 등 흔적이 남지만, 거의 대부분이 원숭이마냥 나무 위로 움직였다.
대신 나무가 미약하게나마 흔들려 경계심을 심어줄 가능성이 높았으나, 그들을 멀찍이서 발견한 지 오래였기에 그럴 일도 없었다.
그리하여, 결국 제국군 전부가 올가미 안에 발을 들였다.
헬레나는 그를 눈치 채기 무섭게 눈을 번뜩이며, 높게 들었던 오른손을 아래로 내려쳤다. 공격 신호였다.
“ 허억?! 기, 기스… 끄르르! ”
지시를 받은 군사들은 기다렸다는 듯 화살을 쏴댔다.
엘프 특유의 바람을 휘감은 화살이 비처럼 내렸다.
비는 정확히 제국군의 골통이나 목젖을 노리고 날아들었으며, 바람을 찢고 날아드는 와중에 소리 하나 나질 않았다.
하나를 쏘면 눈 깜빡할 사이 또 하나를 시위에 겨누어 쏘니 제대로 대처할 겨를이 없었다.
그렇잖아도 머리 위에서 매섭게 떨어지니 어쩔 수 없었겠지.
더해, 명중률도 악랄하게 높았고.
“ 끝났군. ”
화살비가 내린지 불과 몇 분. 슬그머니 옆으로 다가 온 오르커스가 끝났음을 알렸다.
엘프들도 그를 알기에 시위에서 손을 떼고 나무에서 내려와, 처참한 몰골로 죽어버린 시체들에 박힌 화살을 하나하나 뽑기 시작했다.
바람에 실린 화살에 맞은 시체들이라 그런가, 찢어졌다 보다 깎였다는 표현이 어울렸다.
뼛조각이 날아가서 차마 말로 표현 못할 몰골들이었으니 그럴 수밖에.
나는 피 냄새로 끈적한 공기를 들이쉬며,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한둘이 아니라 수백에 이르는 시체를 직접 보는 것은 생전 처음이기에 기분이 좋을 수가 없었다.
아마 강철멘탈이 아니었으면 구역질을 하고도 남았을 터였다.
“ 괜찮아? ”
내 상태가 그리 좋지 않다는 것을 알았는지, 헬레나가 조심스레 내 손을 감싸며 물었다.
군사들과 함께 화살을 회수하던 엘렌도 아차 싶다는 표정으로 헐레벌떡 달려왔다.
묘하게 웃기다는 생각이 드는 상황이었다.
“ 대공님… 괜찮으세요? ”
“ 일단 걱정해 줘서 고마워. 괜찮으니까 신경 쓰지 않아도 돼. 그보다, 화살은 다 수거했어? ”
“ …아, 네에. 들고 온 화살에 더해, 제국 놈들이 가지고 있던 화살도 넉넉히 챙겼어요. 덕분에 화살이 부족해서 곤란할 일은 없을 거에요. ”
그렇다면 다행이지. 나는 눈을 감은 채 몇 번 숨을 고르다, 눈을 가늘게 뜨며 입을 열었다.
“ 그러면 얼른 움직여야지. 오르커스. 혹여나 있을지 모를 후발대를 대비해 전방 경계를 좀 더 하면서 움직이라고 전달해 주세요. ”
“ …알겠소. ”
쯧. 오르커스도 이 참상이 썩 마음에 내키지는 않았는지, 혀를 차며 앞으로 향했다.
큰 명령은 나나 헬레나가 내리지만, 이브 대신 마법병단의 지휘를 하고 있어 제법 바쁘게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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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이게 대관절 무슨 일인가?! ”
더욱 침묵이 깊어가는 새벽.
제국군 외곽 병영은 아주 크나큰 혼란에 휩싸여 있었다.
하늘 위에서 아래로 소리 없이 떨어지거나, 정면에서 곧고 빠르게 날아드는 화살이 보초를 서던 초병의 숨통을 끊은 것이 시작이었다.
바람을 휘감은 화살은 곳곳에 놓아 둔 횃불을 뚫고 날아가 불을 일으켰다.
가끔씩 불화살이 날아드는 경우도 있었다.
과장을 보태면 가히 불바다가 따로 없었다.
“ 기습! 기습입니다! ”
“ 기습이라니?! 수성을 해야 될 놈들이 쳐들어왔다는 말이냐!? ”
창을 으스러져라 쥔 병사가 황급히 달려와, 불바다가 된 이 지역의 책임자에게 보고했다.
책임자는 제국의 자작으로, 그 또한 방금 깨어난 상태였기에 갑옷을 걸치지 않은 상태였다.
워낙 정신이 없어 갑옷을 입을 여유조차 없었던 탓이다.
“ 그렇습니다! 분명 왕국 쪽의 편을 들기로 한 엘프 놈들이 기습을 했습니다! ”
“ 이럴 수가…! 아니, 잠깐만! 그렇다는 건… 우리 측에서 보낸 군은 다 죽었다는 소리가 아니냐! ”
수십만 중 사백.
단순히 비율로 보면 그리 심한 피해는 아니나, 사람이 줄어버렸으니 자작의 속이 쓰린 것도 당연했다.
하지만, 그렇게 속 쓰리던 것도 잠시.
자작은 언제 그랬냐는 듯 옆에 선 병사를 시켜 병력을 끌어 모으게 하고, 자신 또한 막사로 달려가 황급히 무장을 마치고 나왔다.
“ 매직 아이템! 매직 아이템을 써라! ”
자작은 명령에 따라 검은 기둥 같은 것을 들고 온 병사들에게 명령했다.
정령마법을 휘감은 화살을 쏘거나, 마법 자체로 공격하는 엘프들을 막기 위한 매직 아이템이었다.
기둥의 키는 병사들의 허리까지 오는 정도였으며, 범위 안에 들어온 마법을 흐트러뜨리는 힘을 갖고 있었다.
그로 인해 기둥을 스치는 화살들은 자연스레 힘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마법이 사라졌다 해서 그 파괴력이 전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단순한 화살이 되었기에 그 위력이 몹시 낮아진 것은 맞으나, 결코 얕볼 수준은 아니었다.
병사들도 그를 알기에 침착하게 방패를 들고 방어를 하고 있었다.
─전열을 정비하고 아이템을 들고 와라! 함부로 틈을 주지 말고, 궁수대는 활을 매겨라!
자작 이외에도 다른 지휘관들이 사방에서 지시를 내리자, 군사들이 군영 곳곳에서 모여 진을 이루었다.
워낙 여기저기 흩어져 있어 난잡한 감이 있었으나, 공격을 막아내기엔 충분하고도 남았다.
“ 방어 병력 외에는 물을 가져와 불을 꺼라! 침착하게 대응하면 큰 문제는 없을 것이야! ”
방어를 갖추고 어느 정도 숨이 트이자, 자연스레 남은 병력을 부려 불을 끄는 데 동원했다.
처음 기습을 당했을 땐 어쩔 수 없이 피해가 나왔으나, 태세를 갖추자 피해가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더구나 엘프 군대가 멀리서 화살을 쏘고 있을 뿐 다가올 생각을 않으니, 금세 여유를 찾을 만도 했다.
“ 이대로 당할 수만은 없지. ”
아수라장 속에서도 각 진영에 전령을 보내 연계를 하던 중, 가장 먼저 기습을 받았던 자작이 이를 갈았다.
기습의 효과가 점점 떨어지고 안정감이 높아지고 있으니 분노가 고개를 들었다.
그래서 전령을 보내 공격하겠다는 의사를 전하고, 각 진영들이 호응하여 힘을 보태도록 유도했다.
어찌보면 당연한 선택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당연한 선택이 제대로 이루어지기 전.
작지만 사람 셋 정도는 우습게 삼킬 폭풍이 아가리를 쩍 벌리며 달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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