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0화 〉 킹 메이커 #9
* * *
제국.
그놈의 제국 때문에 올 일 없을 나라까지 올 수밖에 없었던 것을 생각하면 속이 참담한데, 그 이름을 남의 입에서 들으니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다.
그렇잖아도 손에 익지도 못한 고문을 하느라 차분하다 못해 가라앉은 상태였으니까.
“ 제국이라. 제국이 왜? ”
“ 그것이……. ”
놈이 대답을 하다 말고얼굴 근육을 부르르 떨며 말을 더듬었다.
마치 입 밖에 내면 저절로 죽게 되는 저주라도 걸린 모양새였다.
“ 왜? 답하면 곤란한가? ”
“ 아, 아니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
그저 궁금한 마음에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더니 몹시 당황한 기색으로 소리쳤다.
말을 하지 않으면 다시 허벅지를 쑤시지 않을까 두려워하는 눈치였다.
아마 이게 바로 PTSD가 아닐까?
“ 그러면 말을 해 봐. 대신 너무 질질 끌지만은 마라. 내 인내심도 무한하지는 않으니까. ”
“ 그, 그렇지요. 말… 하겠습니다. ”
후우, 후우. 놈은 몇 번이고 숨을 들이쉬고 내뱉으며 숨을 골랐다.
척 보기에도 마음의 준비를 하는 모양새였는데, 얼마나 큰 이야기를 하려고 저러나 싶었다.
그 탓에 내심 기대감이 올랐고, 시시한 이야기면 어쩌나 싶은 걱정도 생겼다.
그렇게 놈은 몇 분을 끌고 나서야, 무겁게 닫힌 입술을 뗐다.
“ 대략… 두 달 하고도 조금 전쯤 되었을 겁니다. 저희 영토에 낯선 인간이 찾아왔습니다. 그래서 당연히 경계부터 했지요. 보통 인간이 수인국, 그것도 제법 깊숙한 쪽에 있는 호인족 영토에 들어올 일이 거의 없었으니까요. ”
“ 그렇긴 하지. 호인족은 주로 수인국의 군사 쪽을 꽉 잡고 있으니까. ”
“ 예. 잘 아시는군요. 아무튼, 그 다음엔 자연스레 누군지를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제국의 귀족이라고 하더군요. ”
드디어 본론이 나오는구나 싶어, 나도 모르게 눈을 날카롭게 치떴다.
이제부터 시작되는 이야기를 최대한 귀담아 듣고 잊지 않기 위해서였다.
이브도 나와 같은 생각을 했는지 놈의 등 뒤에서 눈을 빛내고 있었다.
“ 귀족이라. 어떤 인간이냐? 이름은? ”
“ 몸집은 좀 작고, 머리가 희고, 수염도 흰 노인 같은 남자였습니다. 이름은 잘 기억이 안 나지만… 백작이라고 했었습니다. ”
이름을 모르는 것이 조금 아쉽긴 했지만 생김새와 직위만 알아도 충분했다.
사실 제국 귀족을 잘 아는 것이 아니기에, 이름을 듣는다 한들 누군지도 몰랐을 터였다.
“ 그래서, 그 다음은? ”
“ 자잘한 마찰이 있긴 했습니다만, 결국 후보와 만나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그 후, 후보께서는 그 백작의 힘을 받기로 했고요. ”
“ 아마 모종의 거래를 했겠지. 자세한 내용은 모르느냐? ”
“ 예. 거기까지는 잘……. ”
호인족 대표와 수도까지 따라왔기에 많이 알고 있을 줄 알았더니, 생각한 만큼 많이 알지는 못하는 모양이다.
이놈이 그만한 믿음을 못 받았을 수도 있고, 아니면 호인족 대표라는 놈이 남을 잘 믿지 않는 성격인 것일까.
나는 그 의문을 풀고자 놈에게 여러 가지 질문을 던졌고, 놈은 겁에 질린 채 성실하게 답했다.
그에 뒤에서 지켜보고 있던 두 놈은 쉴 새 없이 입을 놀려대는 한 놈을 째려보았다.
그러다 내가 더크를 흔들어보이자 언제 그랬냐는 듯 시선을 아래로 깔았다.
호인족 대표의 생김새나 성격, 그리고 일정에 이르기까지.
여러 정보를 주워들을 수 있었으나 정작 중요한 정보는 듣지 못했다.
이 말은 즉, 놈들을 사로잡아야 할 필요가 있다는 뜻이다.
“ 그래. 제법 성실히 나불거렸으니 목숨은 붙여 줘야겠지. 하지만, 만약 네놈이 말한 것에 하나라도 거짓이 있다면… 각오를 해 둬라. ”
마지막으로 경고를 남긴 뒤,어떻게 놈들을 잡을까를 두고 고민하기 시작했다.
서인족의 승리로 끝내기 위해서는 결국 남은 놈들을 전부 때려잡아야 하니 무모하다고 볼 수는 없었다.
결국 거쳐야 할 길이다.
나는 잠시 입을 다물고 가만히 타닥 소리를 내는 모닥불을 바라보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 지금부터 너를 풀어주마. 그러니 네 주인에게 가서 내가 전하는 말을 똑똑히 전해라. ”
“ 예, 예! ”
나는 놈이 겁먹은 채 쫑긋거리는 귀에 제법 긴 이야기를 들려준 뒤, 망설이지 않고 호인족 놈들의 뒤통수를 하나하나 후려쳤다.
.
한 눈에 보아도 사나우며, 덩치 큰 사내가 무릎을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몸짓이나 표정만 보아도 초조해 보인다는 기색이 엿보였으나, 동시에 그를 잠재우려 애쓰는 모습도 보였다.
사내, 에릭은 호인족 대족장의 아들로서 그렇게 살아왔다.
“ 늦는군……. ”
알현을 마친 다음 날.
그는 수도의 서문 쪽으로 나와 미리 매복시켜 둔 호인족 전사들과 자리를 가졌다.
서인족처럼 지형을 등지고 숨어 있어, 이렇게 모인 지금도 크게 눈에 띌 일은 없었다.
그러나, 어제 서인족의 정찰 겸 위협용으로 보낸 세 명의 소식이 아직까지 없어 내심 당황스러워하는 중이었다.
“ 따로 찾아볼까요? ”
“ 아니. 조금 있으면 오겠지. 접선지를 바꾼 것도 아니니… 일단 기다려보자. ”
고작 셋이라고는 하나 약하디 약한 서인족 놈들을 상대로 진땀을 뺄 만큼 호인족 전사가 약하지도 않다.
더구나 그런 일이 있다 하더라도 제 한 몸 뺄 만한 역량 정도는 있었으니, 에릭이 믿고 기다리겠다는 결정을 한 것도 당연했다.
그를 지키던 호인족 전사들도 그리 생각했기에 말을 질질 끌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결과적으로 그 생각은 옳았다. 비록 셋 모두가 차마 말로 표현 못 할 몰골이 되었어도, 결국 그들의 품으로 돌아왔다.
“ 알렉… 대체 무슨 일이 있었나? ”
참담한 상황에 반해 에릭의 목소리는 차분하기 그지없었으나 정작 눈빛이 떨리고 있었다.
평소 같은 차분함을 끌고 갈 만큼 녹록치 않은 상황임을 짐작한 탓이다.
가장 먼저 상처 입은 남자, 알렉은 그 얼굴을 바라보며 두렵다는 듯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 …죄송합니다. 예상 외로 그 망할 쥐새끼들의 저항이 거셌습니다. ”
“ 저항이 거셌다고…? 자세히 말해봐라. ”
“ 예. 그것이……. ”
쥐새끼들, 서인족의 대표 스케빈이 왕궁에 입성한 그날 밤.
서인족들이 셋 정도의 호위를 대동했듯, 알렉을 포함한 셋 또한 에릭의 호위로서 왕궁에 머무르는 중이었다.
그리고 서인족 호위들이 이곳저곳 떠돌아다니기 시작하는 것을 몰래 지켜보다,놈들을 쫓은 뒤 잡으라 명령했다.
버러지가 더 이상 악으로 버티는 꼴이 보기 싫었기에.
여기까지는 에릭 또한 잘 알고 있어 별 말 않았으나, 그 후로 이어지는 말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운 좋게 도망친 한 놈을 쫓아 좁은 샛길까지 헤치며 밖으로 나올 때 까지는 좋았지만, 기습에 당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 쥐새끼 놈들은 독이 바짝 올라 있었습니다. 더구나 쥐새끼가 아닌 놈 하나가 기습을 가해 왔습니다. ”
“ 음? 쥐새끼가 아닌 놈이라고? ”
“ …예. 밤이 어두워 어느 종족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키가 제법 큰 것만 보아도 쥐새끼는 아니었습니다. ”
으음. 에릭은 쥐새끼가 아닌 누군가를 곱씹으며 고민에 잠겼다.
어느 정신 나간 놈이 약해빠진 쥐새끼를 밀어 줄 생각을 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제법 솜씨는 좋은 모양이라 결론 내렸다.
밤임을 고려하더라도 셋을 저 꼴로 만들기가 쉽지는 않으리라는 믿음이 깔린 생각이었다.
더구나, 지금은 한심하게 여기는 것보다 위협이 될지도 모를 인물을 치우는 것이 우선이다.
그러니 잘잘못을 따지는 건 나중으로 미뤄두어야만 했다.
“ 또, 마지막으로 근처 숲에서 기다리고 있겠다고 했습니다. 오지 않으면 너희들이 쥐새끼라 업신여긴 이들의 비웃음과 경멸을 피하지 못할 거라고……. ”
“ …뭐? 감히 쥐새끼들이 그런 말을 해? ”
차분하게 생각을 정리하던 에릭의 이마에 굵고 커다란 핏줄이 선명히 드러났다.
미간은 구겨질 대로 구겨졌으며, 저도 모르게 으르렁대며 이를 갈기까지 했다.
그렇잖아도 제 주제를 벗어나 쓸데없이 저항하는 쥐새끼들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데, 보란 듯이 도발까지 던진 탓이었다.
이런 말을 던지면 그가 화를 낼 것이다.
이는 알렉도 충분히 알 만한 일이었으나, 그 또한 호인족으로서 그 도발을 순순히 받아들일 수만은 없었다.
아무리 기가 꺾였다 하더라도 마지막 자존심이 남아 있었다.
자신의 말을 그대로 전하라는 지온의 말을 따른 것도, 크게 되갚아주기 위함이었다.
“ 그 찢어 죽여도 시원찮을 쥐새끼들이 아주 발악을 하는구나. 마침 알현도 끝났으니, 더 이상 수도에 머무를 이유가 없겠지. ”
당장 놈들이 기다리는 곳으로 간다. 놈들이 무슨 함정을 파 놓았던, 전부 찢어버리겠다.
에릭은 용광로마냥 시뻘겋게 달아오른 얼굴을 한 채 여전히 낮은 목소리로 명령을 내렸다.
소리조차 시원하게 지르지 못할 만큼 분노가 극에 달해 목이 멜 지경이었던 탓이다.
.
“ 휴우…! ”
수도 근처의 이름 없는 숲. 이브가 구슬땀을 훔치며 조각에 여념이 없었다.
내가 빌려 준 더크를 가지고 나무 곳곳에 마법진을 새기는 중이라 고생이 많았다.
조각에 시간이 걸리는 탓에 넓은 범위에 걸쳐 연쇄마법진을 만들 수는 없었으나, 한쪽을 틀어막을 정도는 되었다.
나는 한밤중에 놈들을 때려 기절시킨 직후, 곧장 연락책 몇 명을 왕궁에 보내 스케빈에게 이 소식을 알렸다.
최대한 빨리 국왕을 만나 계속 하겠다는 밝힌 뒤 곧장 숲으로 날아오라고 말이다.
다행히 호인족 놈들은 거만했고, 서인족 쪽으로 붙인 셋만으로 충분하다 생각했는지 별 다른 움직임을 보이진 않았다.
덕분에 왕궁을 오고가는 일이 한층 더 수월하게 이루어졌다.
“ 놈을 사로잡을 생각을 하시다니… 정말 흥분되는군요. ”
막 우리 쪽으로 합류한 스케빈이 숲을 둘러보며 들뜬 목소리를 냈다.
다행히 날이 밝기 무섭게 국왕을 만나 선별식을 계속하겠다는 증명도 마쳐 무사히 숲까지 올 수 있었다.
“ 벼르고 벼르던 기회입니다. 더구나, 놈들을 사로잡아 기를 꺾으면 다른 종족들도 자연스레 따라 올지도 모릅니다. 한 번 균형이 깨지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을 테니까요. ”
“ 그건 저도 바라던 바입니다. 일이 빨리 끝나서 나쁠 것은 없지요. ”
나는 서인족 거처에 놓아 둔 스케빈의 계약서를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왕이 되면 수인국은 절대 중립을 지키겠다는 계약서로, 그를 어길시 왕위를 내려놓겠다는 상당히 위험한 내용이 적혀 있는 물건이었다.
그러나 스케빈은 그런 계약에도 제법 흔쾌히 응했다. 나를 믿어준 덕이기도 하지만, 도움이 절박했다는 이유가 더 컸다.
더해, 앞서 말했듯 중립을 지켜 수인국에 손해가 될 일도 없었고.
“ 오른쪽 측면은 준비가 끝났어요. 이걸로 호인족의 진로를 크게 제한할 수 있을 거에요. ”
“ 고마워. 새벽부터 지금까지 정말 수고 많았어. ”
손수건이 없어 부득이하게 옷소매로 이브의 땀을 닦아주자, 뺨을 붉게 물들인 채 배시시 웃었다.
곧 크게 한 판 붙을 상황임에도 웃는 것을 보니 제법 담이 커진 모양새였다.
혹은, 기쁨이 그런 상황조차 잠시 잊게 만들었던지.
“ 아…! 슬슬 다가오고 있는 것이 보여요! ”
그러다, 얼빠진 자신을 후회하듯 두 손으로 뺨을 두드리며 다급히 소리쳤다.
미리 주위를 살피는 마법을 써 둔 덕에 이처럼 빠르게 반응할 수 있었다.
그 탓에 마나 소비가 제법 심해 얼마 싸우지 못할 것 같지만… 충분했다.
“ 다들 들으셨듯이 호인족 놈들이 다 왔답니다. 각자 위치로 가 주셔야겠는데… 괜찮겠지요? ”
“ 물론입니다. 자, 다들 위치로 이동해라. ”
스케빈이 나를 거들며 한 마디 하자 서인족들이 묵묵하면서도 빠르게 제 자리로 이동했다.
우선 띄엄띄엄 불규칙적으로 숨은 뒤, 측면에서 안개가 피어오르면 곧장 기습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나와 스케빈을 비롯한 유격대가 그 안개 쪽으로 유인하는 역할을 맡게 되었다.
수상쩍은 놈에다 그들이 업신여기는 선별식 대표라면 제법 매력적인 떡밥이 아닐?까?
“ 긴장 좀 하셔야겠습니다. 이제부터 진짜 시작이니까요. ”
“ 이런 좋은 기회를 놓칠 수는 없는 법이죠. ”
나는 스케빈이 단검을 꺼내 사납게 웃는 모습을 바라보며, 정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단체의 발소리가 내 귀에도 들릴 만큼 점점 커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숲 곳곳에 숨은 서인족들도 그를 느꼈는지, 하나같이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보통 사람이라면 숲에서 기다리고 있겠다는 말을 들었을 때부터 미심쩍게 여기고, 올 생각도 않았을 거다.
하지만 예전부터 먹이사슬의 위에 위치한 무리 중 일부가 먹잇감에게 당한 것도 모자라 도발까지 받으면… 올 가능성이 조금 높아지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리고, 천만 다행히도 이 희망이 잘 맞아 떨어진 모양이다.
어느새 수많은 호인족 무리와 조금 거리를 둔 채 대치하고 있었으니까.
“ 알렉. 네가 말한 수상쩍은 놈이라는 게 저거냐? ”
들었던 대로 우리보다 배는 되어 보이는 수에, 하나같이 덩치가 크고 몸 좋은 무리들을 끌던 남자가 묵직한 저음으로 물었다.
그 옆에는 내가 독하게 마음먹고 칼날을 쑤셨던 놈이 주눅이 든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 맞습니다. 저 복면을 쓴 놈입니다. ”
“ 그래. 그렇다 이거지……. ”
놈들이 자기네들끼리 수군거리던 중, 스케빈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괜찮으냐고 물었다.
나는 당연히 괜찮다고 고개를 끄덕이며, 주머니에서 더크를 꺼내 보란 듯이 까딱거렸다.
그렇잖아도 대장같이 보이는 놈이 이를 갈고 있으니, 좀 더 화를 부추길 작정이었다.
“ 그래. 내가 그 놈이다. 그러는 네놈은 배 불룩한 돼지들의 수장인가보군. 들었던 대로 풍채가 아주 좋아. 살을 발라먹으면 마을 축제도 벌여 볼 만 하겠어. ”
“ ……. ”
대놓고 들어오라며 도발하니 미심쩍게 여긴 탓인가.
이를 갈던 놈은 언제 그랬냐는 듯 얼굴에서 감정을 싹 지운 채, 아주 밋밋하기 그지없는 표정으로 나를 응시했다.
화가 너무 나서 오히려 침착해졌나.
나는 좀처럼 오지 않는 놈을 바라보며 먼저 치고 빠져야하나 생각했으나,
“ 이… 빌어먹을 쥐새끼들이이!! ”
다행히 놈이 먼저 사람 몇은 우습게 묻을 만큼 무서운 표정을 지으며, 쾅 소리가 나도록땅을 박찼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