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님의 기둥서방이 되었다-122화 (122/192)

〈 122화 〉 교국으로 #1

* * *

스물이라.

그 말은 이곳에서 태어난 지 벌써 스무 해가 되었다는 뜻인데, 참 시간 한 번 빨리 간다는 생각이 들었다.

“ 하아……. ”

마음이 급해 짧은 생각으로 저질렀던 것부터 나름대로 신중하게 진행했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뇌리를 스쳤다.

당장 숨이 넘어갈 만큼 위급한 상황은커녕 편안하기 짝이 없음에도 그랬다.

참 어처구니없을 노릇이다.

“ 으응… 일어났어? ”

햇수가 제법 지나가는 동안 많은 변화가 있었다.

영지 상황이 좀 더 풍족해진 것도 그랬으며, 내 곁에서 눈을 비비고 일어나는 검은 머리칼의 헬레나 또한 변했다.

전에도 아름다웠지만요즘 들어서는 완전히 정점을 찍은 것만 같았다.

나는 침대 위에서 새근새근 잠들어 있는 엘렌과 이브를 슥 훑어본 뒤, 헬레나의 뺨에 손을 얹으며 답했다.

그러자 헬레나가 눈을 게슴츠레 뜨며, 손바닥에 뺨을 비비듯 얼굴을 움직였다.

마치 고양이 같았다.

“ 그래. 잘 잤어? ”

“ 덕분에 변함없이 달콤한 밤이었어. ”

이브가 늙지 않는 마법을 고안해 사용한 것도, 그로 인해 이 침실에 자주 드나들게 된 것도 큰 변화 중 하나다.

처음 침실에 발을 들였을 때는 어딘가 어색한 느낌이 남아 있었지만… 지금은 원래 그랬던 것 마냥 편안해 보였다.

나는 어젯밤, 개처럼 헥헥대던 세 여자의 얼굴을 떠올린 탓에 달아오른 몸을 식히려 애썼다.

분명 나이가 먹을수록 욕구가 자연스레 줄어야 정상일 텐데, 줄어들 기미가 보이질 않았다.

일단 씻으면서 열을 완전히 식히자 생각하며, 잠들어있는 두 여자가 깨어나지 않도록 조심스레 침대를 벗어나 욕실로 향했다.

그러자 헬레나가 기다렸다는 듯 내 뒤를 졸졸 따라왔다.

덕분에 한 욕실에서 함께 씻는 처지가 되었다.

더해, 욕조에 몸을 담글 즈음 엘렌과 이브마저 욕실로 들어와 한바탕 소란이 일었다.

다툼이 아니라 가벼운 수다로.

“ 아…! 오늘도……. ”

그렇게 씻고 나와 옷을 갈아입고 나면, 더럽혀진 이불을 씻기 위해 하인이 방 안으로 들어온다.

보통 여자 둘에 남자 하나가 이불을 가지고 가는데, 모두 하나같이 얼굴을 붉히며 쑥스러워했다.

그 탓에 나 또한 치부를 들킨 것 같아 부끄러운 감정이 일었다.

아마 은연중에 치부라 생각했기 때문일 지도 모르겠다.

.

“ 벌써 자네도 스무 번째 생일을 맞이할 때가 다가오고 있군. ”

아침을 먹고 간단히 일을 마친 뒤, 이스 크라우저를 찾아 간단한 대화를 나눈다.

이것 또한 작지만 큰 변화 중 하나였다.

보통은 식사 자리나 저택 안을 오고가며 얼굴을 마주하지만, 오전에 따로 시간을 내지는 않았으니까.

“ 네. 아직 몇 달이라는 시간이 남았지만… 금방 지나가겠지요. ”

이곳에서 성인, 어른으로 인정받는 나이는 따로 없다.

적당히 나이가 들고 자격을 갖추었다 싶으면자기도 모르는 새 성인이 되는 세상이었다.

다만 관례상 열일곱 전후가 되면 성인으로 인정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 딸아이도 스물여덟. 본래라면 아이를 낳았어도 진즉 낳았을 테고, 그렇지 못하다면 불화를 의심할 만하겠지만……. ”

“ 죄송합니다. 너무 오래 기다리시게 해서. ”

나와 헬레나는 여전히 사이가 좋다.

너무 좋아서 문제라 할 수 있을 정도였다.

이스도 그를 아는지 걱정 섞인 말을 건네면서도 정작 그늘 하나 없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 음. 제법 오래 기다렸지. 드디어 손주 얼굴을 볼 수 있겠거니 싶은 마음에 초조하기도 하고. ”

“ 분명 헬레나를 닮아 예쁜 아이가 태어날 겁니다. 저만 안 닮는다면……. ”

“ 그런 겸손은 떨지 말게. 칼을 맞을 지도 모를 일이니까. ”

이스가 제법 말에 힘을 주어 이야기하니 부정할 수도 없을 노릇이다.

그러니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괜히 변명한답시고 말을 질질 끌면 더 곤란할 것 같아서.

커흠.

이스는 잠깐 어색해진 분위기를 바꾸려는 듯 헛기침을 하더니, 전혀 생각지도 못한 것을 입에 담았다.

“ 아무튼, 올해는 제법 중요할 테니… 미리 축복이라도 받고 오는 건 어떤가? 자네의 힘은 잘 알지만, 그저 노파심에 제안하는 걸세. ”

“ 축복이라면… 교국에 들르란 말씀입니까? ”

“ 그렇지. ”

이 세계도 신이 관찰하고 때때로 개입도 하는 만큼 그 존재를 알고, 섬기는 이들이 있다.

그것이 바로 교국이다.

크기는 작지만 블루네일 왕국과 제국 사이에서 굳건히 중립을 고수하고 있으며, 주변 국가 또한 그를 당연히 받아들이고 있다.

그렇다 해서 교국이 현대 종교, 혹은 중세 종교마냥 정치적 영향력을 넓히려 악을 쓰느냐 묻는다면… 그건 또 아니었다.

이곳의 교국은 적당한 영토를 가진 채 대륙 곳곳에 수도원만 지어놓았을 뿐, 조용히 제 갈길 가는 사람들이었다.

보통 이런 세계의 종교단체는 여러모로 썩기 쉽다 생각했는데의외가 아닐 수 없었다.

더구나 진짜 신성력도 사용할 수 있었으니까.

“ 아이를 위해서 교국까지 들르라 하시다니……. ”

“ 왜? 의외인가? 내 아내가 헬레나나… 그 아이를 품었을 때도 교국에 들렀었네. 건강하게 태어나게 해 달라고. ”

그 아이, 케인 크라우저를 말하는 이스의 표정이 약간 어두웠다.

분수에 맞지 않는 욕심 때문에 목숨을 잃었다고는 하나 그의 자식임은 변하지 않았다.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

나는 칙칙한 분위기를 털어내려는 듯 애써 밝은 척 하며 이야기를 이끌어 나갔다.

이 짓도 몇 년을 하다 보니 이골이 날 정도였다.

“ 알겠습니다. 일정을 조정해서 최대한 빨리 다녀오겠습니다. ”

“ 음. 그렇게 하게나. 이참에 자네 곁에 꼭 붙어 있는 첩들도 축복을 받게 하게나. 나쁘지 않으니. ”

“ 커헉! ”

차를 들이키다 말고 사례가 들려 켁켁 소리를 냈다. 과장해서 말하면 독이라도 삼킨 것만 같았다. 생각도 못한 기습을 받은 탓에.

“ 가, 갑자기 그게 무슨……. “

” 비록 그 이유가 어찌 되었던 자네가 품고 헬레나가 허락한 이들이니… 신경을 써 줘야 하지 않겠나? “

” …옳으신 말씀입니다. 배려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

너무 갑작스러워 놀랐을 뿐이지, 아주 옳으신 말씀이다.

더구나 그 이후에도 몇 마디 옳으신 말을 해 주신 덕에 속이 든든했다.

” 그럼,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

” 고생하게. “

나는 이스의 짧은 배웅을 받으며 집무실을 나왔다.

들어왔을 때 보다 나올 때가 배로 피곤한 느낌이었지만, 다 내가 자초한 일이다.

그러니 어쩔 수 없을 노릇이었다.

단순히 곁에 두고 불만을 적당히 풀어주면 그만이라 생각했는데, 몸까지 섞게 될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물론 결과가 좋으니 만족스럽기는 하나, 지금도 간혹 놀라곤 했다.

” 교국에서 축복을 받아 오라고 말씀하셨어? 아버지가? “

이스와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자, 집무실에서 기다리고 있던 헬레나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설마 이스의 입에서 교국에 가라는 말이 나오리라고는 예상 못한 듯, 많이 놀라는 눈치였다.

” 그래. 그래서 일정을 조정해 빨리 다녀오는 게 좋을 것 같은데… 헬레나 생각은 어때? “

” 나야 지온이 원하는 대로 할 거야. 그래도, 개인적으로 봐도 나쁘진 않아 보여. 교국과 사이가 나쁜 것도 아니고. “

헬레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당장 내일이라도 떠나자는 말을 했다.

너무 급히 결정하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지만, 빨라서 나쁠 건 없어 보였다.

이스가 권유한 이상 언젠가 해야 할 일이니까.

“ 마침 겨울이라 할 일도 많이 없으니 잘 됐네. 눈이 쌓인 길을 거쳐야 한다는 게 조금 문제지만……. ”

“ 괜찮을 거야. 그래도 대략적인 계획 정도는 미리 정해서 출발하는 게 좋을 것 같긴 해. ”

대책이라.

헬레나가 남은 서류를 재빨리 처리하는 동안, 대강 어떻게 하면 좋을지 생각했다.

그저 이브나 엘렌도 함께 가기에 사실 그리 큰 문제는 없어 보였다.

마법으로 밀어버리면서 가면 그만이니까.

그러나, 계획 자체가 아예 필요 없다는 말은 아니었다.

어느 영지를 거쳐 어느 길로 갈 것인지, 또 예상치 못한 일로 발이 묶일 경우도 생각해 봐야 했다.

“ 헬레나. 교국까지 가려면 어떻게 가는 게 좋을까? ”

“ 응? 그야 바르칸 백작령에서 배를 타고 이동하는 게 빠르지. 배를 타고 제국령의 항구도시 중 한 곳에 내린 뒤, 거기서 마차 같은 걸 빌려 출발하면 편하기도 하고. ”

겨울바다를 배를 타고 나아간다.

제법 낭만이 있는 제안인 것 같아 가슴이 두근거렸다.

심지어 옛날 배를 타 보는 것은 난생 처음이라 더욱 그랬다.

마치 대항해시대의 상인이라도 된 것 같았다.

“ 배라. 아주 좋네. ”

“ 그렇지? 거기다 바르칸 백작령이라면 마차를 맡기고 가기도 좋고, 마음도 편할 것 같았거든. 지온이 기뻐해줘서 다행이야. ”

헬레나는 한 고비 넘긴 듯, 안도의 한숨을 쉬며 배시시 웃었다.

좋은 제안을 해 놓고도 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어쩌나 싶어 걱정하는 기색이 엿보였다.

“ 다녀왔습니다. ”

대략적인 계획이 잡혀갈 무렵, 다크엘프 마을에 갔던 이브와 엘렌이 집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두 손을 모아 입김을 불어넣는 걸 보니 어지간히 추운 모양이었다.

아마 집무실에 난로를 피우지 않았다면 나라도 저렇게 했을 것 같다.

“ 어서와. 고생했어. 추울 테니, 우선 난로 근처에 앉아 불부터 쬐고 있어. ”

“ 네. 그럼, 잠시 실례할게요. ”

이브와 엘렌은 기다렸다는 듯 난로 앞에 쪼르르 앉았다.

타닥, 하고 장작 타는 소리를 내는 불꽃 앞에 앉으니 제법 살맛이 나는 모양이었다.

추위 때문에 떨리던 어깨가 점점 차분해지는 것이나, 살았다는 듯 긴장이 풀린 표정을 보니 그런 생각이 들었다.

“ 참. 너희 둘도 몸 좀 녹인 뒤에, 적당히 짐을 꾸려 둬. 내일 교국으로 떠날 테니까. ”

“ 네? 갑자기 교국으로 가요? ”

몸을 녹이고 있던 엘렌이 고개를 홱 돌리며 의문스럽다는 듯 물었다.

갑자기 연에 없던 나라를 간다 하니 그럴 만도 했다.

“ 그래. 아버지께서 미리 축복을 받고 오라고 하셨어. 올해 지온의 생일이 되면 아이를 갖게 될 테니, 그를 대비해서. ”

“ …아, 그랬었죠. 아이라……. 벌써 그럴 때가 됐네요. ”

“ 그러게. 시간이 참 느리게 흐르는 것 같으면서도 빠른 것 같아. 가끔 뒤를 돌아보면 깜짝 놀랄 지경이니까. ”

헬레나가 아련한 눈빛으로 과거를 곱씹는 가운데, 엘렌의 입가가 애써 부드러운 호선을 그렸다.

예전이었으면 착각일 수도 있겠거니 싶겠지만지금은 달랐다.

분명 아이라는 말에 씁쓸함을 느끼고 있었다.

늘 침대에서 반쯤 진심으로 아이를 낳게 해 달라는 말을 하곤 했는데, 그에 대한 미련이 생각보다 더 깊은 모양이었다.

서로의 종족이 다른 탓에 아이를 가자기 무척 힘들어,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 그런데… 축복을 받으면 아이를 지키기 쉬워지나요? ”

“ 아무래도 아이가 자라는 방 주위로 신성력이 머물게 되니까 안정감이 높아져. 또, 소소하게 운 나쁜 일을 피하는 효과도 있고. ”

헬레나는 어느 새 고개를 돌린 이브의 질문에 친절히 답했다.

안정감과 운은 여러 면에서도 중요하니, 새삼 받을 만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찌 보면 순산으로 가는 지름길을 닦아주는 셈이니까.

“ 참. 그러고 보니 교국까진 어떻게 가실 건가요? 배로 가는 게 편하긴 할 텐데……. ”

엘렌은 언제 우울했냐는 듯 호기심 가득한 기색을 띠며 물었다.

더해, 당연하다는 기색으로 뱃길을 추천하는 걸 보며,새삼 삶의 경험이 많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 응. 배로 갈 거야. 그 다음은 마차를 타고 이동할 거고. ”

“ 역시… 벌써 다 계획을 세워 두셨군요? ”

“ 겨울이니까 힐 일도 없고, 여유가 있는 김에 적당히 세워 뒀어. ”

나는 제법 죽이 잘 맞아 떨어지는 두 여자의 대화를 들으며, 엘렌의 곁을 가만히 지키고 있는 이브와 눈을 맞췄다.

할 말이 없고, 끼어들 여지가 없다보니 동질감이 느껴졌다.

“ 배가 좋기는 해요. 더구나 요즘 날씨도 잔잔한 편이라 썩 위험하지도 않을 테고요. ”

“ 응. 조금 춥기는 하겠지만 별 문제는 아니니까. ”

“ 추위야 적당한 매직 아이템을 챙기면 되지 않을까요? 기사단 훈련 때 사용하는 물건을 가져다……. ”

여행 계획부터 난방 대책에 이르기까지.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주위에서 다 해결해 준다.

이럴 때는 얌전히 앉아 떡고물만 주워 먹으면 된다는 생각을 하며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아무것도 안해도 되는 상황이 왜 이렇게 좋은지 모르겠다.

다만, 이브는 자기도 뭔가 할 일이 없을까 싶어 제법 안절부절 못하는 기색이었다.

*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