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0화 〉 마법사의 순정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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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에 들 만한 성과를 낸다면 인정하겠다.
이브는 눈을 감은 채, 얼마 전 헬레나가 입에 담았던 말을 떠올렸다.
이 땅의 주인인 헬레나에게 던진 한 마디 한 마디가 모두 진심이었으나, 모처럼 찾아 온 기회를 놓치기도 뭣했다.
그래서 하던 연구도 멈춘 채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렇다 해서 그 특별한 성과를 꼭 내야 하느냐 묻는다면그것도 아니었다.
그저 헬레나가 약속했던 비밀스러운 첩의 자리만 없을 뿐, 공작령의 마법사로서 받는 대우에 변함이 없었으니까.
어떻게 하면 좋을까.
이브는 마법사이니만큼 마법을 이용해 성과를 내리라 결심했으나 그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헬레나가 좋아하는 것을 하자는 생각이 이브의 뇌리를 스쳤다.
마치 뇌물을 쓰듯이.
“ 하아……. ”
이브는 천천히 눈을 뜨며 지온의 얼굴을 떠올렸다.
헬레나가 무엇보다 아끼는 것이 바로 그였고, 그에게 이득을 가져다주는 행위가 곧 헬레나의 호감을 사는 지름길이었다.
또한, 이브는 그 지온에게 잘 보이고 싶은 마음을 채워주는 것 또한 좋은 지름길이 될 거라 생각했다.
헬레나의 아름다움은 이브, 더 나아가 영지민 모두가 인정하는 바이다.
특히 문제가 되는 지온이 그에 푹 빠져 있는 것만 보아도그원판이 흠 잡을 데 없음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아름다움은 젊었을 시절에나 빛날 뿐, 결국 언제 그랬냐는 듯 시들어버리고 만다.
사람으로 태어난 이상 피해갈 수 없을 노화 때문이다.
이브는 그 노화를 마법으로 이겨 낼 생각을 굳혔다.
나이가 지나서도 아름다움을 유지하고, 그 아름다움을 기반으로 남자를 묶을 수 있도록 한다.
마법사로서는 이단에 가까운 생각이었으나 기꺼이 그 길을 걸을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 길을 걷기 위해 가장 처음으로,
“ 실례합니다. ”
바로 옆에 사는 다크엘프의 집을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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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은 관대하시네요.
응접실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앉은 엘렌이 정말 의외라는 듯이 중얼거렸다.
그를 바라보는 헬레나의 눈빛은 차분했고 기분 나빠하는 기색도 없었다.
당연히 나올 만한 질문이라 생각은 했다.
단지 질문을 던진 이가 엘렌이라 약간 어이없었을 뿐.
“ 관대함이라……. ”
관대함이라.
헬레나는 그 말을 몇 번이나 되뇌다 테이블 위에 놓인 찻잔을 집어 찻물을 들이켰다.
아직 희뿌연 김이 약하게 피어오르고 있어 적당한 따뜻함을 품고 있었다.
그 탓일까. 향과 맛을 곱씹듯 뜨거운 숨을 길게 내뿜고 나서야 헬레나의 입술이 열렸다.
“ 예전에… 지온이 독을 먹고 쓰러졌다는 얘기를 했었나? ”
“ …아, 네. 대공님이 말씀하시는 걸 들은 적이 있어요. ”
“ 그럼 잘됐네. 지금부터 할 말을 이해하려면 그 일을 아는 편이 좋거든. 떠올릴 때마다 화가 나지만……. ”
헬레나는 잠시 말을 끊고, 치밀어 오르기 시작하는 화를 억지로 가라앉히려 애썼다.
독 때문에 바닥을 구르며 죽어가던 아이의 얼굴이 지금도 생생히 떠오른 탓이었다.
“ …아무튼, 그 때 나는 지온이 안 보이면 무척 불안한 상태였어. 눈에 보이지 않으면 혹시 모를 일이 터질지 모른다는 불안 때문에. ”
지온이 어렸던 시절이야말로 헬레나의 집착과 광기가 극에 달한 시절이었다.
반드시 헬레나의 눈이 미치는 곳에 있어야 했으며, 혼자서는 화장실조차 보내지 않았다.
그 정도로 심각하기 짝이 없었다.
“ 하긴, 제가 공작님이었어도 그랬을 것 같아요. ”
다른 사람이라면 모를까, 헬레나와 비슷한 성향을 가진 엘렌이기에 쉬이 공감하는 기색을 내비쳤다.
헬레나 또한 그 대답이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들고 있던 찻잔을 테이블에 놓았다.
“ 그 때는 그랬지만 지온이 지극정성으로 돌봐줘서 불안도 조금 가시고, 여유가 생겼어. 이 애라면 곁을 떠나지 않으리라는 믿음이 생겼거든. 그런데… 한 숨 돌리고 보니 또 다른 불안을 알게 됐었어. ”
한 숨 돌릴 여유가 생기고 나서야 자기를 돌아 볼 여유가 생겼고, 그로 인해 매우 상태가 심각했음을 새삼스레 깨달았다.
만약 이해심 많은 아이가 아니었다면 진즉 일이 터지고도 남았으리라.
헬레나는 그를 깨달을 수 있었기에 광기, 사랑과 관련된 여러 책을 찾아 읽었다.
“ 그러다 문득 평이 바닥을 치는 글 하나를 읽었는데… 그럴 만 하더라. 남자를 둘러 싼 치정극이 결국 남자의 죽음으로 끝맺었으니. ”
바람둥이 남자를 둘러 싼 수많은 여자들의 다툼과 광기, 그리고 그 끝에 다다른 남자의 사망.
그것도 모자라 남자의 몸을 나누어 갖자는 괴팍하기 짝이 없는 결말이 헬레나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온전히 가질 수 없다면 죽여서라도 나눠 갖자는 생각의 이유를 이해함과 동시에, 멍청하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 결국 아무리 사랑하는 남자의 것이라 한들… 죽은 고깃덩이에 지나지 않아. 그런 걸 품어봤자 무슨 소용일까. ”
맞는 말이다.
엘렌은 말없이 고개를 몇 번 끄덕이며 강렬한 공감을 표했다.
닿을 듯 닿지 않는 나날이 이어지면 애간장을 끓이다 미쳐버린다는 것은 알아도그 방식이 문제였으니.
“ 그래서 약간이나마 관대함을 갖추게 되셨다고요? ”
“ 전부 잃는 것보다는 나았으니까. 물론, 그렇다 해서 전부 다 받아들이겠다는 건 아냐. 너도 알다시피 홀리 하운드를 진심으로 죽이려 할 때도 있었으니까. 그저 양보해야 할 상황이라면 이가 갈리더라도 받아들여야 한다는 얘기지. 단, 내가 유리하도록. ”
엘렌이 목숨을 걸고 협박할 때가 그 대표적인 예라고, 헬레나는 말했다.
“ 당장 이 배에 정이 없다고 생각해봐. 몰랐다면 모를까, 맛을 본 상황에서 말이야. 그 허무함을 견딜 수 있겠어? ”
“ 절대… 못 견뎌요. ”
배를 채우는 열이 없다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끔찍하다.
엘렌 또한 그리 생각했기에 낯빛이 새하얗게 물들었다.
오싹한 기운이 등골을 타고 흐르는 탓에 몸을 부르르 떨기도 했다.
“ …그래서 양보가 필요한 거야. 하지만… 그것도 상황에 따라 다르지. ”
누군가의, 가령 엘렌 같이 위험한 인물의 사랑으로 인해 환경이 무너질 때가 온다면 경우에 따라 양보한다.
그렇지 않다면 홀리 하운드에게 그랬던 것처럼 숨통을 끊으려 달려든다.
그것이 헬레나가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이었다.
엘렌은 그 결론 덕분에 지금 같이 은총을 받으며 살 수 있음에 감사하며 입을 다물었다.
헬레나가 이를 악물고 양보한다는 것은 상대가 그만큼 위험하고 가치 있다는 뜻이었으니까.
“ 이브가… 그 정도로 위험하다고요? ”
“ 너도 알 텐데. 저 재능이 우리와 척을 진 인간에게… 예를 들면 그 상인 같은 놈에게 넘어갔다고 생각해 봐. ”
이브가 크라우저 공작가와 적대하는 측에 서서 일한다.
엘렌은 그를 상상하기 무섭게 마른 침을 삼켰다.
정면에서 싸우게 된다면 지지 않을 자신이 있지만, 이브가 펼치는 마법은 쥐도 새도 모르게 기습을 가하기 딱 좋았다.
당장 공작령 성벽 주위에 깔아놓은 마법진이 거꾸로 아가리를 벌린다 생각만 해도…….
“ 끔찍한 일이네요. ”
“ 그래. 끔찍하지. 거기다 버리기 아까운 재능이기도 해. 마치 너처럼. ”
엘렌에 대한 감정은 둘째 치고라도, 재해를 일으킬 수 있을 만큼 큰 능력은 반드시 도움이 된다.
엘렌도 그 진심을 알았는지 입꼬리를 가볍게 들어 올린 채 감사하다는 말을 꺼냈다.
“ 그런데도 몇 년이 걸릴지 모르는 일을 조건으로 거신 건가요? ”
“ 이브는 너랑 다르게 성질이 급하질 않잖아. 그리고, 너와 나처럼 한 남자만 보는 것도 아니고. ”
“ 아… 그랬었지요. ”
이브에게 있어 지온과 헬레나는 비교가 어려울 만큼 중요하다.
약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그 무게를 쉬이 잴 수 없었다. 헬레나가 지적한 것이 바로 그 점이었다.
“ 그러니 기다리면 돼. 나중이라도 생각을 바꿔 내가 내민 거래를 거절하면 좋겠지만… 그렇지는 않겠지. ”
하아. 헬레나는 가볍게 한숨을 쉬며 때가 오기를 기다렸다.
포기를 하든, 성과를 내든… 분명한 결론이 날 때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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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한 분께는 아름다운 모습을 보이고 싶다. 너무 당연한 생각이죠. ”
이브는 얼핏 보아도 복잡하기 짝이 없으며, 책상 위에서 푸른빛을 내는 반투명한 마법진을 바라보며 이야기했다.
마법진 위에는 과학실에서 볼 법한 시험관이 거치대에 고정된 채 자리하고 있었고, 관에는 하나같이 몇 방울의 피가 고여 있었다.
그 피는 다크엘프의 피로, 현재 연구 중인 불로를 실현하는 마법을 위한 연구 재료였다.
“ 거야 그렇긴 한데… 엘프의 피는 왜? ”
“ 엘프는 오래 살면서도 젊음을 유지하는 장수종 중 하나잖아요. 그러니 그 이유를 알 수 있다면 도움이 될 것 같아서요. ”
실험실 구석에 쪼그려 앉아있던 올리비아의 질문에 답하며, 이브의 눈동자가 날카롭게 빛났다.
피의 구조를 파악하고 올리비아의 몸을 꼼꼼히 조사하기 시작한지가 벌써 몇 달이었다.
그 사이 시린 눈이 내리던 겨울도 지나가, 불을 때지 않아도 따뜻한 기운이 방 안에 가득한 시기가 되어 있었다.
“ 이걸 전문용어로 실험체라고 하던가? 살다보니 이런 경험도 다 해 보네. ”
“ 덕분에 어떻게든 연구를 할 수는 있으니… 정말 감사해요. ”
“ 뭘. 너무 감사할 필요 없어. 응원만 하긴 찝찝했거든. 그래서 잘 됐다 싶기도 해. ”
올리비아가 한 손에 시험관 하나를 들고, 한 손으로 마법진을 다루는 이브를 보며 웃었다.
그 대공에게 홀려 사서 고생을 한다 싶어 불쌍하기도 했지만, 기왕 하는 고생이라면 그에 맞는 열매를 얻어라 응원하기도 했다.
기꺼이 피를 주고 몸을 훑도록 허락한 것도 그 때문이다.
고작 몇 방울에 불과한 피가 시험관을 타고 오르며 끓는 것도 신기했고, 그것이 책상 위에 넓게 퍼져 정체 모를 도형을 그리는 것도 신기했다.
이브가 최근에 마법진처럼 복잡기괴하지는 않더라도참 영문 모를 생김새를 한 도형이었다.
“ 다 됐어? ”
“ 지금 검증 중이긴 한데… 반응이 영 없네요. 아직까진 안 되나 봐요. ”
도형을 그리고, 그를 바탕으로 식을 짜내어 써 봤지만 반응이 없었다.
그 때문에 질문에 답하는 이브의 목소리에 힘이 없었지만, 손은 여전히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새로운 마법, 하물며 사람의 젊음을 유지하는 것이 하루아침에 이루어 질 리가 없다.
아무도 해 본적 없는 길을 걷는 일이라 그 고생은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이브는 바닥부터 이론을 세우고 재료를 모아 차근차근 일을 진행해 왔다.
아직도 갈 길이 멀기는 하나 기초가 될 마법을 고안하는 데는 성공했다.
문제는 이 다음부터였다.
엘프의 구조를 파악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고, 끊임없이 실패에 실패를 거듭했다.
당연한 일이라 할 수 있었다.
비슷하다고는 하나 엄연히 종이 다른 엘프의 성질을 옮기는 일이니까.
“ 그… 정말 되기는 해? ”
“ 안 된다 생각하면 평생 안 되는 것이고, 된다 생각하고 하다보면 되는 것이 마법이니까요. ”
마법사들 사이에서도 허황된 것이라는 소리를 듣던 미세원소를 가지고 몇 년을 끌었지만 결국 결실을 거두었다.
지온의 도움이 있었다고는 하나 온전히 마법으로 가다듬은 것은 이브의 힘이었다.
그렇기에, 이브에게 있어 실마리가 잘 보이지 않는 상황은 익숙하다. 답을 내는 목소리에 흔들림이 없는 것도 다 그런 이유에서다.
“ 존경스러워. 네가 진짜 어른이다. ”
“ …고마워요. ”
긴 쓴맛 끝에 단맛을 본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망설임 없이 기나긴 쓴맛을 보고 있다.
올리비아로서는 그 모습에 존경심을 품지 않을 수 없었다.
굳이 자진하여 또 고배를 삼키는 짓은 삼갈 것이 분명하다는 생각 때문에.
이브는 그 말이 쑥스러운 듯 얼굴을 붉히더니, 짤막한 답만 내놓은 채 연구에 몰두했다.
오전에는 올리비아를 비롯한 용병단의 여자들에게 피를 모아 연구하고, 오후에는 발가벗은 다크엘프의 몸을 손과 마법으로 더듬으며 조사에 몰두했다.
그 와중에 자잘한 상처가 있으나 탄탄하기 그지없는 몸이 부럽다는 생각도 했다.
연구하고, 자고. 연구하고, 자는 생활이 계속 이어졌다.
그 과정에서 자연스레 병단에 관한 일을 소홀히 할 수밖에 없었으나, 올리비아를 비롯한 용병들의 도움으로 무난히 넘길 수 있었다.
덕분에 이브는 아무 생각 없이 연구에 몰두할 수 있었고, 가끔 초청을 받아 나갈 때를 빼면 오로지 집에만 틀어박혀 있었다.
무려, 몇 년씩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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