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7화 〉 보복 #6
* * *
“ 간첩이라니! 아무리 공작가라 하더라도 이런 말도 안 되는…! ”
툭.
나는 집무실 바닥에 무릎 꿇은 채 악을 쓰는 남자에게 두툼한 서류 하나를 툭 던졌다.
암살자 길드가 쓸 만하다 싶어 빼내 온 보고서였는데, 아주 확실한 증거였다.
덕분에 헬레나도 무척 만족스러워 했었다.
남자는 화를 내면서도 바닥에 놓인 서류를 집어 내용을 살피다, 곧 낯빛을 굳혔다.
“ 어디서 많이 본 물건이지? 네가 쓴 보고서이니 모른다는 소리는 지껄이지 않는 게 좋을 거다. ”
“ 이, 이건 그저 상인으로서 물류의 흐름을 알기 위해……. ”
“ 그런 되도 않은 소리는 치워라. 상인이 엘프 마을의 용태를 살피고, 심지어 군사 상황까지 기록할 이유가 뭐가 있단 말인가. ”
엘프 노예에 관한 정보를 세세히 기록한 것은 물론, 겉으로 보이는 군사 정보까지 기록되어 있다.
아는 사람만 아는 기밀 정보가 적혀있지는 않았지만 제법 자세했다.
아마 이놈은 윗선의 명령대로 따랐을 뿐이겠지만 욕심이 지나쳤다.
이렇게 빼도 박도 못 할 증거를 낳았으니까.
나는 일부러 무릎 꿇은 상인을 비웃듯 말했다.
“ 나는 네놈의 머리에게 이런 일을 저지른 연유를 세세히 따져 볼 생각이다. 그러니 편지를 보내 당장 우리 쪽으로 오도록 독촉을 해. 죽고 싶지 않으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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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세상에 정보를 얻으려면 정보원, 즉 스파이를 파견해야 한다.
대륙이나 옛 왕조 시절에는 세작이나 간자 등의 이름으로 불리는 이들이 바로 그랬는데, 어지간해서는 들킬 일이 잘 없었다.
겉으로는 보통 사람처럼 보이기에 작정하고 움직이지 않는 이상 잡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작정하고 덤비면 어찌어찌 잡을 수 있는 것들 또한 세작이었다.
그저 대부분이 알려져도 별 상관없을 일들이 많았기에 놔두고 있을 뿐이었다.
일상에서 접할 수 있는 정보를 막자고 일일이 잡아들이기엔 수고가 너무 많이 드니까.
또한, 설령 잡았다 한들 바로 처형을 시키지 그 뿌리를 흔드는 일도 드물었다.
대륙의 권력자들끼리 맺은 암묵적 약속이 그 이유일지도 모르나, 세작 하나를 가지고 덤비기엔 이득이 너무 없으니까.
아마 지금 내 눈앞에 있는 상인, 레너드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지 않을까 싶다.
“ 으음. 뭔가 오해가 있으신 모양인데……. ”
“ 오해? 네가 은밀히 부리던 남자가 쓴 보고서와 연결고리는 이미 다 알아낸 지 오래다. 쓸 데 없이 잔머리나 굴리며 발뺌할 생각은 접도록. ”
나는 거만하게 팔짱을 낀 채 입꼬리를 비틀었다.
누가 보아도 사람을 비웃고 경멸하는 것처럼 느끼게 해, 이놈이 가진 여유를 조금이라도 줄이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놈도 닳고 닳은 상인이기에 별 효과는 없어 보였다.
“ 고작 상인 놈이 잘도 날뛰었더구나. 왕국의 귀족들을 은근히 자극해 우리 공작가를 몰아붙일 줄이야. ”
“ 음?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전혀 모르겠군요. 저는 단지 오해를 풀고자 왔을 뿐인데요. ”
“ 그래. 증거도 없으니 발뺌만 하면 그만일 테지. ”
청문회와 다르게 이번 일은 명확한 증거가 있다.
그러니 이 상인 놈이 굳이 먼 크라우저 공작령까지 걸음을 옮긴 것이리라.
자기가 말한 대로 “오해”를 풀기 위해서.
“ 아시다시피 저희 제국상회는 대륙 곳곳을 누빕니다. 왕국도 예외는 아니지요. 그러니 공작령의 상황을 알아보고, 어떤 물건이 팔릴지 알아보라 시킨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명령을 받은 아랫사람이 그를 잘못 이해하여……. ”
“ 쓸데없는 일까지 낱낱이 기록하여 오해를 샀다 그 말인가? ”
“ 그렇지요. 물론 부하의 잘못은 제 잘못이기도 하니, 이렇게 사죄를 하러 왔습니다. ”
그저 오해에서 비롯된 일을 뿐이다.
그러나 잘못을 사과하겠다. 레너드는 그 선을 명확히 그으며 깊이 고개를 숙였다.
더구나 예물까지 갖추어 왔기에 진심이 느껴지는 모습이었다.
겉만 보았을 때는.
“ 오해. 오해란 말이지……. ”
내 옆자리에 앉아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만 있던 헬레나가 스산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등줄기에 한기가 흐를 만큼 싸늘하기 그지없어, 레너드의 어깨마저 움찔할 정도였다.
“ 예. 오해입니다. 슬픈 오해지요. ”
그러나, 고개를 든 레너드의 표정엔 여전히 여유로움이 배어 있었다.
분명 어깨가 움찔했음에도 저러는 것을 보니 배짱 하나는 인정해 줄 만 했다.
점점 날카로워지는 헬레나의 앞에서 저럴 수 있는 사람이 드물었기에.
헬레나는 오해라는 말을 연신 중얼거리다, 돌연 검은 오러를 뽑아 놈의 가랑이 사이로 꽂아버렸다.
워낙 갑작스레, 그리고 눈 깜짝할 사이 일어난 일이라 아무런 대처도 할 수 없었다.
“ 허업! ”
아무리 강심장인 놈이라 하더라도 오러가 가랑이 사이로 꽂힌 것은 두려웠던지 헛바람을 삼켰다.
곁에서 지켜보는 나조차 간담이 서늘할 지경인데, 당해보는 당사자는 오죽할까.
무저갱과 같은 눈.
잊을 만하면 튀어나는 그 눈은 닳은 상인조차 당황케 하기 충분해 보였다.
하물며 엄연히 높은 귀족에 속하는 여자가 이러고 있으니 그 효과가 더욱 커 보였다.
“ 네놈이 그렇게 뻔뻔스럽게 나오면, 어쩔 수 없이 사과를 받아 주리라 생각한 거냐? ”
“ 그… 럴 리가 있겠습니까. 하지만, 지금 공작께서 하시는 행동은 서로에게 썩 좋지 못합니다. 큰 곤란에 처하실 수도……. ”
“ 곤란? 제국에서 잘 나가는 상인을 건드렸다고, 혹은 왕국이 시비를 걸었다 받아들일지 모른다는 것 때문이냐? ”
“ 그렇습……. ”
끄아아아아!! 레너드는 말을 하다 말고 집무실이 떠나가라 비명을 질러댔다.
헬레나가 손에 쥐고 있던 오러를 높이 쳐들어, 아무 주저 없이 레너드의 허벅지를 찍어버렸기 때문이다.
그 고통이 얼마나 심한지는 겪어본 사람만이 공감할 수 있겠으나, 다행히 동맥을 찌른 것은 아닌 듯 출혈이 썩 심하진 않았다.
“ 네놈이 만약 나만 건드렸다면 적당히, 적당히 타협하고 넘어갈 수 있었을 거다. 그런데… 감히 제 주제도 모르고 누구를 말려들게 한 지 아느냐? ”
“ 으, 으으으!! ”
레너드는 고통스러운 신음을 흘리고 있음에도크게 겁을 집어먹질 않고 있었다.
아마 어지간히 굴곡이 많은 인생을 살아왔기에이런 위기에도 익숙한 것이 아닐까 싶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미약한 공포가 그 눈에 깃들고 있음을 볼 수 있었다.
헬레나의 광기를 접한 사람이라면 예외 없이 보이는 눈빛이었다.
“ 전쟁? 좋다. 네놈의 오만으로 제국 황실의 핏줄이 죄다 죽어나가야 해 줘야 주제를 깨닫는다면……. ”
헬레나는 차갑기 짝이 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여태까지는 상당히 차분하게 행동해 왔지만, 결국 일을 꾸민 본인을 마주하는 순간 억눌렀던 광기가 터져 나오고 있었다.
며칠 전부터 묘하게 차분하긴 했었는데, 설마 이렇게 터져버릴 줄이야.
“ 그, 그게 무슨……. ”
“ 지온이 곤란에 빠진 것도 전부 네 탓이지 않느냐? 그 죄는 목을 잘라 빌어도 모자라.”
분명 혼란스럽고 위태로운 상황임에도 오랜만에 고향에 돌아온 것 마냥 정겹기까지 했다.
광기에 적응한 탓인지, 아니면 나도 미쳐버린 탓인지 모를 노릇이다.
꾸욱.
헬레나가 허벅지를 꿰뚫은 오러를 슬쩍 움직이자, 레너드가 또 한 차례 비명을 내질렀다.
그렇잖아도 아픈 곳을 후벼 팠으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 증거가 없다는 얄팍한 수작으로 빠져나갈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면… 아주 큰 오산일 것이다.”
“ 고, 공작… 끄으으!! ”
너무나 큰 고통에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는 듯, 끙끙대는 소리만이 연이어 들려왔다.
허벅지를 꿰뚫은 오러를 타고 피가 뚝뚝 흘러 바닥을 적셨고, 그럴 때 마다 레너드의 안색이 조금씩 창백하게 변해가고 있었다.
다만, 헬레나는 레너드가 죽어가든 말든 상관하지 않고 말했다.
“ 내 우선 황실의 씨를 말리고, 편지 한 장을 써 둘 거다. 모든 것은 네놈이 자처한 일이라고. 그 경우 제국은 어떻게 나올까? 나에 대한 복수가 먼저일까? 아니면 텅 빈 권좌를 차지하기 위해 내분이 이는 것이 먼저일까? 참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군. ”
제국은 그 이름대로 넓고 다양하다.
귀족의 수도 왕국보다 많고, 그로 인해 권력구도도 복잡한 편이다.
그런데 그 권력의 중심이라 할 수 있을 황족들을 다 쓸어버린다면 어떻게 될까.
얼핏 황당할 뿐이라 생각하고 넘기면 그만이겠지만 저지르려는 사람이 헬레나라면 또 모른다.
제국에도 소드마스터가 한 사람 있기는 해도, 공격보다 지키는 입장이 불리하니만큼 헬레나의 생각대로 될 가능성이 높겠지.
“ 그, 그것은……. ”
한다면 한다.
광기에 빠진 헬레나는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여자였다.
알버스 킬리네어와도 전면전을 벌일 생각도 했었는데, 기습이라고 못할 것이 무엇일까.
레너드도 헬레나의 진심을 알았는지조금 더 두려워하는 기색을 보였다.
아직 이성을 잃을 정도는 아니지만제법 궁지에 몰린 눈치다.
법보다 주먹이 가깝다는 소리가 떠오르는 순간이었다.
그래도, 이쯤하면 충분하겠지.
나는 헬레나의 어깨를 조심스레 끌어안으며 입을 열었다.
“ 헬레나. 그만 오러를 거둬 줘. 이쯤하면 놈도 충분히 알아들었겠지. 부탁해. ”
내가 부탁하자, 헬레나가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오러를 거두었다.
그 탓에 뚫린 구멍에서 피가 제법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구멍을 막고 있던 오러가 사라지니 당연한 일이었다.
나는 급히 사람을 불러 상비약과 치료에 필요한 도구를 가져오도록 한 뒤, 상처에 약을 바르고 붕대를 감아 지혈했다.
정말로 죽게 내버려 둘 수는 없을 노릇이기 때문이다.
“ 네놈은 상인이니 흥정에 능할 터. 그러나, 때에 따라선 흥정 자체가 통하지 않는 상대가 있음을 확실히 깨달았겠지. ”
나는 아픔과 공포에 떨기 시작하는 레너드를 물끄러미 응시하며 말했다.
어떻게든 이성으로 버티는 모양새였지만, 조금 더 몰아붙였으면 무너질 것만 같았다.
그 정도로 불안한 상태였다.
본의 아니게 위험한 보복을 한 셈이나 차라리 잘 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협박을 하려면 제대로 해야 먹혀드는 법이니.
“ 두 번은 없을 것이다. 돌아가기 전에 네놈이 심어놓은 끄나풀들도 전부 데리고 가거라. 그리고공작령에 대한 관심도 꺼라. 또한, 만약 한 번 더 이와 비슷한 일이 벌어진다면… 전부 버리고 멀리 도망갈 생각이나 하도록.”
“ …알겠습니다. ”
“ 행여나 앙갚음할 생각도 하지 마라. 만약 그리 하고자 움직인다면…그 때는 정말로 네 목을 베어버릴 명분이 생기는 셈이니까. ”
지금은 공포 때문에 별 생각을 못 하는 것 같지만, 숨통이 트이고 나면 또 모른다.
그러니 마지막 협박까지 알뜰하게 챙긴 뒤에, 사람을 시켜 집무실 밖으로 보내버렸다.
미친놈에게는 거래도, 협박도 통하지 않는다.
그저 피하는 것이 상책일 뿐.
상인 놈이 그렇게 생각 해 준다면 참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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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어먹을. 빌어먹을!
레너드는 다리를 절뚝대며 자기 숙소로 돌아오기 무섭게, 침대를 주먹으로 후려치며 이를 갈았다.
제국상회를 꾸리며 단맛쓴맛 다 보아 왔었지만, 이 자리에 오르고 나서 굴욕을 겪게 될 줄은 몰랐다.
“ 헬레나 크라우저, 그 빌어먹을 년을…! ”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복수를 다짐하던 중, 레너드의 낯빛이 갑작스레 창백한 빛을 띠었다.
터질 듯 시뻘겋게 달아오른 낯빛은 전부 거짓말이었다는 듯, 어깨를 가늘게 떨기까지 했다.
소드마스터의 살기를 코앞에서 접하고, 다리가 꿰뚫려 극심한 고통을 맛보기까지 했다.
더구나 헬레나가 보였던 초점 없는 눈동자는 여태껏 본 적 없었던 광기로 넘실대고 있었다.
사람은 알 수 없는 것에 두려워할 때가 있는데, 지금의 레너드가 딱 그랬다.
살면서 한 번도 겪어본 적 없는 광기 어린 행동이 그를 공포로 물들이고 있었다.
더구나 무력으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소드마스터가 그 주범이다.
두렵지 않을 수가 없었다.
“ 미친년, 미친년……. ”
어느새 복수심이 사라진 자리를 두려움이 채우기 시작하자, 떠나고 싶다는 생각만이 그의 뇌리에 맴돌았다.
제국민을 핍박했다는 명분을 가지고 황실에 진언을 올리려 할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그랬다가는 헬레나가 말한 최악의 상황이 찾아올 까봐 두려웠던 탓이다.
그저 엘프들을 노예로 둔 그 비밀이 궁금했고, 자신이 그 비밀을 알아낼 수 있다면 커다란 이윤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 이유로 일을 진행한 것은 좋았으나, 하필 그를 거느린 상대가 저토록 미쳐 있을 줄이야.
레너드는 머리로만 아는 것과 실제로 겪어보는 것의 간극이 이토록 크다는 것을 새삼 깨달으며, 침대의 이불 속으로 파고들었다.
마치, 두려움을 억지로 떨쳐버리려는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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