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8화 〉 마법병단 #4
* * *
“ 오늘은… 여기까지 할게요. ”
해가 뉘엿뉘엿 서산 너머로 넘어갈 무렵.
이브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오늘의 훈련이 끝났음을 알렸다.
평소 방구석 학자와 같은 그녀에게 있어 몸을 쓰고 숲을 돌아다니는 행위 자체가 무척 힘겨웠기 때문이었다.
“ 쯧. 마나도 아주 바닥을 치는구만. 너무 무리한 거 아냐? ”
삼삼오오 무리지은 다크엘프들이 떠들어대며 떠나는 동안, 오르커스 홀로 흙바닥에 주저앉은 이브 곁으로 다가왔다.
비행마법을 기초로 정령마법까지 연거푸 사용했으니 맥을 못 추는 것도 당연했다.
“ 괜찮… 지는 않지만, 괜찮아요. ”
“ 큭큭. 은근히 고집 있네. 자, 물부터 마셔라. 아일라가 준 거야. ”
아일라. 평소 이브와 가깝게 지내는 다크엘프로, 오르커스는 그녀가 미리 준비해 둔 물주머니를 내밀었다.
사막을 다니는 여행자들이 자주 쓸 법한 가죽으로 만든 물주머니였다.
이브는 그를 감사히 받아들여 정신없이 들이켰다.
가뭄에 말라버린 논처럼 쩍쩍 갈라진 목에 스며드는 물이, 그야말로 가뭄의 단비와도 같았기 때문이었다.
“ 하아…! 살겠다……. ”
긴 안도의 한숨과 함께 이브의 어깨가 축 늘어졌다.
힘이 없어 비실대는 것이 아니라 몸을 옥죄이던 긴장감이 풀려버린 결과였다.
“ 이제 일주일 정도 지났던가? 점점 잘 버티고 있네? ”
“ 마나도… 쓰면 쓸수록 조금씩, 아주 조금씩 늘어나니까요. ”
마법사에게 있어 마나란 근육과도 같은 것이라 쓰면 쓸수록 발달된다.
마나를 담을 수 있는 그릇인 마나홀의 크기에 선천적인 차이가 있기는 해도, 노력이 가장 중요했다.
재능이 있다 한들 훈련을 하지 않으면 용량을 키울 수가 없었다.
이브도 그를 잘 알고 있었지만, 구태여 마나홀을 늘일 생각 자체를 하지 않고 있었다.
그녀에게 있어 마법이란 연구하는 것이며, 스스로 휘두르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마법병단의 장으로 임명되기 전 까지는.
“ 그렇긴 하지. 정령마법도 쓰면 쓸수록 사용 가능한 시간이 늘어나기는 하니까. 하지만 효율이 너무 나빠. ”
“ 교감… 이라고 하셨죠? 정령마법을 사용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
“ 음. 정령과의 교감을 높여 좀 더 차원이 높은 정령을 이끌어 내는 능력이 중요하지. ”
일반적인 마법과 다르게, 정령마법은 정령과의 교감을 높이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흔히 급 높은 정령이라 불리는 존재들과 교감을 나눌수록 그 힘도, 그 힘을 다루는 시간 또한 자연스레 늘어난다.
엘프라면 모두가 알고 있는 일이었다.
“ 네. 그렇다고 들었어요. ”
“ 교감 능력은 정령과의 대화를 자주 나눌수록 높아지긴 하지만, 타고나야 하는 요소가 아주 커. 안 될 놈은 평생 기초정령과 살아갈 수밖에 없는 운명이지. ”
오르커스는 상급정령을 불러내기 위해 발악했던 과거를 털어내듯 진한 숨을 토해냈다.
그 또한 재능의 벽 앞에서 꺾인 엘프 중 하나라는 것을 새삼 깨달은 탓도 있었다.
“ 엇차. ”
아무튼, 기분 칙칙해지는 이야기는 여기까지.
오르커스는 하면 할수록 칙칙해질 이야기 대신 궁금했던 점을 입에 담았다.
“ 그런데 말이지, 굳이 안 해도 될 걸 받아들인 이유가 뭐야? 이곳 귀족 나으리라면 싫다고 말한들 해를 입을 일도 없고, 오히려 존중해 줄 것이 분명했을 텐데. ”
“ 대공님… 말씀하시는 건가요? ”
“ 그야 그 양반 말고 누가 있겠어? 이곳 공작님도 특이하고 좋다는 건 아는데, 대공 나으리만큼은 관심이 있는 건 아니잖아. ”
비공싱적이기는 하나 마법병단이 정식으로 창설되던 날.
지온 크라우저와 함께 찾아와 부드럽게 인사를 나누던 헬레나의 모습이 오르커스의 뇌리를 스쳤다.
예의도 있고, 품위도 있고, 붙임성도 있으나 그들에게 크게 관심을 두지 않던 눈빛까지 다.
이브도 그를 깨달았기에,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 공작님께서는… 그런 분이세요. 영지를 다스리는 주인답게 인재에 욕심도 있으시고, 아름다우시기도 하지만… 어떤 일에서든 대공님이 우선이신 분이니까요. ”
“ 소위 집착이 강하다, 그 말이로군. 그로 인해 제법 시끄러운 일도 몇 번 있었다지? ”
“ 네. 저도 들어서 알게 된 것이지만… 솔직히 믿기 어려웠어요. 제가 본 공작님은 시종일관 아름답고, 기품 있으신 분이었거든요. 대륙에서도 몇 없는 소드마스터로 보이지 않을 만큼. ”
그럼에도 소름 끼치는 광기를 가지고 있어 더욱 무섭다.
그래서 이브는 적당한 거리를 둬야 할 필요를 느꼈고, 지금같이 본진이라 할 수 있을 저택에서 떨어져 사는 생활에 감사했다.
어딘가 허전하기는 해도 안전이 우선이었으니까.
“ 아무튼. 제게 기대를 거시는 분이 그 대공님이라, 그에 보답하고 싶었어요. 제게 기대를 걸고 계시는 분이니까요. ”
어릴 적, 이브가 마탑에 갓 들어왔을 시절엔 마법사들 모두가 기대를 했었다.
이해가 빠르고 마법에 대한 소질도 있어 큰 역할을 하리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미세원소라는 기묘한 분야를 연구 하겠다 결심했을 무렵부터, 그 관심은 점점 차갑게 식어갔다.
마법사는 연구를 통해 해명하는 족속들이니만큼 어떤 분야를 파고든다 한들 무시하지는 않았다.
그래서는 새로운 연구 자체가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이브의 주장이 너무 현실성이 없어 보였기에, 기대로 뜨겁던 시선이 점점 식어만 갔다.
그러던 와중 지온 크라우저가 나타나 연구의 현실화에 가능성을 입히고, 이해하고, 도움을 주었다.
비록 그 계기가 모기나 잡겠다는 다소 얼빠진 일이라고 해도, 성공은 성공이었다.
“ 음. 그렇구만. ”
초야에 묻혀 있던 가능성을 알아보고 지원까지 해 줬다.
그러니 저리 의욕을 불태우는 것도 이해가 간다며, 오르커스는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모든 일에는 하찮더라도 이유가 있기 마련이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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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에서 벌어지는 게릴라전의 전략, 전술 등은 엘프가 훨씬 뛰어났다.
즉 내가 감히 왈가왈부 할 수 있을 영역이 아니거니와, 그럴 필요도 없어 굳이 훈련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니 숲이 아닌 곳에서 벌어지는 전투를 가정한 훈련을 했다.
영지 방어를 목적으로 만든 부대이니만큼 공성전이나 시가전, 혹은 피난민을 지키며 싸우는 호위전과 같은 것들이 그 예였다.
“ 여기서 왼쪽으로 빠지면 광장이고, 오른쪽으로 가면……. ”
시가전을 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헬레나는 그에 지형과 지물을 파악하는 일이라 답했고, 나 또한 그리 생각했다.
고로, 지금처럼 영지 관광을 명분 삼아 다크엘프 무리에게 지형을 익히도록 했다.
“ 후우. ”
다크엘프 무리를 끌고 서쪽 구획을 다 돌아보았을 무렵.
나는 짧은 한숨을 내쉰 뒤, 근처에 있는 여관으로 가 나와 무리들이 먹을 수 있을 음식을 주문했다.
주인은 때 아닌 귀족의 방문에 깜짝 놀랐고, 밥값으로 내미는 은화에 더욱 놀랐다.
셈을 더 쳐 준 탓이겠지.
밥을 먹는데 왜 식당이 아닌 여관이냐 할 수도 있겠지만, 이 대륙의 식당은 대체로 여관과 겸업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먹을거리라면 술집을 찾아가도 되지만시간도 이르고 푸짐함도 덜해 추천하지는 않는다.
“ 대략적으로 훑어보고, 익숙해지는 데 의미가 있습니다. 첫날부터 머릿속에 다 넣으려 애쓰지 않으셔도 되요. ”
나는 조를 이루어 흩어져 앉아 있는 무리들 틈을 돌며 서두를 필요가 없다며 달랬다.
내가 넘겨 준 지도를 성실하게 파악하는 건 좋은 일이지만, 시간이 필요한 일이니까.
“ 고생하셨소. 사람을 시켜도 될 일을 굳이 바쁘신 분께서 나서 하시니. ”
자리로 돌아와 앉자, 미리 자리를 지키고 있던 오르커스가 피식 웃으며 나를 위로했다.
마을의 부촌장이자 사실상 촌장이기도 한 남자이기에 함께 행동하게 되었다.
올리비아는 은근슬쩍 빠져 농땡이를 부리고 있었으니까.
“ 도와주는 분들이 많아 괜찮습니다. 서류 처리도 순조롭고요. ”
“ 아. 하긴 공작께서 버티고 계시던가? ”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서류 처리에 한창일 헬레나의 얼굴을 떠올렸다.
내 명령을 따를 수밖에 없는 처지였기에서류 처리에 매진해야만 하는 우울한 표정을.
그 탓에 지금쯤 한껏 풀이 죽었을 테니, 돌아가면 적절한 포상을 줘야할 듯싶었다.
“ 네. 지금쯤 기사단 훈련 준비를 마무리 하고 있겠죠. ”
“ 왕국의 기사단을 훈련이라. 그런 걸 공작령에서 하고 있으니 참 신기하군. 다른 귀족 나으리들의 불만은 없소? ”
“ 다행히 조용합니다. 크라우저 공작가만큼 군사 훈련을 잘 시키는 곳도 없고, 국왕파로서 입지도 굳건하다보니 그런가 싶네요. 이미 왕국 내에서도 일종의 전통으로 자리 잡히기도 했고. ”
크라우저 공작가 자체가 검술 등에 조예가 깊기도 하고, 이미 몇 대에 걸쳐 진행되고 있어 불만을 가질 수가 없었다.
우리 영지에서 훈련받은 기사들의 능력이 그를 증명한 지 오래였기에.
“ 바, 밥 나왔습니다. ”
“ 고마워요. ”
식당 주인이 덜덜 떨며 스프와 빵을 가져왔다.
공작가의 귀족이 평판이 좋다 한들 막상 눈앞에 있으면 어쩔 수 없이 긴장되는 모양이었다.
물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지만, 이런 사람도 있기 마련이겠지.
“ 자, 얼른 먹죠. ”
내가 먼저 스프에 빵을 찍어 먹자, 오르커스도 나를 따라 빵을 손에 쥐고 먹기 시작했다.
엘렌과 친구들이 그러하듯, 이 남자를 포함한 다크엘프 무리도 고기를 먹는 데 거리낌이 없었다.
“ 이런 집 음식은 대공 나으리 같은 사람의 입에 안 맞을 줄 알았는데? 알면 알수록 참 신기하구만. ”
내가 빵을 반쯤 씹어 먹었을 즈음, 오르커스가 놀라운 듯 중얼거렸다.
“ 귀족이라 한들 감투를 벗고 나면 결국 사람에 지나지 않으니까요. 재해가 신분을 가리지 않고 사방을 휩쓸어 버리듯, 먹는 것에 천함과 귀함을 가릴 필요도 없겠죠. 맛있고 맛없고는 있겠습니다만……. ”
“ 그런 말을 귀족, 그것도 꼭대기인 당신이 하니 신기하다는 거요. 평이 좋을 만 하구만. ”
오르커스는 은근히 낯간지러운 소리를 아무렇지 않게 툭 뱉어내며, 건더기가 제법 푸짐히 섞인 스프 그릇을 집어 들이켰다.
마치 밥그릇에 따라 놓은 물을 들이키는 것만 같았다.
“ 후우! 아무튼, 덕분에 밥도 잘 먹고, 진짜 내 집도 얻고… 참 감사할 따름이오. ”
달그락. 오르커스가 텅 빈 그릇을 식탁에 내려놓으며 입꼬리를 들어올렸다.
제법 거친 느낌이 짙음에도 보기 좋은 미소였다.
“ 감사합니다. 순수한 호의만으로 드리지 못한 것이 마음에 걸리긴 하지만… 좋아해 주시니 다행이네요. ”
“ 아니오. 오히려 아무 대가도 안 바라고 준다고 하면 그게 더 의심스러웠겠지. 오히려 우리 힘을 원한다고 숨기지 않고 얘기해 준 준 덕에 더욱 믿음이 생겼소. 다른 친구들도 마찬가지고. ”
다른 친구들이라. 나는 그 말을 듣고 여관 홀을 슥 훑다, 본의 아니게 바라보는 다크엘프 무리들과 눈을 맞추게 되었다.
청력이 좋은 종족이라 우리 대화를 빠짐없이 주워들은 모양이었다.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
얼굴에 떠오르는 공감의 빛이 그런 생각을 들게 했다.
“ 참. 그나저나, 기사단과의 훈련에는 우리를 안 쓰겠다고 하셨던가? ”
“ 네. 마법병단은 우리 영지민에게도 알리지 않을, 숨겨진 군대입니다. 그러니 훈련과 같은 공식 일정에 드러낼 수는 없겠지요. 한 번 소문이 나기 시작하면 끝이 없을 테니까요. ”
“ 하지만 말이오, 언젠가 전쟁이 나면 결국 알려질 텐데. 그 때를 생각해 보면, 지금 드러난다 해도……. ”
오르커스의 말에도 일리가 있다.
방어를 목적으로 하는 부대이니만큼, 언젠가 터질 전쟁에 모습을 드러낼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 때가 올 때 까지 최대한 숨겨, 쓸데없이 소문이 퍼지는 일을 막고 싶다.
그렇게 답하자, 오르커스가 아차 싶었는지 당황한 기색을 띠며 답했다.
“ 그래. 전에도 그랬었지. 내 깜빡했었소. ”
“ 네. 기억나신 듯 하니 다행이네요. ”
숨겼다 드러낼 때 효과가 크다는 점도 있지만, 되도록 견제를 피하고 싶다는 마음이 더욱 크다.
오르커스도 그를 떠올렸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더 이상 이 문제로 왈가왈부 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 그런데, 이브는 어떻습니까? 듣기로는 많이 힘들어 한다고 하던데……. ”
“ 이브 말이오? 아주 잘 적응하고 있소. 아주 의욕에 넘쳐서 말이오. ”
“ 연구가 아닌 군사 훈련에요? 신기하네요. ”
문득, 남은 다크엘프 무리와 함께 마을에 있을 이브가 떠올라 근황을 물었더니 놀랄 만한 답이 돌아왔다.
평소 관심 있는 분야를 빼면 지극히 소극적이던 것이 이브 그린우드일 텐데, 군사 훈련에 적극적이라.
혹여 새삼스레 마법의 공격적 활용에 흥미라도 느낀 것일까.
아니면공격적 마법을 사용하며 스트레스를 푸는 게 아닐까.
나는 그런 생각을 품으며 입을 열려고 했으나,
“ 대공께서 기대를 걸고 계시다는 말을 하면서 버티는데, 참 대단하더구만. ”
어쩐지 가만히 듣고 넘기기엔 마음에 걸리는 이유가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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