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9화 〉 사랑과 전쟁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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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차를 타고 이틀.
나는 세르반 남작령에 도착하자마자 눈을 비볐다.
이곳저곳에서 희미하게 피어오르는 희뿌연 김 때문인지, 여느 지역보다 확연히 덥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보통 여름에 온천에 가자는 발상은 잘 하지 않는다.
불반도에 비해 너무 시원하기 짝이 없는 여름이라고는 하나, 이곳 사람들에게는 엄연한 여름이다.
그런 여름에 더운 온천에서 뻘뻘 땀을 흘리고 싶지 않다는 것이 당연했다.
겨울에 온천은 그럴 법 하다. 하지만 여름의 온천은 기발하다.
나는 헬레나의 그 말에 홀린 나머지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였던 때를 떠올렸다.
가끔 정신 나간 일탈을 해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막상 이렇게 이루어지고 보니 한숨이 다 나올 지경이었다.
“ 그런데… 의외로 사람이 없진 않네.군데군데 여기 사람이 아닌 것 같은 사람들이 보여.”
“ 휴양 시설이 유명한 도시니까. 계절 감각이 맞지 않더라도 장기 요양을 거치는 사람도 있고, 간혹 우리처럼 조용함을 노리고 오는 사람도 있고. 그래서 그렇겠지. ”
온천만을 즐기러 온 사람은 적지만 심신의 안정을 위해 찾는 이들이 드문드문 있다? 일리가 있는 말이다.
약학을 비롯한 의술이 발달된 곳이기도 하니 치료를 받기도 편리할 테지.
“ 불편하겠지만 제법 돈이 드는 곳에서 묵으려고 해. 그런 곳일수록 머무는 사람이 적으니까. ”
“ 아.조용히 지내고 싶어서 그래? ”
“ 응. 그리고 서로 불편할 상황을 피하고 싶기도 하고 그래. 모처럼 쉬기 위한 여행을 와서 피로가 쌓여 돌아갈 수는 없잖아. ”
헬레나는 결심을 굳힌 후 창밖에 보이는 숙소 거리를 슥 훑어보았다.
어느 정도 높은 값을 요구하는 곳일수록 머물 수 있는 사람에 제한이 있어, 그를 노리는 것 같았다.
처음이자 마지막 신혼여행을 호화롭게 보내고 싶다는 생각은 없어 보였다.
고요함. 그리고 평화. 이 두 가지를 위해 잘 하지도 않는 사치를 부리는 것이라 생각했다.
“ 크…크라우저 공작님! 어, 어서 오십시오! ”
그리하여, 우리는 귀족의 저택을 쏙 빼닮은 것만 같은 숙소에 발을 들였다.
현대식으로 따져보면 제법 급이 높은 호텔이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고층은 아니다.
그만한 건축기술은 물론 손님의 수요가 없을 것이기 때문에.
“ 반가워요. 예고 없이 불쑥 찾아와 놀라셨겠지만,여기서 며칠 정도 머무르고 싶은데… 빈 방이 있나요? ”
헬레나는 마차 창문 밖으로 상체를 슥 내밀며 물었다.
“ 물론입니다! 우리 왕국의 검을 모실 수 있다면 없는 방을 만들어서라도 마련하겠습니다! ”
이 숙소의 지배인, 혹은 상급 직원으로 보이는 중년의 남자가 눈을 반짝이며 목소리를 높였다.
평소 얼굴 한 번 보기가 어렵기 짝이 없는 공작이 발을 들였으니 감격할 만도 했다.
어찌 보면 연예인을 실물로 보는 느낌과 닮았을 지도 모르겠다.
“ 후후.고마워요. ”
그 성의가 감사하다는 듯 헬레나가 웃으며 답하자, 남자는 직원들 몇 명을 급히 부른 뒤 우리를 극진히 안내했다.
마차를 세우는 것부터 시작하여 다크엘프를 눈 하나 깜짝 않고 대하는 것까지, 아주 각이 잡혀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 여기가 이곳에서 가장 좋은 방이기는 합니다. 공작님의 눈에 차지는 않으시겠지만……. ”
“ 아뇨. 정말 마음에 들어요. 안내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참. 나머지 두 분의 방도 마련해 두셨나요? ”
“ 지시하신 대로 해 드렸습니다. ”
나는 말을 모는 마부와 엘렌의 방까지 한꺼번에 잡아둔 것을 떠올렸다.
머무는 방의 수준은 다를지언정 같은 숙소를 잡아주는 것은 귀족의 편의성을 위해서라도 자주 벌어지는 일이었다.
우리를 안내해 준 남자도 그를 아는 눈치였다.
물론, 다크엘프는 그 예외라 할 수 있었지만… 헬레나가 데려 왔기에 무난히 넘어가는 기색이었다.
아무튼, 방은 비싼 값에 어울리게 화려하고 깨끗했다.
겉으로는 겸양을 떨고 있지만 속으로는 충분히 자부심을 가질 만 했다.
그렇게 느껴질 만큼 시설 수준이 좋아 보였다.
“ 식사 외에도 필요한 일이 있으시면 부담 없이 말씀해 주십시오. 그럼, 부디 편히 보내시길. ”
남자는 방의 안내를 마치고 나서야 정중히 고개 숙이며 물러났다.
호텔의 룸이라면 전화 한 통으로 누군가를 부를 법도 했지만, 그럴 수 없었기에 직접 소리를 내야했다.
그럼에도 구석에 있는 파이프로 소리를 흘린다는 점이 무척 편리해 보였다.
시대가 시대라 할 지라도, 그 나름대로 편의성을 추구하려는 힘을 엿볼 수 있었던 것 같다.
“ 이렇게 보면 크라우저 저택이랑 비슷하기도 하네. ”
“ 음… 그렇게 보일 수도 있겠다. ”
나는 화장실과 욕실을 다시 살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물이 흘러나오는 매직 아이템이나 온도 조절이 가능한 커다란 욕조, 조명 등… 쾌적하게 지내기엔 나쁠 것 하나 없는 환경이었다.
내가 크라우저 저택에서 지내보지 않았다면 눈이 휘둥그레졌을 수도 있었다.
“ 온천은 뒤에 따로 마련되어 있다고 했지? ”
어느 나라나 온천을 중심으로 두고 시설을 짓는 것이 당연한 것인지, 혹은 온천을 이용하려는 인간들이 당연히 그리 생각하는지는 모른다.
그저 세르반 남작령의 여러 시설들이 온천을 끼고 돈다는 것에서 묘한 친밀감을 느꼈을 뿐이었다.
나는 헬레나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분주히 짐을 풀던 손을 내려놓았다.
“ 응. 필요한 도구는 그쪽에 전부 마련해 뒀다고는 하더라.돈이 참 좋긴 해. 사람도 별로 없어서 느긋하게 즐길 수도 있고, 돈을 좀 더 얹어주면 전세도 낼 수 있다고 하고. ”
헬레나는 특히 전세라는 말을 힘주어 말하며 눈을 반짝였다.
나는 그 반짝임이 어떤 생각에 의한 것인지 쉬이 짐작이 갔기에, 절레절레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날이 갈수록 음탕해지는 모습을 보니 나이에 따른 성욕이라는 그래프가 떠오르기도 했다.
“ 그래. 오늘 밤에라도 같이 가 보자. ”
다만, 나로서도 나쁘다고는 생각지 않았기에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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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고 자고, 운동하고, 관광을 한다.
요 며칠 사이 무척 완만하면서도 자극적인 시간을 보내느라 현실 감각이 다소 떨어지는 느낌을 받았다.
오로지 쉬면서 돈을 쓰기만 하는 삶이 영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몸에 맞지 않은 옷을 입은 듯한 답답함도 있었다.
“ 오… 이렇게 배합하면 내상에 좋은 건가요? ”
“ 예. 소화가 되지 않을 때에도 함께 곁들이면 좋습니다. 그 때는 이쪽 약초의 비율을 조금 줄여서……. ”
그래서인지, 비상시를 대비한 간단한 약학 지식을 익히는 지금이 참 편안했다. 체질이 그래서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향긋한 약초 냄새도 좋았고, 참 편안하기 그지없는 시간이었다.
“ 일 하는 게 그렇게 좋아? ”
약방에서 나와 한적한 구석에 있던 개방된 탕에서 족욕을 즐기던 중, 헬레나가 새초롬한 낯빛을 띠며 물었다.
예전에도 몇 번 들었던 질문이기에 내 답도 정해져 있었다.
“ 좋지는 않아. 그래도 하게 되더라. ”
“ 무기력해지니까? ”
“ 그렇지. ”
놀고먹고 사는 삶이 나쁘다는 건 아니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환영할 수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조금이나마 일을 하려는 이유는 앞서 말했듯, 사람이 만사에 의욕에 없어지고 축 늘어지기 때문이었다.
그러면 노는 것도 제대로 못해 반쯤 시체 같은 몰골이 된다는 것을 경험으로 깨달은 적이 있었다.
그 이후로는 약간이나마 일을 하려 노력했다.
거창한 일이 아닐지라도, 한두 시간으로 끝나는 간단한 아르바이트라도 좋았다.
더해, 이 대륙에서 나고 자란 시간의 영향인지 좀 더 성실해진 것 같았다.
착각일지도 모르겠지만 그런 느낌이었다.
“ 미안해. 많이 지루했지? ”
“ 응? 전혀. 나는 지온하고 같이 있기만 해도 안 지루한걸. 그리고 약학 지식도 알아둬서 나쁠 것 하나 없다고 생각해. 특히 야전에서 유용하게 쓰일 지식이잖아. 알아두면 보급 물품에 미리 추가해서 대비할 수도 있고. ”
전쟁 없는 세월이라도 전쟁에 대비하는 것은 현명하다.
나는 평화로운 시기에도 전쟁을 준비하라는 말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가만히 넋 놓고 있다 뒤통수를 맞는 것 보다 훨씬 나아 보이기도 했고.
◎◎◎
부럽다.
지온과 헬레나가 느긋하게 어깨를 맞대고 족욕하는 풍경을 멀찍이서 바라보며, 엘렌은 깊고 짙은 한탄을 내뱉었다.
미래를 위함이라고는 하나 요 며칠 사이 유난히 달콤함을 과시하는 관계가 보기 괴로웠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그 풍경을 멀찍이서 지켜보는 건 오늘로서 끝이었다.
나흘간에 걸쳐 그들의 신경에 거슬리지 않도록 멀리 떨어진 호위도 끝이었다.
몸은 편했을지언정 불편하기 그지없던 마음도 슬슬 가벼워질 것 같았다.
“ 오늘이야. 준비는 됐어? ”
세르반 남작령 내에 숙소.
엘렌의 주인이자 경쟁자, 또 협력 관계이기도 한 헬레나가 넌지시 물어왔다.
그녀가 사랑해 마지않는 지온은 방 안에서 쉬고 있으며, 그 사이에 짬을 낸 헬레나가 엘렌의 방에 찾아온 김에 던진 질문이었다.
오늘이라. 엘렌은 광기에 가까운 희열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눈빛을 보였다.
이 때를 애타도록 기다려 왔으니.
“ 네. 물론 철저하게 준비했어요. ”
“ …고생했어. 멀리서 지켜보기만 하느라 마음고생이 심했겠지. ”
헬레나의 입술에서 노고를 치하하는 말이 들려오자, 엘렌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놀라워했다.
관대한 성격이나 한 남자에 대해서는 한 치의 타협조차 하지 않았던 여자의 입술에서 나올 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럴 만도 하지. 헬레나는 놀라워하는 엘렌의 낯빛을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충분히 말문이 막힐 만큼 놀랄 수 있다 생각했기에.
“ 내가 이런 말을 하는 게 그렇게 놀라워? ”
“ 솔직히 말씀드리면… 놀랍네요. ”
“ 풋. 그럴 만도 해. 나도 놀라우니까. 하지만 어쩌겠어. 남편과 함께 보내는 순간들을 망치고 싶진 않은걸. ”
엘렌이 조금이라도 능력이 부족했다면 모를까, 헬레나로서는 더 이상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비록 상황이 강제로 그리 만들었다고는 하나 그녀가 선택한 길이었고, 더 이상 그를 후회할 수도 없었다.
그러니, 결과로 이루어진 관계를 어떻게 잘 이용하느냐로 관심을 옮기기로 했다.
독점욕을 채우고자 한 남자의 애정을 잃는 위험을 감수하는 것보다, 다소 불편하더라도 공유를 통해 안정을 유지하는 길을 택했다.
“ 제가 할 말은 아니지만… 저도 공작님의 말씀에 동의해요. ”
“ …나도 알아. 아무튼, 이 이야기는 이쯤 하자. 나머지 사흘을 어떻게 지새우느냐가 진짜 문제니까. ”
“ 옳으신 말씀이에요. ”
엘렌은 기다렸다는 듯 장롱의 서랍장으로 걸어가더니, 그곳에서 약 두 병을 들고 왔다.
자극적인 밤을 보내기 위해 헬레나가 준비하라고 시킨 정력제, 그리고 또 하나는 흥분제였다.
붉음과 분홍이라. 헬레나는 엘렌의 양 손에 들린 짧고 투명한 약병을 만족스러운 눈길로 바라보며 입술을 떼었다.
“ 그게 부탁했던 물건이지? ”
“ 네. 효과는 확실해요. 그래도… 정말 괜찮으시겠어요? 대공께서 너무 거칠어지시면 두려우실 것 같은데……. ”
“ 괜찮아. 지온의 짐승 같은 얼굴은……. ”
윽! 헬레나는 바르칸 백작령에서 있었던 밤을 떠올리며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지온과 가장 먼저 맺어졌던 날이자, 그의 짐승성에 압도당한 나머지 시키는 대로 따를 수밖에 없었던 때를
그리고, 신분이라는 허울에서 벗어나 진짜 상하관계가 확실히 정해졌던 순간을.
“ 본 적이 있으니까 괜찮아. 오히려 너야말로 조심해. 한 번 맛보면 선을 지키지 못할 지도 모르니까. ”
“ 그… 그렇게나 달라지나요? ”
엘렌이 아는 지온은 부드럽고 마음이 넓은 남자다.
그러나 헬레나가 자랑스럽게 떠벌리는 그의 모습은 미쳐 날뛰는 짐승이었다.
그 괴리감 때문에 순순히 받아들이기가 어려웠으나, 헬레나 또한 그것을 아는지 이렇게 말할 뿐이었다.
“ 오늘 밤에 알게 될 거야. 하지만, 명심해 둬. 오늘 이후로도 선을 넘지 말라고. ”
즉, 그의 품에 안긴 이후에도 눈길이 닿는 곳에서만 행위를 치르라는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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