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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의 기둥서방이 되었다-68화 (68/192)

〈 68화 〉 사랑과 전쟁 #5

* * *

─왜 하필 그런 자작의 아들입니까? 반반한 생김새 때문에 그러신 겁니까?

웃기는 소리.

물론 지온이 내 눈에 더없이 예뻐 보이는 남자라도, 단지 외모가 반반한 이유만으로 반할 것 같은가.

신기루 같은 한 때의 만남과 쾌락에 목맬 정도로 나는 싸구려가 아니었다.

나는 그의 가치를 모른다는 것에 분노하기도 했으나, 다행이라 여기는 마음이 컸기에 무난한 답으로 넘기곤 했다.

나 혼자만이 알고 있으며, 오롯이 나 홀로 독점할 수 있을 남자였다.

그러니 그 가치를 나만 아는 것이 마음 편했다

그러나, 그 가치라는 것도 남의 시선에 맞춘 그럴싸한 포장에 불과할 뿐이었다.

물론 그의 자상함 때문에 눈길이 간 것을 부정할 수는 없으나, 마음을 빼앗긴 진짜 이유는 있으면서도 없었다.

그래. 이유 따위는 없었다.

지온 알트람이 지온 알트람이었기에 반했다고밖에 설명할 길이 없었다.

그렇기에 건방진 엘렌과 그를 공유하게 된 것이 썩 내키지는 않았으나, 요즘 들어 그 거북함이 점점 옅어져가고 있었다.

그 날 이후 선을 지키며 떠받는 태도도 마음에 들었고, 무엇보다 자연 현상을 호위로 삼음으로서 얻는 이득이 몹시 대단했기 때문이다.

물론 그 이득에 생각이 미친 것도 질투심에서 다소 벗어난 덕이었지만, 어쨌든 마음에 들었다.

내가 그녀의 처지라도 똑같이 했을 것 같은 생각을 하니 혐오감이 들 때도 있지만, 결국 고개를 끄덕이며 받아들일 때가 많았다.

“ …감사합니다. ”

그의 연설이 끝나고, 굳이 오지 않아도 될 것 같은 객들이 눈을 반짝인다.

개중에는 자작의 아들 주제에 건방지다는 등 거슬리기 짝이 이야기를 잘도 지껄이기도 했다.

당장 목을 베어 포도밭의 거름으로 삼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다.

나를 욕하는 것은 기꺼이 참아낼 수 있어도 지온을 욕하는 소리를 참기는 어려웠다.

그러나, 오늘은 피가 어울리지 않는 날이자, 흘려서는 안 되는 날이다.

더구나 살심이 치솟았다 하더라도 대놓고 모욕을 하거나 시비를 걸지도 않았으니 조용히 넘어가는 것이 옳았다.

하지만, 그들의 면면은 확실히 기억해 두기로 했다. 훗날 기회가 생긴다면 사적인 원한을 듬뿍 얹어 줄 생각으로.

◎◎◎

끝났다.

나는 영원과도 같은 순간을 맛본 탓에 십 년은 늙어버린 듯한 정신을 가다듬으며 침실로 발을 들였다.

습관적으로 뒷정리를 도우려 했으나 이제 대공이 되었다는 이유로 대부분의 잡무를 할 수 없게 되었다.

본의 아니게 해방된 셈이나, 마음 한편에서는 약간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나마 요리는 취미 생활로 할 수 있었기에 다행이지. 너무 자리만 지키는 것도 영 불편했다.

어쩌면… 이게 노예근성이 아닐까? 누군가의 수발을 드는 데 익숙해진 나머지 내가 수발이 되었다 착각한 것은 아닐까?

잘 모르겠다. 나로서는 명확히 답을 낼 수 없을 듯하지만, 지금 당장 답을 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정도는 알고 있었다.

바로 침대에서 두 팔을 벌린 채 기다리고 있는 헬레나를 상대하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 상대는 새벽 동이 트기 시작하는 때가 되어서야 끝이 났다.

중간에 휴식을 취하거나 선잠이 들 때도 있었지만, 결국 행위의 연장선이었던지라 제법 피로가 쌓였다.

젊다 못해 파릇파릇한 몸이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기절했을 지도 모를 일이었다.

“ 이렇게 멀리 놀러가 보는 건 처음이지? ”

함께 목욕을 마친 뒤, 헬레나는 나를 보며 방긋 웃었다.

늘 그녀의 머리칼을 다듬는 것이 내 몫이었기에, 나와 시선읆 맞추려면 지금과 같이 고개를 돌려야만 했다.

“ 처음이지. 밖으로 나가 본 적은 몇 번 있지만, 순수하게 놀러가는 건 이번이 처음이니까. ”

“ 그 중에는 안 좋은 일도 있었고. ”

대체로 내가 저지른 바보 같은 짓이 원인이었기에 차마 고개를 들 면목이 없었다.

갑작스레 돌진해 온 우연에 의한 사고라고는 하나 대처가 매끄럽지 못했던 것은 분명 잘못이었다.

“ 미안. ”

“ 미안? 지온이 왜 미안해? 해적과 만났을 때도 그렇고, 킬리네어와 부딪혔을 때도 그렇고, 전부 시비를 건 놈들이 원인이잖아. ”

따져보면 그렇기는 한데, 새삼 미안한 감정이 남은 것도 어쩔 수 없었다.

그런 불미스러운 일들 모두가 헬레나에게 부담을 떠미는 듯이 흘러가버려 더욱 그랬다.

나름대로 똥을 치운답시고 노력은 했지만… 묘하게 찝찝하기도 했고.

“ 불씨를 지핀 것이 그쪽이기는 해. ”

“ 그러니까 그렇게 말하지 마. 세상에 정답이 어디 있어? 물론 내 인생에서 지온이 절대적인 정답이기는 하지만……. ”

배려 깊다고 평판 좋은 여성답게 좋은 말이 흘러나오나 싶더니, 결국은 김빠지는 결론이다.

하지만 내게 있어 그 김빠진 결론이야말로 여느 아름다운 문장보다 마음의 짐을 가볍게 해 주었다.

아직 충분히 여유가 있지만 짜낸 양이 양이다보니 어쩔 수 없이 침울해진 것일까.

나는 그 사실을 깨달은 뒤 피식 웃으며 한 줌 남아 있던 우울함마저 털어냈다.

감정을 억제한다는 면에서 좋지 않을 수도 있지만, 이렇게 금방 중심을 잡을 수 있다는 것이 강철멘탈의 좋은 점이었다.

더욱이, 오늘은 여행을 떠나는 날이니까.

“ 으음… 일단 이것부터 처리해야겠다. ”

나는 서로의 흔적으로 흠뻑 절여진 헬레나와 내 옷을 들어 올리며 짙은 한숨을 내쉬었다.

대공이 되었지만 이 짙은 흔적을 처리하는 것은 내 몫이었고, 그 몫을 누군가에게 넘기고 싶지 않았다.

이 냄새나는 옷가지들을 다른 사람이 처리한다 생각하니 소름이 돋은 탓이다. 다른 무엇도 아닌 부끄러움 때문에.

“ 뭐? 이제 대공이니까 다른 분들에게 맡겨도 되잖아? 굳이 지온이 처리하지 않아도……. ”

“ 그냥 내가 하고 싶어서 그래. 이해해 줘. ”

나는 시종으로서 남은 습관이 여전히 빠지지 않았음을 드러내듯 더럽혀진 옷을 재빨리 처리했다.

나 몰래 욕정을 자극하는 옷을 구입한 것이 괘씸해 거칠게 밀어붙였던 때를 떠올리는 흔적들을 바라보니, 참 착잡했다.

육체적 기능으로 생각해보면 뿌듯하기도 하고, 거하게 저지른 것을 생각해보면 왜 그랬나 싶기도 하고.

“ 끝났다. ”

“ 고생했어. 그 대신이라고 하긴 뭣하지만, 짐은 내가 챙겨뒀으니 조금 쉬어. ”

몽정으로 더럽혀진 옷가지를 몰래 세탁한 것 마냥 빠르고 은밀하게 처리를 마치고 오니, 손에 짐이 든 가방을 든 헬레나가 배시시 웃었다.

내가 대공이니 잡일을 하지 말라며 말한 장본인이 저러고 있으니 뭐라 말을 꺼내기가 어려웠다.

“ 그래. 고마워. ”

어쨌든 할 거리가 줄었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기에, 나는 고마움을 표하며 침대 옆자리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 참. 우리가 여행 갔다 오는 동안 방이 조금 바뀔 거야. 지온은 나랑 같은 방에서 자고, 지온이 있던 방은 정리해서 손님방으로 놔둘 것 같아. ”

“ 그래? 그런데 왜 나는 들은 기억이 없지…? ”

“ 어제 지온 몰래 앤디에게 전해 뒀거든. 그러니 모르는 게 당연하지. ”

마치 나를 놀리고 싶었다는 것 마냥 웃는 헬레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무심코 뺨에 손가락을 집어 약하게 꼬집었다.

말랑말랑하고 부드러우며, 또한 질긴 떡을 쭉 늘어뜨리는 느낌이었다.

“ 그것 참 고맙네. 고마워. ”

“ 아, 아하…! ”

내 손길 따위는 언제든지 뿌리칠 수 있을 여자임에도, 헬레나는 연약하기 짝이 없는 보통 영애같이 행동했다.

본래 다소 즐겁기는 해도 오래 끌 생각이 없었으나, 내 손길에 가만히 몸을 맡기는 것을 보며 그 시기를 좀 더 빨리 앞당겼다.

“ 방을 옮기는 일은 내게 말해 줬어야지. 나도 당사자니까. ”

“ 미안해……. 혹시… 싫었어? 결혼해도 각자 방을 따로 쓰는 경우도 많으니까… 지온도 그러는 편이 좋아?”

나는 헬레나의 붉게 달아오른 뺨을 어루만지듯 손바닥을 대었고, 헬레나는 그런 내 손에 자신의 손을 포개며 풀 죽은 기색을 보였다.

그 탓에 내가 공작을 농락해 그 권력을 마음대로 휘두른다는 소문이 이래서 났음을 새삼 깨닫게 했다.

슬프지만 사실이다. 헬레나를 농락한다는 것을 부정하기도 어려운데다 나 또한 내심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 싫기는. ”

애초에 같은 방을 쓰리라 생각하기도 했고, 정말 싫었다면 따끔하게 타일러 여유를 두었을 테지.

오히려 눈치 보지 않고 마음껏 껴안아도 된다는 생각에 즐겁기까지 했다.

“ 전혀 안 그래. ” “ 정말로…? ”

“ 정말로. ”

나는 헬레나와 가볍게, 새가 먹이를 쪼듯 입술을 맞추며 애정이 식지 않았음을 표시했다.

왼쪽 뺨을 쓰다듬으며 몇 번의 키스를 나누자 확연히 안정된 기색을 보였다.

내가 내뱉는 말 하나하나에 희비가 교차하는 모습이었다.

“ 자, 나는 슬슬 아침 준비를 해서 올게. 오늘은 마부 분이 무리를 하셔야 하니까. ”

아침 일찍 출발하리라는 것은 이미 알려둔 상황이기에 몇몇 하인 또한 그에 맞는 준비를 하고 있었다.

평소 적당히 아침을 끌며 조금이라도 더 하인들의 휴식 시간을 주었지만, 오늘은 달랐다. 그들이한껏 들뜬 헬레나를 우선한 결과였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전히 잠든 시간이기에, 나는 조심스레 주방으로 향했다.

아침 식사 겸 점심 도시락을 만들기 위해서.

“ 흥흥~. ”

내 뒤를 졸졸 따라온 헬레나가 콧노래를 부르며 주방 구석에 자리했다.

본래 식재료 창고를 포함해 의자가 필요 없는 장소이나, 헬레나의 기행 때문에 간단히 식사를 할 수 있을 공간이 마련된 상태였다.

적당히 그럴싸한 테이블에 의자. 식기가 든 통까지. 부담 없이, 또 신속하게 밥을 먹으려면 이만한 곳이 없었다.

“ 배고프죠? 아침이기는 하지만 조금 든든하게 먹을까요? ”

“ 응, 좋아. ”

격렬한 운동을 했으니 밥을 먹어야지.

나는 배고픔에 꼬르륵대기 시작하는 주린 배를 억누르며 창고에서 재료 몇 개를 꺼내왔다.

간단한 리조또를 만들기 위한 쌀을 시작으로 토마토나 돼지고기, 간단한 야채 등이었다.

점심 도시락도 만들어야 하지만, 일단 아침부터다. 지금 당장 배가 고파 그런지 점심을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 아, 냄새 좋다……. ”

헬레나는 한 번 찐 고기를 굽는 냄새가 좋은지 눈을 감은 채 입꼬리를 들어올렸다.

물론 나 또한 그 냄새에 매료되어 마른 침을 꿀꺽 삼킬 정도였다.

가히 고문이 따로 없었지만 고기 굽는 냄새는 늘 옳았다.

고기를 찐 다음에 굽는 이유는 간단했다.

내 느낌에 그러는 편이 좀 더 부드러우며, 구운 고기의 특유의 씹는 맛이 있고, 무엇보다 그냥 굽는 것보다 맛있었기 때문에.

또, 그와 동시에 토마토 리조또를 열심히 볶고 야채샐러드까지 만드니 참 든든하기 그지없는 한상차림이 완성되었다.

“ 어…? 혹시 눈치 채고 있었어? ”

헬레나는 테이블에 놓이는 세 그릇의 리조또를 보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내가 눈치 챘을 정도이니 그녀가 아는 것도 당연했다.

“ 평소라면 모르겠는데, 오늘은 배가 고파 그런지 신경이 날카로워져서 그런가봐. ”

“ 그래도 당장 들어올 기색이 없는 걸 보면 제법 신경 써 주는 모양이야. 늘 그렇듯이. ”

이래서 순순히 미워할 수도 없고, 그렇기에 더욱 신경 쓰인다.

헬레나는 그리 중얼거리며, 주방문 너머에서 가만히 기다리고 있을 누군가의 이름을 불렀다.

“ 엘렌, 들어와. 지온이 네 몫까지 차려 왔으니 같이 먹어. ”

역시. 이 시간에 주방 바깥에 있을 사람이 썩 많지는 않지만, 헬레나의 부름이 추측을 확신으로 바꾸었다.

그녀가 말했던 대로, 조용히 주방문을 열고 들어오는 누군가가 바로 엘렌이었기에.

“ 알고 계셨어요? 소리도 있고, 대공께 집중하시느라 모르실 줄 알았는데……. ”

문을 열고 들어오기 무섭게 놀라워하는 엘렌을 바라보며, 헬레나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 나는 알아. 지온도 정확히는 몰랐지만 누군가 있다는 것 정도는 알았고. 아무튼 너도 같이 가야 하니까 같이 먹어. ”

“ …네. 실례하겠습니다. ”

그녀는 몰래 장난을 치려다 걸린 아이처럼 풀이 죽은 채, 얌전히 헬레나 옆에 자리했다.

이렇게 보니 두 사람이 엄마와 아이 같았다. 나이로 따져보면 엘렌이 조상격인데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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