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5화 〉 사냥 #4
* * *
“ 하아……. ”
숙소에서 나와 변경백령으로 향하는 길. 나는 때 아닌 뜨거운 눈빛의 세례를 받으며 내심 진땀을 흘리고 있었다.
티를 내지 않으려 애쓰는 척 하는 다크엘프들의 태도 때문이었다.
그들은 나와 눈이 마주칠세라 급히 딴청을 피우기도 했으며, 때로는 헬레나와 나를 번갈아보며 음흉한 웃음을 짓기도 했다.
경계심에 똘똘 뭉쳐 거리를 두던 시간에 비하면 가히 장족의 발전이었으나, 오늘만큼은 그 발전이 영 반갑지가 않았다. 이래서 사람이 간사하다는 소리가 나오는가 싶다.
“ 왜, 무슨 일 있어요? ”
“ 아뇨. 별 일 없습니다. 차라리 일이 있었다면 좋았을 것 같네요. ”
소나기처럼 잠깐 쏟아 부은 뒤 그쳤으면 모를까, 변경백령을 코앞에 둔 오늘까지 이러고 있으니 답답할 노릇이다.
그나마 열기가 조금 가라앉았기에 망정이지, 계속 처음 같은 상태였다면 참 답답했으리라.
헬레나의 조르기를 딱 잘라 거절하지 못해 숙소에서 달래 준 이후부터 저랬으니까.
“ 흐음……. ”
헬레나는 말없이 내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대뜸 고개를 돌려 뒤에서 따라오던 엘프들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 여러분. 너무 뜨거운 눈길로 쳐다보시면 곤란합니다. 잘 아시겠죠? ”
“ 아, 아앗……. ”
정녕 헬레나가 한 말이 맞는가 싶을 정도로 도발적이다.
나는 마차를 모느라 아주 잠깐 곁눈질로 뒤를 살피는 수밖에 없었지만, 그 짧은 순간에 참 많은 것을 볼 수 있었다.
가령 정곡을 찔린 듯 난처해하는 기색이 역력한 다크엘프라던가, 무저갱 정도는 아니더라도 제법 차갑게 식은 눈빛의 헬레나라거나.
또, 무리들 중에서도 심기가 복잡해 보이는 듯 착 가라앉은 눈빛을 보이는 엘렌이라거나.
“ 네. 저희가 너무 무례했습니다. 죄송합니다. ”
“ …후우. 그렇게 말씀하시니 이쯤에서 넘어가도록 하죠. 제 입장에서도 얼굴 붉힐 일은 피하고 싶으니까요. ”
엘렌의 정중한 사과로 인해 일이 원만하게 수습된 것은 좋으나, 여전히 가라앉은 기색이 역력하다.
본래 용병단의 머리로서 침착한 모습을 보여주기는 했어도 어딘가 확연히 달라 보였다. 조용한 것은 매한가지이나 그 속내가.
“ 감사합니다. ”
아무튼, 내 입장에서 보면 전혀 나쁠 것 없는 주의였다.
덕분에 뒤통수를 찌르는 듯한 날카롭고 뜨거운 바늘이 사라진 기분이었고, 새삼스레 상쾌함을 느낄 만큼 속이 후련하기도 했다.
그래서 감사 인사를 전했더니, 헬레나는 별 것 아니라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아마 그녀로서도 지금 상황이 계속 이어지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 같았다.
그러던 차에 결국 참지 못하고 가볍게 경고를 준 것일 테고.
“ 아쉽지만… 놀이도 슬슬 끝내야겠지요. 변경백령이 조금씩 보이고 있으니까요. ”
내 눈에는 보이지 않더라도 헬레나의 눈에는 분명 변경백령의 풍경이 비치고 있겠지.
더해, 다크엘프도 헬레나와 똑같은 것을 보는 듯 느슨함을 지우고 적당한 긴장감을 품었다.
놀이가 끝났다는 헬레나의 말이 와 닿은 것 같았다.
“ 많군요. ”
나는 내 눈으로 변경백령을 눈에 담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
거대한 성벽과 만리장성을 떠올리게 하는, 등간격으로 비치된 망루들까지.
몬스터들이 득실대는 숲과 마주하듯 거대한 성벽을 쌓지는 못했더라도, 그에 준하는 방어선이었다. 적어도 내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그러한 리슬링 변경백령에는 오늘도 수많은 무리가 줄을 이루어 자기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척 보기에도 거친 이들의 비중이 많은 것으로 보아, 다른 영지들과는 확연히 다름을 알 수 있었다.
“ 야, 저거 봐라. 저거… 레드후드 용병단 아냐? ”
“ 무장한 다크엘프 여섯. 맞네. ”
“ 저것들이 무슨 바람이 불어서 여기까지 온 거야? 거참……. ”
거친 말로 수군거리는 이들의 대부분이 용병이었다.
영지를 왕래하는 보통 사람들도 없지는 않았으나, 그 수가 명백히 용병들에게 밀린다는 인상이었다.
척 보기에도 갑옷과 무기로 무장한 이들이 훨씬 많았으니까.
“ 새삼 엘렌이 얼마나 흉악한지를 깨닫게 되네요. ”
“ 흉악? 내가 그렇게 못되게 생겼소? ”
문득, 짐마차의 꽁무니를 따르던 엘렌이 내 곁으로 쪼르르 다가와 불만스러운 듯 물었다.
조금 전까지 멍해 있던 것과 다른, 내가 처음 마주했던 당당한 여자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 그럴 리가요. 생김새가 아니라, 명성 말입니다. ”
“ …아, 으음. 그런 거로군. 뭐, 어쩔 수 없는 일 아니겠소. 앞서 말했듯 저렇게 경계해주는 편이 차라리 좋다고 보오. ”
엘렌은 농담을 진심으로 받아들인 듯 무척 딱딱한 기색을 보이다가도, 내 해명을 듣자마자 굳었던 표정을 풀었다.
당연히 평소처럼 완전히 풀어진 상태는 아니었다. 적당히 긴장하고, 적당히 풀어진 느낌이었다.
“ 다음. 무슨 목적으로… 헉! ”
검문을 하고 있던 위병이 헛바람을 집어삼키며 한껏 놀란 기색을 드러냈다.
짐마차 뒤에 대기하고 있는 용병단도 충분히 놀라웠지만, 헬레나가 내미는 가문의 증표가 결정적이었으리라.
“ 고, 공작! 그것도……. ”
“ 헬레나 크라우저입니다. 리슬링 변경백을 만나러 왔습니다. 저라고 증명할 수 있는 가문의 패만으로도 부족하시다면, 오러 블레이드를 켤 수도 있습니다만……. ”
“ 아, 아니요! 충분합니다! 그… 기별을 넣어드릴 테니 잠시 기다리시겠습니까? 아니면 안내를 붙여 곧바로 찾아가시겠습니까? ”
“ 기별을 넣어 주시죠. 갑작스런 방문에 변경백께서도 놀라셨을 테니, 성벽 안쪽에서 잠시 기다리겠습니다. ”
굳이 기별을 넣어 기다리는 것은 무척 번거로운 일이나, 상대의 체면과 생각할 시간을 주기 위해 기다리기로 했다.
그만큼 변경백을 함부로 대하기 어렵다는 뜻이기도 했으며, 한편으로는 존중을 드러내는 것처럼 보였다.
우리는 술에 물 탄 듯 쉽게 검문을 뚫었으나, 입구 근처의 성벽에서 잠시 한 숨 돌리는 중이었다.
말을 타고 떠난 전령이 소식을 전해올 때 까지, 가만히 햇빛을 쐬며 시간이나 때우면 될 것 같았다.
“ 참 활발하기도 하군요. ”
어떻게 보면 상시 전시 상황이라 볼 법한 영지였으나, 그 활기는 여느 영지들 보다 훨씬 뛰어났다.
들리는 이야기와 사전 지식을 종합해 보면 몬스터의 사체를 팔기 위해 여러 길드의 지부도 마련되어 있으며, 그렇기에 해체를 전문으로 하는 이들도 있다고 한다.
그것은 저 숲과 경계를 마주하는 다른 국가들도 마찬가지라고.
단, 그렇다 해서 다른 경제활동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몬스터와 관련되었다는 환경이라는 인식이 너무 클 뿐이었지.
“ 그러게요. 몬스터 사냥을 하고 있기에 활발한 건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 건지……. ”
“ 복잡한 사정이 있겠지요. 아무튼, 활기 넘친다는 것 하나만큼은 확실해 보입니다. ”
나는 헬레나와 가볍게 말을 주거니 받거니 하며 시간을 때웠다.
다크엘프는 또 그들대로 무리를 이루어 목소리를 낮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때때로 눈빛이 날카롭게 번뜩이기도 했다.
“ 응. 그건 부정할 수 없겠지. 저기 멀리서 달려오는 전령도 참 힘이 넘쳐보이고. ”
“ 전령이… 아. 오고 있네요. ”
무슨 소리인가 싶어 앞을 바라보니 말발굽 달리는 소리가 조금씩 가까워짐을 알 수 있었다.
흙먼지가 피어오르는 것도 그렇고, 말을 탄 병사의 윤곽도 점점 또렷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얼굴을 보니 조금 전 소식을 전하러 갔던 전령이 분명해 보였다.
“ 실례합니다. ”
전령은 말에서 내리자마자 헬레나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동작 하나하나에 절도가 있어, 그 군기가 얼마나 잘 세워졌는지를 알 수 있는 모습이었다.
“ 크라우저 공작님 외에 그 손님들을 모셔 오라는 백작님의 명령이 있으셨습니다. 백작님은 사냥에서 복귀하는 중이시기에, 마중을 나갈 수 없었던 점에 대해 사죄를 표하셨습니다. ”
“ 괜찮습니다. 예고 없이 찾아 온 불청객이니, 쫓아내지 않는 것만 해도 감사한 일이지요. 아무튼, 잘 부탁드립니다. ”
“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저를 따라 오시죠. ”
나는 전령이 말에 올라타기 전에 짐마차에 올라 타 미리 방향을 틀어 두었다.
그 덕에 조급한 마음에 채찍질을 하지 않고 넘어갈 수 있었다. 미리 준비했기에 생긴 여유 덕이었다.
병사나 우리나 말을 천천히 몰아 목적지로 나갔다.
소식을 전하러 올 때처럼 급히 달려가야 할 필요도 없었고, 우리 또한 한시를 요하는 일이 아니었기에 서두를 필요가 없었다.
설령 서두른다 하더라도 길을 모르니, 결국 사방을 헤매느라 시간을 낭비했겠지.
“ 도착했습니다. 이곳이 리슬링 백작님의 저택입니다. ”
병사가 말을 몰아 도착한 곳은 백작의 저택이었다.
내가 여태껏 보았던 여느 귀족의 저택보다 작은 규모였다.
그럼에도, 묵직한 맛이 느껴지는 것이 참 신기했다.
낡았지만 깨끗하기 짝이 없는 건물.
거추장스러운 정원 대신 떡하니 정면에서 맞아주는 연무장과 모래바닥. 한쪽 구석에 잘 치워 두었지만 유사시를 대비했음이 분명해 보이는 목책과 여러 장애물 등등,
그야말로 기지라는 느낌이 물씬 풍기는 저택이었다.
“ 여기서부터는 저택의 하인들이 안내를 할 겁니다. 그럼, 저는 이만. ”
전령은 말에서 가볍게 목례를 취한 뒤,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곧장 말머리를 돌렸다.
아마 자신이 있어야 할 곳으로 곧장 돌아가는 것이 분명해 보였다. 참 철저한 직업정신이 아닐 수 없었다.
우리는 전령이 떠난 뒤, 그가 말했던 대로 마중 나온 하인의 뒤를 따랐다.
바깥에서 볼때와 안에서 볼 때와는 다르게, 가슴에 서늘한 바람이 스치는 것만 같은 착각이 들었다.
그것은 황량한 풍경이 주는 착각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어서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저 그 느낌의 이유를 곰곰이 생각할 겨를도 없다는 것 하나만은 분명했다.
우리가 서 있는 로비 뒤쪽에서부터 기다렸다는 듯이 다가오는 한 인기척 때문이었다.
“ 참 생각지도 못한 손님이 오셨군요. ”
중후하기 짝이 없는 목소리. 몸 곳곳에 엿보이는 상처.
말랐으나 깊게 뿌리 내린 단단함을 느끼게 하는 몸.
그리고, 결정적으로 눈앞의 남자를 더욱 크게 만드는 것은 다름 아닌 눈빛이었다.
어느 맹수보다 더욱 날카롭고, 어느 현인보다 더욱 깊이 가라앉은 심해를 느끼게 하는 푸른빛의 눈이었다.
“ 네. 미리 연락을 드리지 않고 찾아온 점, 다시 한 번 사과드립니다. ”
헬레나는 그 남자, 리슬링 변경백에게 망설임 없이 고개를 숙였다.
작위로 보나 힘으로 보아 고개를 숙이지 않아도 되었으나, 그녀는 굳이 그렇게 했다.
모든 조건을 떠나 변경백을 곤란하게 만든 것 하나만은 명백했기에.
“ 얼른 고개를 들어 주시지요. 공작께서 고개를 숙이실 만큼의 잘못이 아닙니다. ”
“ …예.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
헬레나는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드는 것이 아니라, 다소 여유를 두고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공작이 먼저 정중히 고개를 숙이고 들어가 불평의 여지를 잠재웠으니, 이 일을 가지고 크게 문제 삼지는 않을 듯싶었다. 행동의 잘못 여부를 떠나 계급이 깡패인 세상이니.
“ 전하의 생신 연회 이후로 처음이던가요. ”
“ 네. 서로 길이 멀기도 하고, 뵐 일이 없기도 했었지요. ”
“ 서로 얼굴을 볼 일이 없었으니까요. ”
두 사람은 서로 얼굴을 마주하며 가벼운 인사부터 나누었다.
서로의 표정이 워낙 가라앉아 있어 정말 반가워하는지 알 수 없을 만큼 미묘하기 짝이 없는 모습이었다.
그래도 이야기 자체는 계속하는 것을 보니 반갑기는 한 모양이었다.
“ 그래, 공사가 다망하신 공작께서 이런 변경에까지 발을 옮기신 이유가 뭡니까? ”
변경백은 인사가 끝나자마자 떠보는 기색 하나 없이 곧장 직구를 날렸다.
전투로 따져보면 공기를 찢으며 심장을 꿰뚫는 듯 날카롭기 짝이 없는 창질 같았다.
그래도, 헬레나의 얼굴엔 당황하는 기색 하나 없었다. 오히려 기다렸다는 것 마냥 입가에 호선을 그리며 곧장 본론을 꺼냈다.
“ 저희 왕국을 지켜주시는 이곳에 다다른 이유는 하나지요. 몬스터 사냥에 한 손 거들고 싶으니, 부디 허락해 주시길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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