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4화 〉 사냥 #3
* * *
“ 정말 괜찮으십니까? ”
달그락.
체스는 김이 피어오르는 찻잔을 탁자 위에 내려놓으며 걱정이 역력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얇은 서류철의 소박한 언덕을 처리하던 자리의 주인 이스는 그에 답하듯 말없이 찻잔을 들어 입에 가져다댔다. 여전히 향과 맛이 좋은, 정성이 들어간 잃품이었다.
“ 헬레나 말인가. ”
불편하지는 않으나 긴장감이 흐르는 침묵이 흐르고, 찻잔 내려놓는 소리와 함께 무거운 입을 여는 이스.
체스는 자신의 생각을 읽은 듯한 물음에 놀라기는커녕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전 크라우저 공작이자 지금도 크라우저의 큰 어른인 그를 모신 세월이 적지 않았기에.
“ 예. 리슬링 변경백령이라니, 그런 위험한 곳에 보내는 건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
“ 자네는 나이를 먹더니 농담도 잘 하게 됐는가? 나는 헬레나가 결투를 했을 때가 더 위험했던 것 같은데. ”
이스는 피식 웃으며 그 때의 일을 떠올렸다. 인품이나 실력, 마음가짐에 이르기까지… 무엇 하나 부족함 없던 딸 헬레나.
그런 아이가 속에 꽉꽉 감추고 있던 광기를 처음으로 드러냈던, 그로 인해 자신마저 주춤하여 물러나게 할 만큼의 압박감을 내보이던 그 때를.
“ 하아. 저도 그 소식을 듣고 참 가슴을 졸였습니다. 설마 헬레나 님이 제 못난 아들을 거기까지 중히 여기실 줄은 몰랐으니……. ”
체스 또한 이스와 마찬가지였다.
스스로의 손으로 케인을 처형했던 그 날. 체스는 단순히 헬레나의 안에 꼭꼭 숨어있던 지배자로서의 성향이 드러났을 뿐이라 생각했다.
온화했기에 지배하는 인간으로서 필요한 독심이 부족해보였던 소녀가 처음으로 독심을 내보여, 이스의 안에서 차기 공작으로 완벽히 인정받은 것이 전부라 생각했다.
허나, 곰곰히 생각해보면 그 모든 것에는 그의 아들, 지온이 깊게 연관되어 있었다.
지온이 독을 먹어 케인을 처형시켰고, 지온이 범해지려다 뺨을 맞은 탓에 결투라는 대가를 치르게 만들었다.
그리고 지금도 킬리네어 공작가는 그 대가의 여파로 시끌벅적하다.
지온에 대한 깊고도 집요한 집착. 모두가 그 때문이었다.
“ 나는 내 딸이 소드마스터가 되어도 무섭지 않았네. 내 딸에 대해 잘 안다 생각했고,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야. 그러니 위험해질 수도 없다고 생각했었지. ”
“ 물론 헬레나 님의 재능과 힘은 손에 꼽을 만큼 훌륭하십니다만……. ”
“ 나 또한 부모로서 아예 걱정이 없는 것이 아니야. 하지만, 아마 자네만큼은 아닐 지도 모르지. ”
헬레나가 위험해지는 것이 걱정이 아니라, 헬레나가 위협적이라 걱정이다.
이스는 그 작은 차이를 아주 절실히 느끼며,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 태연하게 대하고 있었다.
하나뿐인 딸이 속에 감춰두었던 깊고도 끈적한 심연. 그것을 마주했을 때의 충격은 지금도 생생했으나, 그래도 자신의 딸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 또, 자네도 보았지 않은가? 헬레나의 위험함을. ”
“ 그것은……. ”
체스는 차마 입을 열지 못했다.
이스가 말했던 대로 난생 처음 마주했던 헬레나의 집착이, 보통 사람의 수준을 훨씬 뛰어넘은 그 음습함에 소름이 끼칠 정도였으니까.
이스는 그 무엇보다 웅변적인 침묵을 보며 침음을 흘리다, 반쯤 식어버린 차를 단숨에 들이켰다.
속에 쌓아 둔 답답함이 아래로 쑥 내려가라는 자그마한 소망을 담은 행위였다.
“ 그래. 그러니 자네 아들이 꼭 필요한 걸세. 자네 아들에게는 너무 무거운 짐을 지게 하는 것 같아 미안하네. ”
역설적이게도, 헬레나의 역린이 헬레나의 안정을 찾게 하는 가장 큰 이유였다.
아마 부모가 죽는 것 보다 그가 죽는 것을 더욱 슬퍼할 것이 분명할 정도로, 지온 알트람은 헬레나 크라우저에게 있어 커다랬다.
최우선 가치라고 해도 좋았다.
“ 무거운 짐이라뇨. 당치도 않습니다. 그분이 약혼 의사를 밝히셨을 때엔 제 아들이 감히 분에 넘치는 은총을 받아 황송할 뿐이었습니다만……. ”
“ 지금은 오히려 내가 넙죽 절이라도 하고 싶은 기분일세. 자네 아들은 그 정도로 큰 역할을 하고 있어. 거창하게 말해보자면 운명이라 해도 좋을 지도 모르지. ”
남자를 사랑했다고 해서 그렇게 극단적인 모습을 보이지는 않는다.
그러니 헬레나가 속에 품었던 그 시커먼 덩어리는 원래부터 갖고 있던 것일 가능성이 높으며, 그것을 체스의 아들이 막았다 보는 것이 맞으리라.
그 과정에서 일종의 보호자였던 아이에게 집착하게 된 것은 참 기구하다고밖에 표현할 길이 없겠으나… 크라우저를 위해서는 꼭 필요했다.
그 재능을 온전한 방향으로 이끌기 위한 필수 요소로서.
◎◎◎
“ 귀족이 좋긴 좋구나……. ”
어느 한 숙소. 넓은 방에 오순도순 모인 다크엘프 무리가 웃음꽃을 피우며 여독을 풀기 바빴다.
그들을 고려해 비싸고 넓은 방을 준비한 것도 그랬지만, 여태까지 받은 대접에 새삼 고마움을 느끼기도 했다.
“ 그러게. 여비도 두둑해, 말도 좋고, 방도 좋은 곳을 잡고……. ”
올리비아는 침대에 누워 넋 놓은 다나를 보며 맞장구를 쳐줬다.
수를 나누어 싸구려 방에서 묵던 것이 일상이었던 그들이었으나, 크라우저 공작령에 오고부터 모든 일이 잘 풀리고 있었다.
마치 반세기 이상에 걸친 묵은 불운을 털어내는 것만 같았다.
“ 그나저나, 귀족이 문란하다는 건 잘 아는데… 저렇게 지조 있게 문란한 건 처음 본다. 그치? ”
“ 그 말에 심히 동감하는 바입니다. ”
말 한 마디 없이 묵묵히 자리를 지키는 것이 보통인 아델라가 드물게 손을 흔들며 호응했다.
그녀를 포함해 있는 힘껏 늘어진 여자들도 별반 다르지 않은 생각을 갖고 한두 마디씩 거들었다.
“ 그래도, 아마 엘렌이 보통 사이가 아니라는 걸 눈치까지 않았다면 저러지도 않았을 걸? ”
올리비아가 지금도 옆방에서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는 이들을 가리키며 피식 웃었다.
사람보다 청력이 좋은 그들이기에 침대 삐걱대는 소리도, 억눌린 신음소리도 희미하게 들을 수 있었다.
나름대로 방음이 좋은 시설이라 이 정도에서 그친 것이지, 싸구려 여관이었다면 눈앞에 둔 것 마냥 생생하게 느꼈으리라.
“ 그럴 지도 모르지. 크라우저 공작은 자기 암시를 잘 하는 사람이니까. 반대로 말하면, 그 가면이 드러나지 않은 이상 진정으로 마음을 열지도 않을 거고. ”
“ 친절하면서도 딱 선을 가른다는 거지? 그런 부류의 인간이 의외로 까다롭던데. ”
“ 까다롭기만 하면 다행이지. 그 선을 넘어가려면 얼마나 고생해야 하는데? 대부분은 그럴 일이 없어서 그냥 그런가보다 싶은 마음에 넘어가지만. ”
여러 인간군상을 겪은 여자들답게 오가는 이야기들에서도 세월이 느껴졌다.
그럼에도 아이처럼 생기발랄하기 짝이 없는 것이, 인간과 엘프의 차이를 여실히 드러내는 것만 같았다.
종족의 차이, 그리고 타고난 수명 차이로 인한 차이 말이다.
“ 저 정도 얼굴이면 여자도 많이 꼬일 법 한데, 딱 자리만 지키는 것도 신기해. ”
“ 얘는. 남자들이 군침을 흘리고도 넘치는 몸인데, 굳이 다른 여자를 찾을 필요가 뭐가 있어? 거기다 순종적인 것까지. 내가 남자라도 눈 돌아갈 만 하겠는데? ”
“ 그래도 저러는 게 신기하잖아. 아무리 맛있는 음식도 매일 먹으면 질리고, 자연스럽게 간식이나 특식을 찾아 헤매는 것도 많은 게 그쪽 인간들의 생리니까. ”
주식이 간식이 되고, 간식이 주가 되는 역전도 심심찮게 일어난다는 둥, 제법 낯 뜨거운 이야기들도 오갔다.
물론 그들의 고용주를 욕할 의도는 추호도 없이, 그저 진귀한 것을 보고 감탄을 내지르는 꼴과 같았다.
“ 어쨌든, 여기저기서 다리를 벌리거나 박아대는 것 보다는 훨씬 보기 좋잖아. 안 그래? ”
“ 그건 맞지. ”
다크엘프 무리가 열에 올라 온갖 이야기를 내뱉는 와중에도, 엘렌만은 이야기를 들을 뿐 조용히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그녀 또한 거칠게 살아온 정도가 남달랐으나, 한 남자의 모습이 자꾸만 뇌리에 떠오르는 탓이다.
엘렌이 홀로 그리는 남자는 지온이었다.
땀에 흠뻑 젖은 몰골. 웃옷을 벗으면 보이는 탄탄한 몸과, 무심코 숨을 삼킬 만큼 잘 단련된 기립근.
그 외에도 크지 않으면서 날씬하게 압축된 근육을 보고 의식했던 기억이 지금도 선명했던 덕이다.
물론 그 과정에서 헬레나의 격정 어린 시선을 받을 때도 있었지만… 적당히 귀여운 수준이라 쉬이 넘기곤 했었다.
“ …엘렌. 엘렌! ”
“ 어, 어어? 무슨 일이야? ”
“ 아니, 자고 있는 것도 아니고 멍하니 있기에 어디 아픈가 싶어서. ”
엘렌은 퍼뜩 놀라 주위를 둘러보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올리비아의 부름에 망상에서 벗어나기는 했으나, 그 충격이 컸기에 멍한 반응을 보였다.
깊이 생각에 잠긴 인간을 부르면 이런 반응을 볼 때가 많았으니 대수로울 정도는 아니었다.
허나, 올리비아는 그 속에서 무언가를 건져낸 듯 음흉하기 짝이 없는 호선을 보였다.
“ 뭐야? 혹시 알트람의 아들에 대해 상상하고 있었어? ”
그걸 어떻게!
엘렌은 순간적으로 저도 모르게 퍼뜩 놀랐으나 눈 깜짝할 사이 표정을 수습했다.
마치 처음부터 당황한 적이 없다는 듯한 모습이었으나, 눈썰미 좋은 다크엘프들이 그 모습을 놓칠 리가 없었다.
“ 으흥. 그렇구나~. 하긴, 엘렌은 그 두 사람이랑 연무장에서 노닥거리기도 했으니까. ”
“ 그야 그렇지만… 그 이야기는 갑자기 왜 꺼내는 거야? ”
“ 아니. 곰곰이 생각해 보니까, 그 때 알트람의 아들이 제법 험하게 굴렀다면서? 그럼 자연스럽게 맨살도 볼 수 있었던 거 아냐? ”
내심 흔들림을 잡지 못했던 엘렌의 마음에 다시 한 번 파문이 일었다.
그녀의 심리를 훤히 읽고 정곡을 찌르는 듯한 올리비아의 질문에, 도저히 평화롭게 버틸 상황 수가 없게 되었다.
그렇잖아도 노골적인 대화로 인해 남자를 의식하던 중이었으니, 도저히 수습하지 못할 지경에 이른 것도 당연했다.
하다못해 다른 사람이라도 있었다면 긴장의 끈을 늦추지 않았을 것이나, 그 경우에는 이런 이야기를 꺼낼 일이 없었겠지.
결국, 엘렌이 궁지에 몰린 듯 얼굴을 붉히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 보기는 봤지만… 그게 지금 무슨 상관이야?! ”
엘렌이 언성을 높여 묻자, 올리비아를 비롯한 다크엘프는 오히려 낮게 비명을 내지르며 기뻐했다.
미끼에 낚인 물고기를 보는 것 같은 달성감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 상관? 있지. 우리 엘렌이 겨우 의식할 만한 남자를 만났는데 상관없는 게 말이 돼? ”
“ 의식이라니…! 나는 그런 적 없어! ”
“ 그래. 그럼 의식하지 않는다 치고, 그 남자랑 자 볼 생각은 있어? ”
그들에게 노골적으로 추파를 던지는 이는 없었으나, 그런 이야기를 밥 먹듯이 듣고 살아왔기에 내성이 단단한 이들이다.엘렌 또한 그랬다.
그저 육체와 쾌락에 관련된 이야기에 새삼 부끄럼을 타지는 않아도, 대상이 대상인지라 제법 부끄러워하는 기색이었다.
“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
“ 보통은 말 안 되지. 애초에 어느 종족이던 우리를 꺼리는 놈들뿐이고, 이대로 짝 없이 늙어 죽으리라는 생각을 굳힌 지도 오래야. 엘렌도 알잖아? 우리가 편하게 교배를 하고 살려면 관념 없는 몬스터 하나를 잡아다 뒹굴어야 한다고. 하지만 몬스터는 영 아니잖아. ”
올리비아의 언사는 노골적이고 눈살을 찌푸리는 부분도 있었으나, 사실이다.
엘렌은 가장 먼저 인간 사회에 섞인 다크엘프로서 그 점을 뼈저리게 깨닫고 있었다.
어디서나 배척당하기 일쑤니까.
“ 그래. 나도 알아. ”
“ 그러니까, 다크엘프를 꺼리지 않는 그런 남자가 나타나면 놓칠 수 없는 게 당연하지 않아? 예를 들면, 지온 알트람이라던가. ”
“ 바보 같은 소리 마. 그게 가능할 리가 없잖아. ”
“ 그야 지금 당장은 불가능하지. 하지만 봐. 이유야 어찌되었던 한 울타리에 넣은 우리를 위해서 여러모로 애 써주는 사람들이니, 어떤 형태로든 성과를 얻게 될 지도 모르잖아. ”
그것은 부질없는 절망에 가까운 희망이었으나, 엘렌 또한 그 가능성이 있다고 느꼈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 그러니까, 그 때가 되면 은근슬쩍 끼여서 씨를 받으라 그 말이야. 공작에게서 뺏는 건 말이 안 되는 일이고, 그렇게까지 양심이 없는 것도 아니잖아. 그저 자그맣게나마 한 구석자리를 허락해주면 그것만으로도 감지덕지지. ”
노골적으로 첩이 되라는 말에 눈살을 찌푸릴 만도 했으나, 정작 그 이야기를 듣는 엘렌은 사무치는 부끄러움을 견디기 힘든 듯 고개를 숙였다.
가정을 이루기엔 박복하기 짝이 없는 운명임을 누구보다 잘 아는 여자였기에, 무심코 그 가능성을 엿본 탓이었다.
그래. 귀족들은 남모르게 수많은 첩을 둔다. 여러 부인과 결혼을 하는 이들도 있다. 그 말은 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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