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1화 〉 결투 #3
* * *
아는 것과 직접 겪어보는 것은 그 생동감에 큰 차이를 드러낸다.
엘렌은 그 말을 오늘처럼 뼈저리게 느낀 적이 없었다.
싫은 티 하나 없이 친절하던 여자의 얼굴에 한기가 서렸고, 손을 데면 베일 것 같이 날카로운 기세를 드러내고 있었다.
협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지온. 지온 알트람이라.
곰곰이 생각해보면 헬레나는 남자가 뺨을 맞은 정도로 상대의 목숨을 취하려 드는 광기의 소유자였다.
그 소문이 워낙 흉흉하고 어이가 없었기에 블루네일의 격전지까지 전해진 것도 알고 있었다.
그저, 처음 마주할 때의 인상이 워낙 좋아 깜빡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 별 일은 없었소. ”
하긴, 그런 생김새에 마음까지 넓은 남자다.
더구나 낮다고는 하나 어느 정도 직위도 있다.그러니 저 공작이 반하는 것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엘렌은 내심 그렇게 결론을 내린 뒤 있는 사실 그대로를 입에 담았다.
“ 정말인가요? 정말 아무 일도 없었나요? ”
“ 그렇소. 나와 같은 다크엘프를 평범하게 대해주는 것이 큰일이라면 큰일이겠지만, 그것을 빼면 지극히 평범한 여행길이었소. ”
엘렌의 단호한 답에 헬레나의 눈빛이 요사스러운 빛을 발했다.
헬레나는 다크엘프에게서 오물이라는 인식을 뺄 때 어떤 눈길을 받을지 계산할 수 있는 여자였고, 그 탓에 상대를 더욱 면밀히 관찰하려 애썼다.
헬레나에게 있어 다크엘프도 결국은 엘프다.
인간에 비해 오랜 시간을 살고, 그 시간 대부분을 젊고 아름답게 보내는 엘프다.
그런 엘프가 지온에게 관심을 드러낸다면, 그 마음 좋은 아이가 흔들리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었던 탓이다.
설령 그녀가 그를 믿고 의지하며, 그가 쏟아주는 애정에 한 톨의 먼지도 없는 것을 알아도.
“ …알겠습니다. 믿도록 하지요. ”
엘렌의 표정은 단호했고, 목소리에도 거짓이 느껴지지 않았다. 진실을 말하는 사람 특유의 기색이 짙게 배여 있었다. 그러니 지금 당장은 믿고 넘어가려 했으나, 헬레나는 경고 정도는 해야겠다는 생각에 입을 열었다.
“ 하지만… 꼭 주의하시길 바랍니다. 그 아이에게 너무 빈번하게 다가가거나, 필요 이상으로 친하게 지내는 기색이 없도록 하세요. 만약 그런 모습을 제가 보거나 듣게 된다면……. ”
그 뒤는 알아서 상상하라. 그 말을 마지막으로, 헬레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
막상 피로를 풀라고 해도 가만히 누워 지내는 것은 찝찝했다.
그런 생각을 하는 내가 마치 일중독에라도 걸린 것 같았으나, 아직까지 쉴 때가 아니기에 그렇게 생각할 뿐이다.
아마도 결투가 끝나고 안정을 찾게 되면 또다시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시간을 보내겠지.
고로, 나는 단정하게 연미복으로 갈아입은 뒤 헬레나의 집무실로 걸음을 옮겼다.
잠시 한 숨 돌리는 동안 둘 만의 이야기가 끝났을 테니 자리를 옮기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을 했다.
“ 쉬라고 했는데 벌써 온 거야? ”
다행히, 예상했던 대로 헬레나는 집무실에 있었다.
“ 내가 저질러 놓은 일이 너무 커서 그래. 가만히 앉아 있으려니 찝찝하더라. ”
“ 네 잘못이 아니라니까. 하지만 이 이상 거론하는 것도 아무 의미가 없겠지…? ”
“ 그래. 그러니까 도울 일이 있으면 도울게. ”
나는 언짢아하는 헬레나의 옆으로 다가가 서류 정리를 도왔다.
대부분의 작업은 이스 쪽에서 알아서 처리했으나, 헬레나의 몫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니었다. 예전부터 그래왔던 일이었다.
더구나, 헬레나가 공작이 되며 일거리가 조금씩 늘 기미가 보였다.
예상했던 것 이상으로 헬레나의 일처리가 좋아지고 있어인수인계를 하는 속도에 불이 붙었기 때문이었다.
그 말은 즉, 내가 할 일도 늘어난다는 뜻이었다.
“ 참, 그러고 보니……. ”
한창 서류작업에 탄력이 붙던 중, 헬레나가 말을 걸어왔다.
수줍은 듯이 붉어진 얼굴을 보니 중요한 이야기가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가만히 입을 다문 채 말이 이어지기를 기다렸다.
“ 우리, 약혼식도 아직 안 했었지…? ”
“ 아. 그랬지 ”
생각해 보면 헬레나의 입을 통해 내가 약혼자라는 사실은 익히 알려진 상황이다.
그런데도 약혼식을 거치지 않았으니, 그 상황이 무척 아쉬운 듯 했다.
“ 그렇긴 한데, 생각해 보면 헬레나도 계승식 없이 바로 공작위를 물려받았잖아. 그런 상황에서 굳이 약혼식이 필요할까 싶기도 해. ”
그에, 나는 계승식 없이 공작이 된 헬레나의 일을 거론하며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약혼식이 꼭 필요할까 의문이 들기도 하고, 서로가 깊은 관계로 이어진 이상 바로 결혼을 해도 괜찮지 않을까 생각했다.
“ 아… 응. 그 말도 일리가 있네. ”
“ 물론 공작의 반려가 될 사람을 알리는 행사이니만큼 중요하기도 하겠지. 그래도 공작위를 계승식 하나 없이 넘겨 준 전례도 있으니, 약혼식을 넘기는 것도 비슷하지 않을까. ”
“ 하긴… 그것도 그래. 이런 상황에서 약혼식을 거론하는 것도 웃기는 일이지. 이미 지온이 어떤 사람인지 크게 소문이 난 상태니까. ”
헬레나는 내 답에 쓰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억지로 밝게 웃는 것이 티가 났고, 내심 약혼식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잘 알 수 있었다.
너무 대수롭지 않게 말하니 마음에 상처를 입은 기색이었다.
더구나, 그런 기색을 최대한 숨기며 대범한 척 하는 모습이 참 안쓰러워 보였다. 화장기를 뺀 소심함은 여전했다.
나는 헬레네가 풀죽은 모습을 보며, 이쯤에서 그녀가 기뻐할 만한 말 한마디를 건네주는 것이 좋을 듯 싶었다.
“ 그래. 그러니까 이번 일이 잘 해결되고, 시간이 좀 더 지나면 곧장 결혼식으로 가는 게 훨씬 낫지 않을까. 약혼식은 넘기더라도 결혼식은 해야 할 테니까. ”
“ …어? ”
나는 약혼식이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지만, 결혼식까지 필요 없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재산이 별로 없거나 귀족이 아니라면 또 몰라도, 공작이 결혼식도 치르지 않고 반려를 맞아들이면 그것대로 큰 문제가 될 터였다.
거기다 식도 치르지 않는 것은 헬레나에게도 미안한 일이었다.
뚜렷한 근거 하나 없는 감정적인 결론에 불과했으나, 식을 치르지 못하는 상황도 아닌 만큼 구렁이 담 넘듯 넘어가는 것도 찝찝했다.
다만, 헬레나가 강경하게 밀어붙인다면 꼼짝없이 약혼식도 치러야 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 왜? 아니야? ”
나는 결혼이라는 단어에 놀라는 헬레나를 보며 피식 웃었다.
실망한 기색은 온데간데없고, 점점 표정이 밝아지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 풀 죽은 여자가 맞나 싶을 정도로 급격한 변화였다.
“ 아… 아니긴! 지온은 내 거라고 말했으니까… 결혼은 당연한 거잖아! 그렇지?! ”
“ 그리고 헬레나도 내 거고. ”
헬레나는 그 날 밤의 약속을 떠올린 듯 함박웃음을 지었다.
더구나 서류 처리까지 마무리 지어 무척 여유로운 상황이다. 그 덕분에 한가로이 잡담을 나눌 수도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 와중 태연하게 대화 주제를 돌렸다. 앞으로 있을 결투에 관해서였다.
“ 그러고 보니, 나머지 한 사람은 어떻게 할 거야? ”
“ 아, 결투? 글쎄. 공작령 내에서 적당히 한 분 뽑아도 될 것 같아. 어차피 나와 레드후드, 두 명만 있어도 충분할 것 같거든. ”
근본이 소심하기에 자기 역량을 그리 높게 평가하는 편이 아닌 여자가이번만큼은 덤덤하면서도 자신감 있게 답했다.
익스퍼트 급의 강자 백을 죽이지 않고 상대하는 것치고는 부담감도 없어 보였다.
그리고 나머지 한 판을 썩 신경 쓰지 않는 기색이라면… 내 말을 들어 줄 가능성어 더 높아 보였다.
“ 그러면, 그 자리에 나를 끼워 줘. ”
“ 뭐…? ”
예상대로라고 해야 할 지, 아니면 기대가 어긋났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저 들떠 있던 헬레나의 기쁨이 식어버린 것은 확실했다.
“ 못 들었다면 다시 말할게. 나를 빈자리에 끼워 줘. ”
“ 안 돼. ”
헬레나는 거절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듯 망설임 없이 답했다.
하지만 나도 물러날 생각이 없었기에 말꼬리를 잡고 늘어질 생각이었다.
“ 부탁이야. 끼워 줘. ”
“ 절대 안 돼. 위험한 일이야. 죽을 가능성이 높은 사지인데, 거기에 지온을 밀어 넣으라고? 그것도 내 손으로? ”
“ 죽지 않아. 아니, 안 죽을 거야. ”
아마 심장을 완전히 뽑아내거나 머리가 산산조각나지 않는 이상 죽지 않을 몸이다.
더구나 마나와 몸을 갈고 닦으며 보낸 시간도 더해진 만큼, 생존율이 낮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헬레나는 달라 보였다. 나를 물가에 놓은 아이처럼 바라보며, 불안한 기색을 띤 채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 이미 용병을 데려온 것만 해도 충분히 제 역할을 한 셈이야. 그러니 허락 못 해. ”
“ 헬레나. ”
“ 아무튼, 절대 안 된다는 내 결심은 확고해. 그러니 더 이상 시간 끌지 말고……. ”
나는 등을 돌리려는 헬레나의 어깨를 꽉 잡고, 억지로 시선을 맞추게 했다.
그녀가 진심으로 뿌리칠 생각이었다면 내 힘으로는 어림도 없었겠으나,
순순히 따르는 것을 보니 이야기를 들어 볼 생각인 듯 보였다.
“ 헬레나. 나는 헬레나의 옆을 당당하게 지키고 싶어. 남의 등 뒤에 숨어서 승리를 거저 얻고 싶지 않아. ”
“ 앞서 말했지만, 용병을 데려온 것으로 충분해.. ”
“ 나는 부족해. 그 정도로는 꼬시는 재주만 넘치는 애송이라는 평가가 평생 꼬리표처럼 따를 지도 몰라. 나는 그런 소리를 듣기 싫고, 나 스스로가 운이 좋아 헬레나의 총애를 받은 놈이라고 생각하고 싶지도 않아. ”
나 자신의 자존감을 물고 늘어지자 헬레나의 눈빛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용병을 데리러 가겠다며 그녀를 설득할 때와 말이 비슷했으나, 제법 효과가 있어 보였다.
물론 전에 비해 그렇다는 것일 뿐, 헬레나의 마음을 돌리기에는 아직 부족했다. 여전히 거절 의사를 드러내고 있었으니까.
“ 그래도……. ”
“ 단순히 입 발린 말이 아니라, 크라우저의 옆을 지켜도 될 만큼 실력이 있다는 것을 드러내고 싶어. 그렇게 되면 쓸데없는 잡음도 훨씬 줄어들 테니까. ”
내 이름을 높이고 싶다고 치기 어린 말을 던지고는 있지만, 사실 그러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혹여 어린놈이 치기가 통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막 던지고 있을 뿐이다.
나는 조심스레 치기를 부리는 척 하면서도, 헬레나와 눈을 가까이 맞추며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 거기다 나는 헬레나의 훈련을 매일같이 받아 왔잖아. 실력을 키우기엔 이만큼 사치스러운 환경도 없다는 건… 헬레나도 잘 알지? ”
“ 그건, 그렇지만……. ”
“ 그렇지? 소드마스터가 매일같이 훈련을 시켜주고, 부족한 점을 보완해 주는 생황을 몇 년이나 보냈어. 자랑할 정도는 아니겠지만… 아마 어지간한 익스퍼트도 상대할 수 있을 거야. ”
매일같이 소드마스터와 대련하며 부족함을 보완하는 축복을 계속해 누려왔다.
검을 들고 사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바라 마지않을 사치 속에서 숨을 쉬고 있었으며, 앞으로도 그럴 예정이다.
그래서인지, 헬레나는 내 말이 완전히 근거 없는 치기만은 아니라는 것을 이해하는 듯 보였다.
“ 헬레나, 부탁해. 전에도 말했지만, 나는 거리낄 것 없이 당당한 모습으로 너와 맺어지고 싶어. ”
“ 그래도……. ”
망설이는 기색이 강한 것을 보면 아직 결정타가 부족하다.
그러므로 서로의 코끝이 닿을 만큼 얼굴을 가까이 하고, 최대한 낮고 진중한 목소리를 내며 말했다.
“ 어, 어어……. ”
“ 부탁해. 나는 미래에 태어날 우리 아이에게도 부끄럼 없는 사람이 되고 싶어. ”
“ 아,아이…! ”
팔자에도 없던 아버지가 되게 생겼지만, 헬레나와 약혼자가 된 이상 반쯤 정해진 미래였다.
이제 와서 피할 수도 없으며, 피해서도 안 되는 일이기도 했다.
헬레나는 그에 관해 전혀 생각도 못했던지 허둥대는 기색을 보였다. 당황하기 보다는 기뻐서 어쩔 줄 모르는 듯한 느낌이 강했다.
“ 그래. 미래에 태어날 아이에게, 최소한 책임에서 도망치는 아버지라는 인상을 주고 싶지 않아. ”
나는 유난히 아이라는 말을 힘주어 말하며, 반쯤 넘어온 헬레나의 고집을 쓰러뜨리려 애썼다. 고지가 눈앞에 있었다.
“ 그러니 헬레나, 부디……. ”
조금만 더 유혹하면 쓰러진다. 그런 희망을 갖고 끊임없이 속삭이듯 말을 걸었다.
내 실수로 커진 일에 조금이라도 책임을 지는 것은 물론, 헬레나를 안정시키기 위해서였다.
더해, 쐐기를 박고자 끓어오르는 구역질을 견뎌내며 강압적인 대사까지 토해냈다.
헬레나의 소심함을 건드리기 위한 고육지책이었다.
“ 네, 네에……. ”
그 결과, 헬레나는 내 고집에 무릎 꿇으며 항복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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