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솔플의 제왕-171화 (171/192)

< 59화. 본 드래곤 (1). >

1.

“좋아, 좋습니다. 워베어 아이템 3개 분량 재료에 블러드 오우거 풀세트 한 벌 드리겠습니다. 다른 곳을 알아보라고? 아니, 잠깐만. 대체 얼마를 받아먹으시려고? 어지간하면 거래합시다. 워베어 드롭 아이템은 시장에 풀리지도 않은 아이템입니다.”

통화를 하던 안재현이 안경을 고쳐 쓰기 위해 오른손 검지로 자신의 콧잔등 위에 내려앉은 안경 코받침을 가볍게 올렸다. 그러자 마치 스위치를 누른 것처럼 안재현의 미간에 주름이 생겨났다.

“장난은 정도껏 합시다. 거래하자고 통화까지 하는데, 통화 도중에 이런 말도 안 되는 배짱 부리기는 매너가 아니잖습니까?”

찌푸린 인상에 어울리는 신경질적인 음색이 흘러나왔다.

“블랙 코볼트 왕의 검 한 자루. 최근 시세가 떨어지긴 했지만, 푼돈으로 구할 수 있는 아이템이 아니라는 건 그쪽이 잘 알 테고. 어지간하면 여기서 거래합시다.”

이윽고 안재현이 왼쪽 귀에만 착용한 이어폰이 윙윙거렸다.

“오케이, 거래합시다.”

거래를 마치고, 통화도 마친 안재현이 곧장 이어폰을 벗은 후에 매트리스를 향해 이어폰을 신경질적으로 던졌다.

“빌어먹을 새끼!”

욕지거리와 함께 안재현이 속으로 화를 곱씹었다.

‘190레벨 노네임 스킬북 하나로 아주 뽕을 뽑는구나, 뽕을 뽑아! 빌어먹을 새끼!’

190레벨 노네임 스킬북 물량이 하나둘 풀리기 시작하면서, 어처구니없던 경매장에서의 시세는 뚝뚝 떨어졌다. 그런 상황에서 안재현은 190레벨 노네임 스킬북을 어느 정도 정상적인 시세에 팔 의지를 가진 판매자에게 물물거래를 제안했다.

안재현은 이 거래에서 이제 해골 전사들에게도 필요 없게 된 아이템들을 소모할 생각이었다. 해골 전사에게 필요 없을 뿐이지, 여전히 유저들 사이에서는 인기가 높은 아이템들이었기에 물물거래의 대상이 되기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워베어가 드롭하는 아이템 옵션이 사냥 난이도에 비해 구리긴 하지만, 그래도 220레벨 아이템인데······.’

하지만 어찌어찌 저울질을 하다 보니, 막상 팔려고 염두에 둔 아이템이 아니라 이번에 워베어를 잡고 얻은 아이템 제작 재료가 물물거래의 품목이 됐다.

안재현이 이를 갈았다.

‘역시 난 아이템 거래에 소질이 없다니까. 이런 건 동수······ 됐다, 됐어.’

예상외의 거래였지만, 그래도 물물거래에 써먹은 아이템 중에 안재현에게 필요한 아이템은 없었다. 문제는 그 아이템은 골드를 받고 팔았을 때 안재현이 얻을 수 있는 수익.

‘나도 미쳤구나.’

수익을 계산하던 안재현은 혀를 내둘렀다.

‘고작 스킬 하나에 그런 거금을 쓰다니······ 내가 미친 게 분명해.’

스킬 하나, 그것도 원하는 스킬이 아니라 무엇이 나올지 모르는 스킬북 하나를 구매하는데 어마어마한 돈을 썼다. 정말 리치리치란 별명의 원래 주인이었던 수브라타 두타 같은 어마어마한 부호나 할 짓을 했다.

‘아니면 게임이 미쳤거나.’

안재현이 매트리스 위에 놓인 V기어를 바라봤다.

‘게임이 미친 게 맞지. 워로드가 잘 만들긴 했지만, 다른 게임이 이 정도로 미쳐 돌아가는 건 아닌데.’

워로드의 대성공 이후 많은 게임들이 워로드가 차지한 왕좌를 차지하기 위해 속속 등장했다. 개중에는 게임을 즐기는데 필요한 기본적인 완성도는 워로드에 비해도 밀리지 않거나 오히려 몇몇 부분에서는 워로드를 뛰어넘는 게임이 나오고 있었고, 실제로 워로드만큼

은 아니지만 빠르게 유저 수를 늘리며 성공을 운운할 자격을 충분히 갖춘 게임도 제법 있었다.

그러나 워로드만큼 말도 안 되는 돈이 오고 갈 정도로, 그 정도로 미쳐 돌아가는 게임은 없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안재현이 과거로 돌아오기 전에도 워로드만이 특별한 하나, 스페셜원으로 군림했다. 그 이유를 알 수 없는 특별한 무언가로 존재했다.

그때를 떠올리던 안재현은 비웃음을 머금었다.

‘지금은 미쳐 돌아가는 게 나한테 유리하지만.’

과거로 돌아오기 전에는 워로드의 특별함이 안재현에게 고통이 되었지만, 지금은 반대다. 워로드가 특별하기에 그리고 그 워로드 속의 하회탈이 특별하기에, 안재현은 상상도 못한 것을 이루었다.

그리고 앞으로는 더 대단한 것을 이룩할 것이다.

안재현이 곧바로 매트리스 위에 누웠고, V기어를 착용하기 시작했다.

2.

히르칸이 퀘스트 수행을 위해 20일이 넘는 여행을 마치고, 다시 하르드 요새 유적 마을로 돌아왔을 때, 하르드 요새 유적 마을은 더 이상 마을이라고 부를 수 없을 정도로 번듯한 존재감을 보이고 있었다. 이제는 성의 모습을 갖추고 있었다.

‘저주받은 성 때랑 비슷하네.’

그렇게 하르드 요새 유적 마을이 변화하는 모습은 과거 히르칸이 저주받은 성을 되찾고, 그곳이 흐반 성이란 번듯한 이름과 위용을 갖추게 되었을 때와 비슷했다.

물론 그때와는 몇 가지 차이점이 있긴 했다.

‘그럼 여기도 내 동상 같은 거 세워줘야 하는 거 아니야?’

히르칸이 생각하는 가장 중요한 차이점은 동상의 유무였다.

저주받은 성이 흐반 성이 되었을 때, 흐반 성은 저주받은 성을 되찾아준 누피 패밀리란 이름의 유저들의 동상을 세워줬다. 그러나 하르드 요새 유적 마을에는 아누가스를 무찌른 하회탈의 동상을 세워줄 기미가 눈곱만큼도 보이지 않았다.

물론 그 동상이 세워진다고 해서 당장 히르칸의 수중에 돈이 들어오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세워준다는 걸 마다할 이유는 없지 않은가? 싫어할 이유도 없다.

“씁.”

오히려 히르칸은 그런 게 좋다. 게임에 자신의 존재감이 남기는 것을 굉장히 좋아했다.

좋아하니까 실망감이 생기는 법이다.

‘공원 하나 만들고, 그 공원에 내가 아누가스랑 싸우는 동상 같은 거 세워주면 얼마나 좋아? 멋지기도 하고. 그림도 괜찮겠구먼.’

이런 히르칸의 속마음을 지금 히르칸의 등장에 그를 주목하는 유저들이 안다면 기절했을 것이다.

“하회탈! 하회탈 맞지?”

“하회탈이겠지. 요즘 누가 암흑대륙에서 하회탈인 척하겠어? 하회탈에게 걸리면 답이 없는데.”

“저번에 자기 뒤를 밟았던 유저들 다섯의 손목을 전부 잘라 해골에게 먹였다던데?”

“끔찍하군.”

“그게 그 유명한 와치맨 스타일인가? 무섭다.”

하회탈은 워로드란 무대에서 공포의 상징이다. 하회탈이 보여주는 건 꿈과 희망이 아니니까. 더욱이 하회탈은 몬스터든, 유저든 자신의 눈앞에 거슬리는 것들에게 분명한 응징을 한다. 그게 일반 유저라고 해도, 자신을 건드리면 가차 없다.

그렇게 무시무시한 하회탈이 자기 동상을 세워주지 않는 워로드 시스템에 대해서 칭얼거림을 입속에서 사탕처럼 굴리는 사실을 감히 누가 상상할 수 있겠는가?

‘아, 동상 세우고 싶다.’

그런 주변의 긴장감을 뒤로한 채 히르칸이 토벌협회로 향했다.

3.

토벌협회 하르드 요새 유적 마을 지부 3층과 4층을 잇는 계단. 사람도, NPC도 올 리 없는 그 계단을 의자 삼아 앉은 채 한 유저의 손에는 책 한 권이, 그 유저의 옆에도 책 한 권에 놓여 있었다.

유저의 정체는 히르칸이었고, 책의 정체는 스킬북이었다.

[스킬북이 정체를 드러냅니다.]

[피어싱 포켓 스킬을 습득하시겠습니까?]

히르칸이 적지 않은 값을 치르고 구매한 190레벨 노네임 스킬북에서 나온 스킬은 피어싱 포켓이었다.

‘오!’

히르칸은 만족했다.

어떤 의미에서 히르칸에게 가장 알맞은 스킬이었다.

[피어싱 포켓 스킬을 습득하셨습니다.]

[피어싱 포켓]

- 숙련도 없음

- 스킬 사용 방법 : 자신의 신체에 공간을 만들 수 있습니다. 단, 머리와 가슴은 저장 공간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스킬 설명 그대로, 피어싱 포켓 스킬의 효과를 이용하면 히르칸은 자신의 신체를 주머니처럼, 가방처럼 쓸 수 있었다. 이제까지와는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많은 아이템을 가지고 다닐 수 있으며, 잃어버릴 걱정도 없다.

‘그러고 보니 나 리치였지.’

리치이기에 습득가능한 스킬이었다. 현재 히르칸의 육체는 설정상 리치다. 라이프 베슬까지 습득했으니, 사실상 언데드나 마찬가지다. 실제로 히르칸은 상태 이상 효과 중 하나인 출혈 상태 이상에 면역이며, 반대로 사제의 회복 계열 스킬의 효과를 받을 수 없으며, 사

제가 사용할 수 있는 스킬 중 언데드 몬스터를 상대로 유효한 공격 스킬의 영향도 받는다. 언데드 몬스터 취급을 받는다는 의미다.

그리고 맨몸뚱이 역시 일반 유저와 다르다. 평소에는 일반 유저들처럼 갑옷을 입고 다녀서 유저들이 모를 뿐, 히르칸은 피부 재봉 스킬 때문에 기본적으로 피부 색 자체가 다르다. 오른팔은 털가죽으로 덮여 있고, 왼팔은 파충류의 비늘 가죽으로 덮여 있다. 강철뼈 효

과로 보여줄 순 없지만 뼈도 다르다. 몸 곳곳에는 검은 문신이 그려져 있다.

그런 몸뚱이가 이제는 서랍장처럼 되는 것이다. 어찌 보면 미친 짓처럼 보인다. 전신에 문신을 도배하고, 온몸에 피어싱을 한 사람들이 일반인들 기준으로는 이상하게 보일 수밖에 없는 것처럼.

하지만 히르칸은 그 사실에 만족했다.

‘뱃가죽을 드러내면 안에 마력 회복 사탕이 가득 있다면······ 완전 도라에몽이네? 끝내주네! 가만, 그럼 배꼽이 손잡이가 되는 건가? 손잡이는 어떻게 만들어야 하나?’

이 모든 요소들이 외형적으로는 몹쓸 꼴이 될지언정, 모두가 히르칸의 강함을 보여주는 요소들이니까.

피부재봉과 검은 문신 효과로 히르칸의 방어력은 패시브 스킬을 적용받는 검사 클래스 유저만큼 강하고, 강철뼈와 각력 개조 같은 스킬의 효과도 톡톡히 누리는 중이다.

어차피 사제와 함께 사냥할 일도 없는 히르칸 입장에서 이 요소들은 기분 좋은 요소들이다.

‘자, 그럼 이번에는······.’

히르칸이 곧바로 두 번째 스킬북을 손에 들었다. 이 스킬북은 대마법사 보칸 퀘스트의 보상으로 받은 스킬북이었다. 몇 레벨의 스킬북인지, 무슨 스킬이 있을지는 모른다.

이제부터 그걸 확인할 차례.

그리고 이 스킬북에서 무엇이 나오느냐에 따라서 히르칸은 다른 고민 하나도 같이 해결할 예정이었다.

‘여기서 나오는 스킬에 따라서 전설급 고대의 힘으로 강화할 스킬을 결정해야지.’

고대 왕의 시험을 통과한 히르칸은 자신이 처치한 수호기사 둘의 몸뚱이, 금고나 다름없는 그 몸속에서 두 개의 상자를 찾아냈다. 하나는 검은 상자였고, 다른 하나는 붉은 상자였다. 검은 상자에서는 초월급 고대의 힘을 스킬에 부여할 수 있는 검은 두루마리가 나왔고,

붉은 상자에서는 전설급 고대의 힘을 스킬에 부여할 수 있는 붉은 두루마리가 나왔다.

그게 고민의 시작이었다.

초월급 고대의 힘은 스킬 자체의 성능을 발전시켜준다. 어디에 써도 특별한 고민은 없다.

전설급 고대의 힘은 스킬 자체의 특성을 바꿔준다. 예를 들어 해골 조각 스킬에 초월급 고대의 힘을 쓰면 해골 전사의 능력치와 소환 가능 숫자가 늘어난다. 반대로 전설급 고대의 힘을 부여할 경우에는 이족보행을 하는 몬스터가 아닌 몬스터의 뼈를 제물 삼아 해골 전

사를 소환할 수 있다. 즉, 늑대 인간이 아니라 늑대도 해골 전사로 부릴 수 있게 된다.

그래서 고민을 할 수밖에 없다.

전설급 고대의 힘은 굉장히 얻기 힘들다. 전설급 고대의 힘 1개를 얻기 위해서는 초월급 고대의 힘 10개를 얻을 노력이 필요하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하지만 반대로 무조건 스킬 강화를 한다고 이득이 되는, 그건 아니었다.

단순히 생각하면 가장 사용빈도가 높은 해골 조각 스킬에 강화를 하면 좋을 것 같다. 강화의 결과물도 놀랍다. 해골 늑대, 해골 곰, 해골 뱀을 부하로 부린다니? 대단한 일이다.

하지만 실속은 의외로 없다. 해골 전사가 강한 이유는? 사실 가장 큰 이유는 무장 스킬 덕분이다. 히르칸은 일반 유저들은 꿈도 못 꿀 아이템 세팅을 해골 부하들에게 해준다. 그런데 해골 늑대나, 해골 곰은 무장의 효과를 받지 못한다. 결정적으로 무기를 들지 못한다.

해골 늑대나, 해골 뱀이 입에 칼을 물고 휘두를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오히려 뼈폭탄에 쓰는 게 더 유용할 수도 있었다. 뼈폭탄의 경우에는 전설급 고대의 힘을 부여하면 타이머 기능이 생기니까. 시한폭탄과 그냥 폭탄의 효용성 차이는 극명하다.

‘일단은 해골 기사에 써먹을 예정이긴 한데······.’

물론 현재 최우선 순위는 해골 기사 스킬이었다. 해골 기사 스킬을 전설급 고대의 힘으로 강화하면, 해골 기사들에게 라이딩 스킬과 해골마가 생긴다. 데스나이트처럼 무언가를 타고 싸울 수 있게 된다.

마음은 이미 해골 기사 스킬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기울어져 있다.

단지 굳이 당장 그 선택을 할 필요가 없을 뿐. 새로운 스킬북에서 무엇이 나오는지 보고 선택을 해도 늦을 건 없다.

‘자, 까볼까?’

히르칸이 스킬북 위에 손바닥을 올려놓았다.

[스킬북이 정체를 드러냅니다.]

[본 드래곤 소환 스킬을 습득하시겠습니까?]

‘응?’

말도 안 되는 게 등장했다.

4.

- 오랜만이군.

피곤함에 적당히 찌든 사내의 음성에 해치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오랜만인데, 반갑진 않네. 그때 맞은 뒤통수가 아직도 얼얼해서 말이야. 도와달라고 했는데 오히려 미끼로 써 먹힐 줄이야.”

- 각자의 이익을 추구했을 뿐이지.

“그때 내가 배신자로 찍혀서 어떤 대우를 받았는지, 그걸 알면 그런 소리를 못할 텐데?”

- 사과가 필요한가?

“어차피 내가 원해서 하는 대화도 아니니까 사과를 하든 말든 상관없지만 해주면 듣기는 하지.”

- 미안하군.

“좋아, 그럼 대화로 넘어가자고. 그래서 퍼스트 헤드께서 굳이 날 대화 상대로 부른 이유가 뭐야?”

해치의 물음에 그의 대화 상대, 히드라 길드의 퍼스트 헤드 시트러스는 즉답을 피한 채 잠시 뜸을 들인 후에 말을 꺼냈다.

- 해치, 네 전직이······.

“게임 시스템 이야기를 하려는 모양이었군. 하긴, 우리 여왕님이 그런 건 좀 약하지. 대화 상대는 잘 골랐네.”

- 워로드 제작하고, 관리하는 M.I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지?

그 질문에 해치는 통화 상대에게 보일 리 없는 비웃음을 머금었다.

“그쪽보다는 많이 알 걸?”

- 토봇 소프트는 M.I를 제작하기 전 베이스 인공지능으로······.

“역시 그쪽보다 내가 많이 알고 있네. 일단 하나 짚어주지. 지금 팩맨 프로그램을 말하려고 하나 본데, 팩맨은 M.I의 베이스가 아니야. M.I는 원래 다양한 분야에 써먹기 위한 매니지먼트 인공지능이고, 토봇 소프트는 제작한 M.I의 성능을 테스트하기 위해서 여러 분야

의 기술을 추가로 접목했지. 우리가 즐기는 워로드 같은 경우는 패키지 게임 제작 프로그램인 팩맨의 기술력이 접목된 M.I가 만든 결과물이고. 게임 제작 및 관리 전문 M.I라고 할까? 이 설명을 계속 듣고 싶으면 1번을, 듣기 싫으면 2번을, 다시 들으려면 음표를 눌러.”

- 역시 잘 아는군.

시트러스의 말에 이번에는 해치가 대화에 뜸을 들였다. 뜸을 들인 후 말을 꺼냈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야?”

- 워로드는 잘 만들어진 게임이지. 특히 유저들의 행동과 게임 진행에 따라 결과와 과정이 달라지는 메인 시나리오 퀘스트 시스템은 최초나 다름없는 시도였음에도 놀라울 정도로 완성도를 가지고 있지. 그게 가능했던 이유를 알고 있나?

“변수의 개입을 막았으니까. 이래라저래라 안 한 덕분이지. 이 게임에서 제대로 된 이벤트 한 번 안 나오는 이유이기도 하고.”

이 순간 해치의 머릿속에는 과거의 나날들이 지나갔다. 썩 즐거울 것 없는 나날들이었다. 아침에 회사에 출근해서 밤에 나오고, 집보다 회사에 있는 시간이 더 길었던 나날들을 즐거워할 정도로 해치는 변태가 아니었으니까.

“게임 내용과 상관도 없는 이벤트 한답시고 이벤트 전용 몬스터를 추가하거나, 몬스터 머리 위에 3주년 기념 축하 고깔모자 같은 걸 씌우려고 하는 것도 M.I 입장에서는 미칠 일이니까. 그런 외부에서의 변수 개입을 원천적으로 차단한 건 당연한 선택이지. 더군다나 지

금 워로드를 관리하는 M.I는 어디까지나 초기 제품이니까. 개입할 여지를 남겨두는 건, 사고가 터질 여지를 남겨두는 거지. 그런데 지금 이 설명 듣고 싶어서 연락한 거야? 정말?”

- 지금 우리가 퀘스트를 통해 얻은 정보에 따르면, 워로드 메인 시나리오는 이번 세 번째 메인 시나리오 퀘스트 혹은 그다음 퀘스트를 마지막으로 할 가능성이 크다.

“어휴, 참 놀라운 소식 알려주셔서 고맙습니다.”

해치는 시트러스의 진지한 그 말에 놀라지 않았다. 마치 당연한 사실을 통보받은 것처럼.

- 그리고 메인 시나리오 퀘스트가 종료되면, 그때부터는 보통의 게임처럼 서비스를 시작하겠지.

“아이고, 또 놀랐네.”

- 유저들의 선택과 게임 진행에 따라 달라지는 메인 시나리오 퀘스트가 아니라, 제작자의 의중에 따라 새로운 에피소드, 새로운 무대를 덧붙여가는, 그런 식으로 수명을 덧붙여가는 게임.

여기서 해치는 더 이상 말장난을 치지 않았다. 장난도 여러 번 치면, 하는 쪽이 재미없어지는 법 아닌가?

“그 부분은 당신보다 더 잘 알고 있다니까. 정말 하고 싶은 말이 뭔지 말해.”

- 메인 시나리오 퀘스트의 진행 속도를 늦추고 싶다. 메인 시나리오 퀘스트가 끝나도 워로드의 인기는 유지되겠지만, 더 이상 예전만큼은 아니겠지. 특히 라이브 채널을 운영하는 30대 길드의 타격은 매우 클 터. 사실 지금 30대 길드에 들어온 자본은 일종의 투기자본,

거품이니까.

“우리 길드는 아닌데? 든든한 물주가 있는데?”

- 말 그대로다. 합의 하에 무리한 게임 메인 시나리오 퀘스트 진행을 하지 않는 것. 그럴 만한 이유를 최소한 해치, 너라면 이해해줄 수 있겠지. 우레여왕에게 내가 이런 제안을 한다면 씨알도 먹히지 않을 테니까.

“그건 그렇지.”

이 대목에서 해치는 처음으로 시트러스의 말을 납득했다.

“그래서 뭐 어쩌라는 건데?”

- 하회탈을 무시해라.

하회탈.

그 단어에 해치가 처음으로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입가에 걸린 미소를 지우고, 얼굴 모든 근육을 딱딱하게 굳혔다.

- 하회탈의 발목을 잡는 건 얼마든지 환영이다. 그러나 하회탈을 장기말로 써먹을 생각은 하지 마. 굳이 하회탈이 보이는 곳에 체리를 두고, 누가 먼저 먹나 경쟁을 할 필요는 없지. 내가 하려는 말은 여기까지다.

통화는 거기서 종료됐다.

통화를 마친 해치는 긴 한숨을 내뱉었다.

‘하회탈이라······ 미치겠군. 완전히 꽂혔던데······ 그보다 이제 슬슬 메인 시나리오가 끝이 오는 걸 보니, 토봇 소프트 주식도 팔 때가 됐네.’

< 59화. 본 드래곤 (1). > 끝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