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꿈속에선 주인공인 내가 현실에선 은거기인-5화 (5/62)

〈 5화 〉 홉 고블린 (2)

* * *

"습격이다!"

"랑스 형?"

내가 뛰어가며 챈에게 곧장 소리침과 동시에 문을 열지도 않고 목책을 뛰어넘어 마을로 들어가서 재차 외쳤다.

"몬스터야! 다들 일어나!"

마나를 실은 목소리가 마을 전체에 울려 퍼지자 그제야 마력 폭주를 해제한 나는 현기증에 머리를 부여잡았다. 잠깐 사용한 것뿐인데도 마나의 절반이 소모되었고 심장이 거칠게 뛰는 느낌과 함께 온몸이 뻐근해졌다. 뜨겁게 달아오른 마나를 잠재우고 있자 잠자리에 들려던 사람들이 소란스럽게 몰려나왔다.

"랑스, 그게 무슨 말이야?"

"몬스터가 오고 있다고?"

"예, 습격입니다. 지금 자고 있는 사람들 모두 깨워야 합니다!"

나는 몰려온 사람들의 말에 일일이 대답해 줄 여유가 없어 당장 필요한 말만을 고르고 그중에 섞여 있는 자경단원들을 보며 말했다.

"어서 무장하고 나오십시오! 시간이 없습니다!"

내 눈빛을 보며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느꼈는지 자경단원들이 각자 자기 집으로 뛰어가는 게 보였고 이미 무장을 마친 아던이 뒤늦게 다가오는 게 보였다.

"상황을 보고해라, 랑스."

"예, 단장. 마을 주변을 순찰하던 중 마을 방향으로 다가오는 수많은 소리를 들었습니다."

"발소리라…. 어떤 놈들인지는 못 봤나?"

"소리를 듣자마자 바로 온 터라 모습을 보지는 못했지만 키익 거리는 숨소리로 보아 아마 고블린일 것 같습니다."

"이럴 수가…! 내일부터 토벌대를 꾸리려던 찰나에 이런 일이…."

아던이 미간을 찌푸리며 이마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뜨면서 손을 내리며 마을 사람들을 향해 외쳤다.

"아이들과 몸을 움직이기 힘든 환자, 노인분들은 촌장 집으로 모이고 나머지는 전투를 준비한다!"

아던의 말에 마을 사람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각자 자신의 집으로 향했다. 나 역시 자경단의 무기고로 향해 어깨에 활과 화살통을 메고 무기들을 집을 수 있는 대로 들고나왔다. 내가 무기를 들고 왔을 때는 마을 사람들도 저마다의 복장을 갖추고 무기를 장비한 채로 나왔는데 나무꾼을 업으로 삼고 있는 사람들은 나무를 할 때 쓰던 도끼를, 사냥꾼을 업으로 삼고 있는 사람들은 석궁이나 활 등을 메고 나왔는데 자신이 든 무기 외에도 남는 무기가 있는 사람들은 그것들을 꺼내 바닥에 내려놓았다. 나도 무기고에서 털어온 화살이나 활, 창 등을 바닥에 털어놓으며 아던을 바라봤다. 아던은 마을 사람들의 무장과 그들이 꺼내놓은 무기들을 훑어보더니 지시를 내렸다.

"활이나 석궁을 쏠 줄 아는 사람들은 모두 목책 위로!"

그러자 나를 포함한 자경단은 곧장 목책 위로 올라섰고 이어서 백여 명의 마을 사람들 중 스무 명 정도가 추가로 목책 위로 올라왔다. 아던 마을의 구성원은 과거 용병단원이었던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상당수가 전력이 되어줬다. 총합 서른여섯 명의 사람들이 둥근 목책에 넓게 퍼져 밖을 경계하기 시작하자 아던은 남은 사람들에게도 지시를 내렸다.

"나머지는 화살과 재블린을 모아 목책 위로 올린다!"

마을 사람들은 아던의 지시에 따라 화살과 재블린 등을 목책 쪽으로 옮기기 시작했다. 다들 이러한 상황에 익숙지 않은 것 같지만 아던의 지시에 맞춰 하나둘씩 준비가 되어갔고 나는 컨디션을 회복하기 위해 전념했다.

스트레칭으로 뻐근해진 몸을 풀고 눈을 감아 빨라진 마나의 흐름을 본래의 흐름대로 되돌렸다. 가까스로 컨디션을 돌려놓고 눈을 뜨자 어느새 사위는 쥐 죽은 듯 조용해져 옆에 있던 챈의 마른침 삼키는 소리가 크게 느껴질 정도였다.

묘한 긴장감 속에 모두 숲을 주시하던 중 멀리서부터 예의 그 비 오는 듯한 바스락거림이 들려왔다. 소리는 한곳에서 시작되어 사방으로 퍼졌고 사방에서 시작되어 점차 육안으로 수풀이 들썩거리는 게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고블린의 트렌드마크인 울음소리가 들려오며 녀석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키익.키익.

키이익!

키익?

녀석들은 목책을 밝히고 있는 횃불과 그 위에 선 사람들을 보며 당황했는지 수풀에서 더는 다가오지 않고 멈칫거렸다.

"단장님, 쏠까요?"

"아니, 아직이다. 녀석들이 포기하고 돌아갈 수도 있어."

말 그대로. 고블린들은 습격을 노렸겠지만, 우리가 방비하고 있는 모습에 포기할 수도 있었다. 몬스터는 아니지만, 야수를 예로 들면 보통의 야수들은 자신이 큰 피해를 볼 것 같다는 생각이 들면 포기하는 개체가 대부분이다. 야생에서 상처를 입으면서 사냥을 한다는 건 마지막 만찬을 즐기고 죽겠다는 것과 똑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몬스터의 흉성은 야수의 그것보다 더 거친 면이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비슷한 면이 많았다. 다만 저 고블린 무리가 전투를 포기할지 말지는 우두머리인 홉 고블린의 의사에 달렸다는 것이 달랐지만. 그리고 이 전투의 향방을 결정지을 홉 고블린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쿵쿵.

자신의 키만큼 길고 커다란 도끼를 든 2미터의 거구. 가슴에 난 기다란 흉터는 수년 전 보았던 그 홉 고블린이 틀림없었다. 녀석은 흉광어린 눈빛을 거세게 발하고 있었는데 습격이 실패해서 몹시 분한 눈치였다. 그나저나 기억 속에서는 180센치 정도로 아던과 비슷했던 것 같은데 그때보다 머리 하나는 더 커져 있었다.

키가 커진 만큼 덩치도 더 커진 홉 고블린은 그때보다 훨씬 강렬한 위압감을 풍기고 있었다. 수풀 뒤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 고블린들도 그 수가 가늠이 되질 않아 숨 막히는 긴장감이 점차 가중되고 모두의 이목이 홉 고블린에게 집중되었을 때 녀석이 돌연 도낏자루를 높이 들어 올렸다.

쿵!

그리고 그대로 바닥을 향해 도낏자루를 내려찍더니 고함을 내질렀다.

"우롸아아!"

키이이이익!

홉 고블린의 고함소리와 함께 고블린들이 소리를 지르며 수풀에서 뛰쳐나오기 시작했다. 어둠 속에서 횃불에 비쳐 보이는 탐욕에 미쳐 번들거리는 더러운 눈깔들을 보자 속이 부대꼈다.

'버러지 같은 놈들이 뒤질지도 모르고 자기들 묫자리로 뛰어오는구나. 그 주제도 모르고 부릅뜬 눈깔을 모조리 뽑아 씹어먹어 주마.'

분노와 증오는 잠시 접어두고 차갑게 시위를 당긴다.

"발사!"

아던의 지시에 아던 마을의 사람들도 저마다 각오를 다진 채 활시위를 놓았다. 작은 전쟁의 시작이었다.

파바박.파박.

캬악! 쿠뤡!

활이 쏘아지기 시작하자 뛰어오던 고블린들이 고꾸라지며 빠르게 시체의 산을 쌓아갔다.

'뭐지, 저놈?'

홉 고블린은 자신의 수하들이 픽픽 쓰러져 죽어가는데도 멀찌감치 떨어져 도낏자루만 움켜쥔 채 꼼짝도 하지 않고 서 있었다. 그저 흉흉한 안광만 빛내고 있을 뿐이었다. 나는 활시위를 당기며 녀석에게 조준했다가 이내 포기하고는 가까이서 뛰어오는 고블린 한 마리의 가슴팍에 화살을 날렸다.

'괜히 화살 낭비하지 말자. 목책 위에서 고블린 한 마리라도 더 줄여놔야 한다.'

화살통의 화살은 빠르게 비어가는데 고블린의 수는 좀처럼 줄어들지를 않는 느낌이다. 나는 재블린 하나를 들어 어깨를 한껏 뒤로 젖혔다. 그리고 어깨와 오른손에 마나를 집중해 그대로 투창했다. 목책 가까이 근접했던 고블린 두 마리가 한 번에 꿰뚫려 절명했지만, 상황은 점차 악화일로였다. 수풀 뒤에서 꾸역꾸역 나와대는 고블린들은 그 수가 얼마나 남은 건지 감이 잡히지 않았고 끝이 언제인지 모를 상황에 모두 심리적으로 또 육체적으로 지쳐가는 상황. 다만 위안이라면 목책 주변에 고블린들의 시체가 수북이 쌓여간다는 점이었고 행여나 하는 불안이라면 비어가는 화살통과 사체의 산을 딛고 뛰쳐나오는 고블린 무리의 기세가 꺾이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빌어먹을 고블린 녀석들, 아무리 지능이 떨어져도 그렇지. 죽음에 대한 공포도 없나?'

재차 시위를 당기는 와중에 뒤편에 서 있던 홉 고블린의 움직임이 감지되었다. 홉 고블린은 도낏자루를 높게 들어 올렸다.

쿵.

그리고 그대로 바닥을 내려찍으며 외쳤다.

"쿠왁쿠!"

홉 고블린의 외침과 동시에 고블린들의 행동 패턴이 바뀌기 시작했다. 바닥에 쌓여있는 동족의 시체를 주워들더니 그걸 방패 삼아 전진하기 시작한 것이다. 속으로 멍청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드디어 써먹는구나. 그래도 그동안 수를 많이 줄여놔서 다행이다. 언뜻 보기에도 백이 넘는 시체들이 쌓여있었고 우리는 지금까지 피해가 전무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생각도 잠시.

"크악! 내 눈!"

"아아아악!"

기어코 우리 쪽에서도 피해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마을의 목책이 그렇게 높지는 않던 터라 동족의 시체를 방패 삼아 사체의 산을 딛고 근접한 녀석들이 단검을 날려대고 마비침을 발사하는 등의 공격을 행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에잇!"

키이이익.

하나둘 부상자가 생기기 시작할 때 익숙한 목소리에 옆으로 자연스레 시선이 돌아갔다. 나는 화들짝 놀라서 소리쳤다.

"야! 거기서 뭐 해!"

어디서 구했는지 자경단 복장에 창과 방패로 무장한 메리가 목책 위에 올라온 것이었다.

"죽어! 죽엇! 이 못된 고블린들아!"

메리는 내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지 고블린을 향해 악을 쓰며 검을 휘둘렀다. 그런 메리를 보고 뒤편에서 대기하던 마을 사람들도 부상자들을 뒤로 빼내는 한편 부상자로 인해 생긴 목책의 빈자리를 채워나가며 도끼와 검 따위를 휘두르기 시작했다. 상황의 변화에 아던도 새롭게 지시를 내렸다.

"부상자는 뒤로 빠지고 무기를 들 수 있는 자는 모두 올라와!"

"다들 방패 들고 될 수 있으면 창을 들고 올라오는 녀석들을 찔러라!"

전장은 빠르게 상황이 급변해 이제는 난전이 되었다. 사방에서 고블린과 인간의 병장기들이 맞부딪치는 쇳소리와 병장기들이 살을 헤집고 들어가는 파육음, 그리고 그에 따라 들려오는 비명 소리들이 난무했다. 나는 난전을 뚫고 메리에게 다가갔다.

"야, 빨리 내려가!"

"죽엇! 죽어버려!!"

코앞에서 말하는데도 오로지 자신의 일에만 집중하는 메리의 어깨를 짚자 그제야 나를 바라보는 메리였다. 나는 목책을 넘어오는 고블린의 목을 베며 재차 말했다.

"어, 랑스?"

"얼른 내려가."

"아니. 지금은 한 사람이라도 더 도울 때야. 그리고 나도 싸울 수 있어."

메리는 자신이 들고 있던 창에 마나를 불어넣으며 의지가 가득 찬 눈으로 나를 바라보더니 올라오던 고블린을 향해 창을 내질렀다.

"죽엇!"

'오잉?'

이 녀석 좀 하잖아? 마나를 다뤄? 나는 챈보다 낫다고 생각하며 그래도 걱정이 되어서 메리의 옆을 지켰다. 그렇게 치열한 난전이 지속되던 중 홀로그램 창이 하나 떠올랐다.

[서브 퀘스트­ 고블린 부락 섬멸이 완료되었습니다.]

어느새 고블린 200마리가 잡힌 것이다. 그리고 이제는 더는 수풀을 헤치고 나오는 고블린은 존재치 않았다. 시체의 산을 올라 대치 중인 백 마리 남짓한 고블린과 홉 고블린. 아니, 홉 고블린 어디 갔어!

쾅!

"으아아악!"

"무슨 일이야!"

커다란 소란에 나도 아던도 굉음이 들린 곳으로 시선을 돌리자 무너진 목책에 깔린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그마저도 목책의 끝부분에 몸통이 관통당한 두 사람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죽은 것 같았다. 무너진 목책 옆에 있던 사람들은 경기를 일으키며 주저앉아 뒷걸음질 치면서 경악을 내뱉었다.

"홉 고블린, 홉 고블린이!"

가까이 다가온 고블린들을 처리하느라 멀찌감치 떨어져 있던 홉 고블린에겐 신경을 못 썼는데 그사이에 목책까지 다가온 홉 고블린이 마나를 두른 도끼를 휘둘러 목책을 박살 낸 것이다.

"크라쿠라!"

홉 고블린의 위용은 대단했다. 앞에 단지 홉이라는 말이 붙었다는 이유로 이토록 고블린과 동떨어질 수 있는 건가. 피부가 녹색이라는 것을 제외하고는 울음소리까지도 고블린과는 달랐다. 거대한 도끼와 거구의 몸, 그리고 살기가 넘치는 흉흉한 눈빛에 압도되어 버린 마을 사람들은 주저앉아버렸고 그중에는 오금을 지리고 있는 자들도 여럿이었다.

"흐압!"

쾅!

"쿠악!"

아던이 늑대처럼 뛰어올라 마나를 끌어올리며 홉 고블린에게 검을 휘두르자 홉 고블린도 마주 마나를 끌어올리며 도끼를 들어 올렸다.

"홉 고블린은 내가 맡는다! 다른 사람들은 주변의 고블린들을 처리해!"

아던이 홉 고블린의 도끼에 검을 맞댄 채 소리치자 일순간 소강상태가 되었던 전투가 다시 시작되었다. 무너진 목책으로 밀고 들어오는 고블린들과 시체를 밟고 목책을 타고 넘어오는 고블린들 사방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고블린들에 마을은 순식간에 아비규환이 되었다. 자경단원들과 용병 짬밥을 먹었던 사람들이 나름 잘 막아내고 있었지만, 수적인 열세에 이미 많이 지쳐있었고 무기에 익숙지 않은 사람들은 죽음을 모르고 달려드는 고블린들에게 속절없이 무너져 사망자들이 속출하고 있었다.

그런 아비규환 속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뭔지 어떤 행동이 가장 효율적인지 고심한다.

'아던을 도와 홉 고블린을 처치해야 할까? 아니면 자리를 지키고 고블린들을 마저 처치해야 할까?'

어느 하나 중요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꺄악!"

"메리!"

"랑스…!"

허벅지에 고블린의 단검이 찔려 주저앉는 메리의 앞을 막아서며 사선으로 고블린의 목을 베어낸다. 주저앉아서도 창대를 꽉 움켜쥐고 있는 메리를 들쳐메고는 가장 가까운 집으로 향했다. 다른 사람들이 죽는 것에는 감정이 마비된 것처럼 별다른 화가 나지 않았지만, 메리가 단검에 찔리고 고통의 비명을 지르는 순간 어느 것이 효율적인지에 관한 생각은 제쳐두고 오로지 메리의 안위와 고블린들에 대한 분노만이 타올랐다.

"으아악!"

문을 거칠게 열자 안에서 젊은 부인과 아이들이 비명을 질렀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메리를 집안에 살포시 내려놓았다.

"메리, 절대 나오지 말고 여기 있어."

쾅!

메리의 대답도 듣지 않고 곧장 문을 닫고 다시 마을의 외곽으로 향했다.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에 전황은 더욱 불리해져 대부분의 마을 사람들이 싸늘한 주검이 되어 땅에 엎드려 있었고 열댓 명의 사람들만이 서로 등을 맞댄 채 버티고 있었지만, 그조차 매우 힘겨워 보였다.

그리고 자경단장인 아던도 어느새 왼쪽 팔이 사라진 채 한 손으로 홉 고블린과 사투를 벌이고 있었는데 당연하게도 홉 고블린은 지친 기색조차 보이지 않았다.

'마력 폭주.'

하루 동안 피로가 쌓여서 이미 한계치에 다다른 육신에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바닥에서부터 올라오는 강렬한 감정이 원동력이 되어 전신에 힘을 불어넣는다. 그리고 미처 확인해보지 못했던 실험을 시작했다. 마력 폭주로 인해 몸 전체에 퍼져있던 마나가 증폭되다 못해 현재 육체가 감당할 수 없는 포화상태에 이르고 그렇게 증폭된 마나가 본래 육신이 낼 수 있는 한계를 넘어 신체적 능력을 극대화한다. 이미 피로가 쌓여있던 몸은 작은 경련이 수시로 일 정도였는데 여기에 가장 많은 마나가 응축되어서 모여있던 심장의 마나를 모두 강제로 개방해 심장에서 끄집어내고 그 마나를 이미 포화상태가 된 전신에 억지로 쑤셔 넣었다.

뜨겁게 타오르며 폭주하는 분노의 마나에 심장에서 쏟아져나온 마나가 기름을 붓자 전신의 혈관이 새파랗게 돋아나며 온몸이 터질 듯 붉게 달아오르며 전신에서 뜨거운 열기와 함께 수증기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몸이 녹아내리는 듯한 열기에 정신이 아찔해지며 눈을 뜨기가 힘들었지만 억지로 눈을 부릅뜬다. 전신에서는 상처를 치료할 때와는 비교도 못할 만큼의 고통이 쏟아지고 있었는데 비명조차 나오지 않을 정도였다. 그에 소리 없는 아우성을 지르며 정신을 붙잡으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머릿속은 이미 새하얗게 되어 사고란 걸 할 수 없는 지경에 일러 있었다.

다만 내 고개가 본능적으로 홉 고블린을 향해 돌아간 순간 내 손에는 어느새 목과 분리된 홉 고블린의 머리가 들려있었다. 그 이후로 고개가 휙휙 돌아가며 좁아진 시야를 녹색의 핏물이 점 칠했지만 내 머릿속은 어느 순간부터 점등된 것, 마냥 하얗게 검게 껌뻑이다가 이내 픽하는 소리와 함께 티비가 꺼지듯 꺼져버렸다.

"랑ㅅ…!"

마지막에 무슨 소리가 들린 것 같지만 나에게 닿지는 못했다. 내 의식은 거기서 끊어졌다.

모든 것은 부지불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갑자기 홉 고블린 옆에 나타난 랑스의 손에는 어느새 목이 잘린 홉 고블린의 머리가 머리털이 잡힌 채 들려있었고 목 위에 있어야 할 것이 사라진 홉 고블린의 육신은 머리가 없어진 줄도 모르는지 잠시간 서 있다가 피 분수와 함께 허물어졌다.

그 앞에서 홉 고블린의 피에 흠뻑 젖은 아던은 눈을 질끈 감으며 손등으로 눈가에 튄 피를 훔쳐냈다. 피를 훔쳐내려 움직이는 아던의 팔은 전율로 인해 덜덜 떨리고 있었는데 아던을 전율케 한 비현실적인 상황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저 바람이 분 것 같았다. 다만 그 바람이 지난 곳에는 비릿한 피 냄새가 함께였다. 역한 피바람이 전장을 휘돌고 나자 그 광경을 지켜본, 아니 정확하게는 피바람이 지나간 후의 결과를 지켜본 사람들은 경악을 금치 못하고 입을 떡하니 벌리고 있었다.

털썩. 데구르르.

아던이 눈가의 피를 닦아내었을 때 그곳에 목이 남아있는 고블린은 단 한 마리도 존재하지 않았고 바닥을 구르고 있는 고블린들의 머리는 자신이 죽었는지조차 모르고 그저 눈을 홉 뜨고 있을 뿐이었다.

"저, 저…!"

아던은 숨 막히는 적막 속에 홉 고블린에 의해 무너진 목책 바깥을 향해 손가락질하며 말을 잇지 못하는 챈을 보고 챈의 떨리는 시선과 채 다 펴지도 못한 손가락을 따라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털썩. 털썩.

투두두두둑.

고블린의 시체가 쌓아 올린 녹색의 산. 그 위에 그리고 그 뒤로 쭉 이어지던 고블린의 행렬은 도미노가 쓰러지듯 차례로 무너져내리고 있었다.

아던은 산을 타고 데굴데굴 굴러 내려와 자신의 발치에 멈춰선 고블린의 머리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머리를 뒤흔들고는 남은 마나를 쥐어짜내 목책 밖으로 향했다.

쾅!

푸쉬이이.

"랑스!"

아던이 굉음이 들린 곳으로 향하자 그곳에는 거대한 구멍이 뚫려있는 나무 한 그루와 함께 몸통이 사라져버린 고블린 한 마리의 사체가 나무 옆에 누워있었고 그 앞에는 어두운 밤에도 불구하고 새하얗게 선명한 수증기를 내뿜고 있는 랑스가 우두커니 서 있었다.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란 말인가!'

"랑스!!"

아던은 차마 다가갈 엄두가 나지 않아 다시 한번 랑스를 불렀지만, 랑스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고 랑스의 몸에서 흘러나오던 수증기가 점차 줄어들자 랑스의 몸이 천천히 앞으로 쓰러졌다. 그제야 아던은 고블린들의 시체를 헤집으며 랑스에게 뛰어갔다.

"랑스,앗뜨…!"

'몸이 엄청나게 뜨겁다!'

손을 가져다 댈 수 없을 정도로 뜨거운 열기에 랑스를 부축한 아던은 급한 대로 자신의 수통을 꺼내 랑스의 몸에 뿌렸다.

치이이익.

'수통 하나론 어림도 없겠어.'

뜨겁게 달군 쇠를 찬물에 집어넣은 것 같이 요란한 소리가 났지만 열기는 식을 줄 몰랐고 아던은 마을을 향해 크게 소리쳤다.

"빨리 물 가져와!"

"예?"

아던은 재차 소리를 치려다 허망함에 입을 꾹 다물고 북받치는 감정을 억눌렀다. 랑스의 육체가 실시간으로 부서져 내리기 시작한 것이다.

"아빠!"

아던의 외침을 듣고 단검에 찔려 제대로 걷기도 힘들 몸으로 목책 밖으로 뛰어나온 메리가 아던을 부르고 그런 메리를 보자 억눌렀던 감정이 터져버린 아던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눈물을 흘렸다.

"아빠, 랑스는요?"

아던의 눈물에 불길함을 느낀 메리가 재차 물었지만 아던은 차마 입을 열지 못했다. 뒤늦게 아던의 뒤에 쓰러져 검게 그을린 무언가를 본 순간 메리는 자신이 본 것을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미친 듯이 저었다.

"아, 아니야…. 아니라고! 아니야, 제발 아니라고 말해줘!"

메리는 아던을 지나쳐 검게 그을린 랑스를 끌어안고 오열했다.

"랑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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