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그리는 마법사 - 193회
“지압을 열 번이나 해야 하면 전체적인 기간은 얼마나 걸리나?”
“지압은 일주일에 두 번 합니다. 5주가 소요됩니다.”
“오늘 한 번 한다고 치면 거의 한 달 남짓 걸리는군. 아, 지압 한 번 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어느 정도인가?”
실제로 마나로 치유하는 시간은 1분도 되지 않겠지만 정성껏 지압하는 모습을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
“10분 정도 걸립니다.”
“뭐? 고작 10분? 지압원 가도 기본 1시간 아닌가? 10분 지압해서 무슨 효과가 있어?”
예상했던 반응이었다.
강수가 진지한 표정을 짓고 말했다.
“제가 시술하는 지압은 지압원에서 하는 일반적인 지압이 아니고 저의 생명 에너지를 끌어내서 시술하는 지압입니다. 제 생명 에너지를 소모해서 어르신을 치료하는 것이기 때문에 한 번에 오랜 시간 지압할 수 없는 것입니다.”
생명 에너지라는 말에 배성제가 가소롭다는 표정을 지었고, 한편으로는 흥미를 보였다.
“흠, 자네의 생명 에너지를 쓴다고? 생명 에너지를 쓰면 자네의 생명이 줄어드는 것인가?”
“당연히 제 수명에 영향을 미칩니다. 그래서 10분밖에 시술하지 못하는 것이고, 시술하면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3, 4일 정도 충분한 휴식 시간을 갖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나 함부로 시술하지 않습니다.”
강수는 아무나 함부로 시술하지 않는다는 말을 한 단어씩 또박또박 강조해서 말했다.
뭔가 그럴듯한 얘기였지만 믿기지는 않았다. 문득 배성제는 박 상무가 필드에서 호쾌하게 스윙하던 모습이 떠올랐다. 그때 박 상무는 허리가 정상처럼 좋아졌다고 했다.
‘가만, 박 상무도 재산의 절반을 기부한 것인가?’
배성제가 슬쩍 물어보았다.
“참, 박 상무가 자네에게 지압 받고 허리가 정상이 됐다고 하더군. 박 상무도 재산의 절반을 기부했는가?”
“제가 기부 사실을 확인하지는 않았지만, 박 선생님이 기부하겠다고 약속했고, 약속을 어길 분이 아니기 때문에 기부했을 겁니다.”
“기부 사실을 확인하지는 않아? 자네도 참 특이한 사람이군. 그럼 지압을 하러 가지.”
배성제가 자리에서 일어나 매점을 나섰고, 강수가 그의 뒤를 따라갔다.
VIP 병실에서 대기하고 있던 30대의 남자요양사가 소파에서 일어나 배성제와 함께 실내로 들어오는 강수를 바라본 후 배성제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분은 누구신지요?”
배성제가 귀찮다는 듯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자네 저렇게 누워만 계시는 내 아버지에게 전신 지압해 준 적 있나?”
“네? 그, 그건 제 업무가 아니라서.... 저는 욕창이 생기지 않게 자세만 바꿔 드리고 있습니다.”
“이 젊은이는 아버지 전신을 지압해 줄 전문 스포츠 지압사일세. 자네가 신경 쓸 것 없어.”
“아, 네, 네.”
배성제는 병실로 오는 중에 강수의 방문으로 인해 귀찮은 일이 생길 여지를 없애려고 강수와 말을 맞췄다.
남자요양사와 묵례로 인사한 강수가 배종태가 누워 있는 병상으로 다가갔다.
병상 머리맡에는 뇌파, 심장 박동 등을 표시해주는 의료기기가 놓여 있었고, 삐-, 삐- 하는 일정한 신호음이 의료기기에서 나고 있었다. 병상에는 얼굴에 주름이 깊은 노인이 누워 있었다,
‘일단 적당하게 치료하고, 기부 여부를 확인하자.’
배종태 회장이 정상으로 회복되어도 배성제는 기부하지 않을 사람이었다. 하지만 강수가 순순히 배성제를 따라나선 이유는 재산의 절반을 기부해야 할 사람은 혼수상태에 있는 배종태 회장이기 때문이다. 또한, 자기의 능력을 확인시켜주어야 기부에 대해서 논의할 수 있을 것이다.
“배 전무님, 커튼 좀 쳐 주시죠.”
“알았네.”
배성제가 커튼을 쳐서 실내를 병상과 차단했다.
강수는 의료기기와 연결된 선이 떨어지지 않게 배종태 회장의 몸을 뒤집었다.
주하의 외할아버지에게 지압했던 머리 혈자리를 떠올린 강수는 머리 정중앙에 위치한 백회혈부터 아래 목덜미 부위의 아문혈까지 마사지하듯 가볍게 지압했다.
머리 지압을 끝낸 강수는 등에 위치한 복원, 풍문, 폐유, 궐음유, 심유, 격유 등의 혈도를 천천히 정성껏 지압했다. 강수가 지압하는 모습을 지켜보던 배성제는 반복되는 단순한 동작이 지루했는지 스마트폰을 꺼내 인터넷을 실행해 기사를 읽었다.
약 9분 남짓 배종태의 머리와 등을 두 번 반복해서 지압한 강수는 치유마법을 캐스팅하기 위해 다시 머리 지압을 시작했다.
강수는 백회혈을 누르며 입안에서 작은 목소리로 치유마법을 캐스팅했다.
“치유.”
강수의 손으로 푸르스름한 치유의 마나가 모였다. 치유의 마나는 배종태의 머리로 스며들기 시작했다. 약 1분 후 배종태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고, 얼굴 근육이 실룩거렸다. 치유는 1분에 불과했지만 마나는 삼분지 일이나 빠져나갔다. 강수가 손을 떼고 배종태의 상태를 지켜봤다. 파르르 떨리던 배종태의 눈꺼풀이 힘겹게 올라가고 배종태가 눈을 떴다. 그의 눈빛은 초점을 잃은 것 같이 공허해 보였다.
배종태가 눈을 몇 번 껌뻑이더니 이번에는 입술이 파르르 떨리며 움찔거렸다.
다른 움직임은 없었다.
강수가 스마트폰을 보고 있는 배성제의 팔을 톡톡 건드렸다.
배성제가 고개를 들자 강수가 눈짓으로 배종태를 가리켰다.
병상의 배종태에게 시선을 돌린 배성제가 매우 놀라 자기도 모르게 헛숨을 들이켰고, 손에 쥐고 있던 스마트폰이 바닥에 떨어져 뒹굴었다.
“아버지, 접니다. 성제예요. 절 알아보시겠어요?”
배성제가 배종태의 손을 잡고 흔들었지만, 배종태는 눈을 껌뻑이며 입술을 실룩일 뿐 다른 반응은 보이지 못했다.
약간의 소란에 무슨 일이 벌어진 줄 알고 남자요양사가 커튼 사이로 고개를 내밀고 상황을 살폈다. 의료기기의 신호는 정상이었다. 배종태가 눈을 뜬 모습은 배성제의 등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별일 없다고 판단한 남자요양사가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잠시 그 자리에 서서 두 부자를 지켜보던 강수가 조용히 밖으로 나갔다. 자기가 할 일은 끝났다. 배종태가 눈 뜬 사실이 곧 알려질 테고 의료진이 몰려와 어수선해질 것이다.
복도로 나온 강수는 엘리베이터 앞으로 가 버튼을 눌렀다.
땡!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강수가 엘리베이터에 올라타려는데 복도에서 고함이 들렸다.
“이보게. 잠깐!”
배성제가 복도에서 뛰어오며 강수를 불렀다. 강수 앞으로 단숨에 달려온 배성제는 격정에 휩싸여 기이한 열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그냥 가면 어떡하나? 얘기 좀 하세.”
“조금 답답한데 밖에서 얘기하시죠?”
“그러지.”
두 사람은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배성제의 놀라움은 컸다. 고작 10분 남짓 지압으로 아버지가 눈을 뜨고 얼굴 근육이 움직였다. 이것이 절묘하게 맞아떨어진 우연인지 아니면 지압으로 인한 일시적인 변화인지 아니면 지압사가 생명 에너지를 사용해서 아버지를 치료한 것인지 혼란스러웠다. 분명한 점은 지압사가 지압한 후에 아버지가 눈을 떴다는 사실이다. 이제 다음에 시술하는 지압의 결과를 보면 우연인지 아닌지 판가름 날 것이다.
문제는 지압의 효과가 나타난 이상 지압의 보수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는 점이었다. 정말로 아버지가 정상으로 회복된다면 직장인이 만질 수 없는 금전적인 보상을 할 수 있다. 하지만 지압사는 조금 전에 황당한 제안을 했다.
‘아버지 재산의 절반을 달라고 했는데.... 아니, 사회복지법인에 기부하라고 했지.’
말이 되지 않는 제안이었다.
아버지 재산은 대충 계산해도 6,000억 원이 넘는다. 자기가 모르는 재산도 적지 않을 것이다.
‘생명 에너지고 뭐고 간에 3,000억 원을 치료비로 달라는 게 말이 돼?’
하지만 죽음에 직면한 아버지의 심정을 누가 헤아릴 수 있겠는가? 지압사가 한 말의 의향을 물었다가 아버지가 여생을 살아보겠다고 당신 재산의 절반을 기부하는 대형사고가 터질 수도 있다. 어쨌든 그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보수는 적당한 선에서 타협해야겠다고 결론을 내렸다.
‘최악의 경우 의식만 돌아와서 아버지가 물려주기로 한 유일시스텍의 지분만 받으면 된다. 더 바랄 것도 없어.’
땡!
“1층입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배성제는 지압의 대가에 대해 나름 방향성을 정리했다.
병동 밖으로 나온 두 사람은 병동 옆에 조성된 화단 앞 벤치로 갔다. 3월 말의 밤기운은 서늘했다. 강수는 시원한 공기를 깊게 들이켰다.
배성제가 감격에 겨운 목소리로 운을 뗐다.
“아버지가 눈을 뜬 모습을 보고 내가 얼마나 놀라고 기뻤는지 아나? 내 심장이 멎는 줄 알았네.”
“네. 결과가 좋아서 다행입니다.”
“이제 보니 이름도 모르고 있었군. 나는 배성제일세.”
“유일글로벌 배성제 전무님이라고 전해 들었습니다. 이강수입니다.”
“내 아들하고 연배가 비슷한 것 같으니 이 군이라고 부르겠네. 이 군, 다음 지압은 언제 할 계획인가?”
“삼일 뒤면 아무 때나 괜찮습니다.
“삼일 뒤면 토요일이군. 토요일 이맘때가 좋겠네. 어떤가?”
“저는 괜찮습니다. 한데 어르신이 혼수상태에서 깨어났으니 병원 의료진이 정밀검사를 할 텐데 제가 지압할 시간이 날까요?”
“아마도 별별 검사를 다 하겠지. 하지만 토요일, 일요일에는 특별한 일이 있지 않으면 따로 검사하지 않으니까 괜찮다네.”
“알겠습니다. 배 전무님, 어르신이 깨어났으니 다시 짚고 넘어갈 것이 있습니다.”
“응? 뭔가?”
“제가 좀 전에 건강이 회복되면 어르신 재산의 절반을 기부해야 한다고 말씀드렸죠?”
배성제가 움찔하며 미간을 찡그렸다.
“그, 그렇지.”
“어르신의 의식이 돌아오고, 의사소통 할 수 있으면 저의 제안에 대한 어르신의 의사를 알려주십시오. 만약 어르신이 재산의 절반을 기부하지 않으면 저도 지압을 할 수는 없습니다. 제 생명 에너지를 함부로 낭비할 수는 없으니까요.”
“그건....”
너무 황당해서 말문이 막혔다.
배성제의 표정이 살짝 어두워졌다. 목구멍에서 튀어나오려는 욕을 꾹 참으며 폭발할 것 같은 감정을 최대한 숨기고 대답했다.
“이 군. 아버님 재산의 절반을 기부하라는 것은 비상식적이고 비현실적이지 않나? 더구나 사회복지법인에 기부하면 자네가 얻는 이득도 없지 않은가? 생명 에너지까지 소비해 가며 지압을 하는 것인데 자네가 보상을 받아야지 엉뚱한 복지재단에 기부한들 무슨 소용인가? 그러지 말고 이 군이 떵떵거리며 살 수 있도록 금전적으로 충분히 보상하겠네. 그렇게 하세.”
유일 그룹은 국내 30대 그룹의 하나다. 기사에 의하면 배종태 회장의 재산이 6,000천 억 원이 넘는다고 했다. 얼마 남지 않은 삶을 위해 재산의 절반을 포기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무엇이 어찌 됐건 배종태 회장 앞에는 두 개의 선택지가 놓여 있다. 어떤 것을 선택하든 순전히 본인이 결정할 몫이다.
“제가 돈을 받으면 불법 의료 행위가 됩니다. 하지만 피로나 뭉친 근육을 풀어주는 지압은 누구나 할 수 있고 법적으로 저촉되지 않죠. 제가 돈을 받지 않는 이유입니다. 그리고 제는 생명 에너지를 사용해 지압합니다. 그것의 의미에 대해서는 굳이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재산의 절반을 기꺼이 사회에 환원할 수 있는 마인드를 가진 분이라면 저 역시 생명 에너지의 사용을 감수할 수 있습니다.”
“으음.”
배성제가 짤막한 신음을 토하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잠시 후 배성제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딱딱했고 차가웠다.
“자네의 의사가 정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아버님께 자네 제안을 들려주고, 어떻게 할지 연락 하겠네.”
“알겠습니다. 그럼 이만.”
강수가 묵례하고 차가 서 있는 주차장을 향해 미련 없이 걸어갔다.
배성제가 어둠속으로 멀어지는 강수를 냉랭한 표정으로 노려보았다.
‘뭐 저런 정신 나간 놈이 다 있지? 재산의 절반을 기부하라니 완전히 미친 새끼 아닌가? 너 스스로 굴러들어온 복을 찼으니 날 탓하지 마라.’
아버지가 병상에서 일어나기만 하면 20억 원 선에서 보상하려고 마음먹었던 배성제는 보상은 포기하고 기부하는 쪽으로 결심을 굳혔다. 물론 아버지에게 기부 여부를 물어볼 필요는 없었다. 사회복지법인에 하라는 기부는 아버지의 회복 상태에 따라 이삼천만 원 정도면 충분할 것이다.
하인섭 박사는 아버지의 뇌가 손상되었고, 손상된 뇌의 정상적인 회복은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배성제는 아버지의 건강이 정상으로 회복할 것이라고는 감히 상상도 하지 않았다. 그것은 상식이었고, 현대 최첨단 의학도 어찌하지 못하는 진리이기도 했다.
남자요양사가 아버지의 변화를 언제 알아차릴지 모르지만, 아무리 늦어도 내일 오전 정기 진료 때는 발견될 것이다.
‘한바탕 소동이 일어날 테고 온갖 검사를 하겠지? 한데 뭘 어떻게 했기에 아버지가 깨어났을까? 정말 궁금하군. 검사하면 적어도 아버지가 왜 깨어났는지 그 원인은 밝혀낼 수 있겠지.’
이강수라는 자의 지압에 의해 아버지에게 어떤 변화가 생겼는지 궁금했다. 지금 당장 아버지의 상태를 의료진에게 알리고, 정밀검사해서 변화의 원인을 밝히고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의료진이나 그 누군가가 이강수의 방문과 아버지의 변화를 연관 지으면 향후 무슨 일이 벌어질지 예측 불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