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림 그리는 마법사-188화 (188/197)

그림 그리는 마법사 - 188회

뽀롱뽀롱!

꾸우꾹, 꾸욱!

산새 소리가 정적에 싸여 있는 산중에서 울려 퍼졌다.

얼어붙은 대지가 따스한 양광에 녹았고 겨우 내내 찬바람에 흔들렸던 나목에서 파릇파릇 새싹이 돋아났다.

어느덧 3월이 되었다.

북한산 강수의 수련 장소.

해는 이미 중천에 솟아올라 있었다. 바위에 앉아 마나수련을 하고 있던 강수가 마나회로 수련을 끝내고 눈을 떴다.

‘음, 마나하트는 꿈쩍하지 않는구나.’

마나하트가 3서클에서 4서클로 진화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수년 동안 마나회로 수련이 필요하다. 한데 이전보다 수련을 적게 해서 그런지 마나하트는 변화의 기미조차 없었다. 4서클 마나하트로 진화하면 좋겠지만 현시점에서 무리하게 수련 시간을 늘리고 싶지는 않았다.

‘언젠가는 4서클로 발전하겠지.’

자랄인이 지구로 차원 이동해 올 것 같지 않아서 마나하트 성장에 전력을 쏟을 필요가 없었다.

강수는 신록만큼이나 상쾌한 기분으로 산 아래 풍경에 시선을 주었다.

산 아래는 산뜻한 초록의 빛깔로 물들고 있었다.

‘꽤 추운 겨울이었는데 이제 봄기운이 완연하구나.’

자리에서 일어난 강수가 팔을 머리 위로 쭉 펴고 허리를 비틀며 가볍게 몸을 풀었다.

드디어 내일 홍콩 컨벤션 센터에서 프리뷰 전시가 열린다. 홍콩 크리스티 경매에 신경 쓰지 않으려고 해도 경매 결과가 궁금한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한주 뒤면 홍콩에서 크리스티 경매가 열리는구나. 고한슬 씨가 졸업반 아이들 낙찰가는 넘을 거라고 했는데 정말 그렇게 될까?’

강수는 눈물, 카카오나무의 요정들, 커피 열매 따는 소녀가 졸업반 아이들 낙찰가만 넘어도 성공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자기 그림이 아무리 좋아도 자기는 해외에서 무명 미술가에 불과하다. 자기 작품이 뛰어나다며 고한슬이 낙관적으로 얘기했지만, 강수는 확신할 수 없었다.

뉴욕 전시 작품은 차질없이 준비하고 있었다.

강수는 2월부터 8월까지 한 달 평균 5점 완성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계획대로 그리면 80호 내외의 작품 35점을 그릴 수 있다. 주하와 결혼식 올릴 예정인 4월이 변수지만, 한 달 평균 5점은 여유 있게 잡은 개수라 목표한 양을 채우는데 어렵지 않을 것이다.

지금까지 한주에 한 점씩 계획대로 6점을 완성했고, 구상해 놓은 스케치는 12개다. 남은 12개의 스케치를 전부 그리면 18점의 작품을 완성하는 셈이다.

‘나머지는 17점인데....’

완성한 작품 6점과 구상해 놓은 스케치 12개의 캔버스 사이즈는 50호에서 80호 사이다. 캔버스 사이즈를 키우면 제작할 수 있는 작품이 줄어든다. 어떤 작품을 구상하면 그 작품에 가장 적합한 크기의 캔버스를 선택해야 한다. 즉, 구상 단계에서 캔버스 사이즈를 염두에 둬야 한다.

뉴욕 전시 출품 작품 수는 20점만 넘으면 되기 때문에 강수는 애초의 계획과 다르게 캔버스 사이즈 키우는 것을 고려하고 있었다. 현재 구상하고 있는 작품은 거대한 도시 문명 속에서 삶을 영유하는 인간 군상의 파노라마였다. 지하철, 아파트, 대형마트 등인데 한 작품에 수백 명의 도시인이 등장한다.

지하철은 3개의 캔버스로 구상했다. 스크린도어 앞에 길게 끝없이 줄 서 있는 수백 명의 사람들, 스크린도어가 열리고 승강장으로 쏟아져 나오는 수많은 승객과 줄 서 있는 사람으로 한 치의 틈도 없이 빽빽하게 메워진 승강장, 새로운 사람들이 길게 줄 선 승강장.

하늘로 솟아오른 수많은 아파트와 그 안에서 사는 사람을 그릴 아파트와 넓은 마트에서 물건 사는 사람으로 빽빽한 대형마트도 3개의 캔버스로 제작할 계획이었다.

지하철의 인간 군상, 대형마트의 인간 군상, 수십 개의 고층 아파트와 그 속의 인간 군상을 화폭에 담으려면 각각의 정사각형 캔버스가 100호는 돼야 했다. 결국 변형 100호짜리 9점을 제작하는 셈이었다. 작업 시간이 적지 않게 걸릴 것이다.

산 아래 초록의 풍경에서 시선을 거둔 강수는 배낭을 챙겨 어깨에 메고 하산하기 시작했다.

우웅! 우웅!

산에서 중간쯤 내려왔을 때 스마트폰이 진동했다.

발신자는 서혁중이었다.

‘땅이 나왔나?’

서혁중의 사촌 형이 소개한 땅을 서혁중과 두 번 보러 갔었다. 두 개 다 위치나 주변 환경, 평수가 맞지 않아 구매하지 않았다.

“혁중아, 무슨 일이냐?”

[아, 이제 연결됐네요. 선배님, 지금 어디세요?]

“운동하고 북한산에서 내려가는 중이야.”

[잘됐네요. 제가 사촌 형하고 작업실 부지 보고 왔는데 이번엔 괜찮은데요. 지금 보러 갈래요?]

“정말 괜찮아? 주변에 단란주점 같은 이상한 거 없어?”

[네. 이번엔 정말 그런 거 없어요. 산자락 아래 단독주택이거든요. 게다가 평수가 200평이 넘어요. 집주인이 가격을 세게 불러서 아직 팔리지 않았는데 건축업자가 눈독 들이고 있다고 합니다.]

“산자락 아래? 알았다. 보러 갈 테니까 주소 톡으로 보내라.”

[네, 주소 보내고 저는 택시 타고 가겠습니다.]

1분도 지나지 않아 서혁중이 주소를 보냈다. 강수는 지도 앱에 서혁중이 보낸 주소를 써넣고 검색했다. 주소의 위치는 4.19 탑 공원 인근이었다.

‘택시 타고 출발한다고 했으니까 빨리 가면 혁중이와 대충 시간이 맞겠구나.’

강수는 서둘러 산을 내려가 지도 앱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달려갔다.

4.19 탑 공원 주변은 주로 단독주택이 자리했고 가끔 빌라가 있는 조용한 주택가다. 강수는 4.19 탑 공원을 지나 앱이 가리키는 대로 경사진 골목길로 올라갔다. 몇 번 골목길을 돌아 올라가서야 주택가의 마지막 집이자 목적지인 산자락 아래 있는 매물에 도착했다. 골목길은 단독주택 옆으로 이어져 산에 올라갈 수 있었다.

오랜 세월의 흔적이 남아 있는 집은 낡고 허름했다. 나뭇가지로 엮은 낮은 울타리가 담을 대신했고, 넓은 텃밭이 집 뒤에 펼쳐져 있었다.

강수는 울타리 옆으로 난 산길을 올라가 단독주택을 전체적으로 살펴보았다. 산자락에 인접한 마지막 집이라 전망이 좋았고 평수도 적당했다.

‘이 정도 평수면 작업실 짓고, 집 지어도 부모님이 소일거리로 텃밭 일굴 땅은 충분하겠다. 여기면 어머니, 아버지도 싫다고 못 하시겠지?’

얼마에 내놓았는지 몰라도 모든 것이 마음에 쏙 들었다.

부모님을 모시고 살 생각에 강수 입가에 미소가 절로 걸렸다.

‘비싸게 내놓아서 건축업자가 안 샀다고 했는데 덕분에 내가 살 기회가 온 셈이구나. 다행이다.’

강수는 얼마가 됐든 집을 구매하기로 마음먹었다.

‘택시네.’

저 아래 골목길 사이에서 택시가 달려오고 있었다. 아마도 서혁중이 타고 있으리라.

강수는 아래로 내려갔다.

예상대로 택시에서 서혁중이 내렸다.

“선배님이 먼저 와 있었네요? 이 주택인데 작업실 부지로 어떤가요?”

“위로 올라가서 둘러봤는데 평수도 넉넉하고 위치도 마음에 든다. 집값이 얼마냐?”

“그게... 좀 비쌉니다. 처음엔 너무 비싸서 말씀드리지 않으려고 했는데 혹시 몰라서 연락한 겁니다.”

강수가 피식 실소했다.

“그래서 얼마나 하는데?”

“평수가 235평인데 자그마치 25억 원이랍니다. 너무 비싸죠?”

“235평에 25억? 허, 비싸긴 하다.”

“그렇죠? 위치가 좋긴 한데 25억은 사촌 형도 좀 비싼 편이라고 했어요.”

그전이라면 생각도 못 할 거금이었지만, 작년에 번 돈이 있어서 지금은 구매할 여력이 충분했다.

“혁중아, 사촌 형님에게 연락해서 내가 살 테니 집주인하고 계약 날짜 잡으라고 해라.”

“네? 25억이나 하는데 이걸 산다고요?”

“북한산 산자락 아래 235평이나 되는 땅을 언제 또 구하겠냐? 마침 작년에 번 돈이 있어서 부담되지 않으니까 사촌 형님에게 연락해라.”

서혁중이 허름한 단독주택을 바라보며 안타까운 표정으로 입맛을 다셨다.

“쩝! 선배님이 사겠다면 연락해야죠.”

서혁중이 스마트폰을 꺼내 전화했다.

“형님, 접니다.... 지금 선배랑 매물 살펴봤는데요 땅이 마음에 든다고 구매하겠답니다.... 선배가 근처에서 등산하고 내려오는 길이라 바로 확인할 수 있었거든요. 하여튼 집주인하고 날짜 잡아서 연락해주세요.... 네, 네. 알겠습니다. 들어가세요.”

스마트폰을 주머니에 넣은 서혁중이 말했다.

“들었죠? 날짜 잡아서 바로 연락한다고 합니다.”

“수고했다. 내려가자.”

“네.”

강수와 서혁중은 따스한 햇볕이 비추고 있는 한낮의 조용한 골목길을 내려가기 시작했

다.

*

3월 11일.

크리스티 홍콩경매에 앞서 프리뷰 전시가 홍콩 컨벤션 전시 센터에서 개최되었다.

크리스티는 전 세계에서 거물급 컬렉터와 미술관장급 주요 인사가 찾아오는 2022 아트바젤 홍콩의 개최 시기에 맞춰 홍콩 경매를 운영한다. 아트바젤 홍콩이 열리는 이 기간에는 크리스티뿐만 아니라 다양한 위성 아트페어와 개인전이 동시다발적으로 열리는 홍콩 예술 축제 기간이기도 하다.

크리스티 프리뷰 전시장은 많은 남녀 관람객들이 몰려와 전시 작품을 감상하고 있었다. 호기심이나 그림이 좋아 찾아온 일반 관람객도 있고, 경매에 참여해 마음에 드는 작품을 구매하려는 컬렉터도 있다. 그들은 진지한 표정으로 전시 작품을 하나하나 살펴보고 있었다.

전시장 입구에 세련된 디자인의 원피스를 입은 우아한 모습의 중년 여인이 들어섰다. 우아한 옷차림에 미모가 뛰어난 중년 여인은 밍우옌이었다.

작년 12월에 서울 인사동을 찾아가 직접 이강수의 작품을 구매해 돌아온 밍우옌은 ‘잠자리와 소녀’ 연작 5점을 남편과 상의해 튼튼한 액자에 담아 레스토랑에 전시해 놓았다. 특이한 캐릭터와 독특하며 환상적인 색감의 ‘잠자리와 소녀’ 연작은 레스토랑을 찾은 손님들의 시선을 단번에 사로잡았고, 레스토랑에 놀라운 그림이 전시되어 있다는 소문이 나면서 손님이 서서히 늘어났다.

‘잠자리와 소녀’ 연작 5점을 레스토랑에 전시해 놓은 지 4개월. 이제는 소문을 듣고 이강수의 그림을 보기 위해 일부러 찾아오는 손님이 엄청나게 늘었고, 그 때문에 줄 서서 기다려야 하는 유명 레스토랑으로 거듭났다.

이강수의 동향에 각별히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던 밍우옌은 며칠 전 예술저널21의 김화영 기자에게 이강수의 작품이 크리스티 홍콩경매에 출품됐다는 연락을 받고 프리뷰 전시가 오픈하자마자 달려온 것이다.

‘이번에는 어떤 작품일까?’

밍우옌은 이강수의 새로운 그림을 만난다는 기대감으로 가슴이 뛰고, 살짝 흥분한 상태였다. 그림을 보면 또 갖고 싶은 욕심이 생길지도 몰랐지만 일단 확인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밍우옌은 다른 작품보다도 이강수의 작품이 가장 궁금했기 때문에 전시장을 빠르게 훑어보며 걸었다. 괴이하고 섬뜩한 도상 이미지가 걸린 그림, 다양한 색감이 발군인 실제 벽돌을 입체적으로 배치한 반 입체 작품, 화려하고 강렬한 원색의 물감을 고흐의 붓 터치처럼 거칠게 찍어 발라 불타오르는 드넓은 초원을 표현한 그림 등 정면에 전시된 화려하거나 기묘한 작품을 지나쳐 이강수 그림을 찾아 점점 안쪽으로 향했다.

안으로 들어갈수록 관람자가 줄었고 한산해졌다.

안으로 걸어갈수록 이강수 작품을 곧 만난다는 사실을 떠올리며 긴장감이 서서히 고조되고 있던 밍우옌은 20여 명의 관람객이 한 곳에 몰려있는 것을 발견하고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전시 공간이 넓고 전시 작품도 많아서 관람객이 몰려 있는 경우는 드물었다.

‘무슨 작품인데 사람들이 저렇게 몰려있는 거지? 설마....’

밍우옌이 사람이 몰려 있는 곳으로 다가가 사람들 틈으로 전시된 작품을 확인했다.

‘아!’

밍우옌은 속으로 탄성을 질렀다. 전면에는 자기가 찾고 있었던 이강수 작품이 걸려 있었다.

작품명 ‘눈물’

밍우연은 이강수의 작품, 흑인 소년이 누군가를 응시하고 있는 ‘눈물’에서 한동안 눈을 떼지 못했다.

흑인 소년의 무심한 눈빛이 가슴 깊숙이 파고들었고 원초적인 감정을 건들었다. 그것은 슬픔이었고, 애처로움, 부끄러움, 죄책감, 끝내는 대상을 알 수 없는 분노, 아니 개인주의, 이기주의에 매몰되고, 물질만능주의에 물들어 있는 현대 사회와 당연한 듯이 살아가는 인간에 대한 분노였다.

문득 밍우옌은 흑인 소년의 뒤에 펼쳐진 드넓은 초원을 보았다. 초원은 황색과 녹색이 어우러져 중첩되었고, 강렬한 아우라가 분출되고 있었다. 그 아우라가 분노한 마음을 포근하게 감싸는 것만 같았다.

“휴우-”

깊은 한숨을 내쉰 밍우옌이 옆에 걸린 작품으로 시선을 돌렸다.

옆에 걸린 작품은 ‘커피 열매 따는 소녀’

커피나무 아래 신비한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을 것만 같은 고산지대의 숨 막힐 듯이 고요하고 적막한 풍경이 펼쳐졌다. 햇볕에 검게 그을은 피부의 남미 소녀가 커피 열매가 든 바구니를 어깨에 메고 아득한 산 아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 슬프도록 아름답구나. 저 소녀는 산 아래 화려한 도시를 동경하겠지. 내가 그랬던 것처럼.’

밍우옌은 쓸쓸한 미소를 지으며 마지막 그림으로 시선을 돌렸다.

작품명 ‘카카오나무의 요정들’

단색조를 연상케 하는 밝은 갈색과 짙은 갈색, 갈색, 연한 갈색의 카카오닙스가 캔버스를 가득 채웠다.

요정 같은 아이들이 카카오나무 사이에서 뛰놀고 있었다. 아니, 좀 더 살펴보니 아이들은 뛰노는 것이 아니라 카카오나무 숲에 숨어 있는 것 같았다.

‘아이들은 뛰놀지 않고 왜 숨어 있는 걸까?’

곧 밍우옌은 아이들이 뛰놀지 않고 카카오나무 사이에 숨어 있는 이유를 유추할 수 있었다.

카카오닙스 조각이 되어 카카오나무 숲에 숨어 있는 아이들은 비정하고 차가운 현실에 내몰린 아이들일 것이다.

밍우옌은 경매 시작가를 확인했다.

눈물이 370만 홍콩달러, 나머지 두 작품은 300만 홍콩달러였다.

밍우옌은 세 작품 가운데 하나만이라도 낙찰받고 싶었지만, 시작가부터 만만치 않았다. 작년 와이옥션 경매에서 ‘졸업반 아이들’이 520만 홍콩달러에 낙찰된 이후 이강수는 홍콩 미술시장에서 한국의 떠오르는 신예작가로 주목받고 있었다.

‘경매에 참여하겠지만 얼마에 낙찰될지 도무지 짐작할 수도 없구나. 설마 천만 달러까지 가진 않겠지?’

밍우옌은 이강수 그림에 매료되어 그림 앞에 몰려 있는 사람들을 훑어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낙찰받기 쉽지 않겠다는 예감이 들었다. 밍우옌은 낙찰받든 받지 못하든 800만 홍콩달러까지 배팅할 각오를 다졌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