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그리는 마법사 - 187회
고원철과 서혁중이 무지개출판사 사무실의 편집기획팀 파트로 다가가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처음 뵙네요. 편집기획팀 사원 유가은이에요.”
몸에 달라붙은 주황색 목폴라 티에 청바지를 입은 유가은이 자리에서 일어나 생글생글 미소 지으며 두 사람을 반갑게 맞이했다. 유가은의 외모는 청순한 스타일이었다.
고원철과 서혁중은 편집기획팀과 이메일로 작품에 관한 의견을 주고받으며 작업했다. 편집기획팀 직원과 얼굴을 보는 것은 오늘이 처음이었다.
“아, 예, 예. 만나 뵙게 돼서 반갑습니다. 고원철입니다.”
“서혁중입니다.”
“어서 오세요. 전수민입니다.”
전수민도 자리에서 일어나 고원철과 서혁중에게 인사했다. ‘멸종 동물을 지켜라’ 시리즈물로 대박 행진을 벌이고 있는 편집기획팀은 얼굴에서 미소가 피어 있었고, 분위기는 활력이 넘쳤다.
강승호가 호탕하게 웃으며 앞으로 나와 고원철, 서혁중과 악수를 하며 말했다.
“하하하. 고원철 작가님, 서혁중 작가님, 어서 오십시오. 바깥 날씨 춥죠?”
“네. 하늘에 구름이 껴서 그런지 바람도 차고 꽤 춥네요.”
“추울 땐 따듯한 차 한 잔이 속을 풀어주죠. 어떤 차 마시겠습니까? 아, 가은 씨, 차가 뭐 있지?”
옆에서 유가은이 차 종류를 말했다.
“커피, 녹차, 우엉차, 생강차가 있어요.”
“커피요.”
“저는 녹차 부탁합니다.”
“가은 씨, 나는 생강차. 회의실로 가져와요. 두 분은 회의실로 갈까요?”
“네, 부장님. 금방 준비해 가겠습니다.”
고원철이 적당한 키에 예쁘고 청순한 모습의 유가은을 힐끔힐끔 쳐다보며 속으로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예쁘다. 남자 친구는 있을까? 얼굴도 예쁘고 키도 적당한데 당연히 있겠지?’
고원철은 강승호를 따라 회의실로 들어가며 유가은을 보자마자 느낀 호감과 관심을 접었다. 사귈 수 없는 여자를 마음에 두고 있어 봐야 마음만 심란하고 씁쓸하다. 깨끗하게 포기하는 편이 정신 건강에 이롭다.
고원철이 유가은을 훔쳐보는 모습을 눈치챈 서혁중이 입가에 음흉스러운 미소를 흘렸다.
‘흐흐, 원철이가 유가은 씨 바라보는 눈길이 심상치 않은데? 하긴 유가은 씨 정도면 예쁜 편이지. 남자 친구가 없으려나?’
탕비실로 걸어가던 유가은이 강승호를 따라 회의실로 들어가는 고원철을 슬쩍 쳐다보며 속으로 웃었다. 유가은은 고원철이 자기를 훔쳐보는 눈길을 느낀 것이다.
‘호호, 설마 고원철 작가가 나한테 관심 있는 거야? 음, 학벌 좋고 그림도 잘 그리는데 외모가 너무 평범해. 이강수 씨처럼 잘생기지 않았으면 돈이라도 많이 벌어야 평범한 외모가 용서되는데. 돈은 잘 벌까?’
이리저리 머리를 굴려보니 돈은 잘 벌 것 같았다.
‘멸종 동물 시리즈물이 계속 대박 나면 인세가 꽤 될 거야. 더구나 이강수 씨가 섭외했다는 건 재능이 있다는 거고, 이강수 씨와 일하니까 돈은 잘 벌겠구나.’
고원철의 외모를 객관적으로 평가하면 평범했지만 인상이 나쁘지는 않았다. 전체적으로 볼 때 사람은 괜찮아 보였다. 무엇보다 작년에 백억이 넘는 그림을 파는 엄청난 인기와 놀라운 성공을 거둔 이강수의 어시스트로 일한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이강수가 고원철을 어시스트로 쓰는 것은 고원철의 능력을 인정한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고원철이 보낸 눈길에 나름 염두를 굴린 유가은이 차를 준비하기 위해 탕비실로 들어갔다.
회의용 책상을 사이에 두고 고원철, 서혁중과 마주한 강승호가 고맙다는 말로 운을 뗐다.
“작년 연말에 모임에 나가지 못하고 작업해주어서 고맙습니다. 두 작가님이 열심히 작업해 준 덕분에 ‘멸종 동물을 지켜라’ 시리즈물 판매량이 고공행진 하고 있습니다.”
“아뇨. 연말에 모임에 나가지 못한 건 편집기획팀도 마찬가지인걸요. 오히려 쉬지도 못하고 마무리 작업해 준 여러분께 저희가 더 감사하죠.”
“별말씀을요. 한데 시리즈물에 관련해서 할 얘기가 있다고요?”
서혁중이 고원철에게 네가 얘기하라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고원철이 입을 열었다.
“저기, 강 팀장님. 시리즈물 5, 6편 출간을 당장 내일부터 작업 들어가야 하잖아요?”
“그렇죠.”
“혹시 5, 6편 작업을 한 달 뒤로 미룰 수 있는지 여쭤보려고요.”
“한 달 뒤에요? 그건....”
입가에 미소를 잃지 않은 강승호가 물었다.
“혹시 작업을 한 달 연기하는 특별한 이유가 있을까요?”
“네, 그게.... 솔직히 말씀드리면 일정이 너무 빡빡해서 개인 작업할 시간이 나지 않아서 그럽니다. 5, 6권 작업 시작하기 전에 한 달 정도는 회화 작업해야 회화 감각을 잃지 않을 것 같거든요. 강 팀장님이 양해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똑똑!
“실례합니다.”
이때 노크와 함께 문이 열리고 유가은이 들어왔다. 유가은이 각각의 차를 책상에 내려놓고, 고원철과 눈을 맞추고 말했다.
“맛있게 드세요.”
“아, 감사합니다.”
당황한 고원철이 반사적으로 고개를 숙여 꾸벅 인사했다.
유가은이 고원철을 향해 싱긋 미소를 지어 보이고 밖으로 나갔다.
‘헉!’
유가은의 미소에 고원철이 순간적으로 가슴이 철렁했다.
‘나, 날 보고 미소 지은 건가?’
두근거리는 마음을 진정하며 잔을 잡았다. 찻잔 안에는 녹차 우린 초록의 물이 보석처럼 빛났다. 고원철은 그렇게 느꼈다. 고원철이 멍한 얼굴로 녹차의 에메랄드 빛깔에 시선을 주고 있자 커피를 한 모금 홀짝 마신 서혁중이 팔꿈치로 고원철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헛!’
흠칫 놀란 고원철이 황급히 녹차를 한 모금 입에 넣었다가 눈을 부릅뜨고 잔에 도로 내뱉었다.
찻물이 조금 뜨거웠던 것이다.
“고 작가님, 괜찮습니까?”
“아, 네. 물론입니다. 그냥 약간 뜨거웠을 뿐입니다.”
“하하. 다행이네요. 시리즈물은 잘 나갈 때 후속 작품을 빠르게 출간하면 매출에 효과적이긴 한데 한 달 정도 연기하는 것은 무리 없을 것 같습니다. 두 작가님이 원하면 그렇게 해야죠.”
“감사합니다.”
“저희 편의를 봐주셔서 고맙습니다.”
“한 달 뒤면 2월 18일인데 그때부터 작업 들어가면 되겠습니까?”
“네. 그때면 괜찮죠.”
“그럼 5, 6권은 한 달 뒤 2월 18일부터 작업하기로 하죠. 그리고 두 작가님에게 제안할 사항이 하나 있습니다. 시간 되면 지금 얘기해도 될까요?”
“시간은 있습니다. 무슨 제안이죠?”
“멸종 동물을 지켜라 시리즈물 한국 편이 10권으로 끝나면 세계 편 작업 들어가는데 세계 편을 변경하려고 합니다.”
“변경이요?”
“본래 세계 편도 한국 편처럼 10권으로 기획했죠. 한데 10권이면 동물 10마리에 불과하죠. 세계의 멸종 동물을 다루기엔 그 수가 너무 적다는 의견이 제기되었고, 내부 기획 회의에서 멸종 동물을 늘리는 것이 좋겠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고원철과 서혁중이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아, 몇 권이나 더 늘리려고요?”
서혁중의 질문에 강승호가 대답했다.
“몇 권 더 늘리기보다는 미국 편, 아마존 편, 마다가스타르 편, 시베리아 편, 가나 편처럼 세계 편은 국가나 특정 지역의 멸종 동물을 다루자는 쪽으로 논의가 됐습니다. 다만 편당 동물 수는 기본 10마리지만 조정할 수 있을 겁니다.”
“지금 얘기하신 것만 해도 다섯 편에 50여 멸종 동물, 50권이나 되는군요?”
“그렇습니다. 세계 편의 그림책 판매 성적이 좋으면 국가나 지역은 추가할 수도 있겠지요?”
고원철이 재빨리 머릿속으로 계산해보았다. 서혁중과 자신이 일 년 내내 그림책을 그려도 각각 4권씩 고작 8권에 불과하다. 자기들만 작업하면 몇 년이 걸릴지 기약도 없다.
“우리가 석 달에 한 권씩 그리면 일 년에 출간하는 그림책이 8권이군요? 기획한 권수에 비해 그리는 속도가 느린 것 같은데 괜찮을까요?”
강승호가 가볍게 웃었다.
“하하. 그 점은 두 작가님이 염려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건 차후에 생각해 볼 문제지만 일단 우리도 자료 준비하고 캐릭터 만들고 기본적인 줄거리 짜는데 시간이 꽤 걸립니다. 물론 우리가 좀 더 빨리 기획할 수도 있겠지요. 만약 그런 상황이 돼서 빨리 출간해야 할 상황이 오면 작가 한두 분 더 섭외해서 작업하면 될 겁니다.”
일러스트에 매달리지 않아도 된다는 부담감이 없어진 고원철과 서혁중의 얼굴이 환해졌다.
“알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이강수가 작품 팔아 수십 억 번 모습을 옆에서 똑똑히 지켜본 고원철과 서혁중인지라 일러스트보다 자기 그림으로 승부해야 한다는 욕망이 더 컸다. 물론 자기들이 화가로 성공한다는 보장은 없다. 그래서 출간하면 베스트셀러가 되어 팔려나가는 ‘멸종 동물을 지켜라’의 일러스트를 포기할 수도 없었다.
그림동화책에서 나오는 인세가 작은 돈이 아닐 뿐만 아니라 한 권, 두 권 작품이 늘면 인세가 눈덩이처럼 불어날 것이 명약관아하다. 더구나 단권도 아니고 수십 권짜리 시리즈물이 아닌가? 강승호가 일정에 맞춰야 한다면서 양자택일을 요구했으면 고민이 많았을 것이다.
일러스트로 생활비를 벌고, 회화 작업할 시간까지 챙긴 고원철과 서혁중의 얼굴이 밝아질 수밖에 없었다.
강승호와 작업 일정에 관한 조율을 끝낸 고원철과 서혁중이 회의실 밖으로 나왔다.
편집기획팀 방향을 바라본 고원철의 눈에 컴퓨터 작업하고 있는 유가은의 모습이 들어왔다. 유가은의 모습만 봐도 가슴이 두근거렸다.
‘아, 어떡한다?’
아까는 포기하겠다고 마음먹었지만 자기를 향해 지은 미소 한 방으로 그 결심이 흔들리고 있었다. 고원철의 머릿속은 유가은 때문에 복잡하게 뒤엉켰다. 유가은이 자기에게 호감을 보였다고 느꼈는데 이대로 떠나면 언제 또 유가은을 만날 수 있을지 막막했고, 실낱처럼 가는 기회의 끈이 툭! 하고 끊어질 것이 분명했다. 최소한 전화번호라도 받아야 기회의 끈이라도 유지하고, 관계의 발전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고원철은 심적 갈등으로 혼란한 상태에서 쇠붙이처럼 무거운 다리를 출입문을 향해 한 걸음씩 옮겼다. 출입문이 가까워질수록 심장이 타들어 가는 것만 같았다.
결국 유가은을 향한 연심을 참지 못한 고원철이 고개를 돌려 유가은을 바라보았다.
‘엇!’
고원철이 화들짝 놀랐다. 어쩐 일인지 유가은이 가기를 바라보고 있었고, 다시 유가은과 눈이 마주쳤다. 이때, 유가은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신 차린 고원철이 미친 듯이 뛰는 심장 소리를 들으며 천천히 출입문으로 걸어갔다. 한 걸음 한 걸음 옮기는 고원철은 전신을 옥죄는 듯한 긴장으로 팔다리가 파르르 떨렸고 알 수 없는 흥분에 휩싸였다.
고원철이 천천히 걸은 탓에 유가은과 출입문에서 만날 수 있었다. 고원철과 유가은이 사무실 문을 열고 동시에 복도로 나왔다.
유가은이 말했다.
“고 작가님, 팀장님과 얘기는 잘 됐나요?”
고원철의 입에서 즉각 대답이 튀어나왔다.
“예, 예. 5, 6권은 한 달 뒤에 작업하기로 했습니다.”
유가은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애교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어머, 왜요? 무슨 피치 못할 사정이 생긴 건가요?”
“아뇨. 아뇨. 그게 아니라 곧바로 시리즈물 작업을 시작하면 혁중이나 저나 개인 작품 할 시간이 전혀 없어서요. 강 팀장님한테 개인 작품 할 시간을 한 달만 달라고 부탁드린 겁니다. 다행이 팀장님이 흔쾌히 수락해주셨고요.”
“그러셨구나. 잘됐네요....”
유가은이 말끝을 흐렸다.
고원철은 순간적으로 유가은과 복도에서 계속 대화를 나눌 수 없는 자기 처지를 깨달았다. 더 머뭇거려서는 자기에게 주어진 어쩌면 단 한 번일지도 모르는 기회가 날아갈지도 몰랐다.
고원철의 머리가 빠르게 회전했고, 머릿속에서 내린 결정을 일사천리로 말했다.
“가은 씨. 저는 그림동화책이 처음이라 편집기획팀의 도움이 아니었으면 책 출간은 꿈도 꾸지 못했을 겁니다. 그림동화책을 해보니까 궁금한 건 많은데 물어볼 사람이 없어서 아주 답답했었습니다. 혹시 제가 잘 모르거나 궁금한 걸 가은 씨한테 조언 구해도 될까요?”
“네. 저도 잘 모르지만 제가 도울 수 있는 건 도와드려야죠. 언제든지 물어보세요.”
“고맙습니다. 한데 연락처는....”
마지막 관문이었다.
만약 사무실로 전화하라고 말하면 정말로 마음을 접어야 하고, 스마트폰 번호를 알려주면 긍정적으로 판단해도 될 것이다. 고원철의 간절함이 담긴 눈을 살짝 마주 본 유가은이 손을 내밀었다.
“스마트폰 주세요.”
“네? 아, 예.”
고원철이 스마트폰을 꺼내 패턴을 해제해 유가은에게 건네주었다.
유가은이 전화번호를 찍어서 통화 아이콘을 눌렀다. 신호가 가자 스마트폰을 고원철에게 돌려주었다.
“여기요. 잘 저장해두세요.”
“물론입니다. 머릿속에 평생 저장해 놓겠습니다.”
“풋, 그럼 전 손 씻으러 화장실에 갈게요. 다음에 또 봐요.”
“네. 연락하겠습니다.”
고원철은 가슴이 터질 것 같은 희열에 휩싸여서 멍한 얼굴로 복도 끝으로 걸어가는 유가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유가은이 화장실로 들어가고 나서야 퍼뜩 정신 차렸다.
‘성공이다! 성공이야. 가은 씨와 만날 수 있겠다.’
고원철이 목구멍에서 터져 나오려는 환호성을 참으며 주먹을 불끈 쥐고 부르르 떨었다.
엘리베이터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서혁중이 다가와 실실 웃으며 고원철의 어깨를 툭툭 쳤다.
“가은 씨와 인연은 잘 엮었냐?”
“응? 아, 알고 있었냐?”
“그래, 인마. 꿰뚫듯이 가은 씨를 쳐다보는데 어떻게 모를 수가 있냐?”
엘리베이터 앞으로 걸어가며 고원철이 쑥스럽게 웃었다.
“후후, 가은 씨가 전화번호 알려줬다.”
“앞으로 사귀는 거냐?”
“글쎄? 그림동화책에 관해 궁금한 게 있으면 개인적으로 물어봐도 되냐고 했더니 언제든지 물어보라고 했거든. 그리고 전화번호 찍어주며 다음에 또 보자고 하더라.”
“그럼 거의 90%는 사귈 마음이 있다는 거네.”
“그럴까?”
“전화번호 알려주고 언제든지 전화하라는 건데 당연하지. 너한테 유가은 씨는 과분하니까 헛짓해서 차이지 말고 잘 붙잡아 봐라.”
“그, 그래야지.”
고원철은 저녁식사 하자고 당장 전화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그러면 너무 속보이는 것 같아 그럴 수는 없었다.
땡!
엘리베이터가 도착해 문이 열렸다.
고원철은 엘리베이터에 올라타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내일, 내일 전화해야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