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그리는 마법사 - 186회
일성빌딩 강수의 작업실.
뉴욕 개인전 작품을 스케치하던 강수는 크리스티 한국지부 소속 고한슬의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이강수입니다.”
[안녕하세요, 크리스티 고한슬입니다. 이 작가님. 홍콩 경매 일정이 확정되어 연락 드렸습니다. 잠시 통화 괜찮으세요?]
“예. 말씀하세요.”
[2022년 크리스티 홍콩경매는 3월 18일, 금요일에 개최합니다. 경매 출품작품 프리뷰는 3월 11일 금요일부터 17일 목요일까지 일주일간 홍콩 컨벤션 센터에서 진행됩니다. 이 작가님 작품은 19일 토요일 이브닝 프리미엄 경매에서 소개될 예정입니다.]
자기 작품이 토요일 이브닝 프리미엄 경매에서 소개된다는 고한슬의 말에 강수가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이브닝 프리미엄 경매면 보통 세계적으로 명성을 얻고 있는 유명 작가 위주로 진행하지 않나요?”
[그렇죠.]
“고 팀장님도 아시다시피 저는 신인작가인데 제 작품이 이브닝 프리미엄 경매에 배정된 건 뜻밖인데요?”
[맞습니다. 이 작가님은 특별한 케이스입니다. 이 작가님은 작년에 한국과 홍콩에서 개인전을 열고, 경매에 참여 하셨는데 작품 활동이 너무나 드라마틱하고 인상적이어서 내부적으로 이브닝 프리미엄 경매에서 소개하는 편이 성공적인 경매가 될 가능성이 높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물론 이 작가님이 보내주신 세 작품의 뛰어난 회화적 완성도와 사회적인 메시지가 절묘하게 융합해 놀라운 작품으로 승화한 점이 결정적으로 작용했죠. 그래서 특별히 이 작가님 작품은 이브닝 프리미엄 경매에 배정된 것이지요.]
듣기에도 얼굴이 붉어질 정도의 극찬이라고 해도 좋을 칭찬에 강수가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하하, 그런가요? 제 작품을 높게 평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니요. 사실을 말씀드린 거랍니다. 저희는 이 작가님 작품이 ‘졸업반 아이들’ 낙찰가를 뛰어 넘을 것으로 예상하고 있어요. 경매 진행 상황은 저희 홈페이지 ‘경매 스트림’ 서비스를 통해 인터넷으로 실시간 시청하실 수 있습니다. 경매와 관련해서 궁금한 사항이 있으면 질문해주세요.]
“만약 제 작품이 낙찰되면 대금은 언제 지급됩니까?”
[제가 그 부분을 말씀드리지 않았군요. 죄송해요. 낙찰자가 기한 내에 낙찰 대금을 입금하면 다음 날 이 작가님에게 연락하고 지정 계좌로 송금해 드립니다. 또 궁금한 사항 있으신가요?]
“아뇨. 없습니다.”
[경매 일정은 문자로 보내드리겠습니다. 혹시 궁금한 사항 있으면 언제든지 저한테 연락해주세요.]
“네. 그러죠.”
전화가 끊겼다.
오늘은 1월 18일, 화요일.
홍콩 경매 3월 19일까지 두 달 정도 남았다.
경매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 궁금하긴 했지만, 결과에 연연할 것은 없다고 생각했다.
낙찰가를 떠나서 애초에 유명작가라는 명성과는 거리가 멀었고, 대중적인 이슈와 함께 주목받는 신인으로 등장했을 뿐이다. 경제적인 부분은 고민할 이유조차 없을 만큼 여유가 넘쳤다. 작년에 개인전과 단체전을 통해 번 돈만 세금 떼고 50억 원이 조금 넘는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엄청나게 큰 수익이다. 앞으로 돈에 얽매일 일 없이 그림만 그려도 될 만큼 넉넉한 거금이었다.
강수가 차창 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회색 건물들 사이로 보이는 회색 구름이 차가워 보였다. 아침까지 눈이 내린 골목길에는 소복이 하얀 눈이 쌓여 있었고, 회색 빌딩 사이로 칼바람이 불 때마다 옥상에 쌓인 눈이 바람에 날리며 보석 가루처럼 반짝였다. 바람이 불어 체감 온도가 내려가 비록 춥기는 하지만, 하얀 눈이 거리와 지붕에 쌓인 정경은 왠지 포근해 보였다.
강수는 오랜만에 내린 눈으로 겨울다운 풍경이 연출된 골목길을 바라보며 잠시 겨울 정취를 감상했다.
창밖의 겨울 풍경에서 시선을 돌려 이젤로 걸어가던 강수가 문득 작업실을 둘러보았다.
‘흠, 다 좋은데 작업실이 조금 협소하단 말이야....’
작업실은 교통이나 위치 등 편의성은 최고지만 결정적으로 천장이 낮았다. 퍼스트타워에 그린 ‘향유고래의 꿈’같은 대작을 그리기 위해서는 새로운 공간이 필요했다. 당장 300호 이상 되는 작품을 제작할 계획은 없지만, 장기적인 안목에서 보면 미리 작업 공간을 확보해 놓아서 손해 볼 일은 없었다.
‘돈은 충분하니까 별내 땅에 작업실을 지을까? 한데 결혼하면 용산에서 별내까지 출퇴근해야 하잖아? 그건 너무 멀잖아? 출퇴근 안 할 거면 살 집도 같이 지어야 하고.’
별내에 작업실을 지으면 가장 아쉬운 점이 접근성이다.
현재 작업실에 비교하면 별내는 접근성이 현저하게 떨어진다.
‘아니면 돈도 충분한데 그냥 서울에 땅 사서 작업실을 지어?’
작업실에 대해 이런저런 궁리를 해보는 강수였다.
이젤 앞에 서서 염두를 굴리고 있는 강수에게 서혁중과 고원철이 다가왔다.
“선배님,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세요?”
“응? 별거 아냐. 작업실을 어떻게 할까 고민 중이다.”
고원철이 살짝 놀란 표정으로 강수를 쳐다보았고, 서혁중이 즉시 대꾸했다.
“작업실을요? 리모델링하게요?”
“아니. 작업실을 다른 곳으로 옮길까 싶어서.”
“옛! 아니 왜요? 이 작업실이 어때서요? 공간 넓고 위치도 괜찮고, 지하철도 코앞이잖아요?”
“그런 것은 다 마음에 들고 좋지. 다만 천장이 낮아서 규모 있는 작업을 할 수 없다는 게 문제지.”
“아- 그렇네요.”
서혁중이 탄성을 지르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작업실은 어디로 옮길지 정했나요?”
“아직 정하진 않았는데 별내면에 작업실을 지을까 싶은데 너희들은 어떤 것 같으냐?”
서혁중이 금시초문이라는 얼굴로 물었다.
“별내면이요? 별내면이 어디죠?”
“지하철 4호선 끝 당고개 지나서 별내면이라고 있어. 주하가 별내에 땅을 좀 가지고 있어서 거기에 작업실을 지을까 생각 중이거든.”
“4호선 끝에서 더 가야 하면 교통은 꽤 불편하네요?”
“좀 그런 편이지. 그래서 고민이다.”
옆에서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고원철이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별내에 묘지 있는데 묘지 있는 쪽은 아니죠?”
“아니지. 묘지공원 있는 곳은 서별내고 주하가 가지고 있는 땅은 동별내 쪽이라 괜찮아. 별내에 작업실을 지으면 집도 짓고 아예 별내에서 살아야겠지.”
“별내에서 작업실 짓고 산다고요?.”
서혁중이 울상을 지으며 애원하듯 말했다.
“선배님, 제 자취방에서 여기까지 한 시간인데 여기서 당고개 지나 별내까지 가려면 한세월입니다. 그냥 요 근처에서 찾으면 안 될까요?”
서혁중의 우는 소리에 강수가 피식 실소했다.
강수가 별내에 작업실을 차리려는 가장 큰 이유는 마당과 텃밭 없는 아파트에서 살 수 없다고 하시는 부모님을 모시기 위해서였다. 서울에서 2, 3백 평 넓이의 땅을 살 수 있으면 작업실과 집, 텃밭까지 마련할 수 있으니 굳이 별내까지 가지 않아도 된다. 아무리 생각해도 작업실은 예술과 문화가 집중된 서울에 두는 것이 편하기 때문이다.
예전에 별내로 이사해 같이 사는 것에 대해 아버지께 여쭤보았을 때 아버지는 아는 사람도 없는 별내에 뭐 하러 가냐며 탐탁해 하지 않았다. 돈이 없었던 때는 선택지가 없어서 별내동으로 갔겠지만, 이제 서울에서 작업실을 구할 수 있을 만큼 벌었다.
“생각 중인데 아직 결정하진 않았어. 네 말처럼 근방에서 땅을 사서 작업실을 짓거나 건물 사는 것도 염두에 두고 있다. 좀 두고 보자.”
“선배님이 버는 돈이 있는데 서울에서 작업실 지을 땅 못 사겠습니까? 제가 알아봐 줄까요?”
“네가? 아는 사람 있냐?”
“네. 저하고 친한 사촌 형님이 공인중개사 사무소 하거든요. 사촌 형님한테 저렴하고 좋은 땅 구해달라면 찾아 줄 겁니다.”
강수가 자기 머리를 톡톡 쳤다.
“부동산 사무실에 알아보면 간단한 걸 왜 그 생각을 못 했지. 말 나온 김에 혁중이가 사촌 형님한테 얘기해서 강북구나 도봉구에 한 2, 3백 평 정도 되는 땅 있는지 알아봐 줄래?”
“네? 2, 3백 평이요? 빌라 짓는 것도 아닌데 그렇게 넓은 땅이 왜 필요하죠?”
“양구에 계신 부모님 모셔오려고. 부모님이 소일삼아 텃밭을 일구고 싶어 하시거든.”
“부모님 모시려고 하는군요. 선배님, 서울 땅값 장난 아닌데 그 비싼 땅을 텃밭으로 쓰는 건 너무 아깝지 않을까요?”
고원철이 옆에서 한심하다는 눈으로 서혁중을 쳐다보았다.
“넌 선배님이 작년에 얼마나 벌었는지 옆에서 지켜봤으면서 그런 소리 하냐?”
서혁중이 그제야 멋쩍은 얼굴로 뒤통수를 긁적이더니 고원철에게 버럭 한 소리 했다.
“야, 선배님 그림이 엄청나게 팔린 건 알지만 정확한 수입을 내가 어떻게 아냐? 하여튼 땅 살 돈만 있으면 집에서 텃밭도 일구고 정원도 꾸미면 좋긴 하지.”
땅만 구하면 이강수가 서울에 작업실 차릴 수 있다는 사실을 떠올린 서혁중이 재빨리 강수에게 의욕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선배님, 제가 사촌 형님한테 말해서 저렴하고 근사한 땅을 찾아드리죠. 저한테 맡겨주십시오.”
“고맙다. 혁중아, 땅 볼 때 도로에 인접해 있는 땅은 피하고, 최소한 여기처럼 도로에서 두 블록 정도 떨어져 있는 곳을 찾아봐라. 부모님이 번잡하고 시끄러운 곳은 싫어하시니까.”
“알겠습니다.”
작업실 얘기가 일단락되자 고원철이 화제를 바꿨다.
“선배님, 멸종동물을 지켜라 3, 4편이 출간되었습니다. 강 팀장님이 그러는데 선주문이 1, 2편보다 많던데요.”
“어, 그러냐? 몇 부나 되는데?”
“만 부씩이요. 그래서 초판 1쇄 오천 부, 2쇄, 3쇄 각각 사천 부씩, 만 삼천 부 인쇄하는데 출간되면 곧장 베스트셀러 1, 2위에 진입한다고 합니다.”
“축하한다. 출간하자마자 베스트셀러 1, 2위면 이제 일러스트 작가로 확고하게 자리매김한 것 같다. 앞으로 일이 없어서 빈둥거릴 일은 없겠어.”
“알바하러 다닐 일은 없어서 좋긴 한데 일러스트에 쫓기니까 작품 할 시간이 빡빡해요. 쉴 틈도 주지 않고 5, 6편 작업하자고 하는데요.”
일러스트레이터로 전업해서 나쁜 것은 없지만 목표가 화가라면 일러스트는 생활비 버는 정도가 적당하다. 강수는 자기 경험을 떠올리고 조언해주었다.
“일러스트레이터로 계속 나갈 거면 상관없지만 그게 아니면 두 달에 한 권이 아니라 서너 달에 한 권씩 출간하자고 건의해 봐라. 자기 작품은 꾸준히 해야 발전하니까.”
“그래야 할까 봅니다. 이틀에 하루 정도는 내 작품 해야지 일러스트만 그리다간 작품에 손 놓을 수도 있을 것 같아서요. 그렇지 않냐, 원철아?”
“동감이야. 아예 한 달은 내 작업하고, 한 달 뒤에 그림책 작업하는 건 어때?”
“그것도 괜찮다. 전화로 얘기하는 것보단 얼굴 보고 얘기하는 게 낫겠지. 내가 강 팀장님에게 시간 되는지 전화해보마.”
서혁중이 스마트폰을 꺼내 강승호에게 전화했다.
“강 팀장님, 안녕하세요? 아, 예. 잘 지내고 있습니다. 강 팀장님, 시리즈물 작업과 관련해서 드릴 말씀이 있어서 전화 드렸습니다.... 아, 만나서 말씀드려야 할 것 같아서요.... 그럼 원철이하고 제가 찾아뵙겠습니다.... 예, 예.”
전화를 끊은 서혁중이 고원철에게 말했다.
“원철아, 아무 때나 사무실로 오면 된대. 언제 갈까?”
“뒤로 미룰 것 없이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지금 갔다 오자.”
“지금? 좋아. 지금 간다고 문자 보내마.”
서혁중이 강승호에게 문자를 한 통 날리고 강수에게 말했다.
“선배님, 우린 무지개출판사 갔다 오겠습니다.”
“그래. 가서 잘 얘기하고 와라.”
강수는 다시 이젤 앞에 앉았고, 고원철과 서혁중은 두툼한 겨울 잠바를 걸치고 작업실을 나섰다.
휘이잉-
칼바람이 얼굴을 할퀴고 지나가자 건물 밖으로 나온 고원철이 목을 움츠리며 투덜거렸다.
“으- 바람이 엄청 차네. 이놈에 겨울 좀 빨리 지나갔으면 좋겠다. 겨울은 왜 있어서 사람을 힘들게 하는지 모르겠다.”
“짜샤, 시원하고 좋기만 한데 뭘 그래. 병자처럼 굴지 말고 어깨를 쫙 펴봐.”
“시원해? 하긴 넌 지방이 많아서 추위를 덜 타는 모양인데 난 겨울만 되면 손발이 꽁꽁 얼어서 추위가 너무 싫다. 겨울 대신 여름이 왔으면 좋겠다.”
“아오, 넌 꼭 그런 식으로 얘기해야 하냐? 지방 많다고 겨울에 안 추운 사람이 어디 있어? 건강해서 추위를 덜 타는 거지. 빨리 걷자. 그럼 덜 추울 거다.”
두 사람은 지하철역을 향해 빠른 걸음으로 걸어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