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림 그리는 마법사-179화 (179/197)

그림 그리는 마법사 - 179회

*

강수는 안범진과 송다린이 완성해 놓은 작품 ‘카카오나무의 요정들’을 덧칠하고 있었다. 정밀성을 요구하는 작업인 만큼 고도의 집중력과 세밀한 손놀림이 필요했다. 두 후배가 공들여 그려놓은 탓에 덧칠을 빠르게 칠해나갈 수 있었다.

캔버스에서 물러나 전체적인 채색을 살펴보던 강수가 갑자기 밀려드는 허기를 느끼고 미간을 좁혔다.

꼬르륵!

뱃속에서 에너지를 충전하라는 신호가 요란하게 울렸다.

‘몇 시나 된 거야? 헐, 벌써 일곱 시네. 밥 먹어야겠다.’

시각을 확인한 강수가 팔레트를 내려놓고 붓은 물통에 넣어 씻어냈다.

붓을 씻어놓고 옆으로 건너가려는데 스마트폰이 진동했다. 잘 모르는 전화번호였으나 통화를 연결했다.

“여보세요? 이강숩니다.”

[안녕하세요? 크리스티 고한슬입니다. 두어 달 전에 통화했는데 기억하시나요?]

“고한슬 팀장님! 물론 기억하죠.”

[저는 지금 선암갤러리예요. 이 작가님 작품 감상하고 차라도 한잔하러 왔어요. 전시 작품 전부 감상했는데 평범한 시골 풍경과 인물을 그렸는데도 작품이 너무 아름답고 신비롭고 따뜻해요. 그뿐이 아니라 캔버스를 지배하는 색조와 색감, 인물 표현 모든 면이 너무 좋은데요. 한데 작가님, 전시장에 안 나오셨네요?]

“오늘은 작품 할 것이 있어서 전시장에 나가지 못했습니다. 미안합니다.”

[아뇨. 연락 없이 온 건데 작가님이 저한테 미안해할 일이 아니죠. 저기, 이 작가님. 연말까지 세 작품 차질 없이 출품 가능한지요?]

“아, 그렇지 않아도 경매 문제로 고 팀장님한테 연락하려고 했습니다.”

[그러셨어요? 무슨 일이죠?]

“뉴욕 경매에 출품은 재고해야 할 것 같습니다.”

[네? 뉴욕 경매를요? 왜요?]

고한슬의 목소리에 당혹스러운 기색이 묻어났다.

“고 팀장님이 아실지 모르겠지만, 저는 올해 첫 개인전을 연 신인작가입니다. 한국에서는 핑크티티 초상화와 홍콩에서 ‘졸업반 아이들’이 칠억 원에 낙찰되어 대중적으로 알려진 편이지만, 뉴욕 컬렉터 가운데 저를 아는 분이 계실까요?”

[그건....]

“거의 없겠죠?”

[음, 꼭 그렇지만은 않아요. 동양 미술에 관심 있는 컬렉터도 상당수니까요. 물론 국내보다 인지도는 거의 없겠지요.]

“맞습니다. 뉴욕에서 전시회 한 번 안 했는데 당연히 저는 이방인처럼 낯선 존재일 뿐만 아니라 인지도 없는 무명화가에 불과할 겁니다. 그에 반해 국내 미술계에서는 올해 봄과 가을에 개최한 두 번의 개인전 전시 작품이 완판될 정도로 과분한 성공을 거두었죠. 이번 개인전에 출품한 그림도 어제까지 8점만 남고 다 팔린 상태고요. 이런 상황에서 섣부르게 뉴욕 경매에 출품할 이유가 없다며 주변에서 말리더군요. 뉴욕 진출은 저도 바라는 바지만 너무 욕심낼 필요 없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뉴욕 진출은 개인전부터 시작해서 천천히 진출하려 합니다.”

[그렇군요. 뉴욕 경매에 작품을 내지 않으면 혹시 다른 계획은 있나요?]

“본래 뉴욕 경매에 출품하려 했던 작품 세 점은 계획대로 제작하고 있습니다. 이 세 작품을 크리스티 홍콩 경매에 출품하고 싶은데 가능할까요?”

[아, 출품작은 준비하고 있군요? 홍콩 경매 출품도 물론 가능하세요. 그럼 홍콩 경매에 출품할 수 있도록 변경해드릴까요?]

“그렇게 해주십시오.”

[작품은 예정대로 연말까지 제출할 수 있나요?]

“네. 연말까지 제출하겠습니다.”

[알겠어요. 작품만 차질 없이 제출하면 내년 봄에 개최하는 홍콩 아트바젤 아트페어 기간에 열리는 경매에 출품할 수 있도록 일정을 잡겠어요. 홍콩 아트바젤엔 전 세게 컬렉터가 모이기 때문에 ‘졸업반 아이들’처럼 아마 좋은 성적을 기대할 수 있을 거예요.]

홍콩에서의 경매는 왠지 부담되지 않았다.

“하하. 고맙습니다. 작품이 완성되는 대로 연락하고 보내겠습니다. 편의 봐주어 감사합니다.”

[별말씀을요. 차후 뉴욕에 진출하시면 그때도 저희 크리스티를 이용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이렇게 신경 써주시는데 물론이죠. 그럼 들어가세요.”

전화를 끊은 강수가 통화 소리를 듣고 다가와 있는 고원철과 서혁중을 쳐다보았다.

서혁중이 의미심장한 눈빛을 빛내며 말했다.

“이 작품, 크리스티 홍콩경매에 출품하는군요?”

“그래. 저번에 얘기한 대로 홍콩에서 하는 경매로 바꿔 달랬다.”

“홍콩에선 경매할만하죠? 이미 엄청난 낙찰가도 기록했으니까요.”

“글쎄? 저번처럼 두 사람이 경쟁하는 상황이 또 생길 것 같진 않은데?”

팔짱을 끼고 있던 서혁중이 아니라는 듯 팔을 내저었다.

“그건 모르죠. 이 작품만 보더라도 ‘졸업반 아이들’에 비해 나으면 나았지 못하지 않거든요. 오히려 그때보다 더 경쟁 붙을 수도 있지 않을까요?”

“맞아요. 뚜껑은 열어봐야 아는 거죠.”

고원철이 서혁중의 말을 거들었고, 강수가 애매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수는 있지만....”

홍콩 경매 출품작은 눈물, 카카오나무의 요정들, 커피 열매 따는 소녀다.

‘눈물’은 자기의 예술적 욕망과 정신세계를 완벽하게 응축해 녹여낸 결과물이고, ‘카카오나무의 요정들’은 머릿속의 이미지를 캔버스에 완벽하게 재현하면 작품의 완성도는 나무랄 데 없을 것이고, 단색조의 신비로운 분위기가 예술성까지 담보할 것이다.

‘두 작품은 마음에 드는데 커피 열매 따는 소녀가 걸리는군.’

커피 열매 따는 소녀는 직설적인 표현을 피하고, 환상적인 색채를 통해 사회적 메시지와 예술성을 융화하려고 한 작품이다. 그렇게 생각했는데 얼마 전에 살펴본 커피 열매 따는 소녀의 스케치가 너무 환상적인 표현에 치우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환상적인 요소를 지우고 정직하게 현실의 모습을 그대로 그려야겠어. 소녀도 남미 소녀 그대로 그리고, 옆을 돌아볼 게 아니라 커피 열매가 든 바구니를 어깨에 메고 아득한 산 아래를 바라보는 옆모습으로 바꾸고.’

연말까지 시간은 충분하다.

카카오나무의 요정들을 끝내는 대로 커피 열매 따는 소녀를 작업하면 된다. 전체적인 구도와 장면 구상은 기존의 스케치에서 약간 변형하면 되기 때문에 따로 걸리는 시간은 거의 없고, 채색하는 시간은 5, 6일이면 충분하다.

변수라면 연말이 다가오면서 고등학교, 대학교 동창 모임, 대학 동아리 모임, 마술 동아리 일루션 등 이런저런 모임이 열린다는 점이다. 각종 모임에 참석하려면 주말은 시간을 비워야 한다. 그리고 박진수에게서 지압을 받겠다고 연락이 왔다. 남은 네 번의 지압은 주중 저녁 시간을 활용하면 시간을 아낄 수 있다.

전시 작품은 어제까지 107점이 팔려서 완판을 목전에 두고 있다. 오늘 몇 점이 팔렸는지 연락받지 못했지만 선암갤러리 측에서는 완판을 당연시했다. 전시장을 지키며 컬렉터와 작품에 관해 얘기하고, 다양한 사람의 작품 평을 듣고 싶어도 시간이 허락하지 않았다. 어쨌든 전시장은 남은 기간 동안 두 번 정도는 나갈 계획이었다.

시골 부모님 집에는 연말을 피해 연초에 주하와 같이 간다고 말씀드렸다.

‘연말이라 일정이 생각보다 빡빡한데? 주하한테 사죄하고 연말까지만 봐달라고 해야겠다. 연말까지 크리스티에 출품할 작품만 끝내면 뉴욕 전시까지는 여유 있으니까 그 뒤로는 주하하고 같이 지낼 수 있겠지. 결혼식 준비도 같이하고.’

결혼식이 내년이라지만 4월 중순이라 코앞에 닥쳐온 셈이다.

강수는 형식적인 절차를 중시하지 않았다. 형식이 내용을 빛내주는 것은 틀림없지만 진짜로 중요한 것은 내용이지 형식은 아니다. 기본적으로 남들 하는 만큼 하면 되고, 결혼식 준비는 주하가 원하는 대로 따를 생각이다.

꼬르륵!

잠시 생각에 잠겨 있는 강수를 지켜보고 있던 서혁중이 웃으며 말했다.

“흐흐, 선배님. 배에서 천둥 치는 소리가 요란하게 나는데요?”

강수가 갑자기 몰려드는 허기에 배를 움켜잡았다.

“오늘따라 배가 요동치네? 밥 먹으러 가자. 어디로 갈까?”

“맛있는 거 먹으러 가죠?”

“넌 맨날 ‘맛있는 거’만 얘기하지 말고 어디서 뭘 맛있게 하는지 구체적으로 얘기해 봐라.”

“하하. 전 가리는 게 없어서 뭘 먹어도 상관없습니다.”

고원철이 식당을 제안했다.

“강수 선배님, 정우 칼국수 어때요? 만두도 맛있고, 해물 칼국수도 국물이 진해서 일품이잖아요.”

“날도 추운데 따뜻한 해물 칼국수 좋지. 거기로 가자.”

“네. 저도 정우 칼국수 집 만두 좋아합니다. 그 집 만두 먹다가 다른 집 만두 먹으면 맛없어 못 먹죠.”

고원철이 웃기지도 않는다는 얼굴로 핀잔을 줬다.

“넌 가리는 음식 없이 뭐든 맛있게 먹는다며 그건 무슨 소리냐?”

“인마, 그래서 단서 달았잖아. 잘 새겨들어라. 선배님, 어서 가시죠.”

사무실을 나선 세 사람은 지하주차장으로 내려갔다.

강수의 SUV에 오른 서혁중이 강수에게 말했다.

“선배님, 이 차 탈 때마다 느낀 건데 이제 차 교체할 때도 되지 않았습니까? 돈을 억수로 버는데 말입니다.”

부르릉!

시동을 건 강수가 무덤덤하게 대답했다.

“그렇긴 하지만, 차가 잘 굴러가서 새 차 사야 한다는 생각 안 든다. 중고로 팔고 다시 사기도 귀찮고. 걍 망가질 때까지 타다 새 차 사는 게 낫지 않겠냐?”

“와, 선배님은 차 욕심이 전혀 없네요? 원만한 남자는 뽀대 나는 차를 굴리고 싶어 하는데 말이죠.”

강수가 피식 실소했다.

고급 차나 명품으로 자기를 뽐내는 일에는 별 관심 없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사치를 부릴 수 있는 금수저 출신도 아니고, 그만한 돈을 벌지도 못했기 때문에 명품에 관심 가질 수조차 없었다. 애초에 자기는 명품과는 아득히 멀리 있는 소시민에 불과했다. 이제 명품을 살 수 있는 여건이 되었지만, 명품과는 인연 없는 삶을 살아왔기 때문에 새삼스럽게 셔츠 한 장에 100만 원 하는 명품을 사 입고 싶은 마음도 생기지 않았다. 더구나 자기가 만나고 있는 친구와 동기, 선후배, 사회 활동하며 사귄 지인들은 자기처럼 값비싼 명품과는 거리가 멀다. 계속 그들과 어울려 살아갈 텐데 돈 좀 번다고 명품으로 치장하고 다닐 필요가 없었다.

“차가 고장 없이 굴러가면 됐지 달리 바라는 건 없다. 요즘은 제때 부품 갈고 차량 검사만 해주면 잔고장도 없더라. 지금처럼 말썽만 부리지 않으면 당분간은 이 차 몰련다.”

고월철이 강수 말에 동조했다.

“저도 선배님하고 같은 생각입니다. 물건을 한 번 사면 수명이 다할 때까지 써야지 싫증나면 멀쩡한 제품 버리는 사람이 너무 많은 것 같거든요. 쓸 수 있는 제품 버리는 것도 엄밀하게 보면 자원 낭비이고, 환경파괴 행위나 마찬가지인데 말이죠.”

듣고 있던 서혁중이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야, 뭘 그렇게 복잡하게 따지면서 사냐? 현실에 맞게 대충 살면 되지.”

“너 전 지구적으로 환경이 얼마나 심각하게 파괴되고 있는지 알면서 하는 소리야? 약간의 불편을 감수하면 환경보호에 일조할 수 있는데 대충 살아야 해?”

“참나. 내후년이면 세계 인구는 80억 돌파한단다. 한쪽에선 환경 살리겠다고 각종 규제와 환경 보호 정책 실행해서 10을 보호한다고 하지만, 다른 쪽에선 먹고 살기 위해 300을 파괴하고 있거든. 세상 돌아가는 게 우리 맘대로 되지 않아. 그러니까 이것저것 따지면서 골치 아프게 살 거 없다고 봐. 신제품도 마음에 들면 사서 쓰면 되고, 필요 없으면 안 사면 되는 것이지.”

“어휴, 말하는 거 하곤. 10하고 300이라는 수치는 어디 기관에서 발표한 자료냐?”

“대충 그렇다는 거지 내가 환경파괴 수치를 어떻게 아냐?”

“그럼 그렇지. 넌 신빙성 없는 말을 잘도 한다.”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강수가 한 마디 던졌다.

“난 원철이 말이 맞는 것 같은데? 환경보호보다 환경파괴가 더 빨리 진행되는 것이 현실이지만, 어쨌든 조금이나마 노력하는 게 낫지 않겠어?”

“그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 환경보호를 하지 말자는 건 아니고 자기 방식대로 살자는 거죠.”

“네 방식대로 사는 건 좋은데 다른 곳에서는 지금처럼 개념 없는 소린 하지 마라. 사람들이 우습게 여긴다.”

“안다, 알아. 자식이 별걸 다 잔소리하네. 아무렴 내가 그런 분위기도 파악 못 할까?”

서혁중이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골이 난 서혁중을 보며 강수가 피식 웃으며 또 한 마디 했다.

“사실 혁중이 말도 일리는 있어. 어차피 두 번 사는 인생도 아닌데 자기 철학대로 사는 것도 좋겠지.”

“거 봐라 쨔샤. 선배님도 인정하시잖냐. 그리고 너도 이제 돈도 꽤 버는데 궁상 그만 떨고 돈 좀 쓰면서 살아라. 그래야 여자도 만나지 맨날 그렇게 빈티 좔좔 흐르는 꼴로 다니면 혼자 늙어 디질 거다.”

“뭐어!”

고원철이 인상을 쓰면서 서혁중의 뒤통수를 노려볼 뿐 반박하지 못했다. 분하지만 서혁중 말이 바늘처럼 가슴을 찔렀기 때문이다.

지하 주차장에서 지상으로 나온 강수 SUV가 어둠을 쫓아내고 있는 가로등 불빛 속으로 달려나갔다. 정우 칼국수는 일성빌딩에서 다섯 정거장 떨어져 있었다.

걸어갈 거리는 아니어서 차를 몰고 가는 것이다.

*

강수의 세 번째 개인전에 전시된 115점의 작품은 전시회 개막 2주 차인 8일 만에 완판 기록을 썼다. 선암갤러리에서 발표한 총매출액은 약 117억 원이다. 비록 작품 수가 많아서 올린 매출액이었지만, 출품 작품 수를 떠나 개인전 매출액으로만 치면 이는 한국 미술계의 역대급 매출액이었다.

인터넷 매체에서 다투어 이강수 개인전 매출액에 관한 기사를 써 올리기 시작했고, 인터넷과 SNS를 통해 완판과 매출액 소식이 빠르게 퍼져나갔다. 그리고 117억과 함께 이강수라는 이름 석 자가 다시 포털사이트 실검에 등장했다.

한국 미술계의 눈이 온통 이강수 개인전으로 쏠렸고, 미술 관계자들이 선암갤러리를 찾았다. 개인전 매출액 117억 원이라는 어마어마한 금액은 미술계 관계자뿐만 아니라 네티즌과 일반 대중의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이강수 그림에 대한 궁금증을 참지 못한 수많은 사람이 개인전이 끝나기 전에 이강수의 그림을 감상하기 위해 선암갤러리로 몰려들었다.

선암갤러리에는 때아닌 관람객이 몰려들어 정상적인 관람이 곤란할 정도로 혼잡한 지경에 이르렀고, 캐리커처 행사 때처럼 선암갤러리 앞에 관람객이 길게 줄 서는 진풍경이 다시 벌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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