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그리는 마법사 - 172회
비슷한 나이에 의학박사 타이틀을 단 여자에게 비웃음 받으며 자존심 구기느니 이강수의 지압 얘기는 언급하지 않는 것이 나았다.
최경화가 대답했다.
“네. 안마받으면 저린 게 덜하고, 움직이는 것도 편하다고 해서 4년 전부터 꾸준히 안마원에 다니고 계세요.”
“안마원 다닌다고 손상된 뇌세포가 회복되거나 정상으로 돌아오지는 않아요. 한약이나 양약을 먹어도 마찬가지죠. 어르신 뇌가 정상으로 재생된 현상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네요.”
“특별한 이유로 인해 뇌세포가 회복되는 경우는 없나요?”
최경화의 질문에 정미란이 잠시 생각을 정리하고 나서 입을 열었다.
“과거에는 뇌세포는 재생하지 못한다고 했죠. 최근에는 해마에서 줄기세포가 발견되어 뇌세포도 재생한다고 밝혀졌어요. 다만 손상된 뇌세포를 대체할 정도는 아니죠. 이정구 박사 같은 분들은 생기(生氣)가 유전자를 활성화해서 뇌세포를 재생할 수 있다고 하지만 현실적으로 의미 있는 연구 결과가 나오지 않았어요. 다만 뇌 가소성에 의해 죽은 뇌세포의 소실된 기능을 재활을 통해서 다른 뇌세포가 일부 대신해 약간 회복할 수 있을 뿐이죠. 근래 들어 세계적으로 의료벤처 기업들이 사람의 골수에서 뼈나 혈관, 연골, 신경 등이 되는 간엽계 줄기세포를 채취해 대량 배양하는 방법으로 세포의약품을 개발하고 있기도 해요. 하지만 뇌질환은 여전히 현대의학이 극복할 수 없는 분야로 남아있어요. 한데 어르신의 뇌세포가 이렇게 회복된 현상은 거의 기적과도 같은 일이죠. 그래서 말씀인데 어르신이 입원하셔야 할 것 같아요.”
고개를 끄덕이며 듣고 있던 최경화가 입원이라는 말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입원이요? 왜요?”
“뇌세포가 재생된 건 특이한 현상이라 정밀한 검사가 필요해요. 그런 이상 현상을 보건대 앞으로 어르신께 무슨 증상이 발생할지 예측할 수 없거든요. 아버님께서 입원하셔야 돌발 상황이 발생하면 우리가 즉각적으로 대응할 수 있으니까요.”
정미란은 뇌세포의 재생으로 인해 마치 최완제의 건강에 문제가 일어날 소지가 있다는 뉘앙스를 풍겼다. 최완제의 뇌세포가 정상으로 재생한 원인을 검사해보려는 속마음은 숨겼다. 왜 그런 현상이 생겼는지 검사해서 원인을 규명할 수만 있으면 세계적인 명성을 얻음은 물론이고 막대한 부를 거머쥘 것이다.
최경화가 미간을 찌푸리며 부정적인 어투로 말했다.
“입원은 안 하실 것 같은데요? 병원에 뭐 하러 가냐는 걸 억지로 모시고 온 걸요.”
당연히 입원할 것으로 생각했던 정미란이 미간을 찡그렸다.
“어르신 연세를 생각하면 입원하시는 것이 안전하지 않겠어요?”
“그렇긴 하지만 나보다 아버님 의사가 중요하죠. 아버지께 여쭤보겠어요.”
최경화가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가 최완제가 휴식하고 있는 대기실로 갔다. 자기 뜻에 따르지 않는 최경화를 짜증 난다는 듯한 눈초리로 쏘아보다 의자에서 일어나 최경화를 쫓아갔다.
“아버지, 몸은 어때요?”
“어떻긴 괜찮지. 검사 결과는 나왔고?”
“네. 검사 결과 손상된 부위 뇌세포가 거의 정상으로 재생됐대요. 그래서 저리고 마비 증상이 없어진 거구요. 괴사한 뇌세포가 왜 정상으로 재생됐는지 이유는 몰라서 검사해봐야 하겠대요.”
“헐헐. 몸이 좋아졌으면 됐지 이유는 알아서 뭐 하게? 검사 끝났으면 집으로 내려가자.”
“아버지. 의사 선생님이 뇌세포가 정상으로 재생된 원인을 조사해봐야 한다면서 입원하시래요. 입원하실래요?”
“입원? 뭔 소리야? 아픈 데가 있어야 입원하지 몸이 멀쩡한데 왜 입원해? 어여 내려가기나 하자.”
정미란은 자기가 입원하라고 하면 당연히 입원할 줄 알았지 입원을 거부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최완제가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가려 하자 정미란이 다급하게 앞을 가로막았다.
“어르신, 잠깐만 제 말 좀 들어주세요.”
“무슨 말?”
“어르신. 괴사한 뇌세포가 재생된 것은 이상 현상입니다. 지금은 괜찮지만 갑자기 돌발적인 증상이 나타날 수 있어요. 그럴 때 응급조치가 늦으면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 최악의 사태에 대응하려면 세계적인 의료시설을 갖춘 저희 병원에 입원하시는 것이 안전하거든요. 우리 의료진이 어르신의 건강 상태를 24시간 모니터링하면서 건강을 지켜드리겠습니다.”
최완제의 얼굴이 굳어졌다.
“아픈 것은 치료하지 못하더니 몸이 좋아지니까 입원하라는 건 무슨 해괴한 경우야? 일 없소. 경화야, 가자.”
정미란이 옆으로 지나가는 최완제를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입원에 대한 거부가 너무 완고했다. 한숨과 함께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정미란이 표정을 펴고 최완제를 따라갔다. 잽싸게 최완제 옆으로 다가간 정미란은 최완제와 보폭을 맞춰 걸으며 달콤한 제안을 했다.
“어르신. 어르신께서 입원하신다면 VIP 병실로 모시고 입원비와 모든 검사료는 받지 않겠습니다. 조금도 불편하지 않게 편의를 제공하는 것은 물론이고, 언제든지 외출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다시 생각해보세요.”
걸음을 멈춘 최완제가 탁한 노안으로 정미란을 바라보았다.
“왜?”
“네?”
“어째서 늙은이한테 그런 호사스러운 대접을 해주는 건가?”
“그, 그건....”
정미란은 왠지 최완제의 탁하고 흐린 노안을 마주 볼 수 없었다. 고개를 살짝 숙여 눈빛을 피하고 대답했다.
“어르신, 저는 괴사한 뇌세포가 정상으로 재생한 원인을 밝히고 싶습니다. 이는 매우 중대한 일로서 만약 뇌세포의 재생에 관한 약간의 실마리라도 밝혀낸다면 불치병이나 다름없는 수많은 뇌질환을 치료하는데 있어 획기적인 전기를 마련할 수 있을 것입니다. 뇌질환으로 고통받고 있는 수많은 환자를 도와준다고 생각하시고 저희 병원에 입원해주시면 안 될까요?”
최완제가 정미란을 지긋이 바라보다 질문을 던졌다.
“의사 선생. 앞으로 내가 살면 얼마나 살 것 같소?”
뜻밖의 질문에 정미란이 쉽사리 대답하지 못했다. 입원해 달라고 요청하는 입장에서 건강하게 오래 산다고 말하기도 그렇지 않다고 말하기도 적절하지 않았다.
현재 우리나라 노인 인구 중 90세 이상 초고령 노인 수는 20만 명을 훌쩍 넘었다. 100세 이상 장수 노인도 2만여 명에 달한다. 손상된 뇌까지 정상으로 돌아온 최완제가 90세 이상 살 가능성은 충분했다.
“요즘은 백세시대라고 하잖아요. 건강만 잘 관리하면 그 정도는 사실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허허. 백세시대? 의사 선생, 여기 있으면 그나마 백 세까지 못 살 거야. 의사 선생이 얘기한 백 세까지 살기 위해서라도 난 내 집에서 편하게 지내야겠구먼.”
정미란은 최경화와 함께 엘리베이터 앞으로 걸어가는 최완제를 난감한 얼굴로 바라볼 뿐 붙잡지 못했다.
*
12월 7일 12시경.
실내 인테리어가 고급스러운 압구정동의 한 레스토랑으로 김주하와 임해영이 들어섰다.
“어서 오십시오. 예약하셨습니까?”
검정 유니폼에 흰색 와이셔츠를 입은 단정한 복장의 웨이터가 밝은 미소를 지으며 두 사람을 맞이했다.
“최경화요.”
“이쪽으로 오십시오.”
김주하와 임해영은 웨이터의 안내를 받아 창가에 있는 룸으로 들어갔다.
“엄마.”
“안녕하세요?”
창가에 앉아있는 최경화가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를 받았다.
“어서 와라. 식사 가져오세요.”
“예. 알겠습니다.”
공손히 대답한 웨이터가 문을 닫고 물러가자 김주하가 물었다.
“외할아버지는 후유증이 없어졌다면서요? 병원에서는 뭐래?”
“이상 없다고 하는구나. 몸도 예전보다 건강해졌고. 외할아버지는 검사 끝나고 어제 집으로 돌아가셨단다.”
이강수의 지압으로 인해 아버지에게 뭔가 이상 변화가 생겼다는 의문을 품고 있는 최경화는 손상한 뇌세포가 정상으로 재생됐다는 사실을 일부러 얘기하지 않았다.
“어머, 잘됐다. 저번에 시골집에서 뵈었을 때는 너무 초췌해서 눈물 나려 해서 혼났어.”
“이제 걱정 마라. 식사도 잘하시고, 후유증도 없어져서 몸에서 기운도 생겼단다.”
“아유, 다행이다.”
최경화가 본론을 꺼내기 위해 강수를 화제에 올렸다.
“이 서방은 개인전 오픈 준비 잘 끝냈다니?”
“그럼요. 지금 갤러리에서 장 부장님하고 디피하고 있어. 실은 선암갤러리가 오프닝 준비는 물론이고 디피할 사람까지 지원해줘서 강수오빠는 계획대로 디피 하는지 감독만 한대.”
최경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 서방이면 그 정도 대접은 받아야지. 저번 개인전하고 단체전은 개막 당일 전시작이 전부 팔렸다고 했는데 이번 전시회에선 어떨 것 같니?”
“음, 저번 달에 열렸던 단체전 호당 가격에 비교하면 이번 개인전 호당 가격이 2배도 넘게 올랐거든. 그림값이 너무 많이 올라서 개막 당일 완판은 어려울 것 같긴 해. 그래도 전시 기간이 2주나 되니까 팔리기는 다 팔릴 거야.”
똑똑!
작은 노크와 함께 문이 천천히 열리고 웨이터가 애피타이저를 내려놓고 나갔다.
“갤러리에서 오프닝, 디피 다 해주면 전시회 개막해도 바쁘진 않겠구나?”
김주하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오프닝 후에는 수많은 사람한테 축하 인사 받느라 며칠은 바쁠 테고, 기자들하고 인터뷰도 꽤 해야 할걸?”
“이번 주는 바쁘다 치고, 다음 주에는 좀 한가하겠구나.”
“아마도 그러겠죠. 근데 강수오빠는 왜?”
“그게.... 좀 한가해지면 이 서방이 김순희라는 내 친구 남편한테 지압을 해주면 어떨까 싶어서.”
“네? 허리가 안 좋은데 왜 강수오빠한테 지압을 받아?”
“이 서방이 네 외할아버지한테 지압을 해주었잖니? 그게 꽤 효과 있다고 하시는구나. 그 얘길 김순희라고 아파트에 사는 친구한테 해주었는데 걔가 자기 남편 허리가 안 좋다고 이 서방한테 지압을 받고 싶다고 해서 그래.”
김주하가 어이없는 표정을 짓더니 웃음을 터트렸다.
“호호. 강수오빠가 지압해 준 건 외할아버지가 편하게 주무시라고 해 준 것뿐이거든? 지압 한 번 해서 무슨 효과가 있다고 강수오빠한테 지압을 받아?”
“나도 그렇게 얘기했지. 한데 허리는 수술하면 문제가 더 심해진다고 해서 한의원도 다니고 허리 운동도 해봤는데 그때뿐이라고 하더라.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잡으려는 것처럼 이 서방한테 지압 받아보고 싶다니까 한번 얘기해보렴. 어떤 효과를 떠나서 외할아버지처럼 좋아질 수도 있지 않겠니?”
김주하가 고개를 갸웃했다.
“하긴 몇 년이나 계속된 후유증이 강수오빠가 지압한 후에 없어졌다고 하니 신기하긴 하다. 강수오빠가 할지 안 할지 모르겠지만 한번 얘기해 보고 전화할게.”
“효과는 없어도 괜찮아. 친구한테는 네 신랑 될 사람이라 지압 정도는 해줄 거라고 장담했으니까 내가 꼭 부탁한다고 얘기해. 알겠니?”
“음, 알았어요.”
잠시 후 모락모락 김이 피어오르는 메인 요리 해물 파스타가 나왔고, 엄마와 식사를 끝낸 김주하는 인사동으로 향했다.
*
선암갤러리는 강수의 개인전 출품 작품 디스플레이 준비로 분주했다.
장영봉과 잡담 나누며 디스플레이 작업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강수가 실내로 들어온 김주하를 반갑게 맞았다.
“주하야, 어서 와.”
“오빠, 안녕. 장 부장님, 안녕하세요.”
“그래. 주하 씨, 오랜만이야.”
“헤헤. 그렇네요. 오빠, 점심은 먹었어요?”
“응. 여기 일하는 사람하고 장 선배님하고 다 같이 가서 쌈밥 먹었어. 주하는?”
“엄마가 해물 파스타 사줬어요. 오빠, 잠깐 할 얘기 있는데 괜찮아요?”
“물론이지. 얘기해.”
“저쪽으로 가요.”
김주하가 강수의 팔을 잡아 사람이 없는 공간으로 갔다. 강수가 호기심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무슨 비밀스러운 얘기인데 구석으로 왔어?”
강수가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자기를 바라보자 김주하가 장난스럽게 웃었다.
“히히. 오빠가 외할아버지 지압해 줬을 때 외할아버지가 오빠 손이 약손이라고 했잖아요.”
“응? 그건 농담으로 하신 말씀이지. 약손은 무슨.”
“근데 그걸 엄마가....”
김주하가 엄마와 만나서 했던 얘기를 강수에게 자세히 들려주었다.
“... 그래서 효과가 있든 없든 상관없다며 지압을 해달라고 엄마가 간곡하게 부탁했어요.”
“흐음, 그래?”
“근데 오빠가 지압하고 나서 외할아버지 증세가 좋아진 게 좀 신기해요. 정말로 오빠가 지압해서 좋아진 걸까요?”
주하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고, 강수가 가볍게 웃어넘겼다.
“하하. 그럴 리가 없잖니? 우연이겠지?”
“헤헤, 그런가?”
김순희 아주머니 남편은 대기업 임원으로 시골에서 상경해 자수성가한 사람이라고 한다. 허리는 20대 초반 아파트 보일러 내부 청소 알바할 때 무거운 폐기물 옮기다 다쳤는데 젊었을 때는 몰랐으나 몇 년 전부터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고 한다.
지압하는 척하며 허리를 고쳐 주는 것은 어렵지 않다. 단지 김순희 아주머니의 남편 허리를 고쳐주면 자기 능력이 점점 다른 사람에게 알려질 공산이 크다.
‘오히려 그게 나은가? 한 명씩 치료하다 보면 소문이 퍼질 테고 재벌가 환자를 만날지도 모르지.’
재벌 출신 갑부를 치료해 단번에 거액의 기부금을 받으면 좋겠지만, 현실적으로 그런 병자 찾는 일조차 쉽지 않다. 설사 그런 병자가 있어서 병자를 찾아가 자기가 병을 치유할 수 있다고 하면 모르긴 해도 미친놈 취급 당할 것이다. 물론 간단한 시범으로 생각을 바꾸는 건 어려운 일은 아닐 것이다.
‘일단 상류층 사람을 치료하면서 내 능력을 알리는 것이 순서 같긴 한데....’
그전까지는 자기의 치유 능력이 알려져서 좋을 것 없다고 생각하고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다. 지금도 그 생각은 변함없지만 제한된 사람을 대상으로 치료하면 별 문제는 아닐지도 몰랐다. 특히 재산의 절반을 기부해야 한다는 원칙을 관철하면 돈이 아까워서라도 웬만해서는 치료해달라고 달려들지 않을 것이다.
‘내 능력이 알려지는 것이 귀찮지만 한번 만나보자.’
나름 생각을 정리한 강수가 말했다.
“지압해 주는 거야 어렵지 않아. 다음 주쯤에 시간 내서 김순희 아주머니 만나볼게. 엄마한테 그렇게 말씀드려.”
“헤헤. 알았어요. 고마워요. 오빠, 일 보셔야죠?”
“응, 미안한데 디피 끝나고 보자.”
“네. 이따 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