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그리는 마법사 - 171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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킹크랩 요리 집에서 강수 옆자리에 앉은 송다린은 마음이 설레는 한편 가슴은 풍선처럼 부풀어 있었다. 항상 강수를 따라다니며 틈을 주지 않았던 김주하가 어쩐 일인지 오늘은 이 자리에 오지 않았다. 김주하가 이강수 옆에 붙어 있지 않는 경우는 흔치 않았다.
‘기회다!’
송다린은 속으로 기회라고 외쳤다.
김주하가 동석하지 않는 데다 술까지 한잔하는 이런 자리는 알바하면서 처음이었다.
술은 화이트와인이지만 와인도 마시면 술기운이 퍼진다. 약간이라도 술기운이 몸에 퍼지면 대부분 사람은 경계심이 느슨해진다. 송다린은 오늘이야말로 이강수를 공략할 절호의 기회라는 판단을 내렸다. 오늘 같은 기회마저 날리면 이강수 선배를 어떻게 해보겠다는 생각은 접는 편이 나을 것이다.
문제는 무슨 수로 이강수와 자기, 단둘만 남는가였다.
‘이 기회를 어떻게 살리지? 그냥 술 취한 척하고 집까지 바래달래?’
송다린이 이강수를 힐끔 쳐다보았다.
‘강수 선배도 와인 마셔서 대리기사 부를 텐데 날 집 앞에 내려주고 갈 게 뻔하고.’
송다린은 와인을 홀짝이며 이강수를 공략하기 위한 전략을 세웠으나 마땅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스킨십? 이미 몇 번 시도했지만 먹히지 않았어. 오늘은 와인도 마시니까 한 번 더 해봐?’
채색이나 그림에 관해 물어보며 은근히 강수에게 밀착하거나 김주하가 없을 때는 밥 먹으러 가자며 팔짱도 껴보았다. 스킨십과 눈빛으로 자기 마음을 충분하게 표현했지만 결국 먹히지 않았다.
‘선배들은 어떻게 된 게 특별한 일 아니면 술집도 안 가서 술을 먹일 수도 없고. 정공법밖에 없는 걸까? 결국 체이고 말 테지만.’
지금까지 변하지 않았던 이강수가 마음을 고백한다고 자기를 받아주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체일 때 체이더라도 마지막 시도는 해보고 정리하든 뭘 하든 해야 할 것 같았다.
“다린이는 무슨 생각하고 있어? 내가 다 먹기 전에 너도 좀 먹어.”
서혁중의 장난에 정신 차린 송다린이 배시시 웃었다.
“헤헤. 알았어요. 와인 한잔하고요. 와인 주세요.”
서혁중이 건네준 와인을 받은 송다린이 어깨로 강수의 팔을 살짝 밀었다.
“선배님, 와인 한 잔 따라줄게요.”
“응? 아직 있는데.”
“아이, 비우면 되죠.”
송다린이 눈웃음을 날리며 강수 팔을 애교 있게 톡 쳤다.
“제가 한 잔 따라주고 싶어서 그래요.”
“어? 그, 그래.”
매정하게 거절하지 못한 강수가 와인을 비우고 잔을 내밀었다.
콸콸!
송다린이 강수 잔에 와인을 쏟아부었다. 순식간에 와인 잔에 와인이 가득 찼다.
“어어. 넘치겠다.”
“호호, 미안해요. 조금 많이 따라졌네. 저도 한 잔 주세요.”
한 송이 장미처럼 요염하게 미소 띤 송다린을 보며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은 강수가 송다린의 잔에 와인을 적당히 따라주었다.
이강수에게 애교부리는 송다린을 지켜본 서혁중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휴, 다린이 저 녀석. 아직도 강수 선배를 마음에 두고 있는 거야?’
김주하와 있을 때 보란 듯이 꼬박꼬박 형수라고 호칭하고, 두 사람이 결혼할 사이라고 주지했음에도 불구하고 강수 선배를 향한 송다린의 눈빛이 변하지 않고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이강수가 송다린의 은근한 애정 공세에 한 치의 흔들림도 보이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강수 선배가 다린이한테 넘어갔으면 어쩔 뻔했어? 어휴, 내가 괜한 짓 했지. 이제 며칠 있으면 알바도 끝날 테고 한시름 놓을 수 있겠다.’
자기로 인해 벌어진 일이라 서혁중은 송다린을 예의주시할 수밖에 없었다. 은연중에 송다린을 주시하다보니 자기도 의식하지 못한 사이 송다린의 얼굴, 표정, 감정 상태, 몸매 등 모든 것이 뇌리에 각인되고 말았다. 이젠 눈을 감고도 송다린의 초상화를 그릴 수 있을 정도였다.
과정이야 어쨌든 얼짱 송다린과 친해지고 싶다는 자기 목적은 이뤘지만 그로 인해 강수 선배와 김주하가 욕본 셈이었다. 그나마 송다린이 알바하게 된 경위를 김주하가 묻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자기가 송다린 부른 사실을 알았으면 김주하에게 원망받고 미운털이 박혔을 것이다.
서혁중이 판단했을 때 아직까지 불미스러운 사태가 벌어지지는 않았다.
‘강수 선배가 인물이야. 이런 사실을 다 알고 있을 텐데 조금도 싫은 내색하지 않잖아. 아니 미인이 집적거리는 건데 싫을 리 없는 건가?’
자기야 송다린 같은 미인이 집적거리면 “조상님, 감사합니다.”하고 절이라도 하겠지만, 김주하와 장래를 약속한 강수 선배는 송다린의 접근이 곤혹스러울 것이다.
실없는 생각을 하면서 서혁중은 킹크랩의 탱글탱글한 몸통 살 한 점 집어 입으로 가져갔다.
강수는 모자란 것보다 남는 것이 낫다는 생각으로 킹크랩을 커다란 놈으로 3마리 시켰다. 사내 넷이 양껏 먹었는데도 탁자에는 킹크랩이 아직 꽤 남았다.
“범진아, 먹고 싶은 거 더 있냐? 시켜줄 테니까?”
“네?”
안범진이 황급히 손사래쳤다.
“아휴, 아닙니다, 다른 건 먹지도 않고 킹크랩으로 배불러 보긴 처음입니다. 남은 것도 다 못 먹을 것 같은데요.”
“알았어. 난 손 좀 씻고 올게.”
화장실을 가기 위해 강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강수가 화장실 가는 모습을 송다린이 힐끔 쳐다보았다.
‘기회다!’
송다린이 다시 속으로 외쳤다.
장소는 화장실 앞이라 맘에 안 들지만 이강수와 단둘이 대화할 기회였다, 강수가 화장실 쪽으로 사라진 것을 확인한 송다린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혁중이 눈을 끔벅이며 물었다.
“다린이 어디 가?”
“전화할 데가 있어서요.”
“어? 그래?”
잽싸게 화장실로 가서 손을 씻고 물로 입을 행군 송다린은 문 앞에서 이강수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송다린은 이강수에게 자기 마음을 고백하고야 말겠다는 결의를 다졌다.
이제 곧 이강수 앞에서 자기 마음을 고백할 순간이 닥친다는 사실을 인식하자 갑자기 가슴이 두근두근 뛰기 시작했다. 어떤 남자 앞에서도 가슴이 지금처럼 뛴 적이 없었다. 하긴 남자에게 사랑 고백해 본 적이 없었으니 가슴 뛸 일 없다고 하는 편이 맞을 것이다.
‘내가, 남자 때문에 가슴이 뛰다니 이상해. 강수 선배가 잘나긴 했지만 그림 말고는 특별난 점은 없는데 어떻게 이런 일이 생길 수 있는 거야?’
최고의 남자만 만난 송다린에게 이강수의 조건은 그림 재능만 빼면 평범한 수준이었다.
처음엔 호기심으로 이강수에게 접근했는데 매일 만나서 작품에 관해 대화하고, 같이 작업하면서 지내보니 뭔가 이상한 매력이 있었다. 온종일 같이 있어도 심적으로 부담스럽지 않았다. 무서운 집중력으로 작품을 완성하는 이강수의 모습은 눈부시게 멋있었고, 놀라움을 넘어 존경스럽기까지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강수에게 빠져든 자기 상태가 비정상 같이 느껴진 송다린이 팔딱팔딱 뛰는 가슴을 진정하기 위해 숨을 깊이 들이켰다.
이때, 남자 화장실 쪽에서 이강수가 나왔다.
‘흡!’
심호흡으로 마음의 준비를 하려 했던 송다린은 갑자기 강수가 등장하자 당황해서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여자 화장실 앞에 서 있는 송다린에게 싱긋 미소를 지어 보인 장수는 유유히 홀로 걸어갔다. 강수의 뒷모습을 멍청하게 바라보고 있던 송다린이 정신을 번쩍 차렸다.
‘안 돼!’
송다린이 후닥닥 강수에게 달려가 팔을 잡고 뒤로 잡아당겼다.
뒤에서 송다린이 갑자기 팔을 잡아당기자 강수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송다린을 바라보았다.
“자, 잠깐만. 할 얘기가 있어요.”
송다린이 강수를 화장실 앞으로 잡아끌었다. 송다린이 힘으로 강수를 잡아당긴들 강수가 끌려갈 리 만무하지만, 강수는 순순히 송다린을 따라갔다.
송다린이 강수의 팔을 잡은 채 서글픈 눈빛으로 강수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윽! 이 녀석 눈빛이 왜 이래?’
강수는 뭔가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직감했다.
“선배님!”
“어?”
“선배님은 내가 마음에 안 들고 귀찮죠? 그냥 사라져버렸으면 좋겠죠?”
예상보다 강도가 센 엉뚱하고 황당한 발언에 강수가 흠칫 놀라서 말했다.
“응? 그게 무슨 소리야? 내가 언제 다린이를 귀찮아했다고 그래?”
“그게 아니면요, 왜 맨날 본체만체해요?”
“본체만체한 적 없는데? 다린이가 힘들고 단순한 작업을 헌신적으로 도와줘서 정말 고맙고 오히려 미안할 지경인데.”
“알바에 관한 얘기 하는 거 아녜요. 선배님은 겉으로는 친절하고 상냥하지만 속마음은 데면데면하잖아요.”
“왜 그렇게 생각하지? 그렇지 않아. 난 겉이나 속이나 다르지 않아.”
“그럼 선배님은 날 어떻게 생각해요?”
술기운을 빌린 송다린이 빤히 강수를 쳐다보며 도발적인 질문을 던졌다.
하지만 강수는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생각한 바를 말했다.
“다린이는 예쁘고 그림 재능도 뛰어난 학교 후배지.”
“그저 후배요? 그 이상의 감정은 손톱만큼도 없나요? 난 선배님 때문에 가슴이 이렇게 팔딱팔딱 뛰는데.”
송다린이 강수의 손을 당겨 자기 가슴에 꼭 안았다.
‘헉! 이 녀석!’
본의 아니게 송다린의 봉긋한 가슴에 손이 닿았고, 겨울옷을 입었지만 물컹한 감촉을 느낄 수 있었다. 노브라였다. 손을 빼려면 힘껏 뿌리쳐야 했기 때문에 강수는 손을 빼내지 못하고 송다린의 눈을 차분하게 바라보았다.
둘의 눈빛이 허공에서 교차했다.
송다린은 이강수의 깨끗하고 흔들리지 않는 눈빛에서 김주하를 향한 변치 않는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김주하 때문에 사랑 고백한들 차일 것은 이미 예상하였다. 하지만 미래가 어떻게 변할지는 신만 알고 있다. 자기 마음을 확실하게 전달해서 강수의 마음에 약간의 존재감이라도 남겨놓고 싶었다.
“선배님을 좋아해요. 그것만은 알아주세요.”
좋아한다고 선언해버린 송다린이 와락 강수를 껴안으며 품에 파고들었다.
자기 품에 파고든 송다린을 떼어내지 못하고 가볍게 한숨을 내쉰 강수가 조용히 말했다.
“다린아, 너도 알지만 내게는 주하가 있잖니. 이제 곧 양가 부모님이 상견례 할 테고 내년 4월엔 결혼할 예정이야. 네가 날 좋아한다니 기쁘지만 내가 어떻게 네 마음을 받을 수 있겠니?”
“흑. 그래요. 선배님 마음엔 이미 주하 언니가 차지하고 있죠. 선배님에게 바라는 건 없어요. 다만 하나. 선배님을 좋아하는 내 마음만 알아주면 돼요.”
강수는 송다린의 마음을 진즉부터 알고 있었다. 자기를 바라보는 뜨거운 눈빛과 달콤한 어투와 애교스러운 행동과 은근한 스킨십. 목석이 아닌 이상 송다린의 표현에 깃든 뜻을 어떻게 모를 수 있을까?
강수가 다린이의 어깨를 감싸고 살며시 토닥였다.
“다린이 마음은... 알고 있었어. 그래서 더 조심했던 거고. 나는 다린이가 예술가의 한 명으로 같이 예술 활동을 해나가는 듬직한 후배가 되었으면 좋겠다.”
“네. 선배랑 같이 작품 할 수 있는 화가가 되겠어요.”
송다린은 ‘같이’라는 단어에 힘주어 말했다.
좋아한다고 고백하고 자기 마음을 정리하면 후련할 줄 알았는데 이상하게 가슴이 뻥 뚫린 듯했다. 김주하 때문에 차일 것을 예상했음에도 불구하고 선택받지 못한 현실은 서러웠다. 송다린은 서글픔을 삼키며 한참동안 강수를 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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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대 중반의 뇌신경 전문의 정미란은 모니터에 출력된 최완제의 뇌 MRI 결과를 살펴보며 경악해서 모니터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최완제는 5년 전 뇌졸중으로 뇌 일부가 손상되어 의식을 잃었다. 의식이 불투명한 상태에서 며칠간의 위기를 넘기고 의식이 돌아왔고, 재활 치료하고 후유증은 남았지만, 일상 생활하는 데는 지장 없어서 퇴원했다. 한데 몇 년간 변화가 없었던 손상된 뇌세포가 기적처럼 재생되어 있었다. 손상된 뇌의 회복이라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 최완제의 뇌에서 일어난 것이다.
‘이거 손상된 뇌가 거의 정상으로 회복됐잖아? 이게 무슨 경우지?’
놀랍고 혼란스러런 머리를 정리한 정미란이 모니터에서 최경화에게 시선을 돌렸다.
정미란이 말하기 전에 최경화가 먼저 물었다.
“달라진 게 있나요?”
“네. 엄청난 변화가 있어요. 솔직하게 말하면 모니터에 나온 결과가 믿기지 않아요. 여기 보시죠.”
정미란이 모니터의 왼쪽 스캔 사진을 가리켰다.
“과거에 촬영했던 사진이에요. 뇌 손상 부위를 보시면 알 수 있지만 그전 사진과 비교해보면 변화가 없어요. 한데 오늘 스캔한 이 사진을 보세요. 손상된 부위가 대부분 정상으로 회복되었어요. 약 80% 정도죠. 지금까지 손상된 뇌세포가 이렇게 광범위하게 자연적으로 회복한 경우는 전 세계적으로 전무해요. 대체 환자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겨죠?”
놀란 눈으로 모니터를 보고 있던 최경화가 되물었다.
“무슨 일이라뇨?”
“외국에서 치료받은 적 있나요? 아니면 다른 병원이나 민간요법이라든지.”
“외국이요? 그런 적 없는데요? 단지 일 년에 두 번 한약 다려드시고 읍내 안마원에 다닌 것밖에는 없어요.”
“안마원이요?”
문득 이강수의 지압이 떠올라서 얘기하려다 실없는 사람 취급받을 것 같아 그만두었다. 머리 지압 한 번 한 것으로 손상된 뇌가 정상이 될 리가 없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