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그리는 마법사 - 150회
서혁중이 강수를 불렀다.
“선배님,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세요?”
“어? 이런저런 잡념이 떠올라서.”
“방금 통화하는 거 들었는데 핑크티티 초상화 파나 봐요?”
“그래. 아는 형님 카페에 대여해 줬는데 구입하고 싶다고 하더라. 몇 달 일찍 얘기했으면 한 점에 오백만 원 정도면 됐을 텐데 홍콩경매 때문에 사천 정도 받기로 했다.”
서혁중이 미간을 좁히며 고개를 갸웃했다.
“고작 사천이요? 핑크티티 초상화도 경매에 내놓으면 최소 억대는 갈 텐데 사천에 파는 건 좀 아까운 것 같은데요?”
“억대? 핑크티티 초상화는 팔기로 해서 이제 내 소유가 아니냐. 아깝고 자시고 할 것도 없어.”
고원철이 담담한 목소리로 서혁중에게 말했다.
“초상화 그림이 사실적이면서도 환상적인 분위기가 나서 좋긴 하지. 근데 사천씩이나 하는 그림값이 왜 비싸게 느껴지지 않냐?”
“당연하지, 임마. ‘졸업반 아이들’이 칠억에 팔렸는데 핑크티티 초상화가 사천이면 졸라 싼 거지. 초상화가 사천인 줄 알았으면 나도 하나 샀겠다.”
고원철을 면박하듯 말한 서혁중이 안타깝다는 얼굴로 입맛을 다셨다.
“하여튼 핑크티티 초상화를 경매에 내놨으면 재미있었을 건데 사천에 넘긴 건 너무 아쉽네요.”
“뭐가 재밌냐?”
“핑크티티 요즘 완전히 떴잖아요. 유명 걸그룹 초상화인데 얼마에 낙찰될지 궁금하잖아요. 그뿐만 아니라 초상화별로 낙찰 가격도 다를 텐데 누구 초상화가 가장 비싸게 팔릴지 지켜보는 것도 관전 포인트 아니겠어요?”
고원철이 흥미를 느낀 듯 맞장구쳤다.
“역시 세나 초상화가 제일 비싸게 낙찰되지 않을까?”
“뭔 소리? 지영, 진하, 소냐, 서린 초상화도 각자 매력 포인트가 달라서 경매해 보기 전에는 모르지.”
삑삑삑삑!
이때, 도어락 비밀번호 누르는 소리가 났다.
“형수님이다.”
서혁중과 고원철이 잽싸게 출입문으로 달려갔다.
반코트를 걸치고 언발란스 스타일의 단발머리를 한 김주하와 한결같은 푸른색 투피스 차림의 임해영이 들어왔고, 그 뒤에서 정장을 입은 염진구가 따라왔다. 염진구는 한 손에는 가방을 한 손에는 두툼한 쇼핑백을 들고 있었다.
기초화장만 해서 화장한 티가 나지 않았지만, 김주하의 피부는 뽀얗게 빛이 났다. 강수가 뿌듯한 미소를 지으며 아름답게 빛나는 김주하를 바라보았다.
“어? 진구 선배님. 어쩐 일로 형수님과 같이 오는 거죠?”
쇼핑백을 들고 있는 염진구가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인마, 뭐가 궁금해? 그럴 수도 있지. 이거나 받아.”
“네?”
뭔가 깨달은 듯 쇼핑백을 받은 서혁중이 가볍게 웃었다.
“하하. 엘리베이터에서 만났나요?”
“그래. 됐냐?”
“강수오빠!”
주하가 발랄한 목소리로 강수를 부르며 강수의 품에 달려들었다.
“어서와.”
강수는 사슴처럼 달려든 주하와 포옹한 후 떨어졌다.
“오빠, 오늘 무슨 일 있어서 바쁘게 돌아다녔어요?”
“응, 만날 사람이 있어서 대학교에 갖다왔어. 실은....”
강수는 양진태 교수를 만나 사회복지시설에 관해 나눈 얘기를 간략하게 해주었다.
“와, 요즘 같은 각박한 세상에 자기희생 하면서 어려운 사람을 돕는 분이 계시는구나.”
“이기주의, 개인주의가 만연한 시대인데 평생 자원봉사를 실천하기는 쉽지 않은 일이지. 그래서 내가 존경하는 분이기도 하고.”
“정말 존경스러운 분이다. 복지법인 허가 나면 나도 후원해야겠어요.”
“정말?”
“네. 오빠가 십이억이나 투자해서 후원한 단체인걸요. 나도 조금이나마 힘을 보태고 싶어요.”
강수가 주하의 볼을 손바닥으로 부드럽게 감싸며 고마움을 표시했다.
“고맙다, 주하야.”
“헤헤.”
이때, 건너편에서 서혁중이 고함쳤다.
“선배님, 형수님. 식사 준비 다 됐거든요. 밀어는 식사하고 나누시죠?”
“킥! 오빠, 밥 먹어요.”
“그래. 맛있는 냄새가 난다. 배고픈데 밥 먹자.”
회의용 탁자에는 찬합 열 개에 화려한 비주얼의 한정식이 차려져 있었다.
강수가 탁자에 앉으며 말했다.
“먼저 먹지 뭘 기다리고 있어?”
“맛있는 저녁을 사 온 형수님도 착석하지 않았는데 염치없이 우리 먼저 먹을 순 없죠. 맛있게 먹겠습니다.”
“참나, 어서 먹자.”
군침을 흘리던 서혁중이 전자렌지에 데운 따끈한 떡갈비를 집어 냉큼 입에 넣고 우물거렸다.
“크- 주긴다. 역시 이 맛이야.”
강수가 옆에 앉은 염진구에게 말을 건넸다.
“진구야, 단체전 진행하느라 고생 많지? 내가 신경 못 써서 미안하다.”
염진구가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내 일인데 네가 미안할 게 뭐 있어. 혁중이 하고 원철이가 도와주었고, 필요할 때는 알바도 써서 별로 힘든 것 없어.”
서혁중이 입안에 음식을 꿀꺽 삼키고 말했다.
“선배님, 이번 전시회 흥행할 것 같은 감이 팍 옵니다. 유튜브에 올린 홍보영상 반응도 엄청나게 좋고 유어뉴스, 매일브레인, 톱뉴스 같은 인터넷 매체에서 기사까지 냈잖아요. 그리고 진구 선배님이 미술관, 갤러리, 언론사, 미술대학 할 것 없이 수십 군데 찾아다니면서 관계자 만나서 홍보하고, 자료 돌리고, 배너광고 때리고 정말 죽어라 뛰었거든요. 더구나 칠억 원의 사나이, 강수 선배님이 단체전에 참가한다는 것에 많은 사람이 관심을 보이던데요.”
고원철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진구 선배님이 고생했죠. 고생한 만큼 관람객도 많이 오고 전시 작품도 많이 팔렸으면 좋겠네요.”
“200호짜리 대작이나 강수 그림 빼면 대부분 오백만 원 이하라 관람객만 어느 정도 찾아와도 꽤 팔리긴 할 거다. 너희도 희망을 가져라.”
“캬- 그랬으면 좋겠네요. 그나저나 내 작품은 몇 점이나 팔릴까? 한 점에 삼백 밖에 안 하는데 말이지. 기왕이면 전부 팔렸으면 좋겠다.”
“꿈도 야무지다. 넌 지인들한테 얼마나 연락했냐?”
“이번엔 꽤 연락했지. 한 70명쯤 되나?”
“70명이면 7점만 팔려도 고마운 거지. 일반 관람객이 살 거란 기대는 안 하는 게 속 편할 거야.”
“임마, 그걸 누가 모르냐. 그래도 이번 전시회만큼은 강수 선배님도 출품하고, 예술계 유망주들이 집결한 전시회니까 시너지 효과를 기대하는 거다.”
문득 강수가 말했다.
“진구야, 전시 가간을 짧게 잡은 것 같아 좀 아쉽다. 열흘이나 이주쯤 해야 했는데.”
“그게 1, 2, 3층 전부 비는 날짜가 그때뿐이라서 어쩔 수 없었어. 사실 대관료도 부담돼서 아트페어 개념으로 전시를 기획하기도 했고.”
서혁중이 음식을 집어 먹으며 지나가는 투로 말했다.
“강수 선배님, 이번 전시에서 투자금 회수하면 내년에도 단체전 또 열죠?”
“내년에도?”
“네. 전시회가 이익도 나고 성공하면 굳이 일회성으로 끝낼 건 없지 않습니까? 아예 매년 정기적으로 개최하면 정말 청년 예술가들에게 희망을 줄 수 있지 않을까요?”
강수와 진구가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거 괜찮은데? 키아프나 마니프처럼 한국 청년 예술가 아트페어를 연례행사로 개최할 수 있잖아. 그렇지 않냐, 진구야?”
강수의 말에 염진구가 대답했다.
“이번 단체전이 이익 내고 성공한다면 매년 개최하는 것도 좋겠지만 일단 결과물을 지켜본 후에 논의해 볼 문제 같은데?”
잠시 염두를 굴린 강수가 강경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냐. 손해나봐야 얼마나 나겠어. 혁중이 말대로 매년 정기적으로 개최하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진구야, 너도 한 번 고생하고 끝나는 것보다 이번 전시를 토대로 매년 전시를 진행하는 게 더 낫지 않겠어? 새로운 프로그램도 개발하고, 참여자도 확대하면서 규모를 키워나갈 수도 있고, 나중엔 한국 청년 예술가 타이틀을 건 뜻깊은 연례행사의 하나로 자리 잡는 거지. 게다가 규모가 커지면 네가 행사위원장을 맡아야 할 테고.”
“와, 행사위원장이면 엄청난 감투잖아요.”
서혁중의 너스레에 염진구가 피식 실소했다.
“규모도 커지고, 이익까지 내면 안 할 이유가 없지. 하지만 매년 행사를 열고, 규모를 키우려면 사무실도 얻어야 하고, 직원도 써야 하는데 이익 내기가 쉽지 않을 거다. 그렇다고 적자 행사를 매년 열 수는 없으니까 결과가 나오면 얘기하자는 거다.”
“좋아. 시간은 넉넉하니까 단체전이 끝난 후에 결과물을 놓고 논의해보자.”
말은 논의해보자고 했지만, 강수는 내심 매년 단체전을 개최하는 쪽으로 마음을 굳혔다.
일반 대중의 미술품 구매는 예술품이 좋아서 단순 감상용으로 구매하는 측면도 있지만, 주요 목적은 투자나 재테크다. 그 때문에 일반 대중이 수천만 원씩 하는 중견작가의 작품을 사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반면에 구매 가능한 그림, 그림값이 비교적 저렴한 청년 예술가의 작품은 그림값 상승의 가능성이 작고, 재테크 투자로는 위험하다는 불안감 때문에 작품이 좋아도 구매력이 떨어진다.
청년 예술가를 대상으로 대규모 전시회를 매년 정기적으로 개최하면 중간에서 완충 역할을 할 수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청년 예술가는 전시회를 통해 작품 활동을 계속할 수 있는 계기가 되고, 작품 활동을 계속하면 그림값도 꾸준히 오른다. 또한 누군가는 스타작가로 성장할 것이고, 그의 작품을 구매한 사람은 큰 수익을 얻을 수 있다. 그러면 일반인이 우려하는 불안감이 어느 정도 해소될 여지가 있다.
잠자코 음식을 먹고 있던 주하가 생선구이의 살을 발라내 강수 입에 가져갔다.
“오빠, 아-”
주하가 들이민 생선구이를 강수가 받아먹자 주하가 생긋 웃으며 말했다.
“강수오빠, 이제 일 얘기는 밥 먹고 하고 다른 얘기 해요. 알았죠?”
“아, 밥 먹을 때 일 얘기 하는 게 아닌데 미안.”
“앗, 미안합니다. 제가 괜한 얘기를 하는 바람에. 앞으로 밥 먹을 때는 그림 얘기하지 않겠습니다.”
“호호. 딱딱한 일 얘기 아니고 재미난 그림 얘긴 괜찮아요.”
“넵!”
강수 일행은 화제를 돌려 일상생활에 대해 담소를 나누며 즐겁게 식사했다.
*
다음 날.
해는 중천에 떠올라 따스하게 빛났지만, 겨울로 넘어가는 계절의 길목에 선 북한산의 공기는 서늘했다. 자연은 순리대로 흐르며 작은 변화를 통해 겨울을 준비했다.
마나회로 수련을 마친 강수는 아파트로 돌아가는 길에 인근에서 규모가 가장 큰 마트로 갔다.
강수는 지체하지 않고 견과류 판매대로 갔다. 진열된 견과류를 훑던 강수가 사야 할 물건을 발견하고 걸음을 멈추었다.
‘몇 개나 필요할까?’
강수가 집어 든 상품은 600g짜리 카카오닙스였다. 120*165cm 캔버스 사이즈에 펼쳐놓을 양이 필요했다.
‘한 봉으로 삼십 센티 정사각형을 커버하면 약 24봉이 들어가겠구나.’
봉지에 든 양을 보며 대충 계산을 끝낸 강수는 카카오닙스 24봉을 장바구니에 넣고 계산대로 가 카카오닙스를 계산대에 올려놓았다. 발렌타인데이도 아닌데 계산대에 카카오닙스가 수북이 쌓이자 40대 중반의 계산원이 의아한 눈으로 강수를 힐끔 쳐다보았다.
“종량제봉투 두 개 주세요.”
“네.”
계산을 치른 강수는 종량제 봉투 한 개에 카카오닙스 열두 개씩 담아 아파트로 올라갔다.
강수는 카카오닙스를 이용해 뉴욕경매에 출품할 세 번째 작품을 구상했다. 카카오닙스를 그림의 재료로 쓰려는 것은 아니고, 잘게 부서져 있는 카카오닙스의 형태와 질감, 명암을 사실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카카오닙스를 구매했다. 카카오닙스 조각 하나하나 그려야 하는 세 번째 작품은 꽤나 지난한 작업이 될 것이다.
‘그래도 카카오닙스를 소재로 한 그림이 아동 노동력에 관한 메시지를 환기할 수 있다면 물감칠이 까다롭긴 해도 보람은 있을 거야.’
카카오닙스 조각 하나하나 물감칠할 생각 하면 난감하지만 한번 해보기로 마음먹었다.
‘끈기와 집중력에는 도움 되겠지?’
긍정적으로 생각하며 욕실로 들어가 땀을 씻고 나온 강수는 캐주얼한 콤비 정장을 입고 외출 채비를 끝냈다.
‘작업실로 가서 카카오닙스를 펼쳐놔 보자. 상상했던 대로 그림이 나올지 궁금하네.’
강수는 주차장으로 가서 차를 몰아 작업실로 향했다.
강수가 비닐봉지 두 개 들고 작업실로 들어서자 서혁중이 반색해서 다가와 비닐봉지를 낚아채 내용물부터 확인했다.
“선배님, 이거 죄다 카카오닙스네요? 무슨 카카오닙스를 이렇게 많이 샀습니까?”
“필요하니까 샀지. 뭐 하러 샀을 거 같냐?”
“요즘 음식을 소재로 작품 하는 작가들도 있는데 선배님도 카카오닙스로 작품 만들려는 건가요?”
고원철이 다가와 강수의 질문에 대답하자 서혁중이 생각났다는 듯이 손바닥으로 이마를 탁! 쳤다.
“아, 맞아. 타냐 슐츠라는 설치미술가는 설탕, 사탕, 글리터 가루로 스케일이 꽤 큰 캔디랜드 같은 환상적인 작품을 만들었죠. 구성연 작가는 사탕 꽃으로 유명하고요. 선배님도 이걸로 작품 하게요?”
“음, 원철이가 절반은 맞췄네.”
강수가 회의용 책상으로 가 책상 위에 놓인 잡다한 물건을 옆으로 내려놓고, 바닥을 깨끗하게 닦았다. 카카오닙스를 개봉해 책상 위에 쏟으며 두 후배에게 말했다.
“너희도 카카오닙스 여기에 쏟아 봐라. 흘리지 않게 잘 쏟아.”
“네, 선배님.”
책상 위에 카카오닙스가 수북하게 쌓였다.
강수는 카카오닙스를 가로, 세로 120*165cm의 직사각형이 되게 고르게 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