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9
그림 그리는 마법사 - 119회
*
다음날.
강수가 침대에서 일어난 시각은 오전 열 시.
전날 자정에 한남동에서 아파트로 돌아온 강수는 간단히 세수하고, 손발만 닦고 바로 잠자리에 들었다. 그리고 오랜만에 긴 숙면을 취하고 일어난 것이다.
‘마나회로 수련은 건너뛰자.’
오늘부터 할 일이 많았다.
두 번째 개인전 작품, 단체전에 출품할 작품 등 작업할 그림도 많았고, 단체전 참여 작가도 물색해야 한다.
‘종대와 동석이는 오늘 만나서 얘기하면 되지만.... 다른 작가들은 어떻게 한다?’
박보람, 함기하, 윤세미, 조무용, 정윤정, 홍수인, 이성경, 이명호.... 등 강수의 뇌리에 떠오르는 자기 또래의 젊은 작가는 약 30여 명이다. 대학 선후배가 여덟 명이고 일곱 명은 종대와 박해나, 김이연, 장동운을 뺀 작년 한국청년화가 12인전에 참여했던 작가들이다. 나머지는 열다섯 명은 학부 시절 자기에게 부재한 특별한 재능을 가진 인근 대학교 미대생으로 기억에 선명하게 남아 있는 친구들이다.
스마트폰을 꺼내 연락처 목록을 살펴보았다.
‘열 명은 연락처가 없구나.’
문제는 연락처 없는 열 명만이 아니었다. 어디에 거주하고 있는지도 모를 다른 수십 명의 작가를 섭외하려면 발품으로는 해결될 것 같지 않았다.
‘우선 종대하고 동석이에게 연락하고 토요일에 진구와 상의해보자.’
김종대에게 전화를 걸려던 강수가 멈칫했다.
‘가만, 사업자등록증 만들라고 했지. 생각난 김에 사업자등록증 먼저 만들어야지. 어, 그리고 보니 얼굴도 안 씻었네?’
피식 실소를 지은 강수는 정신도 차릴 겸 얼굴을 씻고 와 컴퓨터를 켰다. 인터넷을 연 강수는 홈택스에 접속해 사업자등록증 발급 페이지로 들어갔다.
개인정보를 입력하기 전에 상호 기입란이 나왔다.
‘상호는 생각해보지 않았는데 뭐로 하지?’
고민했지만 마땅한 상호가 떠오르지 않았다.
‘에이, 이딴 걸로 고민하지 말자.’
타타탁!
상호 기입란에 써진 상호는 강수아트.
자기 이름을 붙였는데 어딘가 빈약한 느낌이 들었다.
“음, ‘강수아트’는 아닌가?”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강수는 강수아트를 지우고 다시 타이핑했다. 상호란에 강하아트라는 글자가 나타났다.
“‘강하아트’ 이건 좀 괜찮은 것 같다. 이걸로 하자.”
강하아트는 강수의 ‘강’, 주하의 ‘하’자를 가져와 지은 상호였다. 상호를 정하고 일사천리로 사업자등록증 발급 신청을 끝냈다.
‘사업자등록증 나오면 구청 가서 사업 신고하라고 했지? 일단 한 가지는 처리했고.’
스마트폰을 집은 강수는 김종대에게 전화했다.
신호음이 끊기고 스마트폰에서 종대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강수구나. 오랜만이다.]
“그래. 요즘 바쁘냐?”
[나야 개인전 끝나고 한가하지.]
“다음 전시회는 잡히지 않았고?”
[아직 안 잡혔어. 그렇지 않아도 세 번째 개인전 열어 줄 갤러리 물색 중이다.]
김종대는 두 번째 개인전에서 출품한 26점 가운데 15점을 판매했다. 신진작가가 두 번째 개인전에서 전시 작품을 절반 넘게 판매한 것은 희망적이고 성공적인 전시회라고 볼 수 있었다. 그림 가격도 12만 원 선에 책정해서 안정적인 그림 값을 형성했다.
“다행히 스케줄 안 잡혔구나. 잘 됐다. 전시에 관해 할 얘기가 있는데 오늘 저녁에 시간 되냐?”
[남아도는 게 시간인데 널널하지. 한데 전시라니 무슨 얘기냐?]
“청년 예술가가 대거 참여하는 대규모 단체전 계획하고 있거든. 너하고 동석이가 참가하면 좋을 것 같아서.”
[대규모라니? 몇 명이 참여하는 단체전인데?]
“적어도 백 명 이상.”
스마트폰에서 놀람이 깃든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뭐? 청년 예술가를 대상으로 그런 단체전 기획한다는 소문은 못 들었는데? 누구한테 들었냐? 주최 측은 어디고?]
“주최 측은 ‘강하아트’고, 기획은 진구가 하고 있다.”
[진구? 강하아트? 그런 갤러리도 있냐? 처음 들어본다.]
강수가 속으로 웃었다.
당연히 처음 들어볼 것이다. 조금 전에 만들었으니까.
“오랜만에 맥주 한 잔 할 겸 만나서 자세하게 얘기하자. 어디서 만날까?”
“좋지. 대학로 레벤호프 7시 어때?”
“알았다. 동석이에게 따로 연락 안 할 테니 동석이 하고 같이 와라.”
“그래, 이따 보자.”
전화를 끊은 강수는 외출 채비를 서둘렀다.
‘여러 갤러리를 돌 건데 택시를 타고 가는 것이 낫겠지?’
괜히 주차장 찾아다니면서 금쪽같은 시간 날리느니 택시 타는 것이 편하다.
외출 준비를 마친 강수는 아파트 근처 밥집에서 점심을 해결했다. 식당을 나온 강수는 택시를 불러 인사동으로 향했다.
염진구는 토요일에 만난다.
그 전에 가능하면 많은 청년 작가의 전시를 둘러볼 계획이었다.
종로 2가에 도착해 택시에서 내린 강수는 인사동을 향해 가볍게 걸음을 옮겼다.
스페이스갤러리 출입문에서 인상을 찌푸린 강수가 걸어 나왔다.
강수가 방문한 갤러리가 벌써 열세 곳.
빠른 걸음으로 움직였지만, 어느덧 6시가 되었다.
인사동에 위치한 갤러리를 훑은 강수는 자신이 착각했음을 깨달았다. 인사동에 즐비한 갤러리는 대부분 중견작가의 전시회가 열리고 있었다. 신진작가는 단 한 곳. 그것도 타 갤러리에 비교하면 규모가 작은 담갤러리였다.
원래 내일은 인사동 못지않게 갤러리가 군집해 있는 삼청로에 가려고 했다.
‘삼청로라고 다르겠어? 더 심하면 심하지.’
인사동이나 삼청로에 위치한 유명 갤러리는 신진작가가 서기엔 높은 장벽이 가로막고 있는 곳이란 사실을 간과했다. 비록 신진작가의 개인전은 단 한 곳뿐이고, 소득은 없지만, 간만에 인사동의 갤러리를 돌며 중견작가 개인전을 감상한 것도 의미는 있었다.
‘나는 정말 운이 좋았다고 해야겠군. 첫 개인전을 선암갤러리에서 열었으니 말이지. 게다가 9월에는 두 번째 개인전까지 잡혀 있고.’
강수는 인사동 골목길을 걸어가며 언젠가 읽은 글을 떠올렸다.
‘대부분 아티스트가 평생 개인전을 열지 못하고 사라진다는 글을 본 적이 있는데 정말일지도 모르겠다.’
평생 개인전을 열지 못하고 사라지는 아티스트가 90%를 넘는다는 글을 어디선가 읽었다.
‘미대로 유명한 우리 대학도 미대에 100명이 입학하면 졸업 후 아티스트의 길을 가는 졸업생은 고작 4, 5명 내외라고 했으니 말 다 했지. 나도 일찌감치 일러스트로 방향을 틀었으니까.’
강수는 3학년에 복학하고 얼마 후에 일러스트 알바를 시작했다.
아르바이트가 직업이 되었기 때문에 졸업 후의 진로는 고민하지 않았다. 하지만 대부분의 미대생이 미대 입학의 기쁨은 잠시, 1학년이 끝나기도 전에 현실에 눈을 뜨고 졸업 후 진로에 대해 의문을 품는다. 고민해도 뚜렷한 대안이 없다. 결국 95%에 이르는 대다수가 비전이 보이지 않는 예술가의 길을 포기하고 만다.
‘이번 단체전, 꼭 백 명으로 한정할 게 아닌 것 같다....’
이런저런 상념에 빠져 길을 걷다가 또 하나의 갤러리, 영인화랑에 도착한 강수는 벽에 걸린 개인전 현수막을 살펴보았다.
-‘심연의 감성’ 전. 김상순. 자연과 소통하는 내면의 심상을 담아내다.
김상순 화가는 추상화를 그리는 중견 작가였다.
‘이 전시 보고 대학로 가면 시간이 맞겠구나.’
강수는 영인화랑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
5월 8일 토요일. 일성빌딩 5층 강수 작업실.
“이야, 작업실 엄청 좋다. 하긴 버는 게 있는데 이정도 작업실 써도 되지.”
강수의 작업실에 들어선 염진구는 한눈에 들어오는 실내를 두리번거리며 감탄했다. 동기 가운데 강수처럼 번듯한 작업실을 가진 친구는 없다. 선배 중에서도 서울에 이 정도 넓은 작업실을 마련한 선배는 몇 안 된다.
“어서 와라. 뭐 마실래? 녹차, 홍차, 커피, 인삼차, 둥굴레차. 차 싫으면 음료수도 있고.”
“무슨 차를 그렇게 많이 사 놨냐? 녹차 줘라.”
강수가 차를 끓이는 사이 염진구는 실내를 둘러보았다.
미니 부스를 살펴보던 염진구가 탕비실을 향해 외쳤다.
“여기 작품이 많다? 전부 두 번째 개인전에 전시할 작품이냐?”
“아니. 추상화는 동석이 작품이다.”
“뭐? 동석이 작품이 왜 여기 있냐?”
강수가 녹차와 홍차를 들고 탕비실에서 나오며 대답했다.
“동석이 작업실 종대랑 둘이 쓰잖아. 작업실이 좁아서 여기에 갖다 놓은 거야. 와서 녹차 마셔라.”
소파에 앉은 염진구가 고개를 꺄웃하며 물었다.
“작품이 죄다 채색만 다른 똑같은 그림이다. 두 번째 개인전 작품은 팝아트 양식으로 그리네?”
“맞아. 실크스크린 인쇄로 15개 인쇄해서 색깔만 다르게 칠하고 있어. 앤디 워홀처럼.”
“같은 그림도 채색에 따라 분위기가 확연히 다르긴 하더라. 근데 개인전 끝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완성된 작품이 꽤 많다? 언제 그렇게 그렸냐?”
강수가 씨익 웃었다.
“후후, 혼자 그린 거 아냐. 원철이 하고 혁중이가 도와주고 있어.”
“고원철하고 서혁중?”
“그래. 작업지시서를 주면 둘이 작업지시서 내용대로 실크스크린 인쇄한 원본에 채색하는 거야. 둘이 채색해서 주면 난 덧칠해서 마무리했지. 그런데 요즘은 두 녀석이 워낙 잘 그려서 내가 할 일이 별로 없어. 그저 약간만 손보는 정도야.”
염진구가 눈을 크게 뜨고 탄성을 질렀다.
“야, 너 굉장하다. 넌 벌써 대중적인 인지도도 어느 정도 생겼고, 인기도 있으니까 다카시, 제프 쿤스처럼 팩토리 만들어서 작업해도 되겠다.”
“내가 인기 있다고?”
“넌 네가 대중에게 꽤 인기 있다는 사실도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거냐?”
“글쎄 체감이 안 돼서 인기가 얼마나 있는지 모르겠는데?”
“내가 체감시켜주지. 너 한 명의 화가가 그림 팔아 먹고살려면 그 화가를 알고 있는 각인층이 몇 명 정도 돼야 하는지 알고 있지?”
“각인층? 생각해 보지 않았는데?”
“정확하진 않지만 가족, 친인척, 동료, 선후배, 지인 전부 합해 대충 600, 700명 정도는 돼야 한다. 그 가운데 작품을 구입해 주는 사람이 100명만 되면 평생 그림 그리고 살 수 있는 환경이 구축됐다고 해도 될걸. 한데 그게 어디 쉽냐? 현실적으로 대부분 불가능하지. 그래서 작가도 온갖 방법 동원해서 미디어에 이름 한 줄이라도 나오려고 스스로 마케팅하고, 열나게 자기를 선전하거든. 대표적인 게 수많은 커뮤니티가 있는 SNS나 인터넷 마케팅이야. 한데 너는 핑크티티 초상화가 대중적인 관심을 끌면서 각종 커뮤니티는 물론이고 TV까지 나왔지? 얼마 전에는 벙어리 황구 죽돌이 영화 원작자로 대중에게 알려졌고. 네 개인전에서 전시 작품이 오픈 당일 완판된 건 아마도 그런 대중적인 인지도 때문일 거다.”
염진구의 열변을 들은 강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자기가 대중에게 얼마나 알려져 있는지 모르지만 다른 신인 작가와는 달리 인터넷이나 미디어에 노출된 것은 사실이었다. 더구나 빈이네 이야기 카페에 전시한 핑크티티 초상화는 이제 입소문을 타서 핑크티티 팬뿐만이 아니라 일반인도 꼭 가봐야 할 명소카페가 됐다고 한다.
핑크티티 초상화 보러 빈이네 이야기 카페에 간다는 것은 자기가 대중에게 노출된다는 말이고, 또한 꽤 의미 깊은 현상이었다. 즉, 핑크티티 초상화를 보러 카페를 찾아간 사람은 자기 그림을 살 수 있는 잠재적인 고객이라고 봐도 된다.
강수는 3월 말에 노민석의 전화를 받았었다.
강수는 몰랐지만, 노민석이 3월 대여료로 150만 원을 부쳤다. 통장에 입금된 대여료를 확인한 강수는 왜 50만 원을 더 보냈냐고 물었고, 초상화 보러오는 고객이 많아져서 매출이 늘어 대여료를 더 보냈다는 대답을 들었었다.
강수는 노민석에게 100만 원만 부치면 된다고 얘기했지만, 노민석은 알겠다고 대답하고 4월에도 150만 원을 부쳤다. 강수는 노민석의 카페가 잘된다고 긍정적으로 여기고 더 거론하지 않았다.
“네 말 듣고 보니 그런 것 같다. 근데 팩토리면 앤디 워홀 작업장이잖아?”
“앤디 워홀 이후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스타 작가들은 수십 명씩 어시스턴트를 고용해서 작품을 대량생산하거나 규모 있는 대작을 뽑아내잖아. 너도 지금 어시스턴트 두 명이나 쓰고 있으니까 작은 공장이라고 할 수 있지 않냐? 제프 쿤스나 데미안 허스트, 무라카미 다카시에 비교하면 가내수공업 수준이지만.”
제프 쿤스 등을 언급하는 염진구의 말에 강수가 헛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네 말이 틀리진 않지만 나는 필요에 의해서 원철이랑 혁중이의 도움을 받는 거지 팩토리 개념은 생각해 보지도 않았거든. 더구나 내 주제에 무슨 팩토리냐?”
강수는 두 번째 개인전을 준비하면서 작업실이 공장처럼 넓고, 천장이 높은 필요성을 느꼈다. 그래서 별내 땅에 공장식 작업실을 지겠다는 생각을 해보긴 했지만 앤디 워홀의 팩토리 개념과는 거리가 멀었다.
“너에 대한 대중적인 인지도나 명성은 보통의 신진작가하고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야. 게다가 네 작품은 예술성도 예술성이지만 무엇보다 대중성을 겸비한 것 같다. 너라면 팩토리를 운영해도 성공할지 몰라. 원철이와 혁중이를 고용해서 작업한 두 번째 전시회 성과가 그것을 알 수 있는 이정표가 되겠지.”
“음....”
“앤디 워홀처럼 인기 연예인이나 유명 인사와 어울리고, 뉴스거리 만들어서 미디어에 적극적으로 노출되면 금방 뜨지 않을까? 넌 실력뿐만 아니라 외모가 받쳐주니까 뜨는 건 어렵지 않을 껄.”
강수가 어깨를 으쓱 올렸다.
“그러고 싶어도 아는 연예인도 유명 인사도 없어. 기획서 좀 보자.”
그제야 염진구가 가방에서 두툼한 파일을 꺼내 강수에게 건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