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림 그리는 마법사-105화 (105/197)

# 105

그림 그리는 마법사 - 105회

몇 점이냐는 김대풍의 말에 주하가 까르르 웃었다.

“몇 점이요? 호호호. 몇 점이 아니라 전시한 25점 전부 팔렸거든요. 굉장하죠?”

“뭐?”

김대풍이 인상을 쓰며 고개를 갸웃했다.

“어제 오픈했는데 전부 팔렸다고? 혹시 너도 샀느냐?”

“저요? 헤헤. 사실 강수오빠 그림이 너무 좋은데 그림값은 되게 싸게 책정했더라고요. 그래서 처음엔 25점 전부 사려고 했어요.”

김대풍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 대충 짐작은 가지만 좋은 방법 같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설마 네가 전부 샀느냐?”

“아뇨. 관람객도 강수오빠 그림이 훌륭하다는 걸 아는지 앞다투어 구매한 거 있죠? 결국 전 4점 밖에 못 샀어요.”

김대풍이 미심쩍은 눈으로 주하를 쳐다보았다.

“정말이냐?”

“제가 왜 거짓말해요? 전시 끝나면 제가 산 그림이 집으로 배달 올 텐데요. 참, 할아버지 별내 땅은 저한테 줄 거죠?”

“그 땅이 당장 필요한 것이냐?”

“꼭 그런 건 아니지만 확답을 해 주셔야 다른 땅을 안 알아보죠.”

“땅값이 일이억도 아닌데 이강수에게 땅 살 돈은 있고?”

주하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김대풍을 흘겨보았다.

“네? 강수오빠한테 그 땅 살 돈이 어딨어요? 할아버지가 저한테 증여하면 제가 강수오빠한테 무상대여하면 간단하게 해결되잖아요.”

김대풍은 이해득실을 따지지 않는 손녀의 퍼주기에 실소를 터트렸다.

“허허허.”

‘인석이 강수에게 빠져서 정신 못 차리고 있군. 사랑이라는 건가?’

김대풍은 남녀 간의 순수한 사랑이라는 감정을 믿지 않는다.

그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아내를 중매로 만나 결혼했다. 아내에게 애정이 없지는 않지만, 사랑과는 거리가 멀었다. 어느 순간 돈이 주체할 수 없을 만큼 쌓이고, 돈 버는 것이 무의미해졌을 때 아내를 버리고 젊은 여자를 찾아다녔다. 젊은 여자는 돈을, 자신은 젊은 육체를 원했을 뿐이었다. 젊은 여자와의 만남은 돈이 매개체였을 뿐 사랑이라는 감정은 한 톨도 존재하지 않았다.

“땅은 급한 게 아닌 것 같으니 천천히 얘기하고, 먼저 이강수와 만나서 얘기부터 해보마.”

주하가 뾰로통하게 볼을 부풀렸다.

“치, 알았어요.”

*

‘대전 이응노미술관 소장품 특별전, 이응노-추상의 응시’ 촬영을 마친 후, 미술관 큐레이터와 작별인사를 하고 나온 한 주간 문화계 소식 피디 김도진은 차량에 오르며 습관적으로 한마디 했다.

“빠진 스태프 없이 전부 탔지?”

“예. 모두 탔습니다.”

스태프라고 해봐야 촬영, 조명 기사와 리포터가 전부인 단출한 촬영팀이다. 모두 탑승한 것을 확인한 김도진이 운전 기사에게 말했다.

“박 기사, 출발합시다.”

“예. 출발하겠습니다.”

촬영 차량이 미술과 주차장을 빠져나와 방송국으로 향했다.

세 곳의 지방 촬영을 위해 새벽부터 일어나 움직인 김도진은 피곤한 몸을 등받이에 기대고 차창 밖에 무심히 시선을 주었다. 방송국까지 가려면 3시간은 걸릴 것이다. 그동안 잠깐 눈을 붙이고 휴식을 취할 수 있다.

차창 뒤로 밀려 사라지는 가로수를 무심코 바라보던 김도진은 후배 정진규와 했던 전화 통화를 떠올렸다.

정진규는 이강수의 개인전이 볼만하다며 추천했다.

방송에 내보내지 않아도 찍어두면 나중에 쓸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며 한번 관람해보라고 했다.

‘고작 신인화가에 불과한데 전시를 찍어 둘 필요가 있을까?’

서도호, 서수경처럼 국제적인 명성을 얻은 인기 작가라면 몰라도 그렇지 않으면 시간 낭비, 인력 낭비다.

‘작품이 어떻기에 관람이라도 해보라는 거지? 궁금하긴 하군.’

작년 핑크티티 차트 역주행과 함께 핑크티티 초상화 그린 화가로 잠깐 언론을 탔을 때 이강수라는 이름을 그도 들어본 적이 있었다.

‘첫 개인전이면 완전 초짜 화가인데 작품이 얼마나 마음에 들었으면 가서 보라는 거야? 좋아, 가서 보고 별 것 없으면 쫑크 줘야지.’

김도진은 이강수 개인전에 들리기로 하고 박 기사를 불렀다.

“박 기사.”

“예, 감독님.”

“가는 길에 인사동에 볼일 있으니까 잠깐 들러주세요.”

박 기사가 한 마디 토도 달지 않고 시원스럽게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뒤에 앉은 리포터 나미연이 볼륨 있는 상체를 앞으로 내밀며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

“감독님, 인사동엔 왜 가는 거죠? 추가 촬영은 아니죠?”

“전시장에 볼일 있어서 잠깐 들리는 거야. 상황 봐서 어쩌면 촬영할 수도 있지만, 추가 촬영은 아냐. 부담 가질 거 없어. 편하게 쉬어.”

“촬영할 수도 있다고요?”

“그래. 이강수라는 화가 전시회인데 참고용으로 찍을 수도 있어.”

“이강수? 이강수가 누구죠?”

“들어본 적 없어?”

“없어요. 잘 모르겠네요. 감독님은 이 사람 전시에 왜 가는 거예요?”

“진규가 괜찮은 전시하고 추천했어. 가는 길이라 잠시 들러보는 거야.”

“진규 씨가? 알겠어요.”

의문을 푼 나미연이 내밀었던 얼굴을 뒤로 빼자 김도진은 눈을 감고 기분 좋게 흔들리는 차의 리듬에 몸을 맡겼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감독님, 다 왔어요.”

어깨의 흔들림을 느낀 김도진이 눈을 떴다. 잠깐 눈을 붙인 것 같았는데 차량은 어느새 인사동에 도착해 주차해 있었다.

“피곤했나 봐요?”

“새벽부터 잠을 설쳐서 그래. 난 선암갤러리에 갔다 올 테니까 쉬고 있어.”

“나도 갈래요.”

“미연 씨도 간다고? 이강수는 초짜 화가고 첫 개인전이야. 그래도 가 보게?”

“진규 씨가 괜찮다고 했으면 볼만한 게 있겠죠?”

“나도 그래서 가보기는 하지만 기대는 하지 마.”

“다녀오십시오.”

촬영 기사와 조명 기사 둘은 그림 전시는 관심 없는지 자리에서 꼼짝하지 않았다.

“그래. 혹시 촬영할 일이 있으면 전화하마.”

“예. 감독님.”

나미연이 김도진을 따라 차에서 내렸다.

나미연은 차분한 느낌을 주는 그린 계통의 투피스를 입었다. 몸매는 늘씬했고, 아나운서를 해도 될 만큼 아름다운 마스크의 소유자였다.

두 사람은 선암갤러리를 향해 걸었다. 이십 대 중반으로 보이는 나미연과 삼십 대 후반의 김도진이 연인처럼 붙어 걷는 모습은 어울리지 않아서 지나가는 사람이 의혹의 눈초리로 힐끗거렸다.

김도진이 얼굴을 잔뜩 구겼다.

“우리가 그렇게 어울리지 않나?”

“훗, 감독님이 이십 대 초반 여자와 사십 대 초반 남자가 연인인 걸 봐봐요. 눈꼴사납지 않겠어요?”

“뭐? 내가 어딜 봐서 사십 대 초반이야. 그리고 미연 씨가 이십 대 초반? 낼모레면 꺾어진 환갑이 할 말이냐?”

“꺾어진 환갑이라뇨? 신촌 가면 대학생이 나한테 작업 걸거든요.”

“됐다. 꿈 깨라.”

“어?”

눈을 가늘게 뜬 나미연이 마주 편에서 팔짱을 끼고 걸어오는 두 남녀를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저 앞에서 오는 커플도 상당히 눈에 거슬리네요.”

“두 사람이 뭘 어떻다고 그래? 잘 어울리는 커플이구먼.”

“여자가 어리잖아요. 하여튼 남자들은 어린 여자를 너무 밝혀.”

“요즘은 돈 좀 있고, 능력 있는 여자들이 연하 더 밝히는데 뭔 소리? 세상이 어떻게 되려고 그러는지 몰라.”

“흥, 그런 여자가 얼마나 된다고 그러세요. 어쩌다 생기는 일을 갖고 언론에서 무슨 대단한 일이라도 난 것처럼 호들갑 떠는 거죠.”

“아냐. 영계 잡아먹는 여자야 드물겠지만, 남자가 연하인 커플은 의외로 많아. 내 주위에도 여럿 있다고.”

“그것참 바람직한 현상이네요. 앞으로도 쭈욱 연하연상 커플이 주류가 되면 좋겠어요.”

나미연의 말을 무시한 김도진이 앞에서 다가오는 사내를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가만, 한데 저 친구가 왜 눈에 익지? 어디서 본 것 같은데 어디서 봤지?’

가까워진 네 사람은 자연스럽게 선암갤러리 입구로 다가갔다.

나미연은 얼굴에 미소가 가득한 두 사람을 자세하게 살펴볼 수 있었다.

‘가까이에서 보니까 미남이네? 여자도 예쁜 편이고. 아니, 꽤 예쁘잖아!’

이때, 남자가 고개를 돌려 앞을 보았다. 나미연은 일부러 남자의 얼굴에 시선을 고정했다. 나미연의 시선을 의식했는지 남자가 나미연을 바라보았다. 의도했던 대로 남자의 눈과 시선이 마주쳤다.

남자의 눈을 똑바로 살핀 나미연은 순간적으로 가슴이 철렁했다. 눈빛이 맑고 깊었고, 한 점 사심 없이 깨끗했다. 앞의 사내처럼 깨끗한 눈빛은 드물었다.

눈은 마음의 창이라고 한다.

나미연은 눈빛으로 상대방을 평가하는 버릇이 있다. 눈빛에는 그 사람의 마음이 그대로 투영되었고, 나미연은 눈빛에 깃든 내면의 욕망을 읽는 재주가 그 누구보다 탁월했다. 이 특이한 재주 때문에 남자를 깊게 사귀지 못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안녕하세요? 먼저 들어가시죠?”

사내가 미소 띤 얼굴로 출입문을 열어주었다.

남자의 첫인상을 속으로 평가하고 있던 나미연은 예상하지 못한 남자의 행동에 당황해 말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예? 아, 가, 감사해요.”

“별말씀을.”

이때 김도진이 눈을 크게 뜨고 나직이 탄성을 뱉었다.

“오, 혹시 이강수 화가 아닙니까?”

“어? 저를 어떻게 알아보셨네요?”

“맞군요. 어디서 봤나 했더니 팜플렛에 실린 사진을 봤네요. 반갑습니다. 나는 한 주간 문화계 소식 담당 PD 김도진입니다. 이쪽은 리포터 나미연 씨.”

그사이 표정을 수습한 나미연이 고개를 살짝 숙였다.

“나미연이에요.”

“방송국 분들이셨군요? 이강수입니다. 그리고 이쪽은 제 여자친구 김주하 씨.”

‘역시 여자친구였어. 친동생이었으면 좋았을걸. 쳇, 왜 괜찮은 남자는 임자가 다 있는 거야.’

이강수같이 깨끗하고 사심 없는 눈빛의 남자를 만나고 싶었던 나미연은 안타까움을 금치 못했다.

“김주하라고 해요. 방송국에서 나왔으면 혹시 강수오빠 전시회 취재하러 온 건가요?”

기대로 가득 찬 김주하의 표정에 김도진이 멋쩍게 웃었다.

“하하. 그렇진 않습니다. 내일 방영분은 촬영 끝냈거든요. 좀 일찍 전시회를 알았으면 고려해 봤을 텐데 어제 알았습니다.”

“어머, 아까워라. 강수오빠 그림 정말 좋은데.”

‘아까운 건 난데.’

나미연은 속으로 아쉬움을 달래며 입을 열었다.

“이강수씨 전시를 동료 리포터 정진규 씨가 추천했어요. 정진규 씨가 한 안목 하거든요.”

“정진규 씨면 이색지대 탐방 리포터 말인가요?”

“정진규 리포터 알아요?”

“알죠. 이색지대 탐방에 나온 핑크티티 초상화편을 몇 번이나 본 걸요.”

“그랬나요?”

김주하의 초롱초롱 빛나는 눈빛을 본 나미연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휴, 저 눈빛을 보니 이강수 말고 다른 남자는 쳐다보지도 않겠구나. 사랑에 빠져도 아주 깊이 빠졌어.’

“아, 참. 방영분 촬영은 끝났지만 상황 봐서 예비용 소스로 전시를 찍을 수도 있는데 괜찮겠죠?”

“물론이죠. 3층 사무실로 올라가서 장영봉 디렉터에게 문의하면 촬영할 수 있도록 편의를 제공해 줄 겁니다. 입구에서 이럴게 아니라 안으로 들어가시죠?”

“그럽시다.”

네 사람은 전시장으로 들어갔다.

“그럼, 김 피디님, 전시장 천천히 살펴보시고, 즐거운 시간되길 바랍니다.”

“예. 고맙습니다.”

두 사람과 헤어진 강수와 주하는 전시장을 전체적으로 둘러보았다.

전시 이틀째, 전시장은 관람객이 상당히 많았는데 교복을 입고 어깨에 가방을 멘 어린 여학생들이 상당수였다.

김주하가 그런 여학생들을 보며 말했다.

“오빠, 여학생들이 많아요. 혹시 핑크티티 팬 아닐까요?”

“그런 것 같은데?”

이리저리 궁리해보아도 자기의 개인전에 관심을 가질 여고생은 역시 핑크티티 팬밖에 없었다. 네 명의 여학생들이 강수와 주하를 힐끔거리며 수군거리더니 강수 앞으로 쭈빗쭈빗 다가왔다.

168센티 정도의 큰 키에 이목구비가 오밀조밀하고 예쁘게 생긴 단발머리 여학생이 강수에게 꾸뻑 인사하며 물었다.

“혹시 이강수 화가님 아니세요?”

“맞아요. 이강수입니다만?”

여학생들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고, 한 학생은 손뼉을 치며 좋아했다.

“야호, 이강수 화가님이다.”

“와, 엄청 젊다.”

“안녕하세요? 우리는 소화여고 학생들이고요, 핑크티티 팬이자 선생님 팬이에요. 이렇게 만날 수 있어서 너무 반가워요.”

“하하. 내 팬이라고요? 나한테 팬이 생길 줄은 생각도 못했는데 정말 고맙네요.”

단발머리 여학생이 가방에서 스마트폰을 꺼냈다.

“선생님, 같이 사진 찍어도 되요?”

“아, 물론이죠.”

“와, 감사합니다.”

여학생들이 강수 옆으로 달라붙자 주하가 옆으로 물러났다. 한 여학생이 주하를 부르며 대놓고 질문했다.

“언니, 언니는 이강수 화가님하고 어떤 사이예요?”

여학생의 당돌한 질문에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난감해 하는 주하 대신 강수가 빙그레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이분은 내 여자친구 김주하 씨세요.”

강수가 여자친구라고 당당하게 밝히자 여학생들이 캭캭대며 부러움의 환호성을 질렀다.

“캬아! 연인이었어.”

“와, 주하 언니 연예인처럼 예쁘다. 부러워요.”

“난 연예인인줄 알았는데.”

“주하 언니, 우리 같이 사진 찍어요.”

단발머리 여학생의 권유에 주하가 쑥스러워 하며 머뭇거렸다.

“어? 내가 끼어도 되요?”

“그럼요. 두 분이 너무 잘 어울려요.”

단발머리 여학생이 주하의 팔을 잡아끌었다.

“언니, 사진 같이 찍어요.”

“그럴까요?”

결국 김주하도 여학생들의 적극적인 공세에 휘말려 같이 사진을 찍었다. 여학생들이 소란을 피우자 주변의 다른 여학생들도 호기심이 생겼는지 근처로 다가오더니 급기야 사진 찍기에 동참했다.

사진 찍기가 끝날 무렵 단발머리 여학생이 가방에서 공책을 꺼내 강수 앞으로 내밀었다.

“선생님, 수고스럽겠지만 사인 좀 부탁드릴게요.”

“사인? 팬인데 해줘야죠. 이름이 뭐죠?”

“성은지요.”

강수는 공책에 간단히 한줄 멘트를 적었다.

-즐거운 관람이었나요? 다음 전시회에서 또 볼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성은지 학생에게.

멘트를 적고 사인을 해서 공책을 건네주려다 멈짓했다. 사인만 해서 주기에는 공책에 여백이 너무 많아서 밋밋했다.

“은지 학생, 잠깐 그대로 서 있어볼래요. 캐리커처 그려줄게.”

“어머, 캐리커처요! 감사합니다.”

강수는 잠시 성은지의 얼굴을 바라보며 이목구비의 특징과 얼굴에서 풍기는 분위기를 캐치해 머릿속에서 캐리커처를 형상화했다.

약 10초 후, 머릿속에서 형상화 작업을 끝낸 강수는 펜을 놀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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