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림 그리는 마법사-42화 (42/197)

# 42

그림 그리는 마법사 - 42회

강수가 마루에서 기다리고 있자 할머니가 쟁반에 수박을 잘라 내왔다.

“할아버진 어디 가셨어요?”

“할아버지? 그 양반은 재작년에 저승길로 갔지. 팔십 평생을 농사만 짓다가 갔지. 늘그막에 어디 놀러 다니지도 않고 땅만 파고 말이여. 망할 놈에 늙은이 같으니.”

욕을 하면서도 할머니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아, 죄송해요.”

뭐라고 위로의 말을 할지 몰라 강수가 할 말을 잃고 마당으로 고개를 돌렸다.

“죄송하긴 뭐가. 살 만큼 살다 죽었으면 됐지. 죽돌이 사진 보고 싶다고 혔지? 잠깐 있어 봐.”

할머니가 곧 손때 묻은 앨범을 가져와 끝부분을 펼쳤다.

“야가 죽돌이여.”

죽돌이 사진은 몇 장 되지 않았다.

종이 박스 안에서 머리만 내놓고 있는 죽돌이.

나무집 안에서 발에 턱을 괴고 있는 죽돌이.

담장 너머 밖을 멍한 얼굴로 바라보고 있는 죽돌이.

마당을 걷는 죽돌이.

강수는 사진 속 죽돌이를 보고 속으로 탄식했다.

겁에 질린 순하디순한 눈. 절망에 침잠된 커다란 눈동자. 자포자기한 무표정한 얼굴.

순간적으로 감정이 가슴으로 치고 올라와 가슴이 먹먹해졌다.

“저, 할머니. 죽돌이 사진 좀 찍을게요.”

“이 사진을 찍는다고?”

“예.”

“아녀. 이 사진이 필요하면 가져가. 내 나이에 죽돌이 사진이 무슨 소용이야. 젊은 부부가 주고 가서 버리지는 못하고 가지고 있었던 거여.”

“아, 그럼 제가 가져갈게요. 고맙습니다.”

“그려. 가져가.”

앨범에서 사진을 꺼낸 강수는 종이 박스 안에서 얼굴만 내밀고 있는 우스꽝스러운 죽돌이를 가리키며 물었다.

“저, 할머니. 죽돌이가 왜 종이 박스에 들어가 있어요?”

“이거, 홀홀홀.”

한차례 웃은 할머니가 사연을 얘기해주었다.

“야가 철창에서 나가면 죽는 줄 알고 안 나오더란 거야. 그래도 사람 힘을 이길 수 있나? 결국, 끌려 나왔는데 또 차에 타려 하질 않고 버티는 거라. 그래서 이렇게 박스에 넣으니까 얌전해져서 데리고 왔다는구먼.”

우습기도 하고 슬픈 이야기였다.

강수는 수박을 먹으며 마을의 천덕꾸러기가 된 죽돌이 이야기를 몇 가지 들을 수 있었다.

“할머니, 수박 맛있게 먹고 얘기 잘 들었어요. 전 마을 사진 좀 찍을게요.”

“그려, 바쁠 텐데 일 봐.”

강수는 할머니를 만나 죽돌이의 사진과 몇 가지 에피소드를 얻을 수 있었고, 죽돌이 이야기를 더 디테일하게 작업할 수 있게 되었다.

강수는 죽돌이가 살았던 집과 죽돌이가 마을을 돌아다니며 사건을 일으켰던 장소를 디카에 담았다.

수화리 마을 풍경을 디카로 찍으면서 강수의 머릿속에서는 이야기와 함께 대략적인 그림이 그려졌다. 만족할 만큼 사진을 찍은 강수는 마을이 내려다보이는 구릉에 앉아 스케치북을 꺼냈다. 그리고 머릿속에 그려진 배경 이미지를 러프하게 스케치해나갔다.

강수의 손은 빠르게 움직이며 구도를 잡고 인물을 배치하고 어떻게 그릴지 메모해 놓았다.

해가 떨어질 즈음 15장의 러프 스케치를 완성했다. 스케치북을 가방에 넣은 강수는 어둠이 깔리는 시골길을 걸어서 팔랑리 집으로 갔다.

*

새벽에 도솔산에 올라가 수련한 후, 어머니가 차려준 점심을 맛있게 먹은 강수는 바쁘다는 핑계를 대고 버스 시간에 맞춰 서울로 줄행랑을 쳤다.

그렇게 서울로 도망쳐 온 강수는 오늘도 여느 때와 다름없이 북한산에서 수련을 마치고 아파트로 돌아왔다.

땀에 범벅이 된 몸을 씻고 아이스티를 만들어 마시려고 물을 끓였다.

먼저 거름망이 있는 찻주전자에 끓는 물을 부어 홍차를 진하게 우려냈다.

우려낸 홍차를 급속 냉각하기 위해 냉동실에서 얼음을 꺼내려던 강수는 문득 콜드마법이 떠올랐다.

아이스티는 우려낸 홍차를 얼음에 따르며 급랭시켜야 향과 맛이 좋다고 한다.

“가만, 콜드마법이 있었지. 후후, 굳이 얼음을 쓸 것 없이 콜드마법으로 냉각해보자.”

강수는 얼음을 도로 냉동실에 넣고 우러난 홍차를 스테인리스 냄비에 따르고 적당량의 물과 설탕을 추가했다. 이제 아이스티는 만들었으니 급속 냉각시키기만 하면 된다.

유리잔에 콜드마법을 펼치면 온도 차에 의해 유리잔이 깨질 우려가 있어서 일부러 스테인리스 냄비에 아이스티를 만들었다.

“음, 잘 되겠지?”

속으로 영창을 끝내고 캐스팅을 했다.

“콜드!”

뜨거운 홍차가 든 스테인리스 냄비에 순식간에 서리가 끼고 찻물 표면이 얼어붙었다.

“하하. 얼음까지 얼었네.”

강수는 얼음을 깨고 유리잔에 아이스티를 따라 맛을 보았다.

“음, 맛있군.”

얼음을 쓰지 않고 급속 냉각한 때문인지 홍차 특유의 향과 산뜻한 맛이 고스란히 살아 있었다.

“카페에서 콜드마법으로 아이스티를 만들어 팔면 잘 팔리겠지?”

마법을 연구해보면 여러 가지 음료를 더 맛있게 만들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카페라···. 크, 카페 차릴 돈도 없는데 뭔 카페. 작업이나 하자.”

고개를 저은 강수는 아이스티를 들고 작업실 의자에 앉아 선풍기를 틀었다. 날이 더우니 선풍기에서도 더운 바람이 불었다.

아이스티를 한 모금 마신 강수가 투덜댔다.

“더럽게 덥네. 에잇, 4서클만 되도 선풍기를 냉풍기로 만들 수 있을 텐데.”

4서클만 되어도 1서클 마법 기능을 물건에 인챈트해서 아이템으로 만들 수 있다.

선풍기에 1서클 콜드마법을 인챈트하면 마나가 풍부한 자랄 행성과는 비교할 수 없겠지만 조금이라도 찬바람이 부는 선풍기를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 특히 날개 없는 선풍기 같은 제품에 콜드마법을 인챈트하면 초대박 제품이 되지 않을까?

선풍기가 냉풍기로 변신하면 절전도 되고, 자연풍이기 때문에 냉방병에 걸릴 일도 없다.

대량생산만 한다면 날개 없는 선풍기의 원조인 다이슨처럼 비싼 가격에 엄청 팔리겠지만 아이템을 공장에서 물건 찍듯이 만들 수는 없었다. 아이템을 만들 물건에 마법수식을 새기고 인챈트하는 것은 노가다 같은 작업이었다.

무엇보다 어느 세월에 4서클 마나하트를 만들 수 있을지 지금은 감도 잡히지 않았다.

“후후. 뜬구름 잡는 생각이군. 죽돌이 이야기나 빨리 끝내자.”

수와리 동네를 취재하고, 러프 스케치까지 해서 서울로 돌아온 뒤, 그림동화책 작업은 탄력을 받아 눈부신 속도로 진척되었다.

할머니가 해준 이야기를 반영해 기존의 이야기를 약간 수정했고, 15장의 스케치를 이틀 만에 끝냈다. 채색 작업은 하루에 2장씩 5일 동안 10장을 완성했다. 그림은 완성하는 대로 사진을 찍어서 편집기획팀에 보냈다.

‘벙어리 황구 죽돌이’는 정밀묘사도 아니고 이미지화도 아닌 중간 정도의 화풍으로 그렸다. 그래서 하루에 2장씩 완성할 수 있었다.

‘이제 5장 남았다. 집중해서 그리면 이틀이면 끝낼 수도 있겠다.’

원화를 출판사에 넘기면 보통 출판사의 일정에 맞춰 출판하게 된다.

무지개출판사 강 팀장은 원화만 넘겨주면 최단 기간에 출판하겠다고 공언까지 했다.

아마 열흘 안으로 출판될 것이다.

‘가만. 오늘은 1일, 토요일이잖아.’

토요일 오후에는 마술동호회 일루션에 가서 마술을 연습한다. 저번 주는 정신 없이 스케치하느라 빼 먹었다.

‘오늘은 조금 늦게라도 가봐야겠다.’

강수는 아이스티를 마저 마시고 채색을 시작했다.

*

“강수 씨, 어서 와요.”

“민석 형님, 안녕하세요.”

지하에 있는 일루션 동아리실 안으로 들어가자 무대 단상에서 회장 노민석이 팔을 흔들며 맞이했다.

노민석의 나이가 강수보다 나이가 6살이나 많아서 호칭을 형님으로 부르기로 했다.

실내에 있던 일루션 동호회 회원들이 다가와 인사를 했다.

“어서 와요, 강수 형.”

“강수오빠!”

20대 중반의 아담한 체형에 얼굴이 작고 이목구비가 오목조목한 여자애가 강수를 보더니 활짝 웃으며 반가워했다.

“저번 주에 기다렸는데 왜 안 왔어요?”

“어, 작업하느라 깜박했지 뭐야.”

옆에서 비슷한 또래로 보이는 청년이 놀리듯 말했다.

“연주는 강수 형이 맘에 드나 보다. 하긴 강수 형이 꽤 핸섬하긴 하지.”

얼굴이 살짝 빨개진 유연주가 청년을 노려봤다.

“야, 강창호. 아니거든.”

강창호란 청년이 뒤로 물러나며 유연주의 볼을 가리켰다.

“근데 왜 볼이 빨개지냐?”

유연주가 강창호를 따라가며 작은 주먹을 휘둘렀다.

“너어, 죽는다.”

“하하, 농담이다. 농담”

처음 보는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남자가 악수를 청해왔다.

“안녕하세요? 처음 뵙습니다. 배홍한이라고 합니다.”

강수도 악수하며 인사를 했다.

“이강수입니다. 얼마 전에 가입한 신입회원입니다. 잘 부탁합니다.”

강수가 일루션에 도착한 때는 오후 5시 30분경으로 3번째 참석이었다.

올 때마다 매번 새로운 회원을 만났고 인사를 나누었다. 강수보다 어린 친구도 있었지만 만나는 회원 전부 강수의 선배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사회인 동호회라 선후배를 따지지는 않았다.

노민석이 장난치는 창호와 연주를 보며 실소를 짓고는 강수에게 물었다.

“참, 강수 씨, 마술 공부는 할 만 한가요?”

“아직은 잘 모르겠네요. 그리고 민석 형님, 제가 한참 동생뻘인데 이제 말 놓으세요. 그래야 저도 동생들한테 편하게 말을 놓죠.”

저번에도 강수가 말을 놓으라고 했지만 노민석은 편할 때 말을 놓겠다며 계속 존대를 한 것이다.

“하하. 그런가? 그럼 그렇게 할게. 아, 그리고 9일 일요일에 죽송보육원에서 자원봉사 마술공연을 하는데 혹시 참석하려면 미리 알려줘.”

“아, 자원봉사 활동도 하는군요?”

“자주는 아니고 두 달에 한 번 정도 하지.”

“특별한 일이 없으면 참석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우린 마술공연 준비할 테니까 연습하면서 궁금한 거 있으면 언제든지 물어봐.”

“예. 그러죠.”

강수에게 있어 마술은 전체 분야는 아니지만 부분적으로 이미 마스터의 경지를 이룬 것과 마찬가지다. 원하는 공간에 불과 얼음을 만들고, 바람을 일으킨다. 물체를 얼리기도 하며 움직이는 물체를 정지시키고, 순간이동 시킬 수도 있다.

투과마법까지 익히면 마술사로 전직하는게 나을지도 몰랐다. 걸림돌이라면 마법을 마술에 접목해서 자연스럽게 연기하는 기술이다.

강수는 마법을 어떤 식으로든 활용하기 위해서 마술 연기를 공부하는 것이다.

우우웅!

블링크를 이용해 카드 이동을 연습하고 있는데 스마트폰이 진동했다.

발신자는 박해나였다. 강수도 장영봉에게 박해나의 전화번호를 받아서 연락처에 저장해 두었다.

‘해나 씨가?’

연락한다고는 했지만 인사치레로 생각했다. 진짜로 연락해 올 줄은 몰랐다.

통화를 연결했다.

[안녕하세요? 박해나예요.]

“예. 해나 씨. 반갑네요.”

[늦었지만 12인전에서 두 작품 팔린 거 축하해요.]

“하하. 그게 최이석 평론가 덕분이죠.”

[작품이 훌륭하니까 최이석 평론가도 인정한 거죠. 혹시 요즘 바쁜가요?]

“아, 하던 일이 있긴 하지만 지금은 마무리 단계네요.”

[그럼 3일 후에 시간 낼 수 있나요?]

“3일 후면··· 4일 화요일이군요.”

집에 가서 한 장 마무리하고, 내일과 모레 두 장씩 그리면 칼같이 시간이 딱 맞았다.

“시간이 되네요. 혹시 무슨 일로?”

[미라세미술관 소장품 특별전이 열리는 예술의 전당에 가보려고요. 혼자 가려니까 심심해서 같이 가면 어떨까 해서요.]

“예··· 에?”

[뜻밖이라 놀랍나요?]

“하하. 그게, 의외긴 해서···.”

[흠, 실은 할 말도 좀 있어요.]

“아, 할 말이요?”

예술의 전당에 같이 가자는 말에 순간적으로 당황했는데 할 말이 있는 모양이었다.

[인상파 거장들의 작품도 감상하고 또 얘기할 게 있는데. 싫은가요?]

“아니, 홍옥까지 한 바구니 받았는데 싫을 리가요.”

[훗, 좋아요. 그럼 글피 예술의 전당 앞에서 2시에 보는 거 어때요?]

오전에 마나회로를 수련하고 2시까지 예술의 전당에 가려면 시간이 빡빡하다.

“3시는 안 됩니까? 오전에 할 일이 있어서요.”

[그러죠. 그럼 그때 봐요.]

“예.”

전화를 끊었다. 할 말이 뭐냐고 물어봐도 전화상으로 얘기해 줄 것 같지 않아 묻지 않았다.

‘할 말이 뭘까? 궁금하네. 그나저나 무조건 월요일까지 나머지 5장을 끝내서 화요일에 퀵서비스로 보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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