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림 그리는 마법사-40화 (40/197)

# 40

그림 그리는 마법사 - 40회

모니터에 출력된 여러 바자회 가운데 아파트에서 가깝고 의미가 있는 바자회를 찾았다.

마침 목동에 위치한 한 성당에서 나눔바자회를 준비하고 있었다.

어려운 이웃을 돕기 위해 봉사 차원에서 개최한다고 했다. 종교를 떠나서 어려운 이웃을 돕는 바자회였으므로 의미 있는 기증이었다.

‘아무렴 다른 단체보단 성당이 낫지.’

왠지 사회가 혼란에 빠질 때마다 시민의 앞에 서서 부당한 공권력에 맞선 성당이 믿음직스러웠다.

목동 성당에 전화를 걸어 바자회 봉사원을 찾았다.

20대로 느껴지는 상냥한 여성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안녕하세요? 목동 성당 나눔바자회 봉사자 피엔씨아입니다. 무슨 일이시죠?]

“아, 안녕하세요? 인터넷 보고 전화 드리는데요 나눔바자회에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고자 소장 물품을 기증하려고 합니다.”

[물품 기증이요? 감사합니다. 어떤 물품을 기증하시려 하나요?]

“실은 제가 미대를 졸업한 일러스트 작가입니다. 그 동안 작업한 어린이 그림동화책과 원화, 교양 책, 그리고 대학시절 캔버스에 그린 제 창작품 등 그림을 기증하고 싶은데 이런 물품도 괜찮나요?”

[어머, 화가셨군요. 저희야 화가님의 소중한 작품을 기증해 주시면 너무나 감사하죠. 이번 나눔바자회는 그림을 판매할 수 있는 아주 특별한 바자회가 될 것 같네요. 저, 근데 성함이 어떻게 되시나요?]

“이강수입니다.”

[이강수 작가님이셨군요. 이번 주 주말에 나눔바자회를 개최하는데요, 혹시 기증은 언제 가능한가요?]

기증 물품을 정리하려면 꽤 시간이 걸린다. 오늘 보내기에는 시간이 촉박했다.

“도움이 된다면 다행이구요. 물품은 오늘 정리해서 내일 1톤 트럭을 불러서 성당으로 보내드리겠습니다.”

[소중한 물품 기증 감사드려요. 배송비는 저희가 부담할 테니 착불로 보내주세요.]

“아닙니다. 나눔바자회에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에 기증하려고 하는 것이니 배송비는 제가 부담하겠습니다.”

[아, 그러지 않으셔도 되는데··· 진심으로 감사 드릴게요.]

“예, 그럼 수고하세요.”

통화를 끝낸 강수는 마트에서 박스를 구해와 그림책과 교양서적을 정리해 현관문 옆에 쌓아 놓았다.

그림책과 교양 책만 네 박스였고, 일러스트 원화가 한 박스다.

‘책하고 원화는 정리가 끝났고···.’

작업실과 작은방에 박혀 있는 캔버스를 꺼내보니 50점이나 됐다. 비슷한 크기로 분류해서 신문지로 포장한 후 노끈으로 묶었다.

구석에 쌓여 있던 캔버스를 꺼내 놓으니 집안의 공간이 넓어졌다. 구석에 수북하게 쌓인 먼지를 청소하는 일은 덤이었다.

“헐, 진작에 치웠으면 시원하고 좋았을 걸. 이 정도면 됐지?”

정리를 끝낸 강수는 이삿짐센터에 전화해 내일 오후 2시에 1톤 트럭을 예약했다.

집안을 정리하다 보니 아파트를 나가는 것이 실감났다.

대학에 입학하면서 시작한 서울생활이었고, 군대에서 보낸 2년을 제외해도 서울생활 7년차였다. 서울에서 태어나고 살아온 사람들에 비교하면 길지 않은 세월이지만 적지 않은 시간을 서울에서 보냈다.

그 동안 지내온 서울은, 한 마디로 표현하면 변화무쌍한 도시다.

정치, 문화, 예술, 경제의 중심지이고, 하늘을 향해 치솟은 고층빌딩이 즐비하며 끝없이 변화, 발전, 도약하는 화려한 도시였다.

수많은 사람들이 성공신화를 쓰기 위해 서울로 올라와서 자신의 삶을 일구고 있다. 강수도 그 많은 사람들 가운데 한 명이었다. 비록 어렵게 장만한 아파트에서 떠나게 되었지만 경쟁에서 밀려난 패배자는 아니다.

‘후후, 그저 높이 뛰기 위해 움츠리는 것뿐이다.’

강수는 그렇게 생각하며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우우웅!

전화가 와서 발신자를 확인하니 선예였다.

‘선예네. 흠, 동생들은 잘 챙기고 있나?’

“선예? 오랜만.”

[강수오빠! 연락도 없고. 미워욧!]

“응? 연락은 너도 없지 않았니? 어쨌든 미안. 좀 바빴어.”

[칫, 나쁜 오빠, 잘 지내죠?]

“그럼. 나야 맨날 작업하느라 바쁘지. 나보다 넌 어때?”

[나도 잘 지내고 있어요. 그것보다 기쁜 소식이 있어요. 얼마 전에 일산에서 열린 ‘중소기업제품박람회’에서 아빠 제품이 호평을 받고 해외 바이어와 수출 계약을 했대요. 오빠 돈은 누구보다 먼저 갚아야 한다며 아빠가 며칠 내로 준다고 했어요. 계좌번호 보내주세요.]

“와, 해외 수출이면 대박이다. 역시 좋은 제품은 팔리게 되어 있어.”

[참, 택배 하나 부쳤어요. 아빠가 고맙다며 기능성 의자를 선물했거든요. 내일쯤 도착할거예요.]

“어? 고맙다. 잘 쓸게.”

[헤헤. 제가 더 고마워요. 돈 부치고 다시 연락할게요. 지금 문자 보내요.]

“응, 돈 준다는데 얼른 보내야지.”

강수는 기쁜 마음으로 계좌번호를 보냈다.

잊고 있던 돈이라 마치 공돈이 생긴 것만 같았다.

‘가만, 선예가 돈을 부치면 굳이 이사할 필요가 없나?’

선예에게 돈을 받으면 통장 잔금이 1650만원으로 크게 늘어난다. 1650만원이면 품위를 유지하면서도 반년 넘게 버틸 수 있다.

재수가 좋다는 생각과 함께 웃음이 절로 터져 나왔다.

“하하, 멀리 뛰기 위해서 한 번 움츠리려고 했더니 그럴 필요가 없게 됐구나.”

강수는 콧노래를 부르며 재빨리 부동산에 전화해서 내놓은 전세를 취소했다.

‘기증하기로 한 작품은··· 계획대로 기증하자.’

지금까지 자신이 그린 삽화나 그림책 원화는 예술적인 가치가 무척 미미한 그림들이었다. 불우이웃을 돕기 위한 의미 있는 바자회였으므로 작품을 기증해도 아깝지 않았다.

*

“엄마 나 왔어요.”

신유라가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며 외쳤다.

“저녁은?”

50대 초반의 김미숙 여사가 거실로 들어오는 딸내미에게 물었다.

“먹어야지.”

“차려줄 테니까 씻고 얼른 와.”

“엄마, 그보다 오늘 택배 오지 않았어?”

“네 방에 잘 두었으니까 밥부터 먹어.”

“차려놔. 금방 갈 테니까.”

신유라는 자기 방으로 들어가 택배부터 확인했다. 그녀의 화사한 방은 화장품이나 책, 원서 등 대부분의 물건이 쓰던 대로 대충 놓여 있었다.

깔끔을 떠는 성격은 분명히 아니었다.

“어디 보자.”

신유라는 퇴근 후 친구들이 카페에서 만나자는 유혹도 떨치고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집으로 달려왔다.

오늘 도착하기로 한 그림을 확인하고 싶은 열망이 그 무엇보다 컸다.

신유라는 조심스럽게 포장을 제거했다.

포장을 제거하자 두 개의 액자가 나왔다.

이강수의 ‘초대’와 김종대의 ‘붉노랑상사화 여인’이었다.

신유라는 두 점의 그림을 보며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호호, 역시 사길 잘했다. 비싸긴 해도 정말 좋다.”

신유라는 두 그림을 세워 놓고 기쁨을 만끽했다.

신유라는 박 실장의 지시로 선암갤러리에서 세 신인작가의 작품을 촬영하고 회사로 돌아온 후 심각한 갈등에 빠졌다.

신유라는 본래 미술품에 관심이 없었다.

서 회장의 심부름으로 갤러리는 몇 군데 가 보았으나 보통 천만 원이 넘는 황당한 가격을 보면 딴 생각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한데 이번에는 선암갤러리에서 신인작가의 작품을 살펴보다 눈에 확 들어오는 두 작품을 발견하고, 에르메스 핸드백과 그림 사이에서 엄청난 갈등을 한 것이다.

퇴근 때까지 계속 되던 갈등은 박 실장이 그림을 출력한 봉투를 들고 사무실을 나가는 모습을 본 순간 종지부를 찍었다.

서 회장이 출력한 그림을 보면 자신이 찍은 두 작품을 구입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신유라는 재빨리 선암갤러리로 전화 해서 두 작품을 구입하고, 에르메스 핸드백을 사기 위해 모아 논 피 같은 돈, 700만원을 송금했다.

송금을 하고 나서야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달은 신유라는 날아간 에르메스 핸드백을 떠올리며 눈물을 삼켜야 했다.

그리고 애인과 데이트하는 날을 기다리는 심정으로 그림이 도착하기를 애타게 기다렸다.

드디어 오늘 기다리던 두 작품과 상봉한 것이다.

‘히히. 나도 이제 컬렉터란 말이야. 앞으로 명품 말고 그림이나 살까? 에휴, 근데 미술품은 너무 비싸. 두 점에 700이나 하잖아.’

신유라는 명품 핸드백이 더 비싸다는 사실은 망각하고 있었다.

‘키키, 어쨌든 ‘초대’를 보면 마음이 너무 평화로우니까 내 방에 걸고, ‘붉노랑상사화 여인’은 거실에 걸어야겠다.’

“유라야, 뭐해. 밥 먹으라니까.”

“알았어. 옷 갈아입고 지금 나가요.”

정장을 벗은 신유라의 몸매는 남자의 눈이 확 돌아갈 만큼 육감적이었다.

신유라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옷을 입었다.

“랄라랄라~, 이렇게 잘난 아가씨를 차지할 남자는 누구일까? 아이 궁금해라. 랄라라.”

헐렁한 바지와 티로 갈아입은 신유라는 방을 나갔다.

*

다음날, 1톤 트럭은 시간에 맞춰 도착했다.

수련을 하고 돌아온 강수는 1톤 트럭에 포장해 놓은 캔버스와 박스를 실어서 목동 성당으로 보냈다. 불우이웃을 돕는데 작으나마 보탬이 되었다는 것이 나름 즐거웠고 새삼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간접적으로나마 누군가에게 도움을 준 것이 처음이기 때문일 것이다.

아파트로 올라와 땀을 씻고, 컴퓨터 앞에 앉은 강수는 메일을 검색했다. 무지개출판사 편집기획팀에서 보내온 문서 파일 ‘벙어리 황구 죽돌이’가 도착해 있었다.

‘벙어리 황구 죽돌이’는 강수가 구상하고 있는 그림동화책의 제목으로 강수가 대학교 다니던 시기에 옆 마을에서 실제로 살았던 황구 죽돌이에 대한 이야기다.

그 당시 강수가 어머니에게 들은 이야기는 대충 이랬다.

황구 죽돌이는 새끼 때부터 철창에 갇혀 살았다. 주인은 죽돌이에게 손톱만큼의 사랑도 주지 않았다. 주인은 애완견으로 키운 것이 아니라 보신탕으로 쓰기 위해 죽돌이를 사육했다. 그래서인지 죽돌이는 항상 겁에 질린 눈을 하고 있었고, 짖지도 못하는 벙어리 개였다.

인간에 대한 불신으로 마음이 닫혀 있던 죽돌이를 젊은 부부가 사서 데려오고, 사랑으로 보살폈지만 죽돌이는 결국 담장 밖으로 뛰쳐나간다. 황구답게 덩치가 당당한 죽돌이는 사람을 피해 무법자처럼 마을을 돌아다니며 짖는 법도 배우고, 암컷을 만나 사랑도 속삭인다. 그리고 어느 날, 사냥꾼의 총에 맞아 죽고 만다. 죽돌이는 끝내 인간의 손길을 거부하고 자유를 선택했고, 너무나 짧은 생을 살았다.

강수는 실제 했던 죽돌이의 이야기를 나름 열심히 써서 무지개출판사 편집기획팀에 보냈다. 편집기획팀에서 의견을 적어 답장을 주면 이야기를 수정해서 다시 보냈다. 그렇게 ‘한국청년화가 12인전’ 전시 기간 동안 몇 번의 수정을 거쳤고, 거의 최종의 이야기를 이제 받은 것이다.

강수는 한 편의 동화로 탈바꿈한 죽돌이 이야기가 담긴 파일을 열었다.

사실 죽돌이 이야기는 주제가 무거워서 접근하기 어려운 소재라고 할 수 있었다. 게다가 새드엔딩이라 본래의 이야기를 토대로 창작하면 작품성은 획득할 수 있을지 몰라도 상업성은 기대하기 어렵다.

결국 죽돌이 이야기는 젊은 부부와 꼬마아이의 헌신적인 사랑으로 인간에게 받은 상처를 치유하고, 위기를 극복, 암컷을 만나 새끼를 낳는 해피엔딩으로 수정되었다.

강수는 죽돌이가 사냥꾼의 총에 죽고, 암컷이 새끼를 낳는 결말을 주장했지만 편집기획팀에서 한사코 죽돌이의 죽음을 반대했다. 강수가 주장한 결말은 이슈는 될 수 있어도 대중의 사랑을 받기는 어렵다는 이유 때문이다.

그림동화책과 회화는 대중 접근방식이 근본적으로 다르다. 단 한 명의 선택을 받는 회화는 극단적인 표현도 문제될 것이 없지만 그림동화책은 수천, 수만, 수십만 명의 나이 어린 독자를 대상으로 한다.

비극적인 결말은 주요 독자인 어린이의 외면을 받을 가능성이 높다. 결국 강수도 그 점을 수긍하고 편집기획팀이 제안한 결말을 수용했다.

이야기가 완성되었으니 그리는 일만 남았다.

강수는 도화지를 라이트박스에 올려놓고 스케치를 시작했다.

딩동, 딩동!

이때, 초인종이 울렸다.

“옳지, 택배구나!”

오전에 택배가 온다고 문자를 받았었다. 현관문을 여니 예상대로 택배기사가 큼지막한 박스를 가져왔다.

“이강수 씨?”

“예.”

“택배 전달했습니다.”

이름만 확인한 택배기사는 사인도 받지 않고 엘리베이터가 움직이기 전에 후닥닥 엘리베이터로 뛰어들어 갔다.

‘엄청 바쁜가 보네.’

택배기사처럼 바쁘게 사는 사람도 드문 것 같았다.

강수는 박스를 열어 선예가 보내준 기능성 의자를 꺼냈다. 굉장히 세련되고 고급스러운 의자는 허리부분이 일반의자에 비해 특이했다. 아마도 그 부분이 특허와 관련이 있을 것 같았다.

의자에 앉아서 자세를 잡아보고, 움직이고 뒤로도 젖혀보았다.

“야, 좋다.”

탄성이 절로 튀어나왔다.

의자에 앉아서 작업해야 하는 시간이 많았던 강수는 단번에 의자가 매우 편안하게 허리를 잡아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하. 이거 작업이 더 잘 되겠는데.”

강수는 선예에게 문자를 보냈다.

-선예야, 의자 잘 받았어. 허리가 아주 편하다. 이 의자 너무 좋다. 아빠한테 감사하다고 전해 줘.

-강수오빠, 방가. 의자가 마음에 든다니 나도 기분 좋아요. 아빠가 내일 돈 부친대요. 그리고 아빠 회사가 좀 풀려서 나 시간 많아요. 음음, 우리 뭐 할까요?

-우리? 뭘 하긴! 시간 많으면 놀지 말고 공부해. 3학년이면 하루 종일 도서관에서 공부해도 시간이 모자를 때잖아.

-그렇지 않아도 도서관인데. 힝, 오빠 미워!

문자를 보내고 선에는 멍하니 파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늘에는 흰구름이 몇 점 흐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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