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림 그리는 마법사-39화 (39/197)

# 39

그림 그리는 마법사 - 39회

[회장님, ‘수탉’는 구입하실 수 있으나 ‘붉노랑상사화 여인’과 ‘초대’는 판매가 되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서준홍의 미간이 좁혀졌다.

“허, 그래? 최 교수의 글이 판매에 영향을 끼친 모양이군.”

[최 교수의 안목은 미술계에 정평이 나 있어서 컬렉터들이 관심을 갖는 것 같습니다. 두 작품은 조금 전에 팔렸습니다.]

‘초대’를 놓친 것이 못내 아쉬웠지만 어쩔 수 없었다.

“쯧쯧, 간발의 차이로 놓쳤군. 팔리지 않은 작품은 뭔가?”

[김종대는 ‘수련꽃 여인’, ‘진달래 여인’, 박보람은 ‘가족’, ‘수탉’. 이렇게 네 작품이 남아 있습니다.]

서준홍은 두 작가의 작품이라도 살 수 있는 것을 그나마 다행이라고 여겼다.

“별 수 없지. ‘수련꽃 여인’, ‘수탉’을 구입하도록 하지. 대금은 바로 입금하겠네. 가격은 얼마인가?”

[‘수련꽃 여인’은 3백, ‘수탉’ 2백5십만 원입니다. 총 5백5십만 원입니다. 작품을 구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는 무슨. 아, 그리고 이 세 작가의 개인전은 언제쯤 계획하고 있나?”

[아직 구체적인 일정은 잡혀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최대한 빨리 개인전을 열 수 있도록 작가들과 상의해 연락드리겠습니다.]

“알겠네. 수고하시게.”

[감사합니다.]

신인작가들의 전시라 가볍게 여겼더니 최 교수의 글이 컬렉터를 움직였다.

원했던 작품은 아니지만 그나마 두 작품을 건졌다는데 위안을 삼았다.

“이 기사, 박 실장을 연결해.”

“예, 회장님.”

차내 스피커에서 신호음이 울리고, 두 번 만에 끊겼다.

[회장님, 박 실장입니다.]

“어, 박 실장. 내 명의로 선암갤러리에 5백5십만 원을 입금해. 그리고 앞으로 이강수, 김종대, 박보람 이 세 명의 전시를 관리해서 보고해.”

[예, 회장님. 다른 지시사항이 있는지요?]

“됐어. 수고해.”

서준홍은 주목해야 할 신인작가리스트에 이들 세 명을 추가했다.

*

수화기를 내려 놓은 장영봉의 입은 귀에 걸렸다.

최이석 평론가의 글이 실린 주간경제가 발간된 오늘 세 작가의 작품이 여섯 점이나 무더기로 팔린 때문이다.

아직 팔리지 않은 작품은 박보람의 ‘가족’, 김종대의 ‘진달래 여인’뿐이다. 이뿐만 아니라 박해나, 김이연, 장동운의 작품도 덩달아 대부분 팔려나갔다.

전시회는 기대치를 뛰어넘는 성공을 거두었다.

다만 최 교수의 글이 일주일 전에만 발표되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그랬으면 다른 작가의 작품도 꽤 팔렸을 것이 틀림없었다.

‘흠, 최 교수님에게 고맙다고 선물이라도 들고 찾아봐야겠지. 그나저나 이들의 개인전이 시급하군.’

김종대는 차세대 화가로서 완전히 궤도에 올랐고, 박보람과 이강수는 최이석의 눈에 들었으니 작품만 좋으면 뜨는 것은 불문가지였다.

장영봉은 진흙 속에서 영롱한 진주를 세 개나 발굴해 낸 자부심으로 하늘을 날 것 같은 기분에 휩싸였다. 입가에서 웃음이 떠나지 않는 장영봉은 표정을 수습하고, 세 작가와 개인전을 상의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

강수와 종대는 작품 완판 기념으로 저녁과 간단하게 축하주를 마셨다.

종대의 ‘진달래 여인’도 폐문하기 전, 판매 대열에 합류해 네 작품이 전부 팔린 것이다.

종대는 ‘도시의 일몰’을 구입한 것이 신의 한수라고 자랑스러워 했다.

3백만원 아끼겠다고 내일까지 기다렸으면 작품을 놓쳤을 테고, 지연이를 엄청 미워했을 거라며 너스레를 떨었다.

강수도 찝찝하고 미안했던 마음을 덜어낼 수 있었다.

완판의 기쁨을 충분히 만끽한 두 사람은 곧 자리에서 일어났다.

강수는 장영봉에게 양해를 구하고 ‘눈물’을 먼저 철거했다.

잘 포장된 ‘눈물’을 들고, 술집에서 나온 강수는 주간지 주간경제를 사서 택시를 탔다.

강수는 최이석 평론가가 미술계동향 코너에서 자신과 종대, 박보람 세 명을 집중 조명했다는 말을 장영봉에게 들었다.

종대의 작품이 완판되고, 자신의 작품 ‘초대’가 팔린 것은 순전히 미술계동향이라는 최이석의 글 때문인 것이다.

최이석은 화단에서 네임밸류가 있는 미술평론가이자 대학 교수였다. 최이석 평론가가 자신의 작품을 비평했다는 말에 가슴이 설레었다.

자신의 작품을 평론가가 비평한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집으로 돌아온 강수는 옷도 벗지 않고, 탁자에 앉아 잡지부터 펼쳤다.

‘미술계동향이라고··· 여깃군.’

권말쯤에 두 쪽에 걸쳐 쓴 논평이었고, 그림 두 점이 실려 있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눈물’이었다.

비록 주간 경제 잡지였지만 잡지에 자신의 그림이 실렸다는 사실만으로도 뛸 듯이 기뻤다.

다만 작게 인쇄된 ‘눈물’은 원화가 주는 절제된 슬픔, 심층적인 색채와 중의적 표현이 죽어버린 것이 아쉬웠다.

강수는 최이석의 글을 읽기 시작했다.

<······ 나는 ‘한국청년화가 12인전’에 출품한 작품들을 한 점 한 점 감상하면서 흡족한 기분을 만끽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박해나, 김이연, 장동운 등 검증 받은 신진작가의 작품은 기대에 어긋나지 않는 수준 높은 작품성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그들 외에 치열한 작가의식이 느껴지는 창의적인 작품을 다수 발견하고 흥분을 금치 못했다. 나를 흥분케 한 그림은 전혀 알려지지 않은 신인작가들의 작품들이었다.

특히 세 작가의 작품은 칭찬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강수, 김종대, 박보람이 그들이다.

전시회에 출품한 이강수의 작품은 세 점으로 ‘눈물’, ‘도시의 일몰’, ‘초대’다.

상단에 실린 흑인 소년을 그린 작품이 ‘눈물’이다.

사진으로는 제대로 표현되지 않았지만 그림은 색조(色調)가 매우 뛰어나다. 황색과 녹색이 어우러진 드넓은 초원을 연상케 하는 배경에 검은색 피부의 소년이 관객의 시선을 피해 어딘가를 응시하고 있다. 흑인 소년의 하얀 눈과 짙은 흑갈색 눈동자는 심연처럼 깊은 슬픔이 갈무리 되어 숨어 있다. 또한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는 소년의 무심하고 절제된 표정은 지난한 삶을 내면 속에서 차돌처럼 단단하게 갈무리하고 있다.

······ 이강수의 또 다른 두 작품, ‘도시의 일몰’과 ‘초대’도 ‘눈물’ 못지 않은 강한 울림을 준다. ‘초대’는 낭만적인 분위기가 풍기는 무척 즐겁고 유쾌한 작품이며, ‘도시의 일몰’은 현대를 살아가는 도시인의 긍지와 미래에 대한 희망, 긍정적인 삶의 에너지를 뿜어내고 있다.

한데 이토록 놀라운 작품을 선 보인 이강수 작가는 아직 첫 개인전도 열지 않았다. 개인적으로 그의 개인전이 너무 기대된다. 나는 이강수가 하루 빨리 개인전을 준비해서 개최할 수 있기를 고대하고 있다.

김종대는 작년, ‘꽃과 여인’이라는 타이틀로 개인전을 개최한 신인으로 에로틱하고 유니크한 파격적인 작품을 선보였다. 이번 ‘한국청년화가 12인전’에서는···.>

논평을 끝까지 읽은 강수는 흥분을 주체하지 못하고 잡지책을 덮었다.

최이석은 어느 작가보다도 자신의 작품에 지면을 가장 많이 할애해서 논평했다. 타 작가보다 비중 있게 다룬 셈이었다.

눈물은 나름 수준작이라고 생각했지만 이렇게까지 칭찬을 받을 줄은 상상도 못했다.

최이석 평론가에게 좋은 평가를 받았지만 아직 갈 길은 멀었다. 그의 말대로 개인전을 열어서 본격적으로 대중에게 자신의 이름을 알려야 한다.

‘개인전을 최소 3번은 열어야 미술시장에서 그림이 거래될 수 있는 자격이 생긴다고 하지. 정말 까마득하구나···.’

그래도 남들과 달리 출발이 남다른 강수는 희망을 가질 수 있었다.

‘장 선배님이 개인전을 빨리 준비하라고 하는 것 보면 최 교수님의 덕을 톡톡히 보는구나. 희망사항이지만 어쩌면 첫 개인전을 성공할지도 모르겠는데?’

오후 6시경에 전시장으로 내려온 장 선배가 개인전을 언제쯤 계획하고 있는지 물었다. 작품만 준비하면 대관료는 물론 팜플렛 등 모든 전시 비용을 지원해 주겠다고 제안했다.

강수 입장에서 보면 파격적인 제안이었다.

강수는 1년 정도 시간을 주면 가능할 것 같다고 대답했고, 장 선배는 최대한 빨리 개인전을 준비해 달라고 주문을 했다.

개인전을 열고자 한다면 단일한 주제나 화풍으로 최소 20개 이상의 작품을 창작해야 한다.

‘한 달에 두 작품씩 일년 내내 쉬지 않고 그리면 24개군. 내년 이맘때 쯤에나 첫 개인전을 열수가 있다는 얘기··· 못 할 거 없지.’

개인전을 준비하려면 최소 1년은 걸린다는 계산이 나온다.

12인전을 준비했을 때처럼 오전에는 마나회로를 수련하고, 오후에는 창작에 전념하면 한 달에 두 편은 완성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문제는 생활비군.’

걸림돌이라면 대출금 이자와 각종 공과금, 품위유지비, 생필품비, 문화비, 재료비 등 매달 고정적으로 발생하는 생활비였다.

‘품위는 포기하고 먹는 거 줄이고 거지처럼 지낸다고 해도 한 달에 최소 200은 필요한데···.’

수중의 돈이라고 해야 250만원 남짓이다. 전시회에서 팔린 그림 값은 수수료 절반을 제외한 400만원이다.

650만원으로 3개월을 버텨도 10월말이면 거덜난다.

아파트를 유지하며 창작 작업하려면 일러스트 병행은 필수였다.

일러스트를 하게 되면 수련을 줄이거나 아니면 잠자는 시간을 줄여야 한다. 또는 개인전 전시를 몇 개월 더 연기하든지 해야 한다.

‘그럴 수는 없지.’

강수는 돈을 벌기 위해 시간을 저당 잡히지 않겠다는 결심을 굳힌바 있었다. 아파트를 유지하겠다고 시작부터 자신에게 한 약속을 깰 순 없었다.

‘종희와 끝났으니 이젠 아파트를 고집할 이유가 없어. 아파트를 정리하고 허름한 작업실이라도 얻어서 그림동화책하고 개인전 준비를 하자.’

강수는 구상 중인 그림동화책과 개인전에 전념하기로 결심을 굳혔다.

다음날.

마나회로 수련을 하고 돌아온 강수는 집주인에게 전화해 사정이 생겨 아파트를 빼겠다고 양해를 구했다. 집주인의 동의를 얻고 상가에 있는 공인중개사에 들러 집을 내놓았다.

중개업자는 월세보다는 전세가 인기 많아서 보름 내로 나갈 거라고 했다. 어차피 이사할 거 빠르면 빠를수록 좋았다.

오전에는 수련을 하러 가기 때문에 집이 빈다. 강수는 디지털 도어락의 비밀번호를 알려주고 밖으로 나와 집으로 돌아왔다.

짐이 많지는 않지만 있을 것은 다 있다. 특히 그림책과 캔버스가 꽤 많았다.

‘짐도 정리를 해야 하는데··· 대학 때부터 모아온 작품도 상당수고 그림동화책, 교양서적, 삽화, 원화···.’

강수는 책장에 꽂혀 있는 상당수의 그림동화책을 보고 고개를 저었다. 창작 동화책도 아니고 일러스트를 접은 마당에 소장하고 있을 필요가 없었다.

책장에 정리되어 있는 삽화, 원화가 눈에 들어왔다.

삽화나 동화책 원화는 책이 출판되고 나면 본래의 소용가치를 다 했다고 볼 수 있다. 이것들 역시 미련을 가질 이유가 없었다.

물론 그림동화책 원화의 경우 작가에 따라 원화전을 열기도 하고, 유명 작가의 원화는 고가에 팔리기도 한다.

하지만 자비를 들여서 원화전을 해봐야 수익을 낼 수 있는 작가는 매우 드문 것이 현실이다.

‘가져 갈 필요 없어. 전부 처분하자.’

다만 정성을 들여 그린 그림인데 쓰레기로 버리기에는 아까웠다.

‘이걸 팔어?’

좌판을 깔고 길거리에서 판다고 생각을 하자 한숨부터 나왔다.

‘관두자. 판다고 해도 몇 명이나 사고, 얼마나 벌겠어? 차라리 바자회 같은 행사에 기증하자. 그리고··· 기존 작품들은 어떡한다?’

대학 때부터 캔버스에 작업해 온 작품이 상당수다. 지금 와서 보니 그것들을 왜 여태까지 바리바리 싸 들고 다녔나 싶었다.

‘졸업 후 그린 작품은 포트폴리오로 정리해 놨으니까 이것도 원화랑 같이 전부 바자회에 기증해야겠군.’

팔짱을 끼고 구석에 박힌 캔버스를 보던 강수의 뇌리에 뭔가 번쩍하고 떠올랐다.

“아, 가만! 포트폴리오 작품들을 다시 그리는 건 어떨까? 채색만 다시 한 ‘강가’도 장 선배에게 좋은 평을 받았잖아.”

다른 건 몰라도 포트폴리오에 있는 15작품은 나름 의미를 가지고 있는 작품들이었다. 비록 저열한 수준 그림이라 예술성은 떨어지지만 창작 의도와 아이디어는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포트폴리오 작품을 다시 그리면 개인전을 준비하는 시간이 거의 절반으로 줄어들지 않을까?’

어려운 문제의 해법을 발견한 것처럼 웃음이 절로 나왔다.

“하하, 바로 이거야. 다시 그리면 되는 거지. 나머지 그림은 전부 바자회에 넘기면 되고.”

자신의 그림을 바자회에 기증하기로 결정한 강수는 인터넷에서 바자회를 검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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