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각성한 이레귤러의 커브가 드러남-142화 (142/200)

142화. 월드 시리즈 (2)

큰 타구였지만 7.3m에 달하는 오라클 파크의 우측 담장은 오른손 타자에게 결코 홈런을 허락하지 않는다. 묘하게 각진 구조 때문에 담장을 때린 타구가 불규칙한 패턴으로 튕겨져 나와 3루타가 많이 나오기는 한다.

이번 타구는 너무 잘 맞아서 체공 시간이 짧았다. 거기에 외야수의 빠른 대처가 곁들여져 2루타로 막을 수 있었다.

상황이 정리된 후 타임을 걸고 베그웰이 감독과 함께 마운드로 올라왔다. 야수들도 모여들고 있었다.

‘부끄럽게… 안 와도 된다고.’

투구 전에 생각이 너무 많았다. 스스로 집중력을 흩트려 버렸다. 바로 반성 중이다.

“편하게 가지.”

괜찮다든가 하는 위로와 격려의 말로 시작할 줄 알았는데 마운드에서 마주한 감독이 다짜고짜 이상한 말을 던져온다.

“무슨 말씀을 하는 겁니까?”

“선두타자가 스코어링 포지션에 처음 나갔잖아. 아마 다음 타자는 번트를 시도할 가능성이 아주 높겠지. 특수한 상황에 일반적이지 않은 투수라면, 주자를 3루에 보내놓고 동점을 만들고 싶어 할 거야. 내가 저쪽 감독이라면 그렇게 할 것 같아.”

상대가 보내기 번트를 시도할 경우 줄 점수는 주고 안정적으로 가자는 뜻인 것 같다.

“그렇지만, 하지만 여기서 실점은…”

오늘 같은 경기에서 경기 중반에 동점이 된다는 건 경기 흐름이 바뀔 위험이 높다.

‘이런 식으로 계속 던지면 잘해야 7이닝 정도겠지. 그 이상은 장담하기 어려워.’

그런 상황에서 동점까지 되면 이 경기가 어떻게 흘러갈지 짐작이 안 된다. 아무리 생각해도 동점이 되면 아주 많이 곤란하다.

“1루를 채우죠.”

“음. 너무 무리하는 것 아닐까? 아직 경기도 중반이고 그렇게 되면 수비 위치가…”

내 주장에 감독의 얼굴에서 망설임이 나타났다.

감독이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그 정도는 나도 안다. 1, 2루에 주자가 있으면 1루수와 2루수는 베이스 쪽으로 붙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주자의 리드 폭이 아주 커지게 된다. 수비가 주자 견제를 위해 베이스 쪽으로 붙으면 1, 2루 간의 빈 공간이 넓어진다.

베이스를 채우는 목적은 더블플레이를 노리는 것인데 오른손 타자의 밀어치는 타구에 취약한 수비 포메이션이 된다는 약점이 생긴다.

“타구를 유격수 쪽으로 유도해 보겠습니다. 3루 쪽 번트는 제가 커버하고 1루수만 앞으로 좀 당기면 되지 않을까요?”

1루를 채우면 상대해야 할 애스트로스의 타자는 7번 빌리 애쉬턴이다. 그는 펀치력은 있지만, 상대적으로 타격의 정교함은 좀 떨어지는 타자다. 전형적인 당겨 치는 타자였다. 그가 밀어치기마저 능숙했다면 그의 타순은 지금보다 훨씬 앞 순번이었을 것이다.

나와 눈을 한 번 슬쩍 마주치더니 감독이 바로 결정을 내렸다.

“음. 다들 들었지? 우리 에이스가 자신 있다는군. 그렇다면 해야겠지. 수비는 4-1형으로… 거기서 알버트 자네만 위치를 앞으로 좀 당겨서 잡으면 되겠네.”

감독은 내 의견에 덧붙여 우익수의 위치도 조정했다.

우익수를 그렇게 당기면 짧은 안타는 거의 봉쇄된다. 메이저리그 외야수들의 어깨는 평범한 우익수 앞 안타를 범타로 바꿀 수 있다. 물론 그 수비 위치에서는 평범한 외야플라이가 2루타로 돌변하기도 한다.

‘하아! 믿어줘서 고맙긴 한데…’

수비 시프트의 중요성이 높아지면서 수비 포메이션은 점점 복잡해져 갔다. 보통 야수들의 유니폼 하의 뒷주머니에는 작은 수첩이 들어 있는데 거기에 이런 변형 수비 포메이션의 방법들이 빼곡히 기록되어 있다. 야수들이 일제히 수첩을 꺼내 감독의 지시사항을 확인했다.

“옙. 알겠습니다.”

감독은 열렬히 찬성하는 표정은 아니었지만, 내 의견에 반대하지 않았다. 이제는 해내어야 한다.

“플레이 볼.”

벤치에서 고의사구 의사를 주심에게 전달하면서 1루가 바로 채워졌다. 무사에 이렇게 의도적으로 루를 채우는 작전야구를 해보는 건 굉장히 오래간만이다. 이런 식의 야구를 미국에서는 거의 하지 않는다.

‘까짓거 하면 하는 거지.’

예상대로 타자는 번트 자세를 취한다.

‘그래?’

초구에 일단 볼을 하나 던져서 타자에게 수비의 위치 이동을 보여줬다. 정상적인 수비 위치에 있던 1루수가 신속하게 전진해 약속한 대로의 움직임을 취했다.

타자는 내밀고 있던 배트를 황급하게 뒤로 뺐다. 이제 타자는 선택을 해야 한다. 번트를 할 것인가 말 것인가? 한다면 어느 쪽으로 굴려야 하나?

‘심리적 압박만 주면 돼.’

아무리 번트 연습을 늘 해왔다고는 하지만 미국야구의 특성상 그것을 실전에서 사용하는 건 익숙하지 않기 마련이다.

대시하는 1루수를 빤히 보면서 그 앞으로 번트를 대 타구를 보낸다는 건 여간한 배짱을 가지지 않고서는 힘들다. 번트는 보기보다 정교함이 필요한 기술이다.

‘자! 어떻게 할래?’

“파울.”

다음 공으로 던져진 싱커에 타자가 배트를 가져다 댔지만 3루 쪽 파울라인을 벗어났다. 타자는 1루 쪽을 피했다.

‘진짜 번트를 하긴 할 모양이네.’

뭔가 특별한 대접을 받는 것 같아 묘한 기분이 든다.

‘내가 이렇게까지 해서 공략해야 하는 급의 투수야? 히힛. 내가 좀 하긴 하지.’

이제 견제를 해야 할 차례다. 투구자세에서 발을 풀며 재빨리 2루 견제. 리드 폭을 넓혀가던 주자가 재빨리 귀루했다.

주자를 잡으려고 던진 건 아니다. 리드 폭을 한 발짝만 줄일 수 있으면 대만족이다.

점점 대학 때 야구하던 감각이 나오고 있다. 그때 이런 상황은 자주 있었다. 원포인트 릴리프에게는 주자 없는 상황이 오히려 드물었다.

원 볼 원 스트라이크.

타자가 정말 보내기 번트 지시를 받았다면 이제는 꼭 성공해야만 하는 볼카운트다.

‘이런 상황에서 쓰리 번트는 어렵지.’

떨어지는 변화구에다 보내야 하는 타구의 방향이 제한되고 애매한 타이밍에 견제구가 나온다. 타자의 집중력을 망가트리기에는 딱 좋은 최적의 조건이다.

경기 진행이 늘어지는 모양새가 되었지만, 관중의 긴장감 더 커져가는지 늘 그라운드를 채우던 웅성임이 조금 줄어든 것 같다. 관중도 지금 이 장면이 오늘의 승패를 좌우할지도 모른다고 느끼는 것 같다.

페이크 번트 슬래시(Fake bunt Slash)로 전환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얼핏 들었지만, 지금 복잡한 생각은 독이다. 그대로 싱커를 인코스 낮은 쪽으로 떨어트렸다.

턱-

어떻게 맞은 건지 번트 타구가 살짝 떴다. 홈플레이트에서 멀리 가는 타구가 아니었기 때문에 이 타구는 포수가 처리해야 한다. 노바운드로 잡을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베그웰이 몸을 날려 헤드 퍼스트 슬라이딩을 하듯 공을 쫓았다.

‘에고, 조금 못 미쳤네. 이거 좋지 않은… 응?’

2루 주자가 스타트 후 타구를 보고 다시 2루로 돌아가다 역동작에 걸렸다.

‘이거 일부러 안 잡은 건가?’

심판은 인필드 플라이를 선언하지 않았다. 베그웰의 몸을 일으키는 동작이 신속하다. 공은 많이 구르지 않고 거의 떨어진 그 자리에 멈춰 서 있었다. 베그웰이 맨손으로 공을 집어 3루로 멋진 송구를 이어갔다.

“아웃.”

공은 다시 2루로…

“아웃.”

순식간에 2(포수) - 5(3루수) - 4(2루수)로 이어지는 더블플레이가 이루어졌다.

“나이쓰!”

주먹을 불끈 쥐게 하는 베그웰의 멋진 플레이였다. 이 와중에 주자의 움직임까지 보면서 순간적으로 어떻게 타구를 처리해야 할지를 판단하다니 대단하다.

우와와-

관중의 환호가 그라운드를 뒤덮었다. 우리 더그아웃 역시 열광적인 분위기였다.

애스트로스의 감독이 쏜살같이 달려 나와 주심에게 인필드 플라이에 관한 항의를 했지만 지금 판정을 번복할 수는 없다. 당한 놈이 병신이다.

인필드 플라이는 기본적으로 심판의 재량에 따른다. 인필드 플라이가 선언되어야 할 조건이 충족되었다고 해도 무조건 성립하지는 않는다. 심판이 판단하여 인필드 플라이라고 선언해야만 유효하다. 비디오 판독의 대상도 아니다.

‘알면서도 당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긴 했어.’

이런 게 야구지능이다. 룰을 가장 잘 이해하는 자가 게임을 지배한다. 스코어링 포지션에 있던 주자가 지워지고 투아웃이 되었다. 넘어가려는 듯했던 흐름을 다시 돌려세웠다. 정말 짜릿하다.

애스트로스 감독이 몰라서 저렇게 항의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어떻게든 흐름을 다시 돌려보려고 하는 노력이 애잔할 지경이다.

곧 재개된 게임에서 기운 빠진 애스트로스의 7번 타자를 삼진으로 돌려세우고 무실점으로 5회를 마무리했다.

“야! 베그웰 정말 대단한 플레이였어. 정말 존경스러워. 그 짧은 시간에 그런 판단을 하다니…”

“뭐?”

이닝을 마치고 더그아웃에 들어가자마자 경의를 담아 감사 인사를 전했는데 베그웰의 반응이 예상했던 것과는 다르다.

“우연히 일어난 일이야. 진짜 잡으려다 못 잡은 거야. 주자가 타구 판단을 잘못한 거지. 운이 좋았어. 순간적으로 조졌다고 생각했었는데…”

‘헐!’

“행운이 반복된다는 보장은 없는 거니까 이제부터는 그런 상황 자체를 만들지 말아야지.”

태연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나가는 베그웰을 멍하니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정말 세상은 운칠기삼(運七技三)으로 움직이나 보다.

딱-

위기 뒤에 기회라는 말이 딱 들어맞았다. 1안타에 머물러 있던 타선이 5회에 다시 1안타를 더 만들어 냈다. 다시 홈런이었다.

‘나 참!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3안타로 2점?’

4안타 1볼넷으로도 점수를 못 내고 있는 어떤 팀과 상당히 비교가 된다. 1회 크리스의 홈런도 뜻밖이었는데 8번 타자 크로포드의 홈런이라니 얼떨떨할 따름이다. 크로포드는 올 시즌 홈런이 없었다. 메이저리그에서 9시즌을 뛰면서 통산홈런이 10개 간신히 넘는데 대부분 리그 데뷔 1, 2년차에 기록한 것들이었다.

“베그웰. 오늘 경기는 어떻게든 이기려나 봐.”

위기는 어떻게든 막아지고 점수는 어이없을 정도로 쉽게 내고 있었다.

“새삼스럽게 뭘 그리 놀란 턱 하는 거야? 여기 타자들 중에서 마이너에서 왕년에 본즈 놀이 못 해봤던 선수가 있겠어? 힘이 모자라서 홈런을 못 치는 선수는 없어. 투수 집중력이 떨어졌겠지. 점수를 내야 하는 장면에서 점수는 안 나고 타순은 하위타순이고 해서 순간적으로 긴장이 풀어졌을 거야.”

“그렇겠지.”

“너나 집중력 잃지 말고 마무리 잘하자고, 쓸데없이 완투를 해야겠다는 등 그런 생각을 하지 마. 내가 보기엔 네가 오늘 7이닝 정도만 소화해 주면 네 몫은 충분히 다하는 거야.”

남은 두 이닝에서 집중력을 잃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는 건 무실점으로 막으라는 이야기다. 하지만 지금 돌아가는 상황에서 완봉 욕심이 슬쩍 머리를 스쳐 지나가는 건 나도 어쩔 수가 없다.

포스트 시즌 등판에서 이제껏 무실점 경기를 한 적이 없었다. 오늘 운도 따라주는 것 같은데 어쩌면 가능하지 않을까란 생각이 스멀스멀 올라오고 있었다.

‘사람은 욕망으로 살아가는 존재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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