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각성한 이레귤러의 커브가 드러남-141화 (141/200)

141화. 월드 시리즈 (1)

"So."

“끝내버려.”

오늘따라 관중의 외침이 귀에 또렷하게 들어온다. 평소에는 한쪽 귀로 들어와서 다른 쪽 귀로 자연스럽게 흘러나가는 느낌이었다면 오늘은 가슴에 머물러 심장을 울린다.

애써 마음을 가다듬으며 공을 던지고 있지만, 이닝이 지날수록 가슴의 박동이 점점 더 커지고 있다. 이미 수십 번 올라왔던 홈 마운드지만 오늘은 특히 높고 가파르게 느껴진다.

4회 초 현재 1:0으로 경기를 리드하고 있지만, 불안한 우세일 뿐이다. 1회 선두타자가 홈런을 칠 때까지만 해도 어제와 비슷한 유형으로 흘러갈 것 같던 경기가 그 이후 우리 타선은 단 한 개의 안타도 쳐내지 못하고 꽁꽁 묶여있다.

‘차라리 언더독의 입장이었으면 좀 편했을 것 같은데…’

어느 사이엔가 가지고 싶은 것보다 지켜야 할 것이 많아진 것 같다.

“스트라익.”

초구를 인코스 빠른 볼로 시작했다. 아웃코스를 주로 이용하던 패턴을 뒤집었다. 역시 타자는 예상하지 못했는지 몸을 잠시 움찔거렸지만 배트를 내지 못했다.

지금까지 거의 매회 안타를 맞았지만 모두 단타였고 선두타자의 출루도 아니었다.

‘좀 늦추니까 여지없이 맞아 나가네.’

정규시즌처럼 느긋하게 던지고 싶은데 그렇게 던지고 있다가도 안타를 하나 맞으면 다시 전력투구를 하는 패턴으로 도돌이표를 찍어 놓은 것처럼 돌아오고 있다.

공을 던지기 전 1루 주자를 지긋이 한 번 바라봐주고 아웃코스 꽉 찬 슬라이더를 던졌다.

“스트라익,”

확실히 패스트볼과 구속 차를 많이 주면 타자의 타이밍을 흩트리기가 편하다. 문제는 이런 패턴을 가져가면 땅볼 유도는 힘들다. 내야에 공이 구르기 위한 전제조건은 타자가 일단 공을 맞혀내야 한다.

‘인플레이 타구가 만들어내야 하는데…’

타자가 타이밍을 놓쳐 공을 그냥 바라보거나 헛스윙이 많아지면 삼진은 늘어나지만 투구 수도 덩달아 늘어나기 마련이다. 그런 식이라면 긴 이닝 소화가 어렵다.

한 패턴으로 꿋꿋하게 밀고 나가는 것이 결과적으로 좋을 수도 있지만 이런 한 점 차 승부에서 실점 위험을 감수하고 싶지 않았다.

일단 인플레이성 타구가 나오면 내가 관여할 수 있는 부분은 거의 없다. 정타가 나오지 않게끔 노력하는 것까지가 나의 역할이고 그 이후엔 운의 비중이 커진다.

‘어제 경기와는 확실히 다르네.’

애스트로스는 1차전을 포기함으로써 빠르게 팀의 재정비를 해낸 것 같았다. 그들의 원투펀치는 아니지만 상당한 수준급의 선발을 투수를 내보내 별로 뒤처지지 않은 초반 판세를 만들어냈다. 이럴 때 실점하면 괜히 상대의 기를 살려주게 된다.

그동안의 포스트 시즌 경기에서는 내가 등판할 때마다 초반에 점수 차가 좀 벌어졌었다. 실점을 좀 허용해도 된다는 전제를 깔고 안정적으로 아웃 카운트를 쌓기만 하면 저절로 승리가 돌아왔었다.

‘오랜만에 짜릿하네.’

오늘까지도 애스트로스는 원투펀치를 가동하지 않고 있다. 이건 아마도 3, 4, 5차전이 벌어지는 홈경기에서 대대적인 반격을 준비하고 있다는 뜻이다.

‘2연승이 필요하다고. 지금 시점에서 실점은 곤란해. 응?’

업슛을 던지라는 사인이 나왔다. 상당히 빠른 승부 타이밍이다. 지금까지 패스트볼도 별다른 힘 조절 없이 전력으로 던져왔는데 업슛 역시 전력으로 던져야 하는 공이다.

공이 떠오르는 듯 보이게 하기 위해선 일반 변화구보다 더 강한 회전이 들어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몸의 밸런스나 팔의 스피드, 손가락의 채는 힘 등이 다 균일하게 맞아들어가야 한다.

결코 힘을 빼고 편안하게 던질 수 있는 공이 아니다. 남발하게 되면 후반으로 갈수록 손아귀 힘이 떨어지는 등의 부작용을 동반한다. 그래서 경기 후반 결정적인 순간에나 한두 개쯤 사용하는 구종이었다.

‘정말 어제 말처럼 하라는 건가? 하긴 지금이 뭘 가려서 해야 할 때는 아니지.’

투 스트라이크 이후의 높은 쪽 패스트볼을 참아내기는 쉽지 않다. 배트 컨트롤이 좋은 선수들의 경우에는 타점이 빗나가도 공을 쫓아 어떻게든 커트를 해내기도 하는데, 이 공은 타자가 전혀 익숙하지 않은 방향으로 움직이기 때문에 일단 배트를 끌어내기만 하면 거의 실패하는 일이 없었다.

“스트라익. 배터 아웃.”

요란한 삼진 콜을 들으며 몸을 돌렸다. 쓰리 아웃. 4회도 무실점으로 막아냈다.

“수고했네.”

더그아웃에서 감독과 손을 가볍게 마주쳤는데 별로 표정이 좋지 않다. 지금 경기 상황도 그렇고 오늘 오전에 일어난 사건 때문일 것이다.

포스트 시즌 7전4선승제의 경우 통상적으로 4명의 선발투수 시리즈를 치른다. 단기전이기 때문에 좀 더 우수한 투수를 집중적으로 투입하기 위해서 휴식을 줄이는 페널티를 감수한다. 그편이 승수 쌓기에 유리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도 중간 휴식일을 생각하면 최소 3일간의 휴식은 보장된다. 하지만 우리 팀은 그렇게 투수진을 운용하지 않았었다. 시리즈마다 정규시즌 4, 5선발을 번갈아 가며 기용하면서 지금까지 정규시즌에서처럼 선발투수에게 최소 4일간의 휴식을 보장해왔다.

‘왜 그렇게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까지는 아주 성공적이었지.’

디비전 시리즈와 챔피언십 시리즈를 거치면서 무리하지 않고 좋은 컨디션을 유지해 온 선발진 덕분에 파탄을 드러낸 상대 팀을 맞아 시리즈 초반 확실한 우세를 점하면서 월드시리즈까지 어렵지 않게 올라왔다.

‘하필이면 오늘 그런 일이…’

아침 식사시간 드로이넨에게 사고가 일어났다. 뷔페 스타일로 준비된 샐러드를 가지러 가다가 무엇 때문인지 미끄러졌다. 그냥 우연히 일어난 재수 없는 일이었다. 그 정도라면 그러려니 하겠는데 문제는 넘어지면서 손으로 옆에 있는 의자를 짚었는데 철제로 된 테두리에 손톱이 걸리면서 끝이 살짝 깨져버렸다,

그것 이외에는 다치지도 않았고 일반적이라면 잠깐의 해프닝으로 지나갈 일이었다. 손톱 살짝 깨진 거야 일주일이면 티도 안 난다. 하지만 드로이넨은 투수였다. 그것도 3일 후에 등판을 해야 하는 투수.

투수에게 손톱은 아주 중요하다.

사실 손톱이 직접적으로 영향을 주는 구종은 공을 찍어서 던지는 너클볼 정도라고 한다. 하지만 직간접적으로 손톱은 공의 실밥을 스치기도 하고 공을 쥐는 감각에 영향을 끼친다. 그래서 손톱 길이에 아주 예민하다. 투수는 단순히 공을 던지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잘 던져야 한다.

대부분의 투수는 손톱 맨 위 하얀 부분이 약간 남는 정도로 손톱을 손질하는데 선수에 따라 길면 부러지기 쉽다고 남기지 않고 다 잘라내는 선수도 있다. 그래 봐야 1~2mm 정도의 차이일 뿐이다.

긴 손톱을 선호하는 선수의 경우 손톱이 짧아지면 공이 뜨는 경향이 생길 정도다. 너무 민감해서 손톱깎이를 사용하지 않는 선수까지 있다. 그런 경우 손톱 가는 도구로 갈아서 길이를 맞춘다.

투수에게는 이왕이면 연약한 손톱보다는 두꺼운 손톱이 낫지만 그렇지 못한 선수들의 경우 보통은 검지·중지에 매니큐어를 발라 손톱의 갈라짐을 막는다. 평소에 반창고를 붙이고 다니는 선수가 있을 정도다.

그런 손톱이 깨졌다? 끝이 2~3mm 훼손되었을 뿐이라서 일상생활에 아무런 지장이 없고 일주일도 안 되어 원상태로 돌아오겠지만, 현재로서는 대사건이다. 일주일 후엔 월드시리즈가 끝난다.

단순하게 생각하면 존슨을 대체선발로 기용하면 되지만 그게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그동안은 선발에서 빠진 선수가 롱릴리프의 역할을 하면서 불펜을 두텁게 만들어 주었는데 그것도 불가능해졌다.

선발투수 한 명을 불펜으로 돌린다는 건 4인 선발이 건재해 제 몫을 다한다는 것을 전제로 하지 않으면 성립할 수 없는 방법이다. 이제 그 기본 계획 자체를 수정해야 한다. 아마도 라드 감독의 머리는 터져 나갈 것이다.

"에구…"

금방 베그웰이 삼진을 당했다. 여간해서는 삼진을 당하지 않는 타자인데 오늘 조짐이 별로 좋지 않다.

‘이렇게 공격이 지지부진해서야…’

따악-

“그렇지. 역시 4번 타자야.”

레블론이 이번 경기 두 번째 안타를 쳐냈다. 이럴 땐 고참이 뭔가를 해내줘야 한다. 투아웃 이후지만, 뒷타자들이 한 방 있는 카스트로와 필로 이어진다.

‘저… 저.’

초구에 거의 원 바운드성으로 낙차 큰 커브가 들어왔는데 우리 팀의 유능한 5번 타자께서 그 공에 냅다 배트를 휘둘렀다.

‘하아! 아무리 배드볼 히터라도 그건 너무 하잖아.’

과거 괴수로 불렸던 블라디미르 게레로가 원바운드 볼을 타격해 홈런을 만든 일이 있다고는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저건 너무 심했다. 어떻게 저런 공에 스윙할 생각이 드는지 정말 뇌구조가 궁금할 지경이다.

저 녀석은 상대 팀으로 만났을 땐 이가 갈리게 잘 치더니 우리 팀에 와서는 그때만 못한 것 같다.

‘어휴! 또…’

턱도 없는 공에 자꾸 배트가 나간다.

‘제발 좀 보고 치라고. 에잉, 그럴 줄 알았어.’

안타는 고사하고 파울 하나 만들지도 못하고 어이없는 공에 헛손질 세 번 하더니 그대로 삼진당해 버렸다.

‘야! 카스트로!’

모처럼 주자가 나갔는데 허무하게 공격이 끝나버렸다.

‘하! 내가 언제부터 우리 팀 타격을 믿었다고 이러냐.’

오늘 우리 팀의 타격 모습에서 묘하게 기시감이 느껴진다. 거의 작년과 판박이인 것 같다. 오늘 상대 투수의 컨디션이 아주 좋은 것 같다. 소위 말하는 긁히는 날에 잘못 걸린 듯하다.

‘할 수 없지. 내가 해내는 수밖에…’

지금 이기기에 충분한 점수를 가지고 있다.

‘1점으로 충분해. 1점 차이나 10점 차이나 똑같은 1승이지.’

“가자! 별거 아니야.”

내 스스로 다짐하듯 외치며 힘차게 마운드를 향해 달려나갔다.

"스트라이크."

"볼."

"스트라이크."

나도 오늘 컨디션이 나쁘지 않다. 싱커의 낙차 조절이 상당히 예리하다. 투구가 향하는 방향이 입체적으로 느껴진다. 투구 수가 늘어나면서 지쳐가는 것이 아니라 제구 감각이 더 예민해지고 있었다.

지금도 간단히 타자를 밀어붙였다. 원 볼 투 스트라이크.

‘승부를 해야 하나? 아니면 유인구를 하나 더…’

조금 애매하다. 보통은 유인구를 하나 더 던지는데 괜히 투구 수만 늘어나는 것 같아서 망설여진다.

‘응? 몸쪽 하이 패스트볼?’

생각해보면 이게 맞긴 하다. 초구 스트라이크를 슬라이더로 잡았고 연속해서 싱커를 두 개 던졌다. 3구째 싱커가 가장 느린 볼이었다. 구속 차이를 이용해서 타이밍을 빼앗는다. 투구의 기본 원칙과 같다.

‘또, 전력투구를 해야 해?’

패스트볼이 느리면 구속 차이로 인한 타이밍의 어긋남 효과가 반감된다. 적어도 90마일 이상의 패스트볼을 던져야 하는데 이런 식으로 던지다가는 잘 던져봐야 7회가 한계다.

‘아! 몰라. 던지라는 대로 던져.’

머리가 복잡하다. 이럴 때는 늘 베그웰의 의견을 따라왔다. 그리고 그건 거의 좋은 결과로 돌아왔다.

따악-

“앗.”

무심결에 하이 패스트볼을 스트라이크 존 안으로 던져버렸다. 존 밖으로 던져 헛스윙을 유도해야 하는 공을 이따위로 던졌으니 이렇게 벌을 받는 것 같다.

‘에구구, 넘어가진 않았네. 그나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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