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7화.
섬서무림은 활을 쏴서 사해련 섬서정벌군을 견제해야 하는데, 더 먼 거리에서 진뢰궁수단이 시위를 당기니 상대가 되지 않았다.
그게 끝이 아니었다.
강기는 무엇이든 파괴하는 사기적인 힘이었다.
그러한 강기를 압축해서 고리의 형태로 만든 강환의 위력은 강기의 수배에 달한다.
하물며 사망도제의 도환이라면 서안의 단단한 성문도 버텨낼 수 없었다.
실제로 소림의 공심대사가 사망도제의 도환을 흘려버린 여력만으로도 성문에 금이 갔다. 직후 사해련 사대봉공인 진뢰궁귀의 화살에 성문이 완전히 파괴되었다.
공심대사는 사망도제를 견제하느라 강기가 실린 진뢰궁귀의 화살까지 막을 순 없었다.
“이놈들! 가엾은 백성들에게까지 해를 끼치느냐!”
“흥! 네놈들이 백성들을 방패삼은 것이지, 어찌 우리가 백성들에게 해를 끼친 것이더냐! 애초 성벽 안에 숨은 것은 너희들이다! 이 위선자 놈들아!”
“으윽!”
사해련 섬서정벌군은 가차 없었다.
섬서무림인만이 아니라 거슬리는 섬서의 백성들까지 베고 민가에 불을 질렀다.
혼란을 일으켜서 정신적으로도 섬서무림을 압박하기 위함이었다.
그러한 계책은 맞아떨어졌는지 섬서무림인들의 수는 결코 사해련 섬서정벌군에 밀리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힘을 쓰지 못했다. 정파인으로서 위험한 백성들을 나 몰라라 할 수 없었다.
사해련 입장에서도 이러한 잔혹한 계책은 위험했다.
민심이 돌아서면 아무리 강력한 힘으로 지배한다고 해도 분명 틈이 생겨버릴 테니까.
그렇기에 감숙을 정벌할 때도 민초들에 대한 피해는 최소한으로 했다.
허나 섬서는 감숙과 다르다. 화산과 종남을 중심으로 너무도 단단하게 뭉쳤기에 정공법만으로는 상대한다면 사해련 역시 큰 피해를 감수해야 한다.
십절무왕이 이끄는 무림맹 고수들이 달려오고 있는 상황이었기에 피해를 줄이면서 빠르게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홀로 싸우려고 하지 말고! 전우들과 힘을 합쳐서… 큭!”
“놈! 감히 날 상대하면서 어디서 헛짓거리냐!”
화산 장문인 화천기는 사해련 섬서정벌군의 초절정고수 중 최강이라는 육참도부를 상대하고 있었다.
그는 그런 와중에 섬서무림인들까지 독려했다.
비록 잠시 밀리고 있었으나 절대적이지 않다.
그렇기에 충분히 반전을 노릴 수 있다고 판단했다.
허나 그런 그의 행동이 육참도부의 자존심을 건드렸다.
다른 사람도 아닌 자신을 상대하면서도 딴 짓을 한다는 것은 자신을 무시하는 행위라고 느껴졌다. 실제로 육참도부를 상대로 딴 짓을 한 것은 무척 위험한 행위였다.
“후… 실례했소. …향기가 천리를 흐르니(香流千里), 향기가 온 세상을 채운다(香滿天地)!”
“와라!”
화천기는 비록 적이었지만 강자인 육참도부에게 집중하지 않는 행위가 실례였다는 것을 인정하며 화산의 자랑인 칠절매화검을 펼쳤다.
칠절매화검은 십사수매화검법, 이십사수매화검법과 함께 매화검법의 하나였다.
그중에서도 강(强)에 비중이 큰 매화검법이었다.
그러한 칠절매화검을 자하신공으로 펼치니 아름다우면서도 강력하기까지 했다.
천생 무인인 육참도부는 그 예사롭지 않은 기세에 움찔하면서도 오히려 호승심을 불태웠다.
“큭! 그것으로 부족하다!!”
“만 개의 꽃이 장막을 이룬다(萬花成幕)!”
호각지세인 칠매신검과 육참도부와 달리 섬서무림의 다른 초절정고수들은 고전을 면치 못했다.
특히 진뢰궁귀를 상대하는 종남의 무극검군은 이를 갈며 속만 태웠다.
“큭! 놈! 정정당당하게 싸워라!”
고래고래 소리치는 무극검군을 향해 어디선가 화살이 날아왔다. 상당히 위협적인 기습이었으나 종남의 원로인 무극검군은 어렵지 않게 막아냈다.
챙!
“거기냐!”
서걱! 서걱! 서걱!
무극검군은 화살이 날아온 방향으로 검기를 쏘았다.
그의 검기는 무언가를 베었다.
허나 그건 나뭇가지일 뿐 목표로 삼은 진뢰궁귀는 털끝 하나 건드리지 못했다.
무극검군은 결코 진뢰궁귀의 아래가 아님에도 고전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
진뢰궁귀는 근접전에도 뛰어난 실력을 가졌으나 원거리 사격을 할 때 능력이 십분 발휘된다.
게다가 상대는 섬서무림에서 손꼽히는 고수인 무극검군이었다. 그런 그를 상대로 근접전으로 싸우는 만용을 부릴 수가 없었다.
‘놈을 빨리 베고 동도들을 도와야 하거늘…….’
머릿수는 양측이 비슷하거나 섬서무림이 조금 앞서고 있었지만, 기세에서부터 밀렸기 때문인지 승기가 기울고 있었다. 그렇기에 무극검군은 진뢰궁귀를 베어냄으로써 반전을 주려고 했다.
그런 마음이 그를 더욱 조급하게 만들고 있었다.
진뢰궁귀는 그런 마음의 틈을 놓치지 않았다.
“진뢰일섬(震雷一閃)!”
“헉! 어림없다!”
진뢰강기를 실은 빠르면서 강력한 화살이 무극검군의 미간을 노렸다.
허나 이 정도로 당할 무극검군이 아니었다.
쾅!
무극검군은 진뢰강기가 실린 화살을 막아냈으나 그 충격에 휘청거렸다.
애초 진뢰궁귀는 이걸 기다렸다.
“혈풍뇌우(血風雷雨)!”
“이런!”
순간 무극검군을 향해 수십 수백의 화살이 몰아쳤다.
환영과 기시(氣矢) 그리고 화살이 섞여서 어느 것 하나 무시할 수 없었다. 일일이 화살을 쳐내는 것은 어렵다고 판단한 무극검군은 검벽을 펼쳤다.
쾅! 콰쾅! 쾅쾅!
폭격을 당한 것처럼 무극검군을 중심으로 수많은 구덩이가 생겨났다.
진뢰궁귀는 무극검군이 무사할 리 없다고 판단했다.
허나 만약을 대비해서 확인사살을 준비했다.
“진뢰… 헉!”
“무극무상(無極無上)!”
혈풍뇌우와 같은 내력소모가 큰 절학을 펼친 만큼 진뢰궁귀 역시 몸에 무리가 간 상황이었다.
게다가 확인사살까지 준비한 상황이었기에 예상치 못한 무극검군의 기습에 대처할 수 없었다.
무극검군이 펼친 무극무상은 무극검법의 정수로, 그의 필살의 의지가 담겼다.
그런 그의 의지를 배반하지 않고 무극무상은 진뢰궁귀의 활을 베고, 진뢰궁귀마저 베었다.
허나 무극검군 역시 몸 상태가 온전하지 않았는지 진뢰궁귀를 벤 상처가 그리 깊지 못했다.
그렇다고 한들 이제부터는 무극검군이 압도적으로 유리해진 것은 사실이었다.
덕분에 진뢰궁귀는 무척이나 초조해졌다.
“놈! 이제 끝이다!”
“젠장!”
권각술에도 일가견 있는 진뢰궁귀일 지라도 활이 없이 상대하기에 무극검군은 너무 버거운 상대였다.
이로써 무극검군의 승리가 확정되는 순간이었다.
허나 상황은 또 갑자기 급변하고 말았다.
“와~!!”
“이, 이런!!”
어디선가 들리는 환호에 무극검군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그리고 불길한 예감은 언제나 틀리지 않았다.
사해련주의 발목을 붙잡고 있던 공심대사가 결국 쓰러지고 만 것이다.
초절정고수가 전쟁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강자라면 화경고수는 전쟁의 결과를 바꿀 수 있는 괴물이었다.
간신히 버티고 있는 상황에서 사해련주라는 괴물이 자유를 얻었다.
섬서무림으로서는 이보다 최악은 없었다.
* * *
“카악~ 퉤! …과연 반야신승이로군. 내 피를 보는 것이 얼마만인지 모르겠어.”
사해련주는 핏덩이를 뱉었다.
심각해보이지는 않으나 내상을 입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럼에도 그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런 사해련주의 시선이 피를 토하는 노승에게 닿았다.
“쿨럭…! 우웩!!”
피를 토하는 노승의 정체를 바로 반야신승, 소림의 전대장문인인 그였다. 반야신승은 사해련주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큰 부상을 입고 말았다.
팔왕 중에서도 손꼽히는 반야신승이었지만, 결국 오제의 벽을 넘지 못했다.
무엇보다 혈마신에게 입은 내상이 완쾌되지 않은 상황에서 사해련주를 상대한 것이 너무나 무모했다.
그럼에도 사해련주를 상대로 지금까지 버텨낸 것만으로도 대단하다고 할 수 있었다.
허나 그것도 이제 끝이었다.
“적 시주… 그대… 설마…….”
“놀아주는 것도 여기까질세, 반야신승.”
사해련주는 반야신승의 말을 끊었다.
그가 눈치챈 것이 아직 알려질 때가 아니었다.
그런 사해련주의 반응에 반야신승은 자신의 예감이 맞았다는 것을 깨닫고 얼굴이 어두워졌다.
‘아미타불…! 설마 적 시주가 그 악마의 무공을 연성했을 줄이야…….’
팔왕과 오제의 격차는 생각 이상으로 크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일방적이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이런 결과가 나온 것은 혈마신에게 입은 내상 때문만도 아니었다.
그건 사해련주가 숨기고 있는 힘 때문이다.
“적 시주, 빈승의 목으로 그쳐주시오. 저들의 안위는…….”
“그건 승자인 내 몫일세. 그만 눈을 감게… 신승.”
서걱!
반야신승은 이 와중에도 섬서무림과 민초들의 안위를 걱정했다. 더 많은 희생이 없길 바랐다.
허나 그건 사해련주가 결정할 일이었다.
그게 적자생존의 법칙이니까.
사해련주의 칼이 반야신승의 목을 훑고 지나갔다.
뚝!
반야신승의 머리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리곤 그의 목에서 피가 솟구쳤다.
“대, 대사님!!”
“바, 반야신승께서…….”
반야신승 공심대사의 최후를 목도한 섬서무림인들은 절규했다. 자신들의 안위를 위해서 그가 희생되었다는 죄책감이 섬서무림인들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그에 반해 사해련 섬서정벌군의 사기는 하늘을 찔렀다.
“모두에게 알려주어라! 본련이 어떤 곳인지를!”
“사해천하(四海天下)! 군림도제(君臨刀帝)!!”
반야신승의 죽음으로 그나마 간신히 이루고 있던 균형이 순식간에 기울어버렸다.
섬서풍운 (2)
“모두 포기하지 말고 물러나시오! 분명 맹주께서… 큭!”
섬서무림의 명숙들은 한 명이라도 더 살리기 위해서 주변을 독려했다.
허나 이미 패색이 짙어진 상황이었다.
언제 도착할지 모를 무림맹주만 기다리기에는 상황이 너무 좋지 못했다.
그러다 보니 대부분 희망을 잃고 절망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흐흐흐… 무림맹주가 온다고 해서 뭐가 달라질 것 같나? 반야신승도 련주님의 상대가 되지 않았는데, 십절무왕 따위가 말이야! 하하하!!”
“놈!”
빠드득…….
사해련 고수들의 조롱에 섬서무림인들은 부들부들 떨었다.
허나 반박하기도 힘들었다.
팔왕 중에서도 상위에 속한 반야신승도 사해련주의 칼에 목이 달아났다.
따라서 백의무제의 사임으로 운 좋게 무림맹주가 된 십절무왕이 사해련주의 상대가 될 거라고 생각하긴 힘들었다.
십절무왕의 무위가 정확히는 알려지지 않았다.
하지만 가장 늦게 화경에 오른 것을 생각하면 팔왕의 말석쯤이라 예상하고 있었다.
그런 그가 온다고 해서 사해련주를 막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긴 어려웠다.
“이제 그만 포기하고… 죽어… 컥!”
“사필귀정(事必歸正). 아직 끝나지 않았어요. 포기하지 마세요.”
“여, 여협께선…….”
사해련 고수를 베고 섬서무림인을 구한 이는 중년의 여인이었다.
그녀는 섬서무림인의 물음에 대답 대신 위기에 처한 또 다른 동도를 구했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주저앉았던 섬서무림인은 다시 일어났다.
“그래 아직 끝나지 않았어!”
작지만 분명 절망 속에서 희망을 꿈꾸는 이들이 생겨났다.
하지만 대세를 바꾸는 것은 어려운지 쓰러지는 자는 사해련 고수보다 섬서무림인이 더 많았다.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았다.
“흐흐… 죽어… 컥!”
“으악!”
푹! 서걱! 서걱!
여인의 검이 움직일 때마다 사해련 고수들이 절명했다.
단호하면서 섬뜩한 손속에 사해련 고수들은 움찔했다.
귀환살수
— 문지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