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6화.
“백의무제 백 대협께서 오고 계시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허나 마물이 정말 백 대협께서 직접 상대해야 할 정도로 강력하다면 저희만으로 시간을 벌 수 없습니다.”
“알고 있습니다. 가주님.”
자존심이 무척 상하는 일이었지만, 두 사람은 덤덤하게 받아들였다.
자존심 때문에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면 오히려 자멸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사조님의 빈자리가 너무도 크구나… 허나 사백께서 수련을 끝내신다면… 달라지겠지.’
화산파에서 자하검제의 빈자리를 크게 느끼는 것 이상으로 무당파도 태극검선의 빈자리로 힘들어하고 있었다.
사파사세인 천웅방의 호북정벌이라는 치욕을 맛보지 않았던가.
허나 절망할 필요는 없었다.
태극검선의 빈자리를 채우듯 적도진인이 깨달음을 얻어서 폐관수련 중이었다.
태극검선의 빈자리를 완벽하게 메우지는 못할지라도 새로운 화경고수의 존재만으로 무당파는 다시 안정을 찾게 될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문제는 그때까지 버틸 수 있냐는 점이었다.
“해서 귀파에서 백성들의 피난을 도우신다면 본가에서는 기문진법을 설치하겠습니다.”
“아… 좋은 생각이십니다!”
현원진인은 본산제자들만 아니라 인근 속가제자들까지 동원해서 백성들의 피난을 유도하고 있기에 제갈세가까지 그 일을 도울 필요는 없었다.
그렇기에 제갈세가는 마물로부터 시간을 끌 진법을 설치할 생각이었다.
기문진법이란 천지조화를 통해서 상전벽해를 펼치는 공부였다.
이를 위해서 세상의 이치를 통달해야 한다.
다행히도 그런 이들이 제갈세가에는 제법 되었다.
“다만… 마물에게 기문진법이 얼마나 통할지…….”
기문진법이 효과적인 이유는 인간의 인지능력을 속여서 무에서 유를 창조할 수 있어서였다.
그렇기에 정신공부를 쌓거나 상단전이 발달했다면 허점을 쉽게 간파할 수 있었다.
만약 마물의 인지능력을 속일 수 없다면 기문진법은 무용하다는 뜻이었다.
기관장치라면 그와 상관없이 발동되지만, 설치하는데 오랜 시간이 소요되고 마물을 상대로 피해를 줄 거라고 생각하긴 어렵다.
그렇기에 확신이 없지만 기문진법을 설치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해도 해볼 수 있는 데까지는 해볼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가주님.”
“그렇지요. 장문인…….”
그렇게 무당파와 제갈세가는 남하 중인 마물로부터 피해를 줄이기 위해서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그 시각, 혈천의 부천주이자 사해련주인 사망도제가 출사표를 던졌다.
* * *
“그간 침묵이 너무 길었다. 그로 인해 본련을 무시하는 자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사천…….”
사망도제는 사천과 감숙의 일을 거론하며 출사표의 정당성을 말했다.
사전에 협조를 청했음에도 공격했다는 이유였다.
이미 1년 전의 일을 이제 와서 거론하는 것은 우습지만 상관없었다.
명분이 필요했을 뿐이니까.
사해련은 사파사세 중 가장 많은 인원을 가진 세력이었다.
다른 사파사세의 경우 보유한 무인의 수가 수천에 불과했다.
대신 수많은 문파를 휘하에 두었기에 최대 이삼만의 무인을 동원하는 것도 가능했다.
허나 사해련은 다르다.
사해련이 자체 보유한 무인이 삼만이 넘는다.
청해성 전체가 사해련이기 때문이다.
그 점이 바로 사해련의 무서운 점이었다.
“청해마왕, 그대에게 일만의 군세를 맡기겠네. 사천을 본제(本帝)에게 줄 수 있겠나.”
“주군께 사천(四川)을 드리겠나이다.”
사해련 십대고수이자 사대봉공인 청해마왕은 사망도제의 말에 무릎을 꿇었다.
그의 얼굴에는 사망도제를 향한 경외감이 어려 있었다.
그렇게 청해마왕이 사천정벌군의 군단장이 되었다.
사해련주의 시선은 청해마왕의 곁으로 옮겨갔다.
“흑천마옹, 노사를 보좌하게.”
“련주님의 명을 따르겠습니다.”
청해마왕은 사대봉공 중 유일하게 혈천에 대해서 모르기에 그를 보좌하는 명목으로 흑천마옹을 붙여주었다.
그 외에도 오대호법인 벽력마군과 음양색불 역시 사천정벌군에 포함되었다.
―흑살대와 혈영대 그리고 천씨세가가 뒤를 따를 테니, 도움이 필요하면 청하게.
―감사합니다. 련주님.
사망도제는 만약을 대비해서 혈천의 힘도 일부 동원했다.
혈천십삼세의 주인들은 각기 혈천삼십육대 중 몇 대(隊)를 포섭했다.
보통 이대이며 많아야 삼대였다.
그리고 대장로와 대호법조차 사대를 영향력 하에 두었다.
그런데 유일하게 부천주인 사망도제만이 오대(五隊)를 끌어들였다.
흑살대와 혈영대는 그 오대 중 이대(二隊)였다.
허나 그들만 동원된 것이 아니었다.
석가장 대신 혈천십삼세에 오른 천씨세가 역시 참전했다.
칠웅방과 달리 초절정고수를 둘이나 보유했고, 수백의 고수들이 뒷받침을 하고 있는 덕분에 혈천십삼세의 자격을 가질 수 있었다.
허나 가주인 천운성이 초절정지경에 오르지 못한 관계로 혈천 내부에 말이 많았다.
이를 잠재우기 위해서 천운성은 자청해서 지원 나온 것이다.
물론 부천주인 사망도제에게 잘 보이기 위함이라는 점이 가장 컸다.
“본좌가 직접 감숙과 섬서를 정벌해, 본련의 이름을 만천하에 알리겠다!”
“사해천하(四海天下)! 군림도제(君臨刀帝)!”
판을 키워야 하는 상황에서 사천 하나로 만족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사망도제는 직접 감숙과 섬서를 정벌할 생각이었다.
그 인원은 무려 일만오천!
감숙과 섬서무림을 합치면 적어도 육만이었다. 그것도 최소로 잡았을 때였다.
무려 네 배나 차이가 났으나 문제될 것은 없었다.
오제인 사망도제가 친정(親征)에 나섰으니까.
‘사존(邪尊), 너의 반응을 기대하지.’
* * *
“선친의 이야기를 들었네. 그럼에도 이렇게 와주셔서 고맙네.”
“아닙니다. 노사님. 아버님의 마지막 청이셨습니다. 여식으로서 당연한 일입니다.”
여산에서 떠난 백인혜가 호북 형주에 도착했다.
제법 강행군이었는지 그녀는 물론 보은단 고수들 역시 상당히 초췌한 모습이었다.
제갈윤호가 대표해서 백인혜를 맞이했다.
그녀의 숨겨진 정체를 모르는 제갈윤호와 좌중은 백인혜의 선녀같이 고운 마음씨에 감동했다.
허나 백인혜의 속내는 달랐다.
‘호호호 다행이네. 백의무제를 살짝 걱정했는데 말이야.’
백인혜는 천요기를 숨긴 상황이었다.
허나 화경고수의 기감까지 속일 수 있다고 장담할 수는 없었다.
그렇기에 유일한 걱정거리가 백의무제였다.
그런데 혈마신을 처리하기 위해서 백의무제가 자리를 비운 덕분에 걱정거리가 사라지게 되었다.
비밀병기가 되어줄 혈마신의 폭주가 이렇게 도움이 될 줄은 몰랐다.
“노사님, 검신 님을 뵙고 싶습니다.”
“조금 쉬었다가 치료해도 되네.”
“저는 괜찮습니다. 그보다 한시라도 빨리 검신 님을 치료해야지 않겠습니까?”
“으음… 그렇다면야…….”
강행군 때문에 백인혜는 상당히 지쳐보였다. 실제로 피로감이 없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는 한시라도 빨리 검신의 정기를 흡수하고 싶어서 안달이 난 상황이었다.
그렇기에 바로 검신을 만나겠다고 청했다.
백인혜의 말에 제갈윤호는 거절할 수 없었다.
한시라도 빨리 치료하고 선친의 장례를 치르고 싶어 한다고 오해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백인혜와 제갈윤호는 엄중한 경계를 서고 있는 검신 이현성의 방으로 자리를 옮겼다.
“어떤가? 깨울 수 있겠는가?”
“장담은 할 수 없으나… 가능할 것 같아요.”
백인혜의 말에 제갈윤호는 얼굴이 활짝 피었다.
태청신단과 건원장주의 의술로 이현성의 맥이 안정되었다.
하지만 이상하게 깨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로 인해 제갈윤호는 물론 모두가 걱정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던 차에 성수의가의 생존자인 백인혜가 찾아왔다.
그러므로 어찌 기쁘지 않을 수 있겠는가.
3대 신의인 성수 백우종에 비할 바는 아니었지만, 의봉 백인혜의 의술 역시 대단하다는 소문을 들었다.
“허나 문제가 있어요.”
“그게 뭔가.”
“검신 님의 맥은 안정되었으나 몸속은 혼돈인 상황이에요. 이를 치료하기 위해선 아버님의 비술인 연혼생사대법을 펼쳐야 해요. 허나 이 과정에서 작은 기파만으로도 충격을 받을 수 있어요.”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가?”
모르는 것 빼곤 다 알고 있다는 신산 제갈윤호였지만 연혼생사대법은 처음 들어봤다.
허나 성수의 비술이라고 하니 의심할 수 없었다.
연혼생사대법(練魂生死大法)이란 그럴듯한 명칭을 말했으나 실제로는 채양보음술을 펼칠 생각이었다.
“주변 10장 내에 아무도 없어야 합니다. 그리고 기감 역시 넓히시면 안 됩니다. 연혼생사대법은 워낙 민감한 비술이기에 그 정도 기파에도 영향을 받을 수 있으니까요.”
“으음… 알겠네. 그렇게 하지. 부디… 검신을 깨워주게나.”
“최선을… 다하겠어요.”
백인혜는 말도 안 되는 이유를 내세우며 모든 사람을 10장 밖으로 물렸다.
당연히 그 말은 거짓이었다.
그럼에도 이런 말을 한 것은 검신의 정기를 흡수하는 과정에서 방해를 받지 않기 위함이었다.
잠시 후, 주변에 기척이 모두 사라진 것을 확인한 백인혜의 표정이 바뀌었다.
청초했던 백인혜가 사라지고 요사한 천요후만 남았다.
그녀는 혀를 날름거리며 흥분을 감추지 않았다.
그리곤 입고 있던 옷을 벗었다.
그렇게 드러난 그녀의 나신은 너무도 아름다웠다.
비록 요녀였지만 천하에서 손꼽히는 절색이기도 했다.
천요후는 여전히 의식을 잃고 있는 검신 이현성에게 다가갔다.
“너무 억울해하지 말라고…. 나 같은 미녀의 품에서 복상사하는 거야말로, 사내의 꿈 아니겠어? 호호호!”
이러한 상황도 모른 채 이현성은 자신의 심연 속에 갇혀 있었다.
* * *
“고작 그것뿐인가. 나의 이름을 계승한 또 다른 나여.”
“크윽!”
이현성은 검에 의지한 채 간신히 서 있었다.
오제에 버금가는 그답지 않은 모습이었다.
그런 그를 한 사내가 오연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 모습이 결코 불쾌하지 않았다.
사내에게 오연함은 당연하기 때문이다.
“포기할 생각이 아니면 다시 검을 들어라. 또 다른 나여.”
“후… 좋다! 살수천자, 나는 아직 포기하지 않았다!”
오연한 사내는 놀랍게도 살수천자(殺手天子)였다.
수백 년 전에 죽은 살수천자가 지금까지 살아 있을 리가 없었다.
그는 암천검에 남겨 있는 살수천자의 잔념이었다.
이현성은 천웅창제에게 입은 내상 때문에 깨어나지 못한 것이 아니었다.
그와의 싸움에서 작은 깨달음을 얻었다. 그 순간 암천검에 잠들어 있던 살수천자의 잔념이 깨어나고 말았다.
이현성은 심연 속에서 살수천자의 잔념에게 암천살무의 정수를 전수받게 되었다.
“일점혈! 천중비화! 여의재천! 파천황!”
살수계를 일통했던 살수천자의 절대무학이 이현성의 검을 통해서 다시 피어났다.
어느 하나 대단하지 않은 초식이 없었다.
허나 그럼에도 살수천자의 잔념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언제까지 형(形)에 사로잡혀 있을 텐가!”
이현성은 완벽에 가깝게 암천살무를 펼쳤다.
그럼에도 살수천자는 버럭 호통을 쳤다.
형(形)이라는 알을 깨지 못한다면 진정한 암천살무를 깨달을 수 없었다.
콰쾅!!
결국 살수천자의 검에 이현성은 쓰러지고 말았다.
귀환살수
— 문지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