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1화.
애증의 눈물
“차가운 달이 슬픈 눈물을 흘리고(寒月哀淚)…….”
아름다운 미부(美婦)가 휘두르는 검술은 너무도 차갑고 섬뜩했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슬픔이 배어나왔다.
“물 위에 뜬 달은 피로 물든다(水月血染).”
휘두르던 검을 거두며 미부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표정이 어두운 것이 마음이 편치 않음을 알 수 있었다.
“왜지…? 검을 휘둘러도 이 답답함이 사라지지 않으니…….”
미부의 정체는 무림에서 한천마녀(恨天魔女)라고 불리는 화옥령이었다.
그녀는 부친이자 화산파 전대 장문인인 자하검제의 명령으로 강제로 폐관수련 중이었다.
명분은 폐관수련이었지만, 그녀가 사문에 지은 죄를 속죄하라는 의미였다.
그렇기에 화옥령은 대부분의 시간을 명상을 통해서 참오하려고 노력했다.
허나 그녀도 무림인이었다.
그렇기에 답답할 때마다 검을 휘두르며 마음을 다스렸다.
그러나 오늘은 왠지 쉽게 마음이 다스려지지 않았다.
“이십여 년 전, 그날처럼…….”
화옥령은 기억하고 싶지 않은 오래전의 일이 떠올랐는지 고개를 거칠게 저었다.
흡사 그렇게라도 털어내고 싶다는 듯이…….
그녀의 인생에 가장 행복했지만 동시에 가장 증오스러운 그날을.
그 때문이지 화옥령은 자신도 모르게 검을 꽉 쥐었다.
그때였다.
“…그간 잘 지내셨소.”
“…….”
누군가의 목소리에 화옥령은 몸이 굳어졌다.
그녀가 폐관수련하는 장소는 화산에서도 깊숙한 곳에 있는 심처였다.
이곳에 출입하기 위해서는 수백의 화산파 고수들을 지나와야 한다.
그렇기에 이곳에 출입할 수 있는 사람은 현 장문인을 포함해서 극소수였다.
물론 그들 역시 이곳에 방문하지 않는다.
화옥령을 이곳에 가둔 것이 자하검제였기 때문이다.
그런 이곳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이 목소리가 누구의 것인지 바로 알아차렸다.
손에 축축해짐을 느낀 화옥령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내가 무슨 생각을… 그가 이곳에 있을 리가…….”
“미안하오. 옥령…….”
그녀는 마음속으로 자신이 환청을 들은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마음과 달리 몸은 달랐다.
화옥령은 벼락이라도 맞은 듯이 전신을 바들바들 떨었다.
그녀는 몸을 돌려서 목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을 바라봤다.
순간 화옥령의 눈이 커졌다.
“여전히 아름답구려. 옥령.”
“…당…신… 정말……!”
그녀의 앞에는 한 중년사내가 서 있었다.
중후한 매력을 가진 사내였다.
얼굴도 상당히 잘생긴 것이 젊은 시절 여인들 꽤나 눈물 흘리게 만들었을 것 같았다.
그런데 문제는 그러한 여인 중에 화옥령도 있었다는 점이었다.
챙!
얼굴이 나찰처럼 변한 화옥령의 검이 허공을 갈랐다.
한천마녀라고 불리는 그녀다운 너무도 날카로운 검술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검은 사내의 검집에 막혔다. 너무도 쉽게.
“네가… 네가… 감히 무슨 낯짝으로 날 찾아와! 당장 죽여 버리겠어!”
“미안…하오. 옥령.”
그의 목소리에 화옥령은 순간적으로 검을 쥔 손에 힘이 빠졌다.
허나 이를 느낀 그녀는 수치심을 느끼며 다시 검을 휘둘렀다.
그녀를 한천마녀라고 불리게 만든 한월검결은 너무도 날카롭고 섬뜩한 검술이었다.
그런 한월검결을 지척에서 펼쳤으니 대단한 고수라도 곤욕을 치를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사내는 검집에서 검을 뽑지 않은 채 한월검결을 막아냈다.
그가 대단한 고수임을 보여주는 대목이었다.
“그날 네 검에 베인 것은 나만이 아니었어. 내 아기… 네 아기도 베였다고!!”
“정말… 미안하오. 그땐 그럴 수밖에 없었소.”
사내는 화옥령을 한천마녀로 만든 장본인이었다.
한때는 그녀의 전부였던 사내였다.
이십여 년 전, 그의 검에 화옥령이 베이기 전까지는.
그녀는 몸에 남은 상처보다 마음에 난 상처가 더욱 컸다.
목숨보다 사랑했던 사내에게 버림받았고, 사랑의 결실이었던 뱃속의 아기까지 잃은 그 날부터 살아도 산 것이 아니었다.
제자인 이현영을 만나면서 마음의 상처가 많이 아물었으나 그를 본 순간 아물었던 상처가 터지고 말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그게 변명이 될 거라고 생각해! 네놈은 인간도 아니야! 인간도 아니라고…! 으어엉! 어엉! 어엉!”
“…정말… 미안하오. 정말…….”
흐느끼는 화옥령을 보며 사내는 가슴이 아팠다.
그런 그녀를 보며 사내가 손을 뻗었다.
그런데 손을 뻗던 그가 멈칫했다.
그의 손이 섬광처럼 움직이더니 화옥령의 마혈을 눌렀다.
전신이 마비된 그녀는 울음조차 마음대로 낼 수 없었다.
사내는 마비된 화옥령을 품에 안았다.
그 직후 무시무시한 기운을 마구 뿜어내는 자가 도착했다.
“그 더러운 손을 당장 떼지 못할까!”
“…오랜만에 뵙습니다. 어르신.”
놀랍게도 두 사람은 구면이었다.
자신의 여식을 안은 채 태연하게 인사하는 사내를 보며 자하검제는 대노했다.
그런 그를 보며 자하검제가 검을 겨누었다.
허나 휘두르지는 못했다.
사내가 한 팔로 화옥령을 안고 다른 손으로 그녀의 목을 잡고 있어서였다.
자하검제가 검을 휘두르면 그녀의 목을 꺾겠다는 협박이었다.
이를 보며 자하검제는 치밀어 오르는 노기 때문에 얼굴이 붉어졌다.
비록 몸은 움직일 수는 없으나 의식을 잃지 않은 화옥령은 사내의 행동에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네…놈이 어떻게…! 내게 네놈이 어떻게!’
화옥령은 분노를 터트렸으나 그 분노가 입 밖으로 나오지는 못했다.
너무 안타깝게도 그녀는 자하검제 협박의 도구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날… 네놈을 죽였어야 했어… 그날 네놈을 놔준 것이 천추의 한이 되었구나!”
“그날 어르신께선 절 놔주신 것이 아니라 사부님께서 절 구해주신 게 맞지요.”
화옥령은 자신이 모르는 이야기가 나오자 당황스러웠다.
사내와 부친 사이에 자신이 모르는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네놈이 검마 그놈의 제자였을 줄 알았다면 그날 반드시 죽였을 것이다. 그래도 령아가 마음에 두었던 사내라고 뜸만 들이지 않았다면…….”
“그건 감사합니다. 어르신.”
이십여 년 전, 피 흘리며 쓰러진 여식을 발견한 자하검제는 눈이 뒤집어져서 범인을 추적했다.
그 결과 도주 중인 사내를 발견했다.
자하검제는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사내가 여식의 눈을 멀게 만든 망할 녀석이라는 것을.
그 때문에 자하검제는 사내를 일검에 베지 않았다.
그렇게 뜸을 들인 것이 큰 실수였다.
기회를 놓친 순간 예상치 못한 기습을 당하게 되었다.
그냥 고수도 아니라 화경고수의 기습이었다.
놀랍게도 검마(劍魔)였다.
검마는 강했다. 자하검제가 제압하지 못할 정도로.
물론 화월천도 자하검제라고 불리기 이전이었기에 지금만큼 강하지는 못했다.
결국 그는 검마에게 발목이 잡혀서 사내를 놔줄 수밖에 없었다.
그날 이후 화월천은 분노를 다스리느라 더욱 검에 몰두했고, 그 결과 자하검제라고 불리게 되었다.
“한 가지 청이 있습니다. 그것만 들어주신다면 옥령의 털끝 하나 건드리지 않고 돌아가겠습니다.”
“네놈이 지금 내게 거래를 청해! 네놈이 감히…….”
우드득…….
자하검제는 끝까지 분노를 밖으로 터트릴 수 없었다.
화옥령의 목을 쥔 사내, 혈뢰검마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로 인해 괴로운지 화옥령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것을 보며 자하검제는 부들부들 떨었다.
“그만! 청이 무엇이더냐! 당장 말하고 꺼져라!”
“어르신의… 한쪽 팔을 주십시오.”
“……!!”
“뭐, 뭐라고!!”
제압된 화옥령은 물론 화월천 역시 기가 막혔다.
자신들 부녀에게 천고의 죄인인 그가 무릎 꿇고 죄를 청해도 부족하거늘, 화월천의 팔을 내놓으라니! 이런 무도한 청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여식인 옥령의 목숨보다 한쪽 팔이 더 소중하십니까? 장.인.어.른.”
“네, 네놈이 감히! 그 더러운 입으로 날 뭐라고 불렀느냐!”
혈뢰검마의 장인어른이라는 말에 자하검제는 결국 폭발하고 말았다.
혈뢰검마의 의도대로.
혈뢰검마는 화옥령을 방패삼아서 자하검제의 위협을 막으려고 했다.
“헉! 큭!”
챙!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화옥령을 방패삼았음에도 자하검제의 검이 멈추지 않았다.
이대로라면 그의 검에 화옥령에 다칠 수밖에 없었다.
당황한 혈뢰검마는 본능적으로 그녀를 옆으로 밀치고 자하검제의 검을 막았다.
갑작스럽게 막았기에 혈뢰검마는 충격을 모두 감당치 못하고 뒤로 밀려났다.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자하검제는 화옥령을 낚아챘다.
“괜찮으냐.”
“으윽!!”
“이, 이런!”
그녀의 신병을 확보한 자하검제는 점혈된 화옥령의 혈을 풀어주었다.
허나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마혈이 풀리지 않고, 그녀가 괴로워하기 시작했다.
이를 보며 혈뢰검마가 나직하게 말했다.
“설마 장인어른께서 그런 얕은 수를 쓰실 줄은 몰랐습니다. 아무리 장인어른이시라도 그 점혈법을 풀 수는 없을 겁니다. 돌려주시죠. 그녀만 더 괴로울 뿐입니다.”
빠드득…….
괴로워하는 여식을 보며 자하검제는 결국 화옥령을 혈뢰검마에게 넘겨주었다.
그는 기묘한 손놀림으로 고통스러워하는 화옥령을 진정시켰다.
혈뢰검마가 그녀에게 건 점혈법은 평범한 것이 아니었다.
오직 혈천주와 혈궁주만 알고 있는 독문점혈법이었다.
그렇기에 천하의 자하검제조차 풀 수가 없었다.
“더 이상 제가 잔혹한 결정을 내리게 만들지 말아주십시오. 장인어른.”
“언제까지 네놈 뜻대로 되는지 보자꾸나!”
자하검제는 이를 악물었다. 허나 혈뢰검마의 협박을 이겨낼 수는 없었다.
결국 그의 검이 자신의 왼쪽 어깨로 향했다.
피로 물들기 시작한 부친의 왼쪽 어깨를 보며 화옥령은 절규했다.
허나 그녀의 목소리는 자하검제도, 혈뢰검마도 들을 수가 없었다.
서걱.
섬뜩한 소리와 함께 자하검제의 왼쪽 팔이 떨어지고, 피가 솟구쳤다.
순간 철혈과 같은 자하검제가 비틀거렸다.
그는 자신의 어깨 혈도를 눌려서 과다출혈을 막았으나 창백해진 얼굴이 자하검제의 상태를 알려주었다.
화경고수도 인간이었다.
멀쩡한 팔을 스스로 베고도 아무렇지 않을 수가 없다.
“약조는 지켰으니… 네놈도 지켜라.”
“죄송합니다. 이러고 싶지는 않았…….”
“변명은 됐으니 빨리… 컥! 네, 네놈이 끝까지…….”
“흐흐흐… 혈뢰 호법님 수고하셨습니다.”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놀랍게도 자하검제의 가슴에 누군가의 손이 튀어나왔다.
누군가가 그의 등을 찔러서 가슴까지 관통시킨 것이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혈뢰검마는 당황했으나 곧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
“유령왕… 누구의 명이오?”
“흐흐흐… 부천주님의 명령이셨습니다. 아… 물론 혈뢰 호법님을 무시한 게 아니라… 만약을 대비한 것뿐이니, 불쾌하게 여기진 말아주십시오.”
자하검제를 암습한 인물은 놀랍게도 혈천십삼세의 하나인 유령곡의 유령왕이었다.
삼대살종의 한명이라지만, 화경고수를 암살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럼에도 유령왕은 자하검제를 암살하는데 성공했다.
그건 그가 두른 장포 덕분이다.
유령포(幽靈袍).
유령비와 함께 유령삼보의 하나로, 모습은 물론 기척까지 숨겨주는 보물이다.
귀환살수
— 문지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