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7화.
곁에 있던 점창파 장문인이 내공을 실어서 말했다.
“모두 진정하십시오! 아직 사백님의 말씀이 끝나지 않으셨소!”
“지, 죄송합니다. 진인…….”
“흠흠…! 저희가 너무 흥분했습니다.”
“대협들의 심정을 이해하오. 빈도 역시 그랬으니 말이오. 허나 빈도의 말을 더 들어보시구려.”
그제야 평정심을 되찾은 명숙들은 다시 관일창왕의 말을 경청했다. 그는 한숨이 나왔으나 애써 참으며 말을 이었다. 이어진 관일창왕의 말을 들은 명숙들은 경악하고 말았다.
“나, 남만의 독립이라니… 그게 정말입니까!”
“어찌 그러한 사실을 숨기실 수 있으십니까!”
검신이 운남성에 방문한 이유를 듣게 된 명숙들은 놀라는 것은 물론 실망했다.
자신들은 명색이 운남무림의 수뇌들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런 자신들에게 언질 하나 없었으니 섭섭한 것은 당연했다. 관일창왕은 결국 그들을 달래줄 수밖에 없었다.
“대협들께 미리 언질하지 못한 것은 송구스럽소. 대협들을 믿지 못하는 것은 아니나 만에 하나 지옥대제의 귀에 들어간다면 큰일 아니겠소? 이 일은 무림맹주님을 포함해서 몇몇 분만 아시는 일이외다. 만약 운남성의 일이 아니었다면 빈도 역시 언질 받지 못했을 것이오.”
“그렇다면야…….”
무시당했다는 생각 때문에 마음이 편치 않았던 명숙들은 관일창왕의 말에 조금이지만 마음이 풀렸다.
그들 역시 아는 사람이 많아지면 비밀이 더 이상 비밀일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럼 저희는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합니까?”
“달라질 것은 없을 것이오. 독왕께서 남만으로 돌아갔다고 해도 지옥성에는 아직 지옥대제와 수많은 고수들이 건재하니 말이오.”
뒷말을 하지 않았으나 모두들 잘 알고 있었다.
독왕과 묘족이 지옥성에서 나왔다고 하지만 여전히 그들은 운남무림보다 강하다는 사실을.
지옥대제는 관일창왕보다 강하고, 초절정고수의 수 역시 지옥성이 압도적이었다.
독왕이 이탈했다고 해서 지옥성을 만만히 볼 수는 없었다. 허나 이제는 절대적인 것은 아닌 만큼 지옥성도 운남무림을 쉽게 생각할 순 없게 되었다.
운남무림으로서는 이제야 숨통이 트인 셈이었다.
“저… 진인… 그럼 그분은 뵐 수 없는 겁니까?”
“아…….”
누군가의 말에 명숙들은 일제히 관일창왕을 바라봤다.
그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나직하게 말했다.
“지옥대제가 회군한 것은 분명 검신께서 뜻을 이루셨다는 것을 의미하오. 그럼 더 이상 이곳에 계실 이유가 없으시오.”
“…그렇군요.”
관일창왕은 내심 떠나기 전에 자신을 찾아와주길 바랬다. 허나 일전에 이현성이 이 일만 잘 마무리되면 바로 집으로 돌아갈 거란 말을 들었기에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맹주에게 보고하는 것도 서둘러야 하고, 집을 오래 비운 그의 상황도 충분히 이해하기 때문이다.
‘검신…그대에게 너무 많은 것을 받았구려. 언젠가 이 빚을 갚겠소.’
* * *
독왕과 묘족이 지옥성을 벗어나 남만 독립이 이루어지고 있을 때, 감숙성에서 발이 묶여 있었던 사천무림인 이천 명이 사천성에 돌아왔다.
이미 소문을 들은 그들은 무척이나 침울했다.
“숙…부님!”
사천무림의 분위기는 최악이었다.
또다시 사해련에 의해서 자신들의 앞마당인 사천무림이 유린당했다. 수많은 무림 동도들을 잃었다.
그중에는 사천무림의 원로이자 초절정고수인 건곤신군과 청성의 장문인도 있었다.
무엇보다 그 일로 청성파는 봉문까지 했다.
사천무림은 굳건한 기둥 하나를 잃은 셈이었다.
사천성에 도착한 당자성은 본가보다 관현으로 먼저 갔다. 불길한 예감 때문이다. 허나 불길한 예감은 언제나 틀리지 않는 법이었다.
“가…주님,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이분이… 이분이 나의 숙부님이시자 본가의 큰 어른이신 당철기 원로님이시다!”
“그, 그게 정말이십니까!”
“어, 어떻게……?!”
당자성의 말에 당가의 직계혈족들은 당황했다.
본가를 오래전에 떠난 당철기였다.
그렇기에 당가인들 중에서도 당철기에 대해서 모르는 자들이 대부분이었다. 허나 그렇다 해도 직계혈족들 중에는 아직 그의 이름 정도는 기억하는 자들이 여럿 있었다.
젊은 시절 그가 만든 암기 장치가 아직도 본가 내에 존재하고 있었다.
“원로님께서 어찌 이런 곳에…….”
“가주님께서는 아셨습니까? 원로님께서 이곳에 계셨다는 것을 말입니다.”
“나도 몰랐네. 몇 년에 한 번 오셨을 뿐이니까.”
사천당가의 절대권력자는 독종 당철영이었다.
아무리 당자성이 소가주였다고 하지만 그의 눈 밖에 난다면 자리를 보전할 수 없었다.
친아들에게조차 가차가 없는 인물이 바로 그였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당자성은 선친의 심기를 건들이지 않게 당철기를 찾을 생각도 못했다. 당연히 이런 곳에 그가 살고 있었다는 사실도 전혀 알지 못했다.
“숙부님을 본가로 모실 것이다! 준비하라!”
“존명!”
청성파에서 당철기의 가묘를 해둔 상황이었지만, 그의 신원이 확인된 이상 계속 이곳에 둘 순 없었다.
그렇게 당철기의 시신을 수습하며 당자성은 끓어오르는 분노를 주체하기 힘들었다.
자주 뵙지 못했으나 부친보다 자신에게 더 따듯하게 대해주었던 숙부 당철기였다.
그가 암군이라고 불리게 된 토대 역시 당철기로부터 나왔다. 그러므로 당자성이 분노하는 것은 당연했다.
“사해련… 네놈들을…! 네놈들을 결코 용서치 않겠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사해련의 대한 분노는 당자성에게 넘어선 안 되는 선을 넘게 만들었다.
자중지란
“어찌 이런 중대사를 우리에게 언질도 없이 독단으로 결정하실 수 있소이까!”
“결코 좌시해선 아니 됩니다!”
사천무림의 일로 한번 발칵 뒤집어졌던 천하는 운남무림의 일로 다시 한번 뒤집어지고 말았다.
지옥성의 분열, 남만의 독립.
결코 작은 사안이 아니었다.
그런 중대사가 몇몇에 의해서 결정되었고, 진행되었다는 사실이 뒤늦게 알려졌다.
그러한 사실에 정파무림의 명숙들은 불쾌감을 숨기지 않았다.
“말이 좀 지나친 것 같구려.”
“황보 단주께선 진즉에 알고 계셨으니 우리의 마음을 모를 것이오.”
“아니, 그건 다 비밀을 유지하기 위함이었기에…….”
“황보 단주의 말은 그대는 입이 무겁고, 우리는 마치 가볍다는 것 같구려?”
감찰단주인 황보관영은 어떡하든 분위기를 바꾸려고 했으나 오히려 역효과만 날 뿐이었다.
친(親) 맹주의 성향을 보이는 황보관영의 변명이 그들에게 좋게 들릴 리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는 황보세가의 대표로 협정서에 서명을 한 인물이기도 했다.
그러는 상황에서 신창양가의 신창까지 나서서 비꼬자 더 이상 어떤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아무리 황보관영이 감찰단주이자 황보세가의 소가주라 해도 신창은 무위는 물론 배분 역시 위였기 때문이다.
비밀유지를 위해서 어쩔 수 없는 결정이었으나 이를 인정한다면 그들을 무시하는 꼴이 된다.
무림맹의 분열을 야기할 수도 있기에 황보관영도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말을 하지 않았을 뿐, 이 상황을 불쾌하게 느끼는 자들도 상당히 많았다.
그에 반해 황보관영의 의견에 힘을 실어주는 인물도 있었다.
“무량수불…! 맹주님의 결정이 독단적이었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허나… 이 모든 것은 맹과 천하를 위함이었습니다. 부디 너그럽게 생각해주시기 바랍니다.”
“그간 맹 내에 많은 일이 있었지 않았습니까? 맹의 중추까지 적이 침범할 정도였으니, 맹주께서도 조심스러우실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그, 그렇다고 하지만…….”
“흠흠…….”
황보관영이 맹주를 옹호할 때는 비아냥거리던 명숙들도 이번만큼은 그럴 수가 없었다.
소림과 무당 다음으로 막강한 힘을 가진 화산의 원로와 오대세가의 수좌인 남궁세가의 장로였기 때문이다.
그들 역시 이번 협정에 대해서 사전에 연락받지 못했다.
그럼에도 맹주의 독단을 두둔하니, 대문파와 무림세가의 대표들도 더 이상 비난할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싸늘하게 변해버린 분위기가 회복되는 것은 아니었다.
그만큼 그들이 느낀 소외감은 상당했다.
물론 그들의 이러한 반응을 예상 못 한 총군사와 무림맹주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러한 결정을 내려야 할 정도로 천하정세가 좋지 못했다.
“…불만이 많은 것을 알고 있네.”
“매, 맹주님!”
“그, 그게 아니라… 저희는…….”
“오, 오셨습니까.”
회의장 분위기가 차갑게 가라앉았을 때, 두 사람이 안에 들어왔다.
무림맹주와 총군사였다. 이번 사달의 중심에 있는 인물들이었다.
열띤 비난을 하는 중이었던지, 아니면 맹주가 기척을 숨겨서인지 하나 같이 뛰어난 고수인 무림명숙들이 그의 등장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덕분에 그들을 비꼬던 무림명숙들은 머쓱했다.
허나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었다.
“송구스럽습니다만 그렇습니다. 맹주님.”
“시, 신창 님!”
반(反) 맹주 성향을 가진 신창이었으나 이렇게 대놓고 맹주를 비난할 줄은 몰랐기에 회의장에 참석한 명숙들은 당황했다.
그런 신창의 의견에 힘을 실어주는 인물이 있었다.
“저 역시 신창 님과 같은 생각입니다. 맹주님.”
“어, 언가주님…….”
신창의 말에 힘을 실어준 자는 진주언가의 가주인 언중경이었다.
그는 신창과 함께 반 맹주 성향의 인물이었다.
아무리 두 사람이 뛰어나다고 해도 백의무제인 백무강과 비교할 수는 없었다.
그렇기에 불만을 드러내면서도 그동안 선을 넘지 않았던 두 사람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대놓고 비난을 하니 다들 당황하는 것이 당연했다.
그때 맹주의 입이 열렸다.
“…그럼 두 분은 본인이 어떻게 하길 바라오?”
맹주의 말에 두 사람은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사전에 그들 사이에 무슨 대화가 오고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를 뒤에서 지켜보는 총군사의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허나 당장은 그저 지켜볼 뿐이었다.
“이미 벌어진 일로 더 이상 문제를 삼는 것은 어려울 거라고 생각합니다. 맹주님.”
“…계속 말씀해보시오. 신창.”
“해서 이후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부맹주님을 선출했으면 합니다.”
“호? 부맹주를 말이오?”
신창의 말에 그제야 맹주와 총군사는 저들이 이런 분위기를 유도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맹주의 권력을 축소시키고 견제할 존재를 내세워서 새로운 권력구도를 구축하겠다는 의지가 깔려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이미 본맹의 장로, 호법인 여러 분들이 계시지 않습니까? 신창.”
“그럼에도 이러한 일이 벌어지지 않았습니까? 총군사님.”
무림맹의 법규상 맹주를 보좌 및 견제하는 존재가 바로 무림맹의 장로와 호법이었다. 그렇기에 부맹주라는 직책이 따로 존재하지 않았던 것인데, 신창은 그 점을 문제 삼았다. 장로와 호법이 존재함에도 맹주가 독단적인 행보를 보인다는 것이다.
화경고수인 무림맹주라면 몰라도 총군사인 제갈윤호에게는 꿀릴 것이 없는 신창은 한 치의 밀림도 없이 반박했다. 허나 말 빨에서는 제갈세가의 태상가주인 제갈윤호를 따를 수가 없었다.
제갈윤호가 신창을 몰아세우려는 순간 무림맹주가 나서서 저지했다.
귀환살수
— 문지기 —